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ards of Canada - Music Has the Right to Children
Released on 1998. 04. 20.
Genre : Downtempo, IDM, Ambient Techno, Ambient
이 글을 뭐라 시작해야 하나. 일단 나는 한국 어딘가에 거주하는 중학생이다, 그리고 뭐 aka 수저다. BOC가 내 삶에 차지하는 비중은 꽤나 높다. 지금 이 문장을 쓰는 순간에도 An Eagle In Your Mind가 내 에어팟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난 이 앨범을 듣는 내내 마땅히 설명할 방도 없는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그것은 내 개인적인 노스텔지어도 있겠고, 앰비언트 트랙이 주는 공허하면서도 확실히 귀를 채우는 그런 오묘함이 있겠다. 난 요즘도 이 앨범을 이틀에 한번씩은 듣는것 같고, 내 주듣앨 탑스터는 MHTRTC으로 꽉차있다.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작년 4월, 나는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당시 나는 등교하기 싫었었다. 뭐 그건 모두가 그렇겠지만, 나의 감각은 달랐다. 흔히들 말하는 괴롭힘을 당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고 우울증이 있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초딩한테 우울증이라니 개껌 씹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헛소리 그만하고 본론을 얘기하겠다. 내 입으로 직접 말하기에는 상당히 부끄러운 사항이지만, 그때 나한테는 무언가 성장과 자아 발달이 있었다. 흔히들 말하는 사춘기다. 그리고 나는 학교나 학원이라는 공간이 나를 재단하려고 한다는 뭐 그런 중2병적인 생각에 잠겨있었다. 하루에 수십번씩 나는 어떤 존재일까를 생각하며 살았고, 나의 미래 모습은 어떨까를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던중 난 감기에 걸렸다. 보통은 감기라 하면 병원에 갔다온 뒤에 의사 진찰서를 제출하며 학교에 등교하는 인정 지각으로 끝내겠지만, 앞서 말했듯 난 학교에 가기 싫었다. 그래서 그냥 결석을 하기로 했다.
아침 8시 48분, 정확한 시간은 아니겠지만 얼추 그쯤 됐을 것이다. 당시 나는 나무위키로 음악을 디깅했었다. 그리고 당시의 나는 /mu/core라는 흥미로운 리스트를 발견해 미친듯이 막 파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커버가 예뻐 꽂혔던 앨범, Music Has the Right to Children이었다. 병원 이비인후과 의자에 앉아 의사가 내 이름을 부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유의 병원 냄새 알지 않는가? 특유의 지적임이 느껴지는 냄새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의자, 그리고 나의 이름 중 가운데 자가 *표 처리 되어 다른 사람들의 이름들과 함께 써져있는 큰 TV 화면. 그러한 시공간 속에서 내 에어팟 속에선 Telephasic Workshop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실 그 날은 일이 좀 많았다. 설명하긴 길어서 핵심만 간추려서 말하겠다. 할아버지가 입원하시고 있었다. 슬픈 이야기는 아니고, 할아버지가 시골에서 감 따시다가 발목 한쪽을 접지르셨다. 현재는 완치 상태시니 걱정하진 말고. 아무튼 병원 침대에 누워 계신 할아버지와 나에게 의자를 양보하고 서계신 엄마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나는 엄마가 양보해주신 의자에 쪼그려 앉아 Telephasic Workshop의 규칙적인 드럼 시퀀싱과 신비로운 앰비언트 트랙에 기대 고개를 흔들며 리듬을 타고 있었다. 왼쪽으로 한번, 또 오른쪽으로 한번씩 말이다. 이후에는 병원에서 엄마나 할아버지보다 두시간 정도 빨리 나와 근처 할아버지 집으로 걸어갔다. 난 사실 할아버지 집으로 바로 가지 않았다. 그저 동네 놀이터 그네를 타거나, 결석했던 학교를 바라보는 등 새로 이사 온 사람 마냥 동네를 이리저리 거닐면서 전앨범을 감상한 뒤에야 할아버지 집에 도착했다. 사실 그랬던 이유는 BOC의 음악이 신비롭고 동시에 나른해, 맨날 보는 동네인데도 무엇인가 새로운 감각이 느껴졌다.
놀랍게도 이 앨범을 접한 뒤 글에서 말했던 내 머릿 속 복잡한 생각들이나, 말하진 않았지만 외부적인 문제들이 차츰 나아져갔다. 그동안 나를 감싸고 있던 복합적인 짜증이나 쓸데없는 감정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갔고, 그냥 행복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런진 모르겠다. 갑작스레 염세주의에서 낙관주의적으로 내 가치관이 변화된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주역에도 이 앨범이 있었다. 본작에서 느껴지던 서정적이지만 왠지 모른 기분 좋음과 평온함이 나를 씻겨내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들은 현재진행형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인격적 성장과 자아 발달이 일어났던 것인가. 지금의 난 그냥 상당히 빠르게 사춘기가 왔다 지나간 것이라 생각한다. 이게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게 하나 있다. 이제 좀 세상이 달라 보인다는 것이다.
이제 장면들로 넘어가겠다. BOC와 함께했던 순간들 중 기억에 남는 것을 그냥 나열해보겠다.
장면 1이었다. 1년 전 작년 10월 밤, 나는 갑작스런 심심함을 느꼈고 나홀로 밤산책을 나가게 된다. 사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꽤 시골이다. 그런 시골 거리를 걷고 있었다. 꽤나 우거진 나무 숲, 차갑지만 상쾌한 공기, 도시가 아니라 불빛은 없어 어두웠다. 그런 길을 걸으면서 내 귀에 꽂혀있던 에어팟에는 Open the Light와 One Very Important Thought이 재생되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 봤다. 빛나는 별들이 내 온몸으로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별은 개뿔 인공위성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튼 난 그날 밤을 아마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왜냐? Open the Light와 One Very Important Thought을 들을때마다 그날 밤에 서린 공기가 너무 선명하게도 느껴지니까.
장면 2다. 이번엔 별거 없다. 올해 3월, 난 버스 정류장에서 학원이 끝나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시에 내 에어팟에는 Olson이 재생되고 있었다. 나는 도시를 매우 싫어한다. 물론 Illinois같은 앨범을 들을때면 "와 도시에 가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지만, 도시 생각이 날때는 오직 그럴때뿐이다. 빵빵거리는 도로의 소음과 동시에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도시의 불빛, 안개가 짙어 안경을 쓰진 않았지만 김이 서려 보이는 내 시야, 학업에 지쳐버린 내 육신. 도시가 있는 힘껏 내가 싫다고 밀어내는 느낌이었고, 그때의 나는 어지러웠다. 그리고 그때 들었던 Olson의 따뜻한 음향과 서정적임을 잊지 못한다.
장면 3이다. 올해 1월이었다. 나는 놀이터에 빨리 도착해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혼자 들었던 Triangles & Rhombuses. 그 놀이터에는 별 특이한게 없었다. 하지만 그 점 자체가 지금 나한테는 강렬한 향수로 다가온다. 그 날 이후로 그 친구들과는 중학교가 갈라져 몇번 밖에 못 만났고 그것도 서로 학업에 시달리느라 짧게밖에 못 만났다. 나중에 시간과 공간이 허락해준다면 다시 그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놀아보고 싶다. 현재 내가 바라는 것 중 하나이고, 난 오늘도 Triangles & Rhombuses를 들으며 그때의 감각을 보관 중이다. 진짜 보고 싶다 얘들아.
TMI지만 나는 막내다. 우리 가족 안에서의 막내가 아니라 사촌 형누나들 다 합쳐서 내가 막내다. 그리고 나의 막내 채재는 내가 태어나고 13년동안 쭉 유지되었다. 그러나 최근 삼촌이 결혼하고 아기를 하나 낳았다. 내 아기도 아니었지만 뭔가 마음이 뭉클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들었던 곡이 하나 있다. The Color of the Fire. "I Love You! 난 너를 사랑해"라고 웅얼거리는 아기의 목소리. 그냥 듣는 순간 울컥했다. 방금 말한 그 아기가 생각나서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해서 떠올리지 못했지만 그 아기를 보고 연상됐던 그 기억, 내가 아기였을 적 기억이 이 곡을 들으면서 자꾸만 떠올랐다.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추억인데도.
이 앨범을 들으면 자꾸 없는 추억이 떠오른다. 방금 말했던 장면들이 전부 내 상상이라는 꿈 엔딩은 아니고, 방금 말한 아기 에피소드처럼 없던 추억이 떠오를 때가 많다. 예를 들어 내겐 Pete Standing Alone을 들으며 떠오르는 추억이 하나 있다. 바로 어린 시절, 시골 본가에서 나홀로 아무 생각 없이 멍때리고 있었던 추억이다. 하지만 난 그런 적이 없었다. 애초에 어린 시절에 시골 본가에 혼자 있다니 배경부터 말이 안된다. 그렇지만 내 머릿 속에는 그 기억이 뚜렷하고 선명하게 연상된다. 이 점이 MHTRTC이 대단한 이유라고 본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추억, 혹은 있지도 않은 추억들이 내 머릿 속에서 이미지화 된다. 이 점은 이 앨범이 얼마나 대단한 노스텔지어와 공간감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증거가 되겠다.
이 앨범은 나의 상상 속 친구이기도 하다. 내가 드디어 음악만 듣다 미쳐버린 것은 아니고, 이 앨범이 나의 공상 속 빈자리를 확실하게 채워줬던 것 같다. Roygbiv를 들으면서 무지개를 온몸으로 받는 상상을 하고, Turquiose Hexagon Sun을 들으며 일요일 낮 나른하게 햇빛을 느낀다. 나의 인격체는 여전히 완전 성장 상태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 빈 공간과 완벽하지 않은 공허를 이 앨범이 깔끔하게 대체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생각이 든다. 이 앨범을 들을때면 추억이 그저 지난 과거의 일들이 아닌 현실 속에 실재하는 것만 같다. 잠시 현실 속 세상을 떠나 음악 속의 낭만과 향수가 가득한 어느 세상으로 접속한다는 것이다. 이 앨범이 있는 한 나의 추억은 그저 잊혀지는 게 아닌 실재한다는 것. 그것도 내 눈 앞에 선명하게. 내가 MHTRTC에게 감사한 이유중 하나다.
감성적인 앨범이니 감성적인 리뷰를 써봤다. 마침 103.5 FM이라는 이벤트가 겹치기도 했고. 물론 나의 사적인 이야기가 많인 담긴 글이니 올리기가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렇다면 뭐 어쩐가. 여러분들도 이 앨범을 들으며 나와 같은 감상, 같진 않더라도 나와 맥락이 비슷한 종류의 감상을 느꼈으면 한다는 생각으로 일부러 장면 묘사 같은 것을 생생하게 해봤다. 내가 이 앨범에 대한 감상을 하나로 압축한 것이 아닌 하나의 틀을 제공했다고 믿고 싶다. 여러분들도 여러분들만의 감상과 추억으로 이 앨범을 채워봐라. 사실 이 앨범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앨범이란 것은 추억이나 개인적인 경험, 감상들이 섞이면 그건 그저 하나의 앨범이 아닌 당신의 추억을 인화해줄 필름이 될것이니까.
Music Has the Right to Children, 음악은 아이들에게 권리가 있다. 이 앨범의 낭만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를 이것보다도 더 잘 대변해주는 제목이 있을까? 아마 이 앨범은 앞으로의 내 음악관, 그리고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앨범을 접한지 1년여 정도 지난 지금의 나에도 이미 영향을 많이 끼쳤지 않았는가. 이 앨범을 처음 들었던 때가 벌써 1년 6개월이라니 시간 참 빠르다. 지금까지 많은 일들이 있어 왔고, 이 앨범은 항상 내 상상 속 친구가 되주며 내 공상의 빈자리를 채워와줬다. 이 앨범이 없었다면 지금의 난 어떤 모습이었을까?
Music Has the Right to Children은 나에게 권리가 있다. 그것도 아주 크게 말이다.
https://youtu.be/1-FI6D8ZXpc?si=vue5vGEGtms7XOl9
후일담
이 글은 사실 인생리뷰로 작성된 글인데, 인생리뷰가 끝나 손놓고 있다가 103.5 FM이라는 흥미로운 이벤트를 하길래 새롭게 재단장해서 올렸습니다.
님 나이 들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람 ㅋㅋ 암튼 추천.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존재하지 않았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앨범이 있다면 그건 정말 잘 만든 앨범이라고 생각이 드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예측 성공 글 잘 읽었습니다 첫 인상은 무서웠는데 의외로 따뜻해서 놀랐었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커버가 좀 무섭게 느껴지기도 하죠 ㅋㅋ
음악과 엮인 추억은 정말 아련하고 소중한것 같아요
사진처럼 이미지로 남아있는게 아니고 오직 음악에서만 나오는 거잖아요.. 개추 꾹
뭔가 저는 이상하게 그때 찍어놨던 사진보다도 오히려 그때 들었던 음악이나 그때 했던 대화들이 추억을 떠올리는데 좋더라구요
무슨 느낌인지 정확하게 알거 같아요 ㅋㅋㅋㅋ
저도 나중에 추억이겠지 하고 사진 많이 찍어놨는데 사실 많이 찾는건 음악이더라고요
난 중딩 때 메탈리카 들었는데… 이 나이 때 벌써 앰비언트를 즐겨듣다니
뭐 대신 본인은 메알못이니 등가교환 아닐까요
세상에 중1이세요??
말도 안돼..
흐흐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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