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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럼리스 - 덜어낼수록 선명해지는 것들

title: [회원구입불가]Editor_jester2026.09.13 22:06추천수 7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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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은 드럼 브레이크 위에서 태어난 장르다. 브레이크비트를 반복하고 그 위에 목소리를 얹는 것, 그게 힙합의 기본 문법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문법을 정면으로 뒤집는 흐름이 언더그라운드에서 나타났다. 킥과 스네어를 최소화하고 샘플 루프와 랩으로 곡을 이끌어나가는 방식, 바로 드럼리스(Drumless)다.

 

드럼이 없는데도 힙합에 누구보다 진심인 언더그라운드 리스너들의 심금을 울리는 이 장르는 대체 어디서 본격적으로 태동했고, 어떻게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 왔을까? 이번 글에서는 드럼리스를 이끌어온 주요 인물들을 소개하며, 이 장르가 걸어온 흐름을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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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을 내세운 사람 — 록 마르시아노 (Roc Marciano)

드럼리스 형식의 음악은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이러한 형식을 전면에 내세우며 대표한 인물은 록 마르시아노다. 롱아일랜드 헴프스테드 출신인 그는 90년대 말 버스타 라임스(Busta Rhymes)의 플립모드 스쿼드(Flipmode Squad)에 몸담았다가 그룹을 나와 더 유엔(The UN)을 결성했다. 당시 힙합 씬은 공격적인 킥과 스네어, 화려한 훅의 사운드가 대세였고, 록 마르시아노 역시 그 문법 안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점차 이 구성에서 벗어나 소리를 덜어내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이 2010년 발표한 데뷔 솔로 앨범 [Marcberg]다. 그는 당시 씬을 지배하던 무거운 드럼을 걷어내고, 소울과 재즈에서 가져온 미니멀한 루프 위에 랩을 선보였다. 킥과 스네어를 배치하는 대신 샘플이 원래 가진 잡음과 질감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자신의 음악을 만들어냈다.

 

록 마르시아노의 플로우는 서두르지 않는다. 마피아, 핌프 서사를 정교하게 풀어내는 가사로 몰입감을 제공하면서도, 랩 마디 끝을 흐리게 넘기거나 짧게 끊어 다음 마디를 예측 불가능하게 만든다. 드럼이 없으니 랩의 강세와 쉼표가 그루브를 대신하는 셈인데, 드럼의 부재로 줄어든 리듬감을 변칙적인 랩으로 탁월하게 보완해낸다. 박자를 붙잡아줄 킥 하나 없는데도 듣다 보면 오히려 더 리드미컬하게 느껴지는, 묘한 감각을 리스너에게 전달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nBMt6nPOArc&list=OLAK5uy_ktlR0-TwzQagquzEO1U_6i1H0BZNx3twM&index=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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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층 더 진화 — 카(Ka)

이 생소했던 형식을 한 단계 끌어올린 건 브루클린 브라운스빌 출신의 래퍼 카였다. 카는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랩에만 몰두했던 인물은 아니다. 뉴욕시 소방국에서 20년 넘게 근무하며 2001년 9/11 테러 현장에 투입됐던 경험까지 있는 베테랑 소방수였다. 동시에 어떠한 레이블과도 계약하지 않은 채 자신의 웹사이트에 직접 만든 음반을 올려 판매한 인디펜던트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카의 '드럼리스'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음반은 2012년작 [Grief Pedigree]다. 이 앨범에서 그는 안개처럼 흐릿한 샘플과 낮게 깔리는 베이스라인만 남기고 드럼을 거의 다 제거해버렸다. 랩도 속삭이듯 낮은 톤으로 뱉어 언뜻 밋밋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이 정적인 전달 방식이 오히려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카는 본작 이후로도 수많은 앨범을 발매하며 드럼리스 힙합 씬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입지를 공고히 다졌다.

 

https://www.youtube.com/watch?v=TMcUKX9kf9A&list=OLAK5uy_lcg2gOcCczJX9S0bV3__vIxckgcZmgjTk&index=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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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에 싸인 래퍼 — 마크-호미(Mach-Hommy)

뉴저지 뉴어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마크-호미는 아이티 포르토프랭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자신의 본명도, 얼굴도 철저히 숨긴 채 활동한다. 공식 석상에서도 늘 마스크를 쓰는데, 크레올어와 영어를 오가는 가사에는 아이티에 대한 자긍심이 짙게 배어 있다. 그의 프로덕션은 가사만큼이나 밀도가 높은데, 하나의 샘플을 여러 겹으로 겹쳐 쌓되 정작 리듬을 짚어줄 드럼은 걷어내 리스너가 오직 랩에만 집중하게 만든다.

 

이런 그의 스타일이 가장 완성된 형태로 드러난 작품이 2021년작 [Pray for Haiti]다. 웨스트사이드 건(Westside Gunn)이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한 이 앨범은 아이티 교육 기반 시설 지원을 위해 수익 일부를 기부하는 프로젝트로 기획되기도 했다. 수록곡 "Kriminel"은 아이티 조상의 영혼을 소환하는 듯한 크레올어 가사와 먼지 낀 듯 거친 샘플 루프만으로 구성돼, 리듬을 짚어주는 드럼 하나 없이도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비트가 리듬을 강요하지 않으니 오히려 가사 한 줄 한 줄의 무게가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경험을 리스너에게 선사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KQA7fk74q9M&list=RDKQA7fk74q9M&start_radi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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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팔로의 랩스타 — 그리즐다(Griselda)

그리즐다는 레이블이면서 가족이기도 하다. 웨스트사이드 건과 콘웨이 더 머신(Conway the Machine)은 이복형제고, 베니 더 부처(Benny the Butcher)는 둘의 사촌이다. 그리즐다 레코즈는 2012년 웨스트사이드 건, 콘웨이 더 머신, 베니 더 부처 그리고 앞서 소개한 마크-호미가 설립한 레이블이다.

 

레이블의 존재감을 본격적으로 알린 건 웨스트사이드 건의 2016년 데뷔 앨범 [FLYGOD]였다. 그는 이 앨범 수록곡 "Hall"에 록 마르시아노가 만든 비트를 그대로 가져다 썼는데, 영향을 감출 생각 자체가 없었던 셈이다. 이보다 앞선 2015년 콘웨이가 내놓은 믹스테이프 [Reject 2], 그리고 2018년 베니가 발표한 데뷔 앨범 [Tana Talk 3]에서도 이런 색채는 이어졌다. 특히 [Tana Talk 3]는 베니가 나고 자란 버팔로의 몬태나 애비뉴를 줄여 부른 제목으로, 세상을 떠난 친형 머신 건 블랙에게 바치는 앨범이기도 하다. 이들 작업에 공통적으로 참여한 프로듀서 대린저(Daringer)는 저음역대 노이즈를 의도적으로 남겨두는 음침한 사운드스케이프로, 록 마르시아노의 차가운 분위기를 버팔로 지역의 거친 질감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며 차별성을 드러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nm4H8IyhY&list=RD-ynm4H8IyhY&start_radi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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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계승

2024년 10월 12일 카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52세. 불과 두 달 전인 그해 8월, 마지막 앨범 [The Thief Next to Jesus]를 내놓은 직후였다. 부고가 전해지자 소셜 미디어에는 그의 곡이 드럼리스 장르의 팬이 된 계기였다는 추모 글들이 잇따랐다.

 

하지만 카가 떠난 자리를 남은 래퍼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채워가며 드럼리스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록 마르시아노는 알케미스트(The Alchemist)와의 협업 시리즈로 [The Elephant Man's Bones], [The Skeleton Key]를 내놓았고, 이후 디제이 프리미어(DJ Premier)와의 EP [The Coldest Profession]까지 발표하며 협업의 폭을 계속 넓히는 중이다. 디트로이트 쪽에서는 볼디 제임스(Boldy James)가 알케미스트와 함께 만든 [The Price of Tea in China]로 장르 내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증명해 보였다. 장르를 상징하던 인물은 세상을 떠났지만, 이렇게 이어지는 협업들이 드럼리스 씬을 지탱하는 새로운 기반이 되고 있는 셈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0s76k0nRdxw&list=RD0s76k0nRdxw&start_radi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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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드럼을 빼는가

트랩과 레이지가 지배하는 현재 힙합 씬에서, 드럼리스는 자극을 내세우지 않고도 조용히 귀를 사로잡는 장르로서 존재감을 키워가고 있다. 808 베이스와 빠른 하이햇이 전면에 나서는 시대에 드럼을 오히려 지워버리는 이 형식은, 몸을 흔들라고 요구하는 대신 가사와 플로우의 미세한 결에 집중하기를 요구한다. 그렇게 트랩과 레이지의 자극에 지친 리스너들에게 드럼리스는 훌륭한 대안으로 사랑받고 있다.

 

다만 드럼리스는 태생부터 마이너한 장르인 만큼, 판매량 자체가 크지는 않다. 그럼에도 웨스트사이드 건은 2023년 트래비스 스캇(Travis Scott)의 [Utopia] 수록곡 "LOST FOREVER"에 참여하며 빌보드 200 차트 1위 앨범에 이름을 올렸고, 이는 드럼리스를 대표하는 인물이 메인스트림에 진출한 성공적인 사례로 남았다. 이처럼 드럼리스를 구사하는 래퍼들은 여전히 언더그라운드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대형 협업을 통해 장르의 존재감을 바깥으로 알리고 있다.

 

동시에 이들은 자신의 앨범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여기며, 스트리밍 한 번으로 소비되고 잊혀지지 않도록 한정반 앨범을 판매하는 방식을 택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웨스트사이드 건이 몸담은 레이블 도프!(Daupe!)의 한정반들은 리셀 시장에서 수백에서 수천 달러에 거래될 만큼 수집 가치를 인정받는다. 스트리밍 중심으로 재편된 현세대 음악 시장에 정면으로 맞서는 행위이지만, 충성도 높은 팬층 덕분에 장르는 특유의 음악성을 꾸준히 이어나가고 있다. 혹시 드럼리스 장르의 음악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 글을 계기로 입문해 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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