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음악은 많아졌고, 기억에 남는 음악은 적어졌다. 그러나 가장 억울한 건 지나간 줄도 몰랐고, 기억에 남을 기회조차 없던 숨은 보석을 뒤늦게 발견했을 때다. 그런 슬픈 순간을 막기 위해 힙합엘이 매거진 에디터들이 열 장의 앨범을 준비했다. 행여나 잊으셨을까 싶어, 한 번씩은 꼭 들어봤으면 하는 마음에 추천하는 2021년 8월의 보석 같은 앨범들이다.
요즘 힙합은 비슷한 소리 위에서 여자, 돈, 마약, 폭력 얘기만 주야장천 해대 뻔하다는 오명을 품고 있다. 트랩 장르 안에서 이런 말을 100% 반박할 수만은 없는 게 사실이지만, 영 누디(Young Nudy)는 그 ‘여자, 돈, 마약, 폭력 힙합’에 속하면서도 꾸준히 자신만의 청사진을 제시하며 든든한 반례가 되어 주는 뮤지션이다. 5월 발표한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 [Dr. EV4L] 이후 고작 3개월 만에 공개한 [Rich Shooter] 역시 전작을 답습하기는커녕, 트랩 음악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수작. 독창성을 내세우는 두 트랩 프로듀서 피에르 본(Pi’erre Bourne)과 쿱(COUPE)이 함께 핸들을 잡은 가운데, 어떤 사운드 소스도 두려워한 적 없던 영 누디는 매 트랙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플로우를 섞어내는 데 성공한다. 호러코어 콘셉트를 끝까지 유지했던 전작과 달리, 총잡이의 선글라스 뒤에 숨은 불안한 눈빛과 죄책감을 이야기하는 후반부 트랙들은 영 누디의 입체적인 캐릭터를 완성한다. 트랩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은 있어도, 트랩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 중 [Rich Shooter]를 싫어할 사람은 없다.
본래 티나셰(Tinashe)는 믹스테입과 뮤직비디오를 공개하며 일련의 트렌드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메이저 레이블에서 애매한 작업물을 발표하며 커리어의 부닥침을 겪었고, 끝내 레이블과 결렬하며 다시 인디펜던트 뮤지션으로서 새출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침내 올해 발표된 [333]은 [Songs For You]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본인의 매력과 음악적 실험성, 그리고 대중성까지 모두 잡아낸 탁월한 결과물이다. 티나셰는 IDM의 요소를 끌어온 트랙과 팝 넘버, 그리고 댄서블한 트랙들을 적절히 배치하며 자신의 다양한 매력을 앨범 전반에서 드러낸다. 또한, 신시사이저를 비롯한 강렬한 사운드 소스와 팝 음악의 구성을 탈피한 전개 등을 통해 청자에게 쉬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여기에 가족을 대동한 참여진, 자신의 사랑관을 드러내는 가사 등을 통해 하나의 완숙한 아티스트, 그리고 인간으로서 성숙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팬데믹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음악가들 역시 시대상을 녹여 낸 작품을 내고 있다. 정글(Jungle)의 [Loving In Stereo] 역시 그렇다. 앨범은 팬데믹 시대 이전에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지만, 역경과 고난을 헤쳐 나가고 사랑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는 만큼 시대와 걸맞은 작품이라 할 만하다. 사실 정글의 이번 앨범은 알면 알수록 재미거리가 가득한 작품이기도 하다. 정글은 앨범에서 다양한 음악가들과 협업하며 과거와 현대에 이르는 댄스 음악을 여러 사운드 소스와 라이브 연주를 한데 뒤섞어 내어 구현한다. 또한, 이전 작품들과 달리 바스(Bas)와 프리야 라구(Priya Ragu)와 같은 참여진을 앨범에 끌어와 더욱더 풍부하고 생동감 있는 사운드를 들려준다. 이 밖에도 여러 안무가와 함께 한 뮤직비디오는 청자에게 앨범의 메시지를 직관적으로 전달해 주는 만큼, 뮤직비디오를 반드시 감상해 보길 바란다.
하이퍼팝(Hyperpop)이라 불리는 마이크로 장르는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았다. 때문에 트리피 레드(Trippie Redd)와 같은 힙합 씬의 기성 뮤지션도 신보 [Trip at Knight]와 함께 자신을 래퍼인 동시에 하이퍼팝 뮤지션으로 규정하는 중. 개인적으로 [Trip at Knight]는 요즘 트랩 트렌드의 정점에 있는 듣기 좋은 트랩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베어1보스(Bear1boss)의 최근작 [America’s Sweetheart]와 같은 작품을 듣고 나면 트리피 레드고 베어1보스고 싸그리 다 하이퍼팝에 편입될 수도 있겠다는 낙관적인 태도로 변하기도 한다. 가사적인 내용 등의 문학성을 아예 놓은 채, 본작은 달려가는 프로덕션과 거침없는 음성 변조 등으로 오직 청각적인 만족감만을 겨냥한다. 물론 음악 활동의 이유를 ‘재미’ 말고는 아예 두지 않는 그의 21트랙짜리, 올해 일곱 번째(!) 프로젝트인 본작을 꼭 정주행해봐야 할 명품이라 칭할 수는 없다. 반대로, 부담감을 덜고 한 번 돌려본 뒤 마음에 드는 곡만을 저장하는 것을 추천한다. 다른 일이라도 잡으며 21곡의 방대한 분량을 흘려듣다 보면 분명 귀가 쫑긋하고, 고개가 흔들리는 구간이 있을 것이다.
1990년대의 힙합 소울, 네오 소울 음악은 2020년대의 알앤비 음악가에게 재해석되어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대표적인 아티스트로는 안리(Anri)의 노래를 샘플링한 제네비브(Jenevieve), 그리고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아마리아(Amaria)가 있다. 데뷔 EP [Bittersweet]은 그런 힙합 소울 음악의 멋과 아마리아의 매력을 잘 집약한 작품이다. 아마리아와 프로듀서는 일정 구간이 반복되는 힙합 비트를 도입했다. 이들의 프로덕션에 별다른 특이점이 있는 건 아니지만, 대신 안정적인 음역대에 신경을 쓴 터라 물 흐르듯 흘러가는 매력이 더욱 강조된다. 아마리아는 삼삼한 맛의 보컬과 특정 구절을 반복하는 가사를 통해 프로덕션의 무드를 한층 극대화한다. 그 덕에 아마리아의 EP는 자극적인 요즘 음악들과 다른 멋을 지니고 있으며, 반복하면 들을수록 더욱 진한 풍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영국의 인플로(Inflo)는 미국의 디마일(D’Mile)에 버금가는 프로듀서다. 두 뮤지션은 알앤비/소울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도를 바탕으로 각각 리틀 심즈(Little Simz)와 실크 소닉과(Silk Sonic)과 협업하며 오케스트라 쪽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인플로는 솔트(SAULT) 프로젝트 외에도 다른 음악가들과 협업하며 멋진 작품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이 중에서도 클레오 솔(Cleo Sol)의 이름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올해 어머니가 되는 경사를 겪었고, 자연스레 인생의 관점에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그리하여 클레오 솔은 이번 앨범에서 어머니가 되면서 겪게 된 여러 변화와 아이에 대한 사랑,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을 고루 담아낸다. 특히 앨범의 프로듀서 인플로는 로즈(Rhodes) 피아노를 비롯한 여러 악기와 합창단 등 여러 참여진을 앨범에 끌어와 곡 구성의 변화를 주기도 한다. 성숙과 자기표현이란 키워드를 제대로 음악으로 풀어낸 올해의 알앤비/소울 앨범.
지금 순간에도 수많은 비트메이커가 제이 딜라(J Dilla)의 영향을 받은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을 거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제이 딜라 역시 하나의 음악 스타일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음악을 끌어들여 끝없이 자신의 음악 세계를 확장해 왔다는 점이다. 이로 미뤄봤을 때 퀴클리 퀴클리(quickly, quickly)는 소위 말하는 딜라 키즈(?) 중에서도 정말 딜라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인물이라 할 만하다. 퀴클리 퀴클리의 이번 앨범이 좋은 예시다. 그는 전작에서 짙게 드러나던 제이 딜라 류의 로우파이(lo-fi) 힙합 비트를 벗어나 사이키델릭과 재즈, 인디 록 등 다양한 장르 음악의 요소를 도입했다. 여기다 퀴클리 퀴클리는 현악기와 관악기, 건반악기 등 다채로운 악기 소스들을 아우른 프로덕션에 나른한 맛이 있는 유연한 보컬을 얹어낸다. 프로듀서만의 개성과 팝 음악으로서의 유연함까지 모두 갖춘 작품이 흔치 않은 만큼, 정말 강력히 추천해보는 앨범이다.
캐나다 출신의 뮤지션 중에는 사실상 미국 국적의 뮤지션처럼 인식되며 씬을 빛내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미국 힙합 씬은 지역마다 발달되고 서로의 특색, 연대감을 지닌 만큼 이런 ‘캐내디언 인베이전’ 현상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확실했던 드레이크(Drake) 정도를 제외하고는 두드러지는 뮤지션이 없었지만, 추후 이어질 보슬렌(Boslen)의 활약을 주목해보는 건 어떨까. 보슬렌의 2년 만의 신보 [DUSK to DAWN]은 콘셉트와 심미적 감각, 음악적 퀄리티에서까지 여타 미국 힙합 뮤지션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프로젝트다. 보슬렌은 신예 아티스트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흠잡기 어려운 퍼포먼스를 선사하며, 목소리의 운용 방식은 키드 커디(Kid Cudi)를, 어두운 멜로디 라인과 오토튠 운용 방식은 트래비스 스캇(Travis Scott)의 향기를 품고 있다. 이 두 뮤지션의 그늘을 벗어나려면 더욱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펼쳐나갈 필요가 있지만, 당장 완성도만으로는 수십만 팔로워를 보유한 미국 래퍼들과 견줘도 크게 꿀리지 않는다.
2017년부터 아는 사람은 아는 맹활약을 펼쳐온 랩 그룹, 쇼어라인 마피아(Shoreline Mafia)를 아는가? 꾸준히 그들의 발자취를 따른 이가 아니라면 몰랐을 수도 있지만, 그들이 지난 2020년 7월 발표한 첫 스튜디오 앨범 [Mafia Bidness]는 네 멤버가 함께한 마지막 프로젝트가 되었다. 쇼어라인 마피아가 와해한 지금, 핵심 멤버였던 오지지(OhGeesy)는 그간의 경험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만든 첫 솔로 프로젝트 [GEEZYWORLD]와 함께 커리어의 새로운 챕터를 시작하려 하고 있다. 본작의 프로덕션은 지금 가장 트렌디한 웨스트 코스트 힙합 사운드로 채워져 있으며, 오지지는 크게 힘들이지 않는 듯한 발성과 툭 툭 던지는 플로우로 리듬 사이에 나른한 공간감을 부여한다. 다베이비(DaBaby), YG, 에이 부기 윗 다 후디(A Boogie Wit da Hoodie) 등 이름만 들어도 든든한 메이저 래퍼들의 어시스트는 제 몫을 해내며, 이들과 스타일이 전혀 겹치지 않는 덕에 오지지 역시 곡을 뺏기지 않고 균형 잡힌 뱅어들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자고로 웨스트 코스트 힙합이라면 여름 해변을 끼고 차에서 듣고 싶어야 하는 법인데, 그런 기준으로 봤을 때 [GEEZYWORLD]는 합격 중에서도 합격이다.
제이든(Jaden)은 아버지 윌 스미스(Will Smith)에 가려져 여전히 ‘취미로, 빽(?)으로 시작한 뮤지션’이라는 오명과 함께 성장하고 있었으나, 작년 8월 발표한 [CTV3: Cool Tape Vol. 3]는 그 분위기를 어느 정도 바꾸는 데 성공한 (제이든의 커리어 속) 기념비적인 프로젝트였다. 카리스마 넘치는 래퍼로서의 모습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하늘하늘한 드림 팝 사운드로 앨범을 채운 것이 큰 호응을 끌어낸 덕인데, [CTV3: Cool Tape Vol. 3]의 디럭스 에디션 격인 [CTV3: Day Tripper’s Edition]은 그렇게 찾아낸 제이든의 새로운 주 무기와 최소한의 힙합적 매력(?)에 더욱 집중한다. 본작은 그저 앞, 혹은 뒤에 신곡들을 주루룩 붙인 전형적인 디럭스 에디션보다는 원곡의 리메이크, 신곡들과 함께 재정립된 트랙리스트와 함께한 ‘리메이크 앨범’에 가까우며, 원작의 자리를 대신하는 곡들에는 [CTV3: Cool Tape Vol. 3]가 갖고 있던 매력적인 요소이 걸러져 한층 더 깊게 녹아들었다. 설마 아직도 제이든의 음악 커리어를 강렬한 뱅어 “Icon” 하나로만 알고 있다면, [CTV3: Day Triper’s Edition]은 그 인식을 완전히 뒤흔들 좋은 시작점이다.
Editor
snobbi & INS
퀴클리 퀴클리 진짜 최고
디깅디깅
감사합니다~ 보슬렌(?) 진짜 스캇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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