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 미니 3집 <EASY>발매와 대형 음악 페스티벌 참여로 날아올랐어야 할 르세라핌의 날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계획의 일환이었던 코첼라 라이브를 계기로 꺾여버렸다. 그리고 단순 라이브 논쟁으로 시작한 팀의 위기는 현재에도 진행 중인 소속사의 대형 이슈를 계기로 다시금 불타오르게 되었고 아이돌 그룹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낙인까지 찍히게 되었다.
잇따른 논란을 극복하고 다시금 날아오르고자 르세라핌이 새롭게 준비한 카드는 하우스 음악. 그리고 새로운 팀 서사였다. 그러나 논란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대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만들어낸 새 앨범은 그저 덮어 놓고 있기만 하기엔 내심 아쉬움이 큰 앨범이다.
앨범의 구성만 놓고 보면 지난 2년여에 걸쳐 발매한 디스코그래피를 통해 공개한 것들과 대동소이하다. 멤버들의 내레이션이 중점이 되는 인트로로 새로운 앨범의 골자를 예고하고, 이어서 앨범과 제목을 공유하는 타이틀곡이 음반의 중심에 놓여 서사를 전개한다. 그다음 앨범의 뱅어(Banger : 앨범에서 가장 돋보이는 트랙)가 3번 내지는 4번으로 자리를 잡고 마지막에는 지금까지의 앨범 서사와 대조되는 스타일의 곡으로 여운을 느끼게끔 하는 방식이다. 정형화된 스타일로 앨범을 꾸려 지금까지의 서사와 유기적인 연결을 꾀하는 노력이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정형화된 방식이기에 신선함이 부족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호불호가 강할 수밖에 없는 내레이션이 포함된 인트로를 차치하고 핵심인 타이틀만 놓고 본다면 이번 앨범 타이틀 <Crazy>는 분명 매력적인 곡이 분명하다. 최신 트렌드를 충실히 반영한 듯한 퐁크 사운드와 세련된 드럼 라인이 르세라핌 멤버들의 보컬과 좋은 합을 이루고 있고 여기에 재치 있는 가사로 곡의 흥을 돋운다. 국내에서 비주류 장르라는 점과 접하는 이에 따라 호불호를 느낄 수 있는 보깅 댄스의 요소를 제외하고 본다면 분명 지금까지 발매된 타이틀곡 가운데 가장 완성도를 갖추고 있는 곡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타이틀의 호조와는 반대로 이어지는 수록곡들의 면면은 타이틀을 보조하지도, 앨범의 서사를 이끌어내지도 못한다. 느닷없이 김완선, 엄정화, 이효리, 아이유 등 선배 여성 솔로 아티스트들을 샤라웃하는 3번 트랙 <Pierrot>는 설득력이 약하고, 마치 에스파의 <Life's Too Short>처럼 코첼라에서 화려하게 피어나야만 했던 4번 트랙 <1-800-hot-n-fun> 역시 지난 디스코그래피의 뱅어였던 <Blueflame>, <No Celestial>,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 <Smart> 같은 곡들에 비하면 밋밋하게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르세라핌의 앨범 발매와 맞물려 자작곡들을 공개하며 싱어송라이터로서의 가능성을 내비쳤던 허윤진이 프로듀싱 한 마지막 트랙 <미치지 못하는 이유>는 지난 디스코그래피의 마지막 곡들과 같은 서술 방식을 공유하지만, 그럼에도 르세라핌의 곡보다는 허윤진 자신의 디스코그래피에 더 가까워 아쉽다.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그랬어야만 하지만 앨범 곳곳에 허점을 노출하고 있어 아쉬움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서사 그만 좀 쓰라고 날 조리돌릴 테니'라고 언급하며 스스로의 앨범 서사에 자신감을 비추던 전작처럼 이번 앨범의 서사 역시 듣는 이들이 납득할 만한 근거가 필요했다. 하지만 조급하게 만들어진 듯한 서사는 왜 미쳐야 하는지, 그리고 미칠 수 없는지를 전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서 앨범을 발매하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이유이다.
크레이지 비트자체는 진짜 좋았는데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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