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HYPED:
‘UNHYPED’는 힙합엘이의 언더그라운드 큐레이션 시리즈로, 이 씬 안에서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내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소개한다. 자신만의 위치에서 힘껏 소리를 내고 있지만, 아직 많은 이들에게 음악을 들려줄 기회가 없는 그들. 장르, 경력에 상관없이 자신만의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있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소개한다.
본 시리즈를 통해 소개될 아티스트들은 몇 년 안에 더욱 큰 주목받을 재능과 가능성을 지녔다. 그런 그들을 미리 발견하고, ‘하이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험해보는 건 어떨까. 어쩌면 ‘언하이프’의 상태의 그들이 만들어낸 솔직하고, 대담한 음악이 더욱 큰 울림을 줄지도 모른다.
UNHYPED: NSW Yoon
‘UNHYPED’에서 스물여덟 번째로 소개할 아티스트는 NSW 윤(NSW Yoon). 시카고에서 시작된 드릴의 물결은 영국과 뉴욕, 가나, 독일, 그리고 한국까지 닿아 하나의 큰 흐름을 이루고 있다. 이미 인천과 경기도 지역을 토대로 활동하는 여러 래퍼들이 드릴을 구사하고 있고, SNS에서 호응을 얻어 차츰 자신들의 인지도를 넓히고 있는 요즘이다. 이 중에서 NSW 윤은 인천을 근거지로 활동을 펼쳐가고 있는 드릴러다. 많은 선배 래퍼들이 그의 이름을 샤라웃하고 있는 건 그의 음악에 느껴지는 진정성 때문일 거다.
LE: 일단 간단한 본인 소개 부탁드릴게요.
NSW 윤: 안녕하세요. 저는 인천 남동구에서 음악하고 있는 19살, 2004년생 이승윤, NSW 윤입니다.
LE: 처음으로 음악이랑 인연을 맺게 된 건 언젠가요?
처음 힙합 음악을 접한 건 지금 캐나다에 사는 사촌 형 덕분이었어요. 사촌 형이 한국에 잠깐 왔었는데요.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덴젤 커리(Denzel Curry)의 “Ultimate”가 엄청나게 유행했거든요. 그때 형이 이게 힙합이라고 들려줬는데요. 지금까지 듣던 노래들이랑 뭔가 다르다는 게 느껴졌어요. 형한테 카카오톡으로 음악 좀 알려 달라고 했고, 그러다가 한국 힙합을 접했어요.
LE: 처음 덴젤 커리를 들을 때 느낌은 어땠나요?
가족들이 노래를 좋아해서 저도 차에서 가요를 듣고 그랬는데요. 그때 힙합을 처음 듣고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피티 느낌나는 뮤직비디오도 되게 멋있었고요. 이런 음악도 세상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LE: “Ultimate” 이후에는 어떤 힙합을 들었나요?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는 덩치가 좀 있었어요. 그러다 친구가 저 보고 킬라그램(Killagramz)을 닮았다고 하더라고요. 킬라그램이 누군지 궁금해서 유튜브로 킬라그램을 검색했는데요. <쇼미더머니>에서 되게 랩을 재밌게 하신 걸 봤어요. 그 노래가 사촌 형이 들려줬던 노래랑 비슷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쇼미더머니>를 알게 되었고, 누나 노트북을 통해서 <쇼미더머니 5>를 보고, 지투(G2)나 면도(myunDo) 같은 분들의 음악을 많이 들었어요.
NSW Yoon: 과거
“ 제 삶은 드릴 문화와 맞닿아 있는 거 같아요.”
LE: 그렇다면 음악을 직접 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 생일 축하 겸 노래방에 갔어요. 그 자리에 제가 좋아하는 여자애도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저도 그 친구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엄마 폰으로 매일 듣던 <쇼미더머니 5>의 “니가 알던 내가 아냐”를 노래방에서 불렀거든요. 애들 반응이 엄청 좋은 거예요. 다 같이 저에게 “너 왜 랩 안 하냐?”고 묻더라고요. 제가 랩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기분이 좋았어요.
그때부터 녹음은 안 했지만, 가사를 계속 썼어요. 당시에는 <쇼미더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다른 래퍼들 가사를 따라 하고 그랬거든요. 그러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힘든 일을 많이 겪었어요. 제 아버지가 옛날에 시를 많이 쓰셨는데요. 저도 지금 느끼고 있는 슬픔과 힘든 일을 곡으로 써보자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렇게 가사를 쓰고 나니까 마음이 편안해지고 슬픈 감정이 해소되더라고요.
그때부터 제가 가사를 쓰고, 랩을 할 때 편안하고 행복해진다는 걸 느껴서 가사를 쓰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또, 중학교 2학년 때 친한 친구가 트래비스 스캇(Travis Scott), 에이셉 라키(A$AP Rocky) 같은 외국 힙합을 좋아했거든요. 친구가 체육 선생님한테 건의를 해서 힙합 동아리를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그렇게 친구 여섯 명을 모아서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그때 마이크를 사고, 학교에서 녹음한 후에 사운드클라우드에 올리고 그랬어요.
LE: 학교생활과 음악을 병행하는 게 힘들지는 않았나요?
제가 공부를 좀 했거든요. 엄마도 제가 공부 쪽으로 진로를 잡고, 대학도 가기를 원했는데요. <쇼미더머니>를 본 이후부터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엄마한테 “엄마, 만약에 내가 래퍼를 하면 어떨 거 같아?”라고 물어봤는데요. 엄마가 진짜 화를 내더라고요. 당시는 절대 랩을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속에 하고 싶다는 생각도 계속 들더라고요. 또, 계속 노래를 쓰다 보니 너무 좋아서 진짜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엄마한테 말했어요.
처음에는 엄마가 싫어하더라고요. 조금만 공부를 하면 괜찮은 대학도 갈 수 있었는데, 잘 안되면 돈을 못 버는 음악을 굳이 해야겠냐고 하셨어요. 그러다 중3 때 고등학교 진학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는데, 학교를 정해야만 하는 날이 온 거예요. 지금 제가 다니는 학교가 예고인데요. 그때 학교에 실용음악과가 있어서 래퍼도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예고를 다니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랩으로 가기는 왠지 싫더라고요.
그러다 저는 학교 들어가기 2주 전에 작곡 학원을 다녔어요. 그때 선생님이 2주 동안 작곡에 대한 모든 걸 알려주셨죠. 그렇게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죠. 예고이다 보니 공부도 많이 시키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여전히 엄마가 공부는 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도 요즘은 좀 잘 풀리고 있어서 어느 정도 증명도 하고 있고, 음악으로 돈도 벌어서 엄마 생일 때 선물도 드렸어요. 이제는 엄마가 저를 믿어 주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음악에만 전념하고 있어요.
LE: 대학 진학도 생각하고 계시는가요?
제가 지금 고3이거든요. 대학에 대해 생각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엄마랑 20살 전에 뭔가 안 되면 그만하기로 약속했거든요. 올해가 되게 중요한 시기라서 일이 들어오는 대로 다 하고, 최대한 성과를 내려 열심히 하고 있어요.
LE: 사실, NSW 윤 님의 지금 음악 스타일은 드릴(Drill)이잖아요. 맨 처음부터 드릴을 하셨던 건가요?
처음에는 붐뱁을 했어요. 가사 쓰기가 편하더라고요. 그때는 여친하고 헤어진 가사를 쓰고, 친구랑 싸우면 친구에 대한 욕을 하는 식으로 가사를 썼어요. 당시 엄마는 “솔직히 네가 잘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취미로 해라” 이런 느낌으로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다 제가 지금처럼 드릴을 한 건 작년이었어요.
https://youtu.be/3W0e7aI0gAg
LE: 그렇다면 드릴 음악을 하게 된 계기는 어떻게 되나요?
저는 중3 때까지는 한국에서 다 할 수 있는 랩을 했었어요. 그러다 고1 때 NLE 차파(NLE Choppa)를 많이 들었어요. “Shotta Flow”의 뮤직비디오도 멋있었어요. 그걸 보면서 나도 NLE 차파처럼 남자답게 랩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트래비스 스캇 다큐멘터리를 보고 미국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영어 공부를 엄청나게 했어요. 제 음악에서 나오는 다른 이와의 차이점이 다 NLE 차파를 들으면서 생긴 거 같아요.
LE: NLE 차파는 트랩 쪽에 가깝다고 볼 수 있죠?
원래 저도 그런 트랩만 했어요. 그러다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린 학원 선생님, 형을 만나게 되는데요. 형이 저한테 영국/미국에서 되게 유행하고 있는 장르가 있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멋있는 장르이니까 한 번 들어보고 너도 해 보라고 했어요. 그래서 한 번 뮤직비디오와 함께 봤는데요. 친구들을 뮤직비디오에 다 같이 부르는 그림이 너무 멋있었어요.
그전까지 저는 3억 정도 들어야 찍을 수 있는 게 뮤직비디오라고 생각했거든요. 반면에 드릴 뮤직비디오는 무슨 동네 마트 슈퍼에 자기 친구들 불러 놓고 그냥 랩 하는데 너무 멋있더라고요. 또, 드릴이 제가 할 수 있는 말을 남자답게 할 수 있고, 슬픔을 멋있게 잘 전달할 수 있는 장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작년 6월이었어요. 당시에 더블 싱글을 내려고 했는데요. 원래는 NLE 차파 같은 트랩 곡을 내려고 했거든요. 형이 드릴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고, 우리 함께 드릴을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했어요. 당시에는 한국에서 드릴을 하는 뮤지션이 실키보이즈(SILKYBOIS) 말고 없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드릴을 시도해서 나온 노래가 "PERIOD"였죠.
LE: NSW 윤을 드릴의 세계로 이끌어 준 형은 어떤 활동명을 쓰고 있나요?
닉네임은 없고, 권승빈이라는 본명을 쓰고 계셔요. 올해 26살이고요. 지금도 그 형과 같이 준비하고 있는 곡이 많아요. 당시 형이 했던 말 덕분에 제가 드릴을 하게 된 셈이죠.
LE: NSW 윤 님이 작곡 전공이니까 미디를 배우신 건가요?
그렇죠. 저는 컴퓨터 음악을 하는 거죠. 형은 피아노 전공인데 미디를 잘 찍어요. 그래서 형이 드릴을 한 번 시도해 보자면서 “PERIOD” 비트를 찍어서 보내줬는데요. 저도 느낌이 와서 바로 가사를 써서 녹음했어요.
https://youtu.be/v-KQWi13TKs
LE: 사실, “PERIOD” 뮤직비디오 댓글 중에는 CJ의 “Whoopty”가 연상된다는 언급이 있거든요. 실제로도 영향을 받은 건가요?
솔직히 부정할 수 없는 게 비트를 만들 때 레퍼런스로 잡은 게 “Whoopty”가 맞아요. 당시 노래가 엄청나게 유행해서 빌보드(Billboard) 핫 차트에도 들어갈 때였거든요. 그래서 그때는 흥행한 드릴이 그거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레퍼런스로 잡고 “PERIOD”를 만들었어요.
하지만, “Whoopty”의 어느 부분을 카피해서 노래에 담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그런데 비트가 끊는 타이밍도 그렇고,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그렇게 느끼신 거 같아요. 저도 댓글을 보고 후렴을 제대로 들어봤는데요. 비슷하더라고요. 의도는 없었지만, 아주 비슷하다고 생각할 거 같아요.
LE: 그렇다면 NSW 윤 님에게 영향을 끼친 드릴 쪽 아티스트로는 누가 있나요?
사운드적으로 큰 영향을 준 사람은 확실히 NLE 차파예요. 제 기본기를 탄탄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것 같아요. 그리고 피비오 포린(Fivio Foreign)처럼 뉴욕 드릴을 하는 래퍼들을 보면서 많은 영감을 받았어요. 또, 비주얼 적으로는 센트럴 씨(Central Cee)와 티온 웨인(Tion Wayne). 둘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영향을 많이 받은 거 같아요.
https://youtu.be/z7DbZS6l6Vk
LE: NSW 윤 님은 이런 아티스트의 음악이 본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친 거 같나요?
확실히 이런 사람들의 음악을 듣고 랩을 하다 보니깐요. 제 랩에 한국어 발음과 영국 발음이 애매하게 섞인 거 같아요. 미국과 영국의 발음은 다르잖아요. 그래서 NLE 차파의 랩을 할 때 뱉던 기본 발음과 영국 아티스트를 들으면서 영향을 받은 발음이 섞이면서 지금의 제 색이 나온 거 같아요.
LE: 본래 드릴은 유튜브와 SNS를 통해 인기를 끌기 시작한 장르잖아요. 그러다 보니 요즘 드릴을 하시는 분들은 틱톡(TikTok)이라는 플랫폼을 활용하지 않을까 싶은데. NSW 윤 님은 어떠세요?
저는 틱톡을 안 해서 쓸 줄 잘 몰라요. 하지만, SNS를 통해 소통하는 건 맞아요. 저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제 음악으로 사람들과 많이 소통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틱톡도 깔아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틱톡 바이럴이 진짜 장난 아니더라고요.
LE: 유튜브로 소통을 많이 하시는 편인가요?
맞아요. 유튜브도 그렇고, 인스타그램으로도 가끔 노래를 선공개하고 그래요. 옛날에는 팔로워가 별로 없어서 좋아요가 두 개 박히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제 노래에 반응도 오고, 모르는 분들도 제 노래를 기다려 주셔서 신기했어요. 이전보다 팔로워가 늘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LE: 그렇다면 한국 드릴과 영국, 뉴욕, 시카고를 비롯한 외국의 드릴은 어떤 차이점이 있는 거 같나요?
저는 드릴이 한국에서 마니아층이 확실히 생긴 장르라고 보거든요.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우선 트랩과 드릴은 드럼 패턴이 달라요. 사운드적으로 보면 드릴은 처음 접해 보는 소스에다 악기 구성도 정신없고, 특이하잖아요. 하고 싶은 말도 거침없이 내뱉고요. 시카고든 브루클린이든 공통으로 드릴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거로 생각해요.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문화 자체가 한국인들한테는 다르게 느껴지는 거 같아요.
그래서 한국인들도 드릴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을 멋있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아서 드릴에 이목이 끌렸던 거 같아요. 한국 드릴만의 매력은 한국인들이 드릴을 할 때 나오는 특유의 발음이 있거든요. 한국인들이 구사할 수 있는 가사도 있고요. 또, 정치 이야기를 마음껏 드릴에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고요. 그래서 한국의 드릴은 미국, 영국과는 그런 부분이 다른 거 같아요.
LE: 사실, 힙합이 삶과 동떨어진 부분도 있지만, 리얼한 진정성을 되게 중요시하는 장르잖아요. 그런 만큼 NSW 윤 님의 삶과 드릴의 감성적인 부분이 어느 정도 맞닿은 거 같나요?
일단, 한국은 총기 소지가 금지되었다는 점에서 미국의 드릴과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제가 드릴을 못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저 자신의 삶을 생각해 보면 드릴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거든요. 물론, 미국인들이 드릴하면 느끼는 이미지와 감성과는 좀 거리가 있지만요.
하지만, 저는 하고 싶은 말을 드릴에서 하고요. 동네 친구들과 작업실에 모여서 노래를 만들면 틀어 놓고 다 같이 우워크(Woo Walk)를 추고 그렇거든요. 그러면 흥분도 되고 기뻐요. 그런 면에서 제 삶은 드릴 문화와 맞닿아 있는 거 같아요. 총이나 칼이 없어도 충분히 드릴을 할 수 있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그게 드릴이라고 생각해요.
https://www.youtube.com/watch?v=usu0XY4QNB0
LE: 그렇다면 드릴 중에서 어떤 지역의 드릴 음악을 제일 선호하시나요?
항상 바뀌긴 하는데요. UK 드릴을 진짜 좋아하고, 요즘은 NY 드릴을 많이 들어요. 제가 팝 스모크(Pop Smoke)를 엄청나게 좋아하거든요. 피비오 포린 같은 경우도 폴로 지(Polo G)처럼 자기 철학이 담긴 가사를 되게 잘 써요. 그런 점에서 NY 드릴을 많이 듣고, UK 드릴도 센트럴 씨와 티온 웨인을 좋아하고요.
LE: NSW 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미공개 곡도 요즘 UK 드릴처럼 리딤(Riddim)의 요소가 담겨 있더라고요.
맞아요. 요즘 영국 언더그라운드에서 핫한 아프로 드릴(Afro Drill)을 시도했거든요. 아프리카의 북소리를 가지고 오는 식으로 아프리카의 노래와 드릴을 접목시킨 건데요. 제가 영국 언더그라운드 애들을 유튜브로 디깅하다가 발견해서 재밌을 거 같아서 다음 앨범에 넣으려고 만들어 뒀어요.
LE: 보통 디깅을 할 때 어느 채널을 많이 보세요?
유튜브에 믹스테입 매드니스(MIXTAPE MADNESS)라고 언더그라운드 친구들을 소개하는 채널이 있고요. GRM 데일리(GRM Daily)에도 UK 드릴이 많이 올라와요. 저는 처음 보는 드릴 관련 유튜브 채널이면 다 알림 설정해두고 콘텐츠 올라올 때마다 보고 있어요.
LE: 그렇다면 NSW 윤 님이 생각하시기에 드릴을 진짜 잘하는 한국 아티스트는 누구인 거 같나요?
블라세(Blase) 형님이 진짜 잘하시는 것 같아요. 처음 <쇼미더머니>에서 드릴을 하시는 걸 보고 그냥 이번에 드릴을 시도하신 거구나 생각했는데요. 이전 노래를 들어 보니까 UK 개러지(UK Garage)도 하셨고, AJ 트레이시(AJ Tracey) 같은 노래도 많이 하셨더라고요. 또, 블라세 형님이 랩 하실 때 영국 맛이 되게 많이 나요. 그 때문에 정말 많이 아신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뵌 적은 없지만, 얼마 전에 인스타그램으로 서로 연락하고 노래 나오면 들려드리려 하고 있어요.
NSW Yoon: 현재
“힙합이 없었다면 저는 망가졌을 거예요.”
LE: 아까도 얘기 나눴지만, NSW 윤 님이 인천 출신이잖아요. 그런 만큼 NSW 윤 님에게 영향을 끼친 인천 출신의 아티스트가 있는지 여쭙고 싶네요.
요즘 포티 몽키(Potty Monkey) 님이나 풀업투투(Pull Up 22) 님이 핫하지만요. 저는 그분들에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저 때도 인천하면 비와이(BewhY) 님이었거든요. 또, 리듬파워(Rhythm Power) 형들도 핫하셨고요. 그런데 비주얼적으로는 확실히 포티 몽키 님을 보면서 많이 배운 거 같아요. 포티 몽키 님이 어떻게 보면 유튜버라서 장난스러운 면모도 있지만, 노래에는 계속 진지한 면모가 나오거든요.
LE: 그렇다면 지금 NSW 윤 님이 동인천 부근에 사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인천이란 지역이 드릴 음악을 하는 데 영향을 끼치는 점이 있나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무래도 영향이 있는 거 같아요. 제가 인천에 살고, 또 그런 말을 들어서 느끼는 거 같은데요. 뭔가 인천은 해가 어둡게 뜨는 거 같아요. 하늘이 껌껌하거든요. 건물이 많아서 그러나 싶기도 해요. 또, 확실히 서울보다 인천이 느린 게 사실이에요. 서울은 빌딩이 많지만, 인천은 오래된 아파트가 많아요. 또, 노래방이랑 술집도 많고요. 그러다 보니 인천이 좀 게토(Ghetto) 바이브가 나는 거 같아요.
물론, 저는 남동구에 살고 있는데 그곳이 그나마 인천에서 시골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집은 괜찮은데 번화가나 학교가 제물포역 쪽에 있어서 그쪽을 가면 정서적으로 파괴되는 느낌이 들어요. 주변에도 노는 형도 많이 있었고요. 그렇게 제가 보고 자란 걸 가사에 솔직히 담으면 센 가사가 가끔 나오는 거 같아요.
LE: 또, 인천을 베이스로 활동하고 있는 집단이나 비와이나 리듬파워를 넘어 새로운 무브먼트를 꾀하고 있는 집단이 있을까요?
우리 동네에서 음악을 하는 애들끼리 모여 만든 만수라는 팀이 있어요. 만수동에 작업실이 있어서 만수예요. 저희가 다 같이 회의를 하거나 노래를 만들면 만수동에 있는 작업실로 모이거든요. <쇼미더머니> 나온 지상이(황지상)도 팀에 속해 있어요. 그리고 저랑 중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낸 NSW 영준이란 친구도 있어요.
제가 걔네 집에서 처음으로 녹음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 그 친구는 춤하고 디자인 쪽을 많이 건드리고 있어요. 그래도 네가 래퍼였으니 랩을 계속해야 되지 않겠냐고 권유를 했어요. 나머지는 고등학교 실용음악과에서 만나게 된 친구들이에요. 이 친구들하고 함께 컴필레이션 앨범도 준비하고 있어요.
https://youtu.be/X074nRhlwM8
LE: 황지상 님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요. 같은 동인천 출신이신 건가요?
지상이는 송도 학교에서 만났어요. 지상이가 중학교부터 고1 때까지는 학교 폭력을 많이 당해서 맨날 죽고 싶다 이야기하고, 우울함이 많았거든요. 저는 지상이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같이 안 좋아지더라고요. 그러다 “야, 너 나랑 같이 음악 해 볼래?”라고 이야기를 걸었어요. 그러면서 지상이가 지금처럼 되었어요.
지상이는 저에게 매일 고맙다 이야기하고, 죽고 싶다는 이야기도 안 해요. 지상이가 처음 음악을 할 때는 빈첸(VINXEN) 같은 스타일의 음악을 했는데요. 제가 지금 지상이가 하는 노스페이스갓(Northfacegawd) 님의 “복덕방”을 지상이네 작업실에서 딱 틀어줬고, 이런 스타일의 음악을 한번 해보라고 추천해줬어요. 2주 뒤에 보니까 지상이가 재밌게 노래를 잘 만들었더라고요. 그래서 지상이한테 이런 스타일로 밀고 가자고 조언을 해줬죠.
LE: 그런데 지상 님이 먼저 <쇼미더머니>에서 하입을 받으셨잖아요. 이런 모습이 NSW 윤 님에게 심적으로 좀 영향을 끼친 부분이 있을까요?
<쇼미더머니>는 지금까지 다 지원을 했거든요. 합격한 적은 없어요. 조금 전에 제가 트래비스 스캇 다큐를 본 뒤 영어를 엄청나게 공부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영어로 랩을 하는 게 사운드적으로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당시에는 영어로만 가사를 썼거든요. <쇼미더머니>도 영어 랩으로 지원했고요.
그러다 지상이가 마지막 날에 전화가 왔더라고요. 그때는 지상이가 붙었으니 축하해주고 그랬는데요. 이후 한두 달 동안은 친구가 잘되어서 좋기도 하지만, 뭔가 마음이 불편하더라고요. 나도 되게 열심히 하고, 같이 했는데. 나만 뭔가 발전이 없는 거 같았어요. 또, 어떻게 보면 지상이는 내가 도와 준 친구인데, 지상이는 TV에 나갈 때, 나는 뻘 짓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쇼미더머니> 지원 심사에서 떨어진 게 정말 다행인 거 같아요. 그때 나갔으면 제가 하고 싶은 말도 없고, 음악에 대한 진정성도 없어서 방송에 나가면 겁먹었을 거예요. 어쨌든 8월에 <쇼미더머니>를 떨어지고, 4개월 정도 슬럼프를 겪으면서 배우고 느낀 게 많아요.
당시에 드릴을 할 생각이 거의 없었거든요. 하다 보니 드릴 음악에 제 이야기를 쓰는 것도 그렇고, 확실히 남자답게 멋있는 걸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다 한 것도 아니고, 뭔가 드릴을 처음 시도를 하는 거란 생각도 들었어요.
제가 [BALLON D'OR] 작업을 11월 정도부터 시작해서 한 달 동안 여섯 곡을 만들었는데요. 그때 노력을 많이 한 거 같아요. 앨범을 만들면서 느낀 게 진짜 많았어요.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심장병도 생기고요. 병원과 작업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느낀 감정들이 많은데요. 그걸 가지고 제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되고, 한글로 가사를 쓰는 방법도 알게 된 거 같아요.
LE: 이야기가 나온 김에 첫 EP [BALLON D'OR]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주시면 어떨까요?
이번 EP는 2021년에 있던 NSW 윤의 삶을 담은 작품이라 생각하고 들으시면 좋을 거 같아요. “들어가”부터 “I Gotta Go”까지는 제가 하고, 하고 싶었던 사운드적으로 좋게 생각하는 음악에다 이야기를 풀어냈어요. 특히 인트로 트랙 “들어가”는 랩으로 다 보여주고 싶어서 랩을 엄청 열심히 했어요.
“Let Me Know”의 경우에는 제가 EP를 만드는 도중에 여자친구를 사귀었거든요. 그때 여자친구와 얽힌 여러 문제를 노래로 풀어서 여자친구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또 영국에서는 멜로디 드릴이 유행할 때였어요. 그래서 저는 멜로디 드릴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도를 하게 되었죠.
그런데 “to ma grandfa”부터 마지막 트랙인 “아직도”까지. 분위기가 확 달라지거든요. 그래서 초반부는 아무 걱정 없이 신나게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았는데, “to ma grandfa” 때 할아버지가 제 곁을 떠나고, 뭔가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되게 많이 느꼈어요. 주변 사람이 제 곁을 떠난 게 처음이었거든요.
그런 감정이 그대로 “Sadness”에 전해져요. 더 사랑 같은 것도 하기 힘들고, 뭔가 잘하기도 힘들다. 그래도 날 믿어주는 사람이 많으니까 다시 힘을 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Sadness”를 만들었어요. “아직도”는 이제 마음을 다시 잡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느낌으로 평화로운 트랙을 만들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EP를 들으면 제 감정과 이야기가 전해질 거예요.
LE: 앨범 제목과 커버는 무슨 의도가 있을까요?
이번 앨범의 커버가 애니, 일러스트잖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앨범의 분위기와 안 맞는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앨범의 제목인 발롱도르가 황금 공, 축구 협회에서 지난 1년 동안 가장 잘한 선수에게 주는 상이거든요.
제가 2021년을 돌이켜 생각해보니까 제가 앞으로 100년을 산다고 생각하면 100년 중에 가장 많은 걸 얻은 1년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저에게 상을 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발롱도르란 이름을 정했고, 1월 10일인 제 생일에 앨범을 내게 되었어요.
LE: NSW 윤 님의 인생을 녹여낸 만큼, EP에 한국어로 된 가사가 많은 게 당연한 거였네요?
맞아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4개월 동안 한국어 가사를 많이 썼거든요. 물론, 영어를 쓸 때 청각적으로 더 좋게 들어주는 분들도 있겠지만요. 저는 청각적인 것보다 제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에게 공감을 시켜주고 싶었어요. 또, 제가 계속 영어만 쓰다 보면 더 발전이 없겠다는 사실을 느꼈어요.
그때부터 그냥 드럼 리듬만 틀어 두고 이쁘게 들리는 한국어 발음도 찾아보고요. 그걸 제 이야기로 엮는 연습을 많이 하면서 가사를 썼어요. “들어가” 같은 경우에도 한국어가 매우 많거든요. 제가 한국어를 써야만 저의 감정 전달이 된다고 느꼈어요.
LE: “들어가”의 경우에는 힙합이 나를 살렸다는 내용의 가사가 있잖아요. 실제로 그런 가사를 쓰게 된 특별한 경험이 있을까요?
제가 살면서 외로움을 되게 많이 느꼈거든요. 왜냐하면, 제가 어릴 때 부모님이 두 분 다 일을 하러 나가셨어요. 그러다 보니 집에 있을 때도 있었지만, 거의 저녁까지 친구 집 가서 놀다가 친구 부모님 오면 그때 집으로 오고 그랬거든요. 항상 저는 소외되는 느낌을 항상 받았어요.
또, 어릴 때 부모님은 좀 많이 다투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방에서 이어폰을 끼고 볼륨을 크게 해서 힙합을 듣고 있으면 부모님이 싸우는 소리도 안 들리더라고요. 그렇게 힙합을 많이 들었는데요. 노래를 들으니 확실히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제가 노래를 듣는 순간만큼은 외롭고, 안 좋은 상황을 모두 잊고요. 곡의 주인공이 된 것 같고, 되게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때 들었던 노래가 다 힙합이었어요. 만약 힙합이 없었다면 저는 상황에 안 좋은 영향을 받아서 망가졌을 거예요. 그때 힙합이 위로가 많이 되어 주고, 저를 살리고 지금처럼 클 수 있게 만들어 줬어요. 그래서 그런 가사를 썼죠.
https://youtu.be/BOonRWkE8Zc
LE: 그때 가장 많이 위로를 받았던 노래가 뭐였나요?
사람들이 생각하기로는 릴 티제이(Lil Tjay)나 폴로 지를 많이 들었겠다고 생각할 거 같아요. 그런데 의외지만, 저는 그레이(GRAY) 님의 “하기나 해”를 듣고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 이후에 릴 티제이의 “Ruthless”를 들으면서 나도 음악으로 이런 이야기를 풀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거 같아요.
LE: 조금 전에 이야기도 하셨지만, 맨 마지막 노래인 “아직도”를 보면 앓고 계신 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작년부터 제가 심장에 염증이 생겼어요. 갑자기 어느 날 숨이 안 쉬어지고 아프더라고요. 119를 불러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심장에 염증이 생겼다고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게 보통 염증이면 모르는데, 염증 수치가 25,000이 나온 거예요. 보통 4,000에서 10,000 넘어가면 위험한 수치거든요. 의사 선생님도 그 수치를 보고 엄청나게 놀라서 바로 중환자실로 저를 옮겼어요.
그때 의사 선생님이 다른 의사 선생님께 오늘이 고비일 거 같다고 귓속말을 하시는 게 들리더라고요. 저는 귓속말을 듣고 너무 무서웠어요. 아직 할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건가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동시에 저는 왠지 여기에서 죽을 거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님이 아직 저에게 준 사명이 있고, 제가 사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기서 저를 죽이실 거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기적적으로 다음 날부터 수치가 4,000씩 내려가더라고요. 2주 동안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기면서 염증 수치가 정상으로 내려갔어요. 퇴원까지 했고요.
제가 어떻게 괜찮아졌는지는 지금도 사실 모르겠어요. 진짜 죽을 뻔한 상황에서 다시 일반인들처럼 사는 게 정말 감사한 상황인 거죠. 저는 몸이 회복되면서 느낀 것들이 많아요. 죽음이란 게 멀리 있지 않고, 한 번 그냥 놓으면 삶이 끝나는 거란 생각도 많이 들었어요. 그때 했던 저의 생각과 가사들이 EP 곳곳에 묻어 난 거 같아요.
https://youtu.be/GOZ3-i0hohQ
LE: 이런 경험이 NSW 윤 님에게 호소력을 더하게끔 한 거 같아요. 그런 부분 때문인지 던밀스(Don Mills), 딥플로우(Deepflow), 트레이드 엘(Trade L) 같은 기성 래퍼분들이 직접 앨범 티저 영상에 출연하셔서 NSW 윤 님을 샤라웃 하셨는데요. 이분들과의 교류는 어떻게 이뤄진 건가요?
저는 던밀스 형을 존경하고 멋있다고 느끼거든요. 정말 씬의 미래를 생각하고 계신 걸 같이 얘기하다 보면 느껴요. 던밀스 형은 저 같은 래퍼들을 엄청나게 챙겨 주시거든요. 자기한테 도움이 되는 게 아닌데 말이죠. 제이포 프라다(J4 Prada)나 폴로다레드(Polodared) 같은 친구들을 챙겨서 “미래 2”를 낸 것도 그렇고요. 밀스 형이 저한테 먼저 인스타 팔로우를 걸었고, 딥플로우 형도 먼저 팔로우를 거셔서 같이 맞팔로우를 했어요.
트레이드 엘 같은 경우는 사실 중학교 2학년 때 같이 음악을 하던 친구였어요. 저와 친구들, 형들과 함께 팀으로 음악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트레이드 엘이 이제는 알아서 흩어져서 해보자하고 흩어지게 되었는데요. 이번에 제 노래를 베이비 셀렉트에서 본 거 같더라고요. 트레이드 엘이 저를 다시 팔로우해서 연락하게 되었죠. 마침 제가 뮤지션분들한테 팔로우가 올 때 앨범을 마무리하고 있었어요.
당시에 호미들이 앨범 프리뷰 영상을 올렸거든요. 저도 그 영상을 보면서 호미들 앨범을 엄청나게 기다리게 되더라고요. 그러면 나도 이런 영상을 찍어서 사람들이 내 앨범을 기다리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저도 다른 래퍼분들과 팔로우를 맺고 있었고, 제가 먼저 그분들에게 DM을 드렸어요.
제가 지금 이런 앨범을 만들고 있는데, 카톡으로 앨범을 보내 드릴 테니까 듣고 괜찮으시면 리액션 영상 한번 찍으실 수 있냐는 식으로 부탁을 드렸어요. 정말 감사하게도 그분들이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프리뷰 영상을 만들었고요. 이렇게 만든 프리뷰 영상이 제 앨범을 기대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LE: 새로 준비하고 있는 앨범은 진행 상황이 어느 정도 되었나요?
다음 EP는 거의 마무리 되었고요. 지금은 세 번째 EP를 만들고 있어요. 4월에는 오왼(Owen) 형과 함께한 싱글이 나와요. 5월에는 제 두 번째 EP가 나올 거예요.
LE: 그렇다면 더 나아가서 이 사람이랑 작업하는 게 꿈인 아티스트가 있을까요?
한국으로 치면 호미들, 그리고 더콰이엇(The Quiett)이요. 더콰이엇 님은 힙합계의 우상이기도 하지만요. 가사를 들어보면 한 방을 때리는 게 꼭 있거든요. 저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라인들을 너무 좋아해요. 또, 호미들 형의 경우에는 진짜 한국 힙합의 세대를 교체한 분들이잖아요. 저는 이분들의 모습이 너무 신선하고, 또 저랑 같이 작업하면 너무 멋있는 게 나올 거 같아요.
외국은 브루클린 드릴의 대표 주자인 케이 플락(Kay Flock). 지금은 빵에 계시지만, 진짜 멋있게 랩을 하거든요. 뮤직비디오도 보면 진짜 그런 폭력적인 가사와 맞아떨어져요. 그리고 릴 티제이. 릴 티제이가 드릴을 대표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드릴을 하는 친구들을 곡에 끌어들여서 노래를 만들잖아요. 저는 그런 걸 보면서 케이 플락이랑 릴 티제이랑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https://youtu.be/gGJS8W9emac
LE: 이번 앨범에 참여한 피처링진 분들도 얘기하면 어떨까 싶네요.
일단 “Let Me Know”에 참여한 호인이는 제 학교 친구예요. 학교 실용음악과에 보컬 전공도 있는데요. 호인이가 성악가 집안이라서 노래를 진짜 잘하거든요. 제가 작업실에서 “Let Me Know”를 만들다가 보컬이 같이 더블링도 쌓고, 앞에 인트로를 넣으면 진짜 예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호인이에게 바로 연락을 해서 혹시 도와줄 수 있냐고 물어봤는데요. 다음 날 작업실 와서 녹음을 해줬어요. 호인이도 음원을 낼 거예요.
제이포 프라다 형 같은 경우에는 뮤직비디오 때문에 처음 만났어요. 제이포 프라다 형이 뮤직비디오를 찍을 때 멋있는 사람들이 촬영장에 와줄 수 있냐고 했거든요. 그때 폴로다레드, 상현이가 저한테 “나는 이거 갈 건데 너도 같이 갈래?”라고 해서 형을 소개를 받았어요. 그때 서로의 음악을 듣고 멋있다고 느꼈죠.
“Sadness”에 참여한 구본겸은 동갑내기 친구예요. 어느 날 본겸이가 앰비드 잭(Ambid Jack)과 함께한 노래의 뮤직비디오를 봤는데요. 저는 그걸 보고 본겸이가 되게 남자답고 멋있다 느꼈어요. 그러다가 폴로다레드가 호미들의 루이(Louie) 형이랑 본겸이를 소개해 줬어요. 본겸이가 자기도 드릴을 한다고 해서 노래를 보내줬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Sadness”의 벌스가 비는 데 본겸이 네가 도와주면 좋겠다고 노래를 보내줬어요. 그때 작업을 처음 같이하게 되었어요.
펄프(8urp) 형 같은 경우에는 제이포 프라다 형 덕분에 알게 된 형이에요. 펄프 형 음악을 들어보니까 되게 멜로디컬한 음악을 잘한다고 생각했고, 함께 노래를 만들면 좋을 거 같아서 연락을 먼저 드렸어요. 호인이 빼고는 앨범에 참여한 분들과 알고 지낸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같이 곡을 작업한 이후로 지금도 계속 교류를 이어가고 있어요.
LE: 참여진 이야기를 길게 나눴는데요. 함께 곁들여서 NSW 윤 님의 크루 S.R.A.에 대한 소개도 부탁드릴게요.
S.R.A.는 정확히 말하면 한국 드릴 팀이예요. 플레이어 세 명이 있고, 비디오 겸 포토 디렉터 형이 한 분 있어요. 또, “들어가”를 프로듀싱한 투턱(T₩OTUK)이라는 친구가 있어요. 또, 최근에는 "to my gradfa"를 프로듀싱해 준 마피아 륜(Mafia Ryun)이라는 친구도 함께하게 되었어요. 플레이어로는 지카(ziika)라는 친구와 블러디 베인(Bludivein)이라는 형이 있어요. 둘 다 드릴을 만들고 있고, 블러디 베인 형은 곧 EP가 나오거든요. 저도 두 트랙 참여했고, 앨범 진짜 좋으니 많이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또, 지카도 곧 노래와 뮤직비디오를 공개할 거예요. 저도 참여한 드릴 곡인데 그 노래도 되게 좋으니 많이 들어주세요. 투턱은 아예 블러디 베인 형 앨범 전곡을 프로듀싱했어요. 그리고 디네인(D.nain)이라는 형은 비디오를 찍고, 앨범 커버 디자인을 맡았어요. 말씀드렸듯이 S.R.A.는 드릴을 목적으로 둔 팀이고, 작업실에 모여서 서로 노래를 듣고 놀면서 다음 챕터를 준비하고 있어요.
LE: 영상 이야기가 나온 만큼, NSW 윤 님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해 준 영상 집단 두인 올 데이(Doin all day)에 대한 소개도 곁들여주시면 어떨까요?
지금은 두인 올 데이에 세 분이 계시는데요. 두인 올 데이 형은 정말 감사한 형이에요. 제가 처음에 곡을 만들었을 때 비디오를 어떻게 찍어야 할지 막막했거든요. 그때 두인 올 데이 형이 저에게 “노래 너무 좋게 들어서 같이 미디어를 찍어보고 싶은데 혹시 계획 중인 게 있냐?”고 연락을 먼저 하셨어요. 그때부터 인연이 되어서 “PERIOD”를 함께 찍었어요.
두인 올 데이 형도 “PERIOD”를 계기로 언더그라운드 씬에 들어오시게 되었고, 저도 뮤직비디오를 계기로 길이 열리게 되면서 서로 윈윈이 되었죠. 그러다 보니 제가 주변 애들한테 뮤직비디오 찍고 싶은 노래가 있으면 두인 올 데이 형한테 맡기라고 소개하고 있어요. 저하고는 “PERIOD”, “to ma grandfa” 두 개의 뮤직비디오를 같이 작업했어요.
https://youtu.be/m-xJCMP4zOo
LE: “to ma grandfa”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안 그래도 NSW 윤 님에게 생전의 할아버지는 어떤 존재였는지, 또 본인의 삶에서 할아버지가 떠나간 일이 어떤 영향을 줬는지 여쭤보고 싶어요.
외할아버지는 제가 정말 사랑했던 사람 중의 한 명이예요. 외할아버지댁을 가면 할아버지가 파워레인저 색칠 공부를 사 주셨거든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외할아버지가 눈도 잘 안 보이셨는데, 문구점 들어가셔서 저를 생각해서 선물을 고르신 거잖아요. 또, 먼저 전화를 거셔서 성경 구절로 절 축복해 주시고, 제가 잘 될 거라고 이야기해 주셨어요. 솔직히 할아버지 생전에 저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빨리 알아채지 못한 거 같아요.
외할아버지가 80대 후반이셨고, 노원구에 혼자 사셨거든요. 그러다 보니 많이 찾아가지도 못했거든요. 그러다 제가 할아버지를 만나서 할아버지에게 저의 사랑을 전하고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요. 그 때 할아버지가 편찮기 시작했고, 결국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저는 처음에 정신도 없고, 사실도 믿기지 않더라고요. 지체할 시간도 없이 장례식장으로 가는 것도 너무 안 믿겼고요.
심지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면회도 안 되는 거예요. 할아버지가 병실에 계시는 건 아는데, 1층에서 할아버지도 못 보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전화로 연락이 왔고요. 마지막 순간까지 할아버지의 얼굴도 못 보고 하늘나라로 보내 드렸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제가 사랑하는 주위 사람이 제 곁을 떠나가는 게 처음이라서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그러다 제가 장례식장 방에서 누워 있을 때 갑자기 내 음악적 재능이 할아버지에게 이어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할아버지가 연세가 많으셨지만, 멜로디언도 하시고, 하모니카도 하시고, 찬송가도 열심히 부르셨거든요. 그래서 저는 상업적인 걸 다 떠나서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할아버지를 추억하는 노래를 만들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래야 제가 할아버지를 사랑한 감정을 안 잊고, 존경하는 마음을 노래로 기록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LE: 어머님은 혹시 “to ma grandfa”를 들어보셨나요?
네. 엄마가 작업실의 짐을 옮겨주러 왔었는데요. 그때 제가 할아버지 이야기를 쓴 노래가 있다고 들려줬어요. 엄마에게 할아버지는 정말 소중한 존재였거든요. 엄마가 다섯 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거든요. 이렇게 할아버지가 아주 힘드셨지만, 그래도 혼자서 자식을 두 명 키우셨어요. 엄마도 그런 사실에 감사하고 있어요. 그 때문에 엄마가 노래를 듣고 엄청나게 슬퍼하시고, 할아버지도 분명 하늘에서 좋아하실 거고, 제가 대견하다는 이야기도 해 주셨어요.
LE: 어린 나이에 엄청 압도적인 경험을 하신 거 같아요. NSW 윤 님은 이런 경험들이 음악을 하는 입장으로 어떻게 다가오나요?
조금 전에 말씀드렸지만, 저는 기독교를 믿거든요.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천국에 가는 걸 알고 있고, 그것이 하나님이 해 주신 약속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죽음 후에 큰 두려움은 없어요. 대신에 저는 드릴 뮤직 안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고 싶어요. 이런 말이 되게 특이하잖아요. 드릴이란 게 폭력적인 부분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미국에서 드릴이 왔기 때문에 드릴하면 폭력을 떠올리는 거로 생각해요. 반면에 한국에서의 드릴은 충분히 자기 말을 멋있게 할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죽기 전까지 계속 제가 느낀 걸 사람들에게 전하고, 제가 절망에 빠졌을 때 하나님이 어떤 역할을 했고, 저에게 어떤 존재인지 이야기하고 싶어요.
드릴은 신나야 하잖아요. 영어로 가사를 만들 때는 가사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발음 술술 풀리는 대로 유쾌하고 농담 섞인 가사를 썼어요. 그런데 한국어로 가사를 쓸 때는 정말 뭔가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곡을 만들어요. 억지로 만드는 곡은 생명이 없는 곡이라고 스스로 느끼거든요.
LE: 이런 NSW 윤 님은 노래를 만드는 원동력이 어디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항상 뭔가를 느낄 때 곡을 만드는 원동력을 받는 거 같아요. 제가 이번 앨범에서도 누군가가 내 곁을 떠나거나 제가 정말 아프면서 느꼈던 걸 썼잖아요. 이것도 분명히 누군가는 경험해봤을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누군가가 제 음악을 듣고 힘을 얻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힘들 때 릴 티제이를 들었던 것처럼 충분히 저도 제 음악을 통해서 다른 이들을 공감하게끔 만든다는 생각이 들어요. 누구나 한 번쯤 겪는 고통인 만큼 사람에게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 노래를 만드는 원동력이 될 때가 있어요.
또, 다른 측면에서는 제 주위 친구들을 좀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제 주위에 정말 찢어지는 가난을 겪는 친구들이 있거든요. 제가 이런 사람들을 끌어안을 정도로 돈을 벌고, 책임감을 키워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요. 나이가 점점 들어가는 저희 아버지도 쉬게 해드리고 싶고요.
마지막으로 제가 멋있다고 생각하고, 존경하고, 저를 위로해주는 사람들이 저와 친분을 맺어 나가고요. 제가 요청을 하면 그분들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서도 원동력을 얻어요. 얼마 전에도 루이 형과 전화를 하면서 형이 너는 한국 힙합 씬의 심장이 되라고 했거든요.
그런 걸 들으면서 진짜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는 걸 느끼고, 차차 사람들이 저의 노력을 알아봐 주는 것. 이런 것에서도 저는 노래를 만드는 원동력을 얻는 거 같아요.
NSW Yoon: 미래
“저는 제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니까 저의 미래를 가사에 채울 거예요.”
LE: 만약 NSW 윤을 정의하면 어떤 단어가 어울리는 거 같아요?
미래가 어울리는 거 같아요. 그냥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이 미래잖아요. 그런 점에서 저는 제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니까 저의 미래를 가사에 채울 거예요. 그러다 보면 앞으로 세대교체가 될 때 미래가 될 수도 있고요. 저는 제 이야기를 쓰고, 스토리를 풀어내기 때문에 미래란 키워드가 맞는 거 같아요.
LE: 그렇다면 아직 NSW 윤 님의 노래를 들어보지 못한 이에게 어떤 노래를 추천하고 싶나요?
“to ma grandfa”요. 제가 하려는 음악이고, 제 이야기를 가사로 쓴 노래예요.
LE: 앞으로의 활동 계획도 이야기해 주세요.
일단 올해 정말 많은 게 쏟아져 나올거에요.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4월에는 오왼 형과 함께 만든 싱글이 나오고, 4월에는 두 번째 EP를 낼 거예요.
LE: 5년 뒤의 자신에게 남기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꼭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되고, 상업적으로 잘 안 되어도 좋아. 대신에 지금처럼 자기 신념 지키고, 거짓말하지 않고,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노래에서 계속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
LE: 5년 뒤의 목표가 있을까요?
5년 뒤면 제가 24살인데요. 코첼라 페스티벌(Coachella Valley Music and Arts Festival)과 롤링 라우드(Rolling Loud)의 초청을 받아 무대에 서고 싶어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집에서 유튜브를 보고 있는데요. 저는 무대가 너무 하고 싶어요. 클럽 같은 데에서 저를 불러 주신다면 제대로 공연을 해보고 싶어요.
LE: 마지막으로 힙합엘이 회원분들에게 남기고 싶은 포부가 있다면요?
곧 묵직한 앨범이랑 제가 피처링한 트랙들이 진짜 미친듯이 쏟아져 나올거 거든요. 많이 들어주세요. 제 노래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LE: 인터뷰 고생 많으셨습니다.
Editor
INS & Melo
너무 멋있다
이 분 떠야됨
자신이 하고자 하는 스타일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물씬 느껴지네요
응원하겠습니다!!!
므싰따 진짜
와 진짜 어린데도 불구하고 엄청 진심이 느껴지고
뭘 해야 할 줄 아는 것 같아 놀랐습니다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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