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에 대해 재고를 거치며 광활하게 논리를 펼친 철학자를 보고 우리는 항상 착하다고 하지 못한다.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그러한 성격을 신경질적이라고 매도하고 모순을 향해 스스로 발걸음을 내디디며 자기 철칙을 파괴할 수 있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인간답다는 말로 뭉뚱그려 그를 설명하려 애쓴다. 그러한 사람을 착하다고 추켜세우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대체 그렇게 인간답다는 인간군상의 제 모습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낭만, 신념 등의 이성과 감성을 오가는 여러 멋지고 화려한 말들로 우리는 우리의 성격을 표현하려고 애써왔다.
다들 어렸을 적, 조금 더 구체적으론 사춘기쯤 되었을 때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고뇌가 있는 것을 반복하는 시뮬레이션 끝에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고, 이에 대해서 멋진 글을 써보고 싶었던 열정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 논픽션 잡지 기사의 형식이든, 멋진 인류애를 담고 있는 소설이든, 비약적인 논지 전개 방식을 담고 있는 철학 논설문이든 말이다. 나는 우리의 그 '순수하다'고 표방하던 영혼이 살아간다는 그 '순수함을 더럽히는 현실'에 의해 더럽혀질 것을 이미 그 나이대에 알고 있었으면서도, 굳이 발버둥 치려는 시도 없이 내가 그렇게 물들기를 받아들였던 것 같다.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평범하게' 바뀌어갔다. 대체 그런 순수함과 평범함, 아름다운 이상향과 현실을 누가 어떻게 규정짓는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우리가 생각하는 '영혼'이라는 추상적인 명사가 비슷하게 납득되어 가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기도 하면서 '우리 인간이 그렇게 설계되었구나.'하는 결론에 나는 도달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에 타협하고 싶지 않고 나도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적어도 나는 가슴 한편에 저장했었다. 다들 그런 생각 있지 않은가? 실제로 그런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힘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사람들더러 중은, 그저 별생각 없이 정형화된 예체능 코스를 밟아 사람들에게 예술을 보여주는 또 다른 '현실을 살아가는 직업의 일종인 예술가'가 있고, 정말로 반항을 하고 싶어 했던 홍대병 예술가가 있다. 그리고 후자 중에서도 오직 노력과 천운의 적절한 황금비에 의해 성공하는 극소수만이 매체를 통해 천재라고 추켜세워지거나 과하다고 욕을 먹거나 한다.
극소수가 아닌, 열정을 불태우고 싶지만, 현실과 타협하기는 싫어하는 인간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살아갈까? 나는 이런 사람들의 인생을 감히 함부로 평가하고 싶지 않다. 그들이 살아가면서 남들이 정해둔 기준에 따라 평가받는 것을 원치 않을 수 있기에 그들을 성공했다거나 성공하지 않았다고 하고도 싶지 않다. 그저 그들이 만든 음악을, 골백번이고 듣고 또 들어 겨우 내가 생각한 결론에 대해 감히 한 페이지 적어 보는 것뿐이다.
천재들은 장례식조차도 작품으로 남긴다. 나는 Injury Reserve의 두 번째 정규 앨범 [By the Time I Get to Phoenix]를 들으며 그런 생각을 한다. 절대적으로 나에게 있어서 이 작품은 내 인생에 가장 많이 영향을 끼친 힙합 앨범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이 작품은 단순히 음악으로서 감상 되는 것을 넘어, 인간이 가진 내적 모순과 그로 인한 갈등, 그리고 그 갈등을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시도를 극적으로 담아낸다.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기존의 힙합 앨범과 다르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느꼈다. 힙합 특유의 리듬과 멜로디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들은 더 이상 중심에 있지 않았다. 대신 불협화음, 실험적인 사운드, 그리고 혼란스럽게 엉켜 있는 감정들이 앞에 서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음악적 선언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혼란을 직면하고 그 혼란 속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몸부림처럼 느껴졌다. 이는 예술이 무엇인지, 그리고 예술가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나의 오래된 질문을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Injury Reserve는 이 앨범을 통해 인간의 복잡성과 모순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자 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묻고 있다. Stepa J. Groggs의 부재라는 비극적 현실은 그 질문을 더욱 날카롭고 절박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 앨범을 듣는 경험을 통해,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그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 삶의 태도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음악을 통해 자신들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깨달음을 표현했다. 그것은 단순히 '잘 만들어진 음악'이 아니라, 그들의 삶과 예술이 혼합된 하나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작품은 특정한 메시지나 결론을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듣는 이가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할 여지를 잘 남겨두었다. 그들이 겪고 있고 처해 있는 어려운 상황에 대해서, 마치 대중들이 여태껏 겪어보지도 못한 사운드들의 집합으로, 트립 합, 포스트록, 노이즈, 온갖 마이너한 장르들을 섞어다가 AI가 구현하라고 해도 할 수 없을 경지의 음악을 선보였다.
이 앨범은 단순히 뛰어난 음악적 성취를 넘어, 오늘날 힙합이 처한 세태와 한계에 대한 철학적 질문, 오늘날 힙합이 처해 있는 미학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자 제안으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전통과 혁신, 정서와 논리를 하나의 통합된 예술적 언어로 엮어낸 이 작품은 Injury Reserve의 음악적 성숙도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길잡이로 기능한다. 내가 2023년 8월에 힙합 엘이에 적어놨던 뻘글을 옮긴다면 그들은 힙합계의 조이 디비전이 되어 뉴 오더를 만들 것이고, 힙합계의 스완스가 되어 두고두고 재평가 받을 것이며, 힙합계의 슬린트가 되어 포스트힙합의 창시자로 불리울 것 같다.
앨범의 제목이자 주제의 중심은 Glen Campbell의 곡 'By the Time I Get to Phoenix'에서 영감을 받은 것 같다. 이는 앨범 전체에 걸쳐 느껴지는 확장적이고 초월적인 정서를 암시한다. 하지만 원곡의 감상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Injury Reserve의 해석은 파격적이고 다층적이며,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복잡한 감정들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그들이 애리조나 주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피닉스에 도착할 즈음이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겠지.'하는 원곡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멤버의 죽음에 대한 작별 인사로 활용함을 암시한 그들의 행위를 담고 있는 이 제목 자체가 그들의 심정을 잘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혼란스러운 샘플링 기법을 잘 드러내는 제목이다.
결국, [By the Time I Get to Phoenix]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그로 인한 갈등을 담아낸 진정한 예술적 시도로 보인다. 그리고 나는 이 앨범을 듣는 경험이야말로, 우리가 모두 언젠가 꿈꿨던 '순수함과 현실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예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마이너할지언정, 이 걸작은 두고두고 내게 있어서 멋진 경험으로 남을 것 같다.
4/5 - Greatest Album of 2021
쓰고 나니까 너무 느끼하네요.
아래는 제가 중학교 미술 수행평가로 이 앨범 너무 좋아해서 한지 스테인드글라스 수행으로 만든 오마주입니다. (저거로 쌤한테 극찬받고 100점 받음 ㅎㅎ)
외게에 올려주시지 ㅜㅜ
잘 읽었습니다
스테인글래스 미쳤네요
리뷰에 개인적인 감상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게 정말 좋네요 잘 읽었습니다!!
혼란스러워서 아름다운, 너무나 좋아하는 앨범. 그나저나 금손이시네유
정말 멋진 경험
와 필력 미친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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