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팝 음악의 기본 골격에도 808 드럼이 뻗친 시대다.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의 힙합 사운드를 휘어잡았던 트랩의 골격이 말랑해지며, 선구자들에 의해 멜로디컬한 트랩의 가능성이 대두된 것이 시작이었다. 이때, 실험의 굵직한 결과물 중 하나로 떠오른 하위 장르 이모 랩(Emo Rap)은 힙합과 타 장르의 결합으로 인해 파생된 사운드 중 하나. 특히 대중적인 인기를 획득한 몇 이모 래퍼들은 빌보드 핫 100 차트 위를 유영하기까지 하며 팝스타가 부럽지 않을 뜨거운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2017년 릴 핍(Lil Peep)이 세상을 떠나고, 이어 2018년와 2019년 텐타시온(XXXTENTACION)과 주스 월드(Juice WRLD)마저 각각 세상을 떠나며 이모 랩 씬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모 랩의 주인공이라 여겨지던 이들이 차례로 떠났지만, 이로 생긴 공석을 꿰찰 다음 주자가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세 뮤지션의 ‘이모적인’ 서사를 완성한 눈물의 사후 앨범들이 각각 큰 인기를 얻었지만, 이는 이후의 어두운 미래를 제쳐두고 잠깐의 불씨를 유지할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실제로, 2021년 5월의 이모 랩 씬은 몇 년 전만큼의 저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https://youtu.be/S1qouvwANi4
그렇다면 이 바닥을 이끌어갈 남은 영웅은 없는 걸까? 다행히도 이모 랩 씬은 사망 선고를 내릴 만큼 그 어떤 인재도 남아있지 않은 파국에 놓여있지는 않다. 우선 그때부터 텐타시온과 릴 핍의 옆을 지켰던 트리피 레드(Trippie Redd)와 릴 트레이시(Lil Tracy)가 있다. 지난 2020년 히트 싱글 “Mood”와 각자의 프로젝트로 입지를 다진 신예 24k골든(24kGoldn)과 이안 디올(iann dior)이 있고, 주스 월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직속 후배 더 키드 라로이(The Kid LAROI)가 있다. “XO TOUR Llif3”로 이모 랩의 가능성을 점쳤던 릴 우지 버트(Lil Uzi Vert) 역시 지난 한 해 가장 활발한 음악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여기서 이모 랩의 사활을 결정지을 포인트는, 상술한 뮤지션들에게 정작 이모 랩을 표방할 마음이 있느냐는 것이다. 애호가들에게는 슬픈 현실이겠지만, 지금 당장은 대부분 그럴 마음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릴 우지 버트는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 [Eternal Atake]를 통해 전혀 ‘이모’하지 않은 범우주적인 사운드를 완성했다. 이모 랩의 개척자 중 하나였던 만큼 릴 우지 버트가 다시 이모 랩을 표방하지 않을 것이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지난 2020년 공개한 세 장의 프로젝트 [Eternal Atake], [Lil Uzi Vert vs. the World 2], [Pluto x Baby Pluto]를 감상하고 난 뒤라면 현재의 릴 우지 버트를 ‘이모 랩의 지도자’라 부르는 데엔 망설임이 생긴다.
뿐만 아니라, 다른 대부분의 이모 랩 뮤지션들은 점점 제대로 된 팝 펑크(Pop Punk) 사운드를 구현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트리피 레드의 최신작인 [Neon Shark vs Pegasus]는 본인에 의해 ‘완전한 록 앨범’으로 규정지어졌으며, 이안 디올과 24k골든, 더 키드 라로이의 신보 역시 ‘이모’하다고 보기엔 팝 록, 혹은 아예 팝스러운 매력을 전면에 내세웠다. 포브스가 2020년을 ‘랩 아티스트들이 록 차트를 지배한 해’로 정의했던 것처럼, 이모 랩의 영역에 발을 걸쳐온 얼터너티브 성향의 힙합 뮤지션들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뛰쳐나가 팝 펑크 아이콘 트래비스 바커(Travis Barker)에게 DM을 날리기 시작했다.
https://youtu.be/WbHfQgVi1GA
이렇게 현재의 이모 랩 씬은 구성원들이 대부분 둥지를 떠나면서 쪼그라들고 있는 실정이다. 음악 산업의 과도기 속 트랩과 팝 시장 사이의 교차점이었던 이모 랩 뮤지션들이 더이상 ‘이모’하지 않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트렌드의 흐름은 되려 팝 시장에서 트랩의 문법을 끌어들이는 게 당연해지게 만들었고, 덕분에 그들은 단순한 래퍼가 아닌 한 명의 팝스타, 록스타로서 당당하게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이모 랩 씬에 진입해 바닥을 이끌 수 있었던 재목 중 현재 자신을 이모 랩 안에 가두고 싶어 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대로라면, 이모 랩을 이루던 요소들이 팝 랩(Pop Rap), 혹은 랩 록(Rap Rock)이라는 더욱 포괄적인 틀 안에 녹아들며 알맹이를 내줄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어쩌면 이러한 이모 랩의 사장은 예견된 미래였을지도 모른다. 이모 랩의 역사는 록 장르 안에서 이모코어(Emocore)가 사장된 흐름과 비슷하게 굴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에 (그들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이모 밴드’로 여겨지며 큰 인기를 끌었던 마이 케미컬 로맨스(My Chemical Romance), 파라모어(Paramore), 폴 아웃 보이(Fall Out Boy) 등의 밴드는 2010년대 이후 팝 친화적으로 성향을 바꾸거나 ‘이모’라는 용어 자체를 혐오하기 시작했다. 이모 랩으로 묶이던 뮤지션들은 자신을 ‘이모 래퍼’로 부르는 네티즌의 동네에 달려가 총을 빼 드는 정도는 아니지만, 대부분 자신들의 음악을 이모 랩으로 규정당하기 싫어하며 그저 한 명의 뮤지션으로 여겨지길 바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https://youtu.be/c9FBgIQNqEo
여전히 이모 랩의 명맥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통(?) 이모 랩 뮤지션으로는 릴 트레이시를 포함한 고스보이클리크(GothBoiClique) 멤버들, 드리핀 소 프리티(drippin so pretty), 브레넌 새비지(Brennan Savage), 릴 애론(lil aaron), 릴 로터스(Lil Lotus), 도쿄스 리벤지(TOKYO'S REVENGE) 등이 거론된다. 아쉽게도, 이중 빌보드 핫 100 차트 상위권을 뚫을 정도로 대중적인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는 뮤지션을 꼽긴 힘들다. 단순히 이모 랩을 좋아하는 이들이 으스댈 수 있는 인물이 아닌, 문화적 현상을 만들어냈던 텐타시온, 주스 월드와 같이 이모 랩의 대중적 인기를 견인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렇게 씬에 활기를 불어넣을 새로운 리더가 등장하지 않는다면, 2010년대 중반에는 놀랍게도 가능한 일이었던 ‘'인싸'들과 이모 음악 이야기하기’는 다시 망상의 영역으로 돌아갈 확률이 높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그때의 이모코어 구성원들이나 지금의 이모 랩 구성원들이나 딱히 메인스트림으로 소비될 생각을 하진 않는다는 것. 이러한 시각으로 보면, 남아있는 이모 랩 뮤지션들과 리스너들에겐 딱 지금 정도로 들고 있는 햇볕을 가장 아늑해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만약 그렇다면 남 부러울 것이 없는 삶이겠지만, 씬 내의 인재 유출이 계속된다면 이모 랩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모 래퍼들이 주도하고 있는 ‘2020년대 팝 펑크 리바이벌’의 연료로 쓰인 짧고 굵었던 장르로 역사에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Editor
snobbi
트레이시정도면 충분히 잠재력있죠
근데 딱히 트레이시도 19년도 이후로 이모음악을 하고 있진 않다고 생각.
anarchy 앨범 10000포 이벤트 어떻게 됐나요 엉엉
집가서 글 올릴게요!! 요즘 과제때매 바빠서 댓글 확인은 못했어요
한국에서 새로운 뛰어난 이모랩 주자가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외국 따라한다고 욕먹을듯 이미 나올 스타일은 다 나왔다고 생각해서
전 killstation에게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그 친구도 딱히 이모는 아니지않나요 대놓고 얼터너티브쪽 같은데
다시 생각해 보니 얼터너티브 쪽이 맞겠네요
해석 영상은 이제 안 올리시는 건가요?ㅜ
대학생활에 치여서 ㅜㅜㅜㅜ 시간 되면 해볼게요
지금이다 릴잰 너의 힘을 보여줘...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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