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프랭크 오션의 블론드인가”
앨범서 먼저 언급할 부분은 단연코 전작과의 비교이다. 전작인 channel orange가 일렉사운드와 매력적인 훅, 멜로디컬함으로 무장한 피비알앤비의 대표적인 작품이였다면 본작은 알앤비 앨범이 아니며 차라리 비틀즈나 비치보이즈에 가깝다. 사운드나 내용적으로도 channel orange가 세상에 대한 오션의 비전을 파노라마와 같이 펼친 작품이였다면 blonde는 각기 연결되지 않는 조각들을 이어붙인 콜라주와 같다.
왜 오션은 본인이 발아시킨 나무를 뒤로 하고 다른 영역으로 훌쩍 떠났는가. 그의 심경에 무슨 변화가 있었는가? 아님 그저 전작의 방향성을 답습하지 않는 예술가 의식인가? 나의 답은 둘 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두 가지 이유 모두 답이 아님을 알고 있다. 프랭크 오션의 음악은 혹자의 말대로 고통으로 가득차있고 그가 블론드의 마지막 트랙에 술회하듯이 자가치료의 측면이 있다. 왜 그가 채널 오렌지의 작법을 버리고 새로운 방법론을 도입했을까? 그것은 그의 심리를 그릴 초상화의 형식으로 가장 적절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블론드는 한 인간의 굴절되고 복잡한 내면이다.
저명한 학자인 스티븐 그린블랫은 셰익스피어의 불멸의 후기 고전들을 향해 불투명성이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이 불투명성은 블론드에게도 보인다. 중요한 지점은 불투명성 그 자체이다. 유리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프랭크 오션은 앨범을 전체로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그 불투명성 자체가 핵심이라는 말이다. 그가 왜 이 불투명성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가 세상을 그렇게 보고 느끼는 방식을 표방한 것에 다름 아니다. 블론드의 사운드는 말그대로 탁월하다. 어쿠스틱 기타, 808 드럼, 일렉기타, 신시사이저, 목소리 까지 오션은 다양한 소리들을 규합해 서정적이면서도 몽환적인 음악을 만들었다. 이런 사운드들은 그 자체로도 매혹적이지만 오션의 심리묘사와도 연결되어있다. 이 앨범에서 오션은 혼란스러우면서 모순적인 내면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산만하고 다채롭다. 기승전결의 익숙한 패턴과도 거리를 둔 방식으로 곡들을 만든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곡들은 곡 중간에도 전환되며 전형적인 구조에서 탈피된 구성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앨범은 난해하다 라는 평을 받지만 역설적으로 그 난해함 덕에 만신전에 오르고 있다.
각각의 곡들은 연결된다기보다는 산만하게 배치되었다.
인트로인 nikes에서 오션은 변조된 목소리와 신스루프로 곡을 구성했다. 변조된 목소리는 지속적으로 앨범에 등장하는데 이는 오션과 그의 감정이 지닌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특성을 드러내면서 약물과 잠, 기억에 따른 혼란스러운 내면의 상태를 표현한다. 인트로부터 이 앨범이 일종의 분리와 그에 따른 화자의 복잡한 심리 상태를 표현할 것이라는 복선이다.
이런 연출은 앨범의 특징인데 예컨데 스킷인 be yourself에서 어머니는 본인 스스로가 되라면서 약물에 취하지마라는 메시지를 남기는데 이 두 내용(스스로가 되어라지만 동시에 하지말아야할 것을 강요하는)은 모순적인 면이 있다. 그리고 다음 solo에서 화자는 약에 취해있다. 이런 이중성과 분열은 앨범을 관통하는 모티브이다.대표적으로 ivy나 white ferrari에서도 드러난다. ivy에서는 기쁨과 사라질 것들에 대한 슬픔이 공존한다. 사랑의 시작을 이야기하는 구절 다음이 사라질 것들의 시작이라는 가사이지 않은가.
white ferrari에서의 화자는 순수한 사랑을 믿지만 그의 연인은 냉소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화자의 목소리(아마도 제임스 블레이크)가 변하는 전개는 화자의 마음이 영원할 수 없음을 암시하는 듯 하다.
white ferrari와 self control등에서 알 수 있듯이 블론드에서 오션은 전작과 달리 피처링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그 피처링들은 적극적으로 존재감을 보이지는 않는다.(유일한 예외는 solo(reprise)의 안드레이다.) 이는 앞에서 말했듯 혼란과 연결된다. 각기 다른 목소리들은 오션 속 내면의 화자들이다. 생각한다. 다양한 목소리들을 등장시켜 복잡다면한 본인의 심리를 대변하게 만든 것이다.
색다른 피처링 운용을 보여준 solo는 두 번 나오는데 이는 혼자됨의 외로움을 강조시키는 구성이다. 두번째 등장시킬 때의 안드레3000의 벌스 역시 현재의 음악시장과 인간관계에서 오는 오션의 심정으로 해석해도 큰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짜 가사가 난무하고 자기 가사가 사라져가고 본인만의 독창적인 노래가 가지는 가치가 의심스러운 상황을 거짓된 관계들 사이서 홀로 진심을 전달하려는 화자의 외로움과 연결시킬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블론드의 가사에 대해 논해야한다. 이 앨범의 정념은 프랭크 오션이 조성한 공간감과 사운드에 기반하고 있지만 결국 방점은 그의 시적인 함축성으로 가득한 가사에 있다. 단번에 이해할 수 없는 가사를 써내려간 오션이지만 self control에서 보인 이미지 창조력과 비유, 서정성은 그가 가진 감수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여러 이슈들을 건드리는 라인들과 말장난,언어유희 등 재치있는 라인이든 프랭크 오션의 가사들은 결국 어떤 시각적/청각적 심상을 청자에게 심어준다. 사운드와 때로는 배치되게 혹은 결합된 그 가사들은 생략되어있고 불투명하다. 그의 가사와 음악이 만드는 것은 틀이다.
다시금 앞에 했던 질문을 던져보자. “왜 프랭크 오션의 블론드인가” 왜 이 시대는 본인을 대표하는 가수로 프랭크 오션을 선택했는가. 단연코 이 앨범이 가지는 무결한 완결성이겠지만 나는 다르게 말하고 싶다. 블론드가 훌륭한 앨범인 이유는 틀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론드가 훌륭함 이라는 단어를 넘어선 이유는 틀만 만들었기 때문이다. 블론드는 그 빈 공간은 블랙홀이다. 이 불랙홀은 청자의 기억과 과거, 현재, 감정들을 빨아들인다. 블론드의 한 시간이 하나의 축복처럼 들리고 아름답게 들린다면 그것은 이 앨범이 가진 것이 아니다. 그 감흥은 당신이 가진 기억과 고통, 아픔에서 나온 것이다. 왜 프랭크 오션이냐고? 그는 듣는 이가 마음을 꺼내놓아 그가 축조한 공간에 둘 수 있게 한다. 그게 이 시대가 프랭크 오션의 목소리를 선택한 이유다.
블론드의 음악은 크게 사랑,고독, 아픔의 축들을 중심으로 배열되어 있다. 단편적인 기억들과 감정들, 그에 따른 오션의 마음의 풍경들이 이 앨범에 산재되어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많은 내용들이 생략되어 있으며 드러난 부분들은 모순적이고 혼란스럽다. 중요한 것은 생략된 것이 무엇일까가 아니다. 오션이 의도한 바는 바로 그 생략 그 자체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션은 왜 생략적이고 혼란스러우며 모순적이기까지한 형식을 취했을까?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의 마음이, 사랑이, 고독이, 슬픔이, 인간이 그러하기 때문이리라. 그가 특별하다고 믿는가? 아니다. 우리가 특별한가? 아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우리의 기억과 아픔에 공명하고 감응하는 순간은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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