첫 울림과 함께 아주 넓은 밀실로 이동했다. 아니 떠밀린 건가. 떨어진다. 무엇이? 칼날? 그래 칼날과도 같다. 난 가만히 앉아 있다. 두 팔에 자꾸만 상처가 생긴다. 칼날로 한 점 한 점 도려낸다. 숨이 막힌다. 조여온다. 붉은 줄 한 개가 생겼다. 목에. 삐걱거리는 소리. 달그락거리는 소리. 찌익. 거친 호흡과 신음. 잔향. 기침 소리. 목 넘김. 무너져버린 대칭. 무너져버린 시간. 무너져버린 공간. 무너져버린 자아. 느리다. 극단적 지속. 팽창. 아프다. 달린다. 감각을 잃은 시계.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다리. 역행하는 시간. 합쳐지는 시대. 원한다면. 원한다면? 자유인가. 날개를 펼친다. 기생충. 자라났다. 벌어진 틈. 흐르는 물. 가빠지는 호흡. 순환을 잃은 폐. 역동적인 심장. 엇갈리는 두 다리 떨림. 자살 충동. 목에 생겨난 세 줄기의 피. 죽음. 부활. 영생. 초월. 죽음. 소멸한 현재. 확장된 과거. 그리고 미래? 미래의 멸종. 기도. 숭배. 퇴마. 죽음. 불안. 공황. 기도. 시침과 초침과 분침. 비선형 진행. 복합구조. 순행의 종말. 짓눌린 바닥. 토사물. 매혹된 눈. 흐르는 구토. 받아먹는 아이. 끝나지 않는 서사. 끝날 수 없는 서사. 좁아지는 밀실. 차오르는 신장. 금기. 쾌감. 무작위. 흥분. 절정. 막혀버린 사정감과 두 마리의 바퀴벌레. 숨죽이는 모기. 에로티시즘. 환각. 누굴 위해. 너와 나. 반복. 변질. 울리는 종소리. 피부를 긁고. 죽음. 죽음. 죽음
모턴 펠드먼, 그는 존 케이지와 함께 20세기 불확정성 음악의 선구자로 불린다. 불확정성 음악이란 작곡가가 음악의 모든 요소를 미리 정하지 않는 것, 즉 연주자의 자율성과 그로 인한 우연성을 동반하는 음악을 말한다. 펠드만은 이러한 불확정성에 영향받아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그의 후기작 For Bunita Marcus는 다르다. 이는 불확정성 음악이라 볼 수 없다. 확정돼 있다. 그는 이 작품을 위해 불확정하게 악보를 남기지 않았다. 오히려 명확하게 기보하고 이를 통해 치밀하게 ‘불확실한 감각’을 유도한다. 그러니까 철저히 자신의 손안에서 계산된 엇갈림을 만들어낸 것이다.
펠드먼의 손에서 쏟아지는 엇갈림은 너무나도 생생히 감각된다. 75분이라는 시간.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동안 그는 피아노만을 이용해 불안정함을 빚는다.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피아노만이 있다. 그렇기에 For Bunita Marcus는 공허하다. 텅 비어 있는 공간. 이것이 불안정의 시작이다. 이 공간에 들어오게 되면 본격적으로 음악이 흐른다. 시작은 부재다. 그리고 끝도 부재다. 존재하지 않음이 광활함을 채워나간다. 이건 내가 좋아하는 요소다. 비움으로써 경계를 부수고 세상을 흡입하는 것. 차오르는 부재엔 여러 불순물이 묻어있다. 나의 숨소리와 주변인들의 잡담 소리. 낡은 마룻바닥을 걷는 소리. 문이 닫히는 소리. 벌레들의 소리와 인지할 수 없는 소리까지.
불순물은 불순물일 뿐. 핵심은 피아노다. 음들이 진동한다.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비처럼 보이기도 하고, 지면에서 타오르는 아지랑이 같기도 하며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서풍 같기도 하다. 그들은 방향을 잃은 것일까. 초월한 것일까. 무엇이 되었던 음 하나하나는 매력적이다. 짓눌린 페달 덕에 음들은 잔향으로 둘러싸 이게 되고 날카로움을 어느 정도 해소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음들은 서로를 배척한다. 어울리지 않으며 조화의 의지는 소멸한 지 오래다. 서사 혹은 화음과 같은, 거시적 제약 구조에서 완전히 탈피한 듯 보인다. 그렇기에 어울리진 않지만, 본질을 잃지 않았다. 각각의 음들은 각각의 음들로 존재한다. 이 명료한 진동은 사인파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아름다우면서도 불안해 보인다. 무너지지는 않으려 노력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무너짐을 갈망할지도 모르겠다.
이 음악 속에서의 시간 체계는 현실과 다르다. 일렬로 나열된 음들이 서로를 앞지르러 하기 때문. 정상적 시간 질서와 공간 의식이 무너진다. 특이한 박자를 가졌다. 박자들은 지속되지 못하고 서로를 물고 늘어진다. 시간의 분절이 과연 그럴 수 있는 것인가? 초감각적이다. 마치 없는 듯 보인다. 무작위하며 동시에 기묘하다. 신비와는 떨어진 개념이다. 박자가 계속해서 바뀐다. 사실 난 따라가지 못했다. 그저 해체다. 나의 시간 개념은 펠드먼의 손짓 아래 엇갈리기만 한다. 다시 정돈할 수 없을 정도로. 변주되는 시간과 붕괴하는 인식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감상하기 위해선 현재를 잡아야 한다. 내가 그러했다. 그저 내 눈앞을 스치는 산들바람만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한다. 지나가 버린 음들과 만들어지고 있는 음들을 무시한 채. 그럼에도 여전히 엇갈린다. 바로 앞에서 살랑거리는 음들을 보기만 할 뿐이지만 이전의 음들이, 박자가, 시간이 보인다. 프루스트적 시간. 바로 그것을 경험한다.
엇갈림은 부정으로 이어지고 이 부정적 감정은 불안을 잉태한다. 또 불안은 느리고 잔잔한 흐름 속에서 증폭된다. 이 음악은 천천히 흐른다. 마치 한 호흡을 아주 길게 늘여둔 기분이다. 피아노 연주에 있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인 75분. 펠드먼의 시간계에서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진다. 길고 넓은 시간. 보이는 건 떨어지는 음들밖에 없다. 상상하기 어렵다. 맹인이 된 것만 같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 청각이 극도로 예민해진다.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 들려오는 소리는 들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난 계속 불안을 느꼈다. 숨통이 조여오는 듯한 선율들이 급류처럼 몰아쳐 온다. 거부하지는 않는다. 불안하지만 또 겁탈과도 같지만, 이 기묘한 음악에서 경외를 느끼기 때문에. 특히나 경에 무게를 더 둔 경외감.
음악이 끝나버렸다. 엇갈림만을 체험하다 어떤 것도 정리하지 못한 채 끝났다. 방을 치우지 못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기분. 음악이 끝나고 창밖의 세상을 보았을 때 느낀 감정이다. 창밖은 선형적이다. 줄을 맞춰 띠는 학생들과 정갈한 차선, 새들의 직선 비행, 흐트러짐 없는 책장 속 책. 다시 날 돌아보았다. 어지러웠다. 더러웠다. 엇갈렸다. 기억 파편들을 어루만지며 75분을 돌아보자, 창 밖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뒤처진 학생들과 차선을 침범하는 승용차, 어린 새들의 미숙한 파상비행, 누군가 가져가 버린 만화책에 균형을 잃은 책장. 엇갈려 보였다. 엇갈림이 눈에 밟히기 시작한 걸까.
아직 무엇도 정리하지 못했다. 결론을 짓지 못한 이야기. 아마 이 글 또한 그럴 것이다. 하지만 만족한다. 왜냐면 정말 많이 생각했다. 음악을 들으며 수많은 생각을 펼쳤다. 누군가에게 음악 그리고 예술은 감각으로만 이어질지도 모르겠지만 나한테 있어 음악과 예술은 사유를 확장하는 매개체이다. 펠드먼의 사유의 바다를 헤엄친다. 그 자체를 즐긴다. 또 내 사유를 펼친다. 즐겁다. 정말 많이 생각했다. For Bunita Marcus 덕분에 말이다. 아마 그 엇갈림이, 난해함이, 괴리감이 내 두뇌를 찢었겠지. 더 많은 생각이 흐르도록. 수평적이고 단조로운 음악이라면 전혀 불가능했을 오늘의 사유.
뭔가 리뷰글이 아니라 음악 기행문 같은 느낌이네요
리뷰라고 생각하지 않고 쓰니 오히려 더 술술 써지네요 마음이 편하니 글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 같아요 존 케이지 작품 하나를 두고 3일 내내 리뷰를 붙들고 있다가 잠시 쉬어갈 겸 써본 글이었는데 예상보다 훨씬 빨리 끝났어요 결과물도 꽤 만족스러워서 기분이 좋습니다 😚
수능 끝나면 저런 글만 쓰고 살아야지
평론가가 되겠다는 의지군요 🫡
재수는 하지 말아줘잉
잘 읽었어요
덕분에 새로운 앨범 알아갑니다
드디어 손님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와 인기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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