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1910~1937)은 본명 김해경으로,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을 선도한 시인·소설가입니다. 그는 과학적 사고와 파격적 형식 실험으로 당시 문단에 강한 충격을 남겼고, 대표작 「오감도」는 그 실험 정신의 정점으로 평가됩니다.
이상의 「오감도」는 글자 그대로 ‘소리 없는 음악’입니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라는 첫 문장은 킥과 스네어가 번갈아 울리는 드럼머신처럼 다가오고, 곧이어 등장하는 괄호 속 대목은 한 박자 쉬었다가 터지는 브레이크처럼 긴장을 당깁니다. 시는 반복으로 박동을 마련한 뒤, 느닷없이 그 흐름을 끊거나 뒤집어 독자의 균형을 무너뜨립니다. 안정과 해체가 맞물리는 이 리듬은, 전자음악의 글리치나 실험적 힙합의 비트 스위치와 닮아 있습니다.
시점 또한 한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무섭다”고 외치는 화자와 “무섭지 않다”고 선언하는 설명자가 번갈아 말을 주고받으면서, 서로 다른 박자가 겹쳐지는 폴리리듬이 형성됩니다. 이야기나 사건이 따로 없는 대신, 언어 자체가 박자와 공간을 만들어 독자를 ‘체험’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이렇게 의미 이전에 리듬을 체험하게 하는 방식은, 글보다 소리에 가까운 예술적 충격을 남깁니다.
제게 이 시는 단순한 실험시가 아닙니다. 리듬이 막 자리를 잡을 즈음 갑자기 끊어지는 구간마다, 제 성장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집안의 기울기를 실감하기도 전에 아버지의 오랜 공백과 빈곤이 들이닥쳤고, 안정된 박자는 번번이 끊겼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매 순간을 ‘다음 박자’에 맞추기 위해 호흡을 조절해야 했습니다. 낙인을 버티는 동안 길어 올린 감정과 전략은, 지금도 제 작업을 움직이는 가장 깊은 동력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오감도」의 불연속적 리듬은 제 삶의 박동과 겹칩니다. 뛰다가 멈추고, 다시 속도를 올리다 돌연 방향을 잃는 그 흐름 속에서 저는 익숙한 현기증을 느낍니다. 이 시가 들려주는 불안정한 박동은, 어떤 의미에서는 제가 끝끝내 잃지 않은 생존의 박자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상이 노린 ‘오감도’—위에서 내려다본 비뚤어진 풍경—는, 여전히 현재형으로 뛰고 있는 저 자신의 궤적이 아닐까요.
결국 「오감도」는 읽는 순간마다 새로운 박자를 만들어 내며, 독자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불안정한 리듬 속에서 저는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박자가 끊겨도 곡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요. 제가 다음 구절, 다음 박자를 스스로 만들어가듯, 이 시 역시 아직 끝나지 않은 음악처럼 계속해서 울리고 있습니다.
이상은 진짜 천재인 듯
엘이에도 고수분들 많으셔서 넘 좋네요 ㅎㅎ
오감도는 진짜 개인마다 자신만의 해석을 가지고 있다고봐도 무방한 것 같음
완전 공감합니다 ㅎㅎ
이상은 천재가 맞는데 오감도는 너무 어렵습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와 함께 평생 엄두도 못낼 작품인것 같네요
맞습니다. 저도 어릴때 국어시간에 진짜 이런 천재가있었구나 했던 생각에 리뷰한것이긴하지만, 진지하게 제가 이상을 평가할 수준은 전혀안된다봐요..
외국에 제임스 조이스가 있다면 우리나라엔 이상 시인이 근데 사실상 둘은 각 나라의 언어로 신의영역을 다 이뤄냈기 때문에 크게 비교가 안되지만..여튼 대단한 사람
저는 아는만큼보인다는 주의라 선생님께서 대단하게 여기시는만큼 선생님께서도 그만큼의 독자수준이실것같네요 ㅎㅎ
한국 문학 역대 최고의 인물
전 완전 동의합니다 ㅎㅎ
오감도 1호에서 13명의 화자를 설명하는게 설명자인가요?
네, 1호에서 13명의 아해를 묘사하고 괄호 속 설명을 덧붙이는 목소리가 바로 화자입니다. 일부 평론에서는 그 화자를 ‘설명자’라 부르는데, 별도의 인물이 아니라 시적 화자의 또 다른 호칭으로 보시면 됩니다.
아 그렇군요. 또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이상 이전에는 우리나라에 이런 리드미컬한 시가 없었나요?
리드미컬한 시는 사실 구지가 (가야건국설화), 가시리, 하여가 등 역사가 오래됐습니다.
그러면 이전 시들과 오감도 1호를 운율적인 부분에서 비교했을 때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언어 자체를 재료로 한 형식 실험이라고 생각했어요. 운율적인 부분에서는 괄호삽입이나 문장단절로 리듬을 의도적으로 깨뜨렸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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