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을러서 글을 쓰는 데 오래 걸린 나머지 공연을 본 지 2주가 다 되어가는 지금에야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 바로 포터 로빈슨의 Nurture인지라... 작년 4월 포터 로빈슨이 새로 나오는 앨범을 메인으로 라이브 월드 투어를 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티켓을 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2024년 말 무려 한국 내한 예정도 잡혀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고등학교 졸업여행이랑 겹쳐버리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내한은 못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나라인 일본으로 날아가서 보기로 했습니다.
고등학교에 포터 로빈슨을 좋아하는 친구가 둘 더 있어서 둘에게도 제 계획을 설명했더니 당장 가겠다고... 그래서 포터 원정단이 결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25년 2월 11일. 포터 로빈슨의 오사카 공연 당일이 되었습니다.
난바 해치 라는 꽤 큰 공연장에서 진행되었는데, 입장 30분 전에 도착해서 조금 걱정했지만 사람이 생각보다 엄청나게 바글바글하지는 않았습니다. 곳곳에 포터 로빈슨 티셔츠를 입은 사람이 보이기도 하고...
본 공연은 5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포터 로빈슨의 일본 공연은 월드 투어에서 총 네 번 있는데, 그 중 도쿄와 오사카에서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라는 이름의 일본 밴드가 오프닝 게스트로 참여하여 40분 정도 공연을 했습니다.
솔직히 여기서 처음 들어본 밴드였고 오프너에 불과해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노래가 좋고 무엇보다 보컬이 정말 잘해서 놀랐습니다.
그리고 15분의 인터미션이 있었는데, 그 시간 동안 저렇게 생긴 분홍색 고양이 풍선이 서서히 부풀어오르기 시작하더니 무대의 3분의 1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공연의 주인공 포터 로빈슨 등장.
(뒷줄이기도 했고 폰 카메라가 구려서 저 화질이 최선입니다...)
대망의 첫 곡은 이번에 나온 정규 3집 SMILE의 첫 곡 Knock Yourself Out.
음악을 듣기 시작한 게 6년이 좀 넘었고 포터 로빈슨 음악을 들은 지가 5년이 좀 넘었으니까 포터는 사실상 제 음악 인생의 8할 이상을 차지하는 놈입니다.
실물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공연장에 처음 등장한 이 순간에 정말 울컥했습니다... 노래 자체는 울컥할 게 단 하나도 없는 마냥 신나는 일렉트로닉 팝인데도...
제가 SMILE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Mona Lisa가 나왔을 때는 대놓고 조금 울었습니다. 원래도 라이브로 보면 정말 지리겠다고 생각한 곡이었는데, 정말 지렸습니다. 곡도 편곡을 조금 해서 원곡에는 없는 사운드가 더 추가되었는데, 라이브 버전이 개인적으로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곡의 절정에서는 갑자기 앨범 커버 모양을 한 커다란 풍선 공이 관객석으로 날아들어서 관객들이 손으로 통통 튕기고 놀았습니다. 아쉽게도 제 쪽으로는 안 날아와서 손에 대 보지도 못했지만 한 2분 정도 재밌는 볼거리를 즐겼습니다.
SMILE 파트의 마지막 곡은 바로 앨범의 3번 트랙인 Russian Roullette.
이 곡은 원래 앨범이 발매되었을 때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라이브 버프를 받으니까 SMILE 파트 최고의 순간을 만들었습니다. 이 앨범에서 가장 EDM 스타일에 근접한 곡인데, 피날레로 틀어버리니까 정말 신났습니다.
그리고 라이브에서는 또 곡을 조금 바꿔서 원곡 뒷부분에 있는 나레이션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본 곡이 시작되었는데, 원래 곡의 메시지가 나레이션의 형태로 뒤에 나오고 앞에 본 테마가 있는 형식이라 더 곡에 몰입되었습니다. 이 곡 역시 라이브 버전이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두 번째 파트가 시작되었는데, 그 파트는 바로 제 엘이 프로필 사진에도 박혀있는, 포터 로빈슨 정규 2집 Nurture...
Nurture 파트의 첫 곡은 앨범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곡이라고 생각하는 Wind Tempos.
메인 테마 피아노 멜로디를 라이브로 연주하고 연주가 끝나니까 무대 전광판에 앨범 제목이 딱 뜨고 시작하는데 와...... 전 여기서 그냥 저항 없이 울었습니다. 인생 최고의 순간 중 하나입니다.
다음 곡은 앨범에서도 Wind Tempos의 다음 곡인 Musician.
전광판에 60 BPM, 120 BPM, 240 BPM, 480 BPM 이 차례로 뜨고 이 화면에 맞춰 점점 빨라지는 메트로놈 사운드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드랍. 이 곡 역시 굉장히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곡이기 때문에 벅차올랐습니다.
원래 이 빌드업과 드랍 부분이 쇼츠나 릴스 같은 데에서 'most disappointing drop of all time' 이라면서 좀 까이길래 실제로 그렇게 김새는 드랍인가 하고 걱정을 좀 했지만 전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훨씬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그 다음 곡은 Something Comforting.
이 곡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가장 좋아하는 앨범의 가장 좋아하는 곡입니다. 이 곡에 대한 애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데, 마침내 라이브로 들으니 감동의 쓰나미가 몰려왔습니다... 여기서 많이 울었습니다...
혹시 이 곡을 모르신다면 당장 들어보세요!
Nurture에 수록되지는 않고 싱글로 발매된 Everything Goes On 이라는 곡도 있었습니다.
전반적으로 달달한 팝송 같은 노래인데, 평상시에는 별 생각 안 했던 곡이지만 이것도 라이브로 들으니까 너무 좋았습니다.
개인적인 얘기지만 곡이 끝나고 포터가 "이 곡은 일본 밴드 요루시카에게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라면서 뜬금 요루시카 샤라웃을 날렸는데, 옆에서 같이 보던 요루시카에 죽고 요루시카에 사는 제 친구가 저를 붙들고 흔들면서 울려고 했습니다ㅋㅋㅋ
다음 곡은 Unfold.
처음 시작했을 때 이 곡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편곡을 많이 해서 놀랐습니다.
원곡은 잔잔하게 진행되다가 하이라이트에서 댐이 무너지고 물이 밀려오는 듯한 사운드가 터지는 곡인데, 라이브에서는 시각 자료까지 동원해서 더 드라마틱하게 연출하니까 와... 예상하지 못한 최고의 순간을 만들었습니다.
Nurture 파트의 마지막은 포터와 아까 처음에 등장한 오프너 밴드의 보컬 단 둘이 장식했습니다.
포터가 피아노 반주를 치고 보컬이 노래를 부르는 형식이었는데, 악기를 다 빼고 피아노랑만 들으니 보컬 역량이 더 돋보였습니다. 노래 정말 시원시원하게 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파트는, 포터 로빈슨 정규 1집 Worlds...
Worlds 파트는 새로운 무대 장치와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포터를 감싸고 있는 하얀색 풍선 같은 것들이 그 장치인데, 포터가 직접 실로폰 채 같은 걸로 치면 불이 들어오면서 소리가 나는, 엄청나게 크고 이쁜 MPC? 같은 장치였습니다.
이 앨범 곡들의 메인 멜로디 라인이 유독 뚜렷한 신스 노트로 이루어져 있는데 포터가 라이브에서 멜로디 노트를 하나하나 치니까 정말 시각적인 효과가 대단했습니다. Worlds 파트의 일등공신!
Worlds 파트의 첫 곡은 앨범에서도 첫 곡인 Divinity.
제가 이 곡의 첫 1분만 듣고 포터 로빈슨에 입문하게 되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엄청난 의미가 있는 곡입니다. 라이브는 원곡과 거의 같았고 악기 구성만 밴드 셋으로 변경된 것 정도였습니다.
공연이 어쩌다 보니 커리어 역순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도 포터 로빈슨 음악을 들으며 자란 제 인생을 되돌아보는 그런 느낌이 들어서 좋았습니다.
다음 곡은 Fresh Static Snow.
사실 이 곡은 앨범 내에서도 굉장히 인지도나 인기가 낮은 편에 속해서 솔직히 라이브로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오 이걸?' 같은 느낌?
그런데 이거 편곡을 정말 무지막지하게 잘 해서 원곡이 생각이 안 났습니다. 원곡은 어쿠스틱이 제로라고 봐도 될 정도로 전자 사운드가 강한데, 이렇게 밴드 사운드에 잘 어울리는 곡인 줄 몰랐습니다. 하나하나 편곡을 다 해 온 포터의 정성과 능력에 감탄한 순간이었습니다.
Worlds가 발매되기도 전에 발매된 포터 로빈슨의 데뷔 싱글인 Language도 이 파트에 있었습니다.
짧게 1절과 하이라이트만 했지만 임팩트가 매우 강했는데, 포터 로빈슨의 커리어를 열어 준 곡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곡의 장르는 완전히 일렉트로닉 하우스라서 이때 사람들이 가장 활발하게 뛰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 곡은 앨범에서는 마지막 곡인 Goodbye To A World.
포터 로빈슨의 곡 중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편이지만 원곡 자체는 꽤나 디스토피아적이고 어딘가 모르게 암울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이 곡은 보컬도 기계음이고 사운드도 전부 전자음이고 곡 구성도 마치 비디오게임이 서비스 종료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짜여 있는데, 라이브에서도 그 느낌이 너무 잘 전달되었습니다.
원곡은 곡이 끝날 때 보컬이 왜곡되고 음질이 낮아지면서 마치 프로그램에 오류가 생긴 듯 끝납니다. 라이브에서는 가사가 적힌 프로그래밍 창이 지지직거리는 영상을 동원해 이걸 더 극대화했습니다. 포터는 키보드 위에 엎드리고 죽은 듯 움직이지 않는 퍼포먼스를 했고, 이 파트에서 사람들이 다들 숨죽이고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지지직거리는 보컬은 너무 자연스럽게 Worlds 파트의 마지막 곡으로 넘어가는데...
그 곡은 바로 포터 로빈슨의 대표곡 Sad Machine.
본인이 가장 아끼는 곡 중 하나라고 하기도 했고, 인지도도 포터의 곡 중 최상위권인, 그 현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곡이 바로 Sad Machine입니다.
이 곡은 상징적인 메인 신스 멜로디를 가지고 있는데, 어딘가 구슬프면서도 감동적이어서 저도 굉장히 좋아하는 멜로디입니다. 전 곡에서 이 곡의 메인 멜로디로 넘어올 때 정말 극락을 경험했습니다. 단언컨대 공연 최고의 순간입니다.
아까 언급한 풍선 모양의 장치로 멜로디를 하나하나 쳐 주는 포터 로빈슨과 이 곡의 조화는 정말로 최고였습니다.
그렇게 Worlds 파트가 끝나고, 풍선 모양의 공연 장치를 치운 후 마지막 두 곡만을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두 곡은 각각 포터 로빈슨의 곡 중 가장 인기가 많은 곡, 그리고 이번에 나온 포터 로빈슨 신보에서 가장 중요한 곡입니다.
친구들은 왜 이 두 곡 안 하냐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제 생각에는 도저히 포터가 이 두 곡을 안 할 리가 없어서 걱정하지 말라고 무조건 하고 간다고 이야기해줬습니다.
그리고 바로 나와주는 Shelter.
이 곡은 프랑스의 전자 음악 아티스트 Madeon과 콜라보한, 포터 로빈슨의 곡 중 가장 인기가 많은 곡입니다.
포터는 유명한 양덕후... 라서 이 곡의 뮤비는 대놓고 애니 스타일인데, 그 뮤비(애니)의 주인공 캐릭터가 갑자기 빈 화면에 등장하더니 들고 있는 아이패드를 애플 펜슬 같은 걸로 터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터치할 때마다 곡의 보컬 샘플이 재생되었는데, 이게 상당히 보는 재미가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웃었습니다.
그리고 본 곡이 시작되었습니다. 원곡과 거의 차이가 없었지만 사람들이 상당히 좋아하는 곡이라 반응이 매우 뜨거웠습니다. 특히 이 곡의 뮤비에 큰 감명을 받아 포터에 입문한 제 오타쿠 친구는 여기서 대놓고 눈물을...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곡. SMILE 앨범의 두 번째 트랙이자 절대 안 하고 가면 안 되는 곡인 Cheerleader.
모두가 기다리던 곡이 나오자 사람들의 함성이 오늘 공연 중 최고를 찍었고, 저도 여기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노래를 따라부르면서 공연의 마지막 곡을 즐겼습니다.
곡 자체는 원곡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고 사운드만 밴드 사운드로 바뀐 것 뿐이었지만, 이 곡은 워낙 최고로 신나고 중독적인 데다가 들으면 행복해지는 행복 바이러스 같은 노래라 저는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정말, 정말, 정말 행복했습니다.
끝나고 저는 엄청난 행복감과 포터에 대한 존경심에 할 말을 잃어서 벙찐 표정으로 친구들과 바닥에 퍼질러 앉아서 각자의 최고의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다들 너무나도 공연에 심취해 아직도 여파가 가시지 않는다는 표정들이었고, 저는 공연을 보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영화를 보고 한 번도 운 적이 없는 제가 이거 보면서 몇 번을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저희 셋은 한 10분 동안 앉아서 "우와... 우와... 개쩐다..." 만 연발하다가 정신 차리고 일어나서 저녁을 먹으러 갔습니다.
일본 여행의 마지막 밤을 장식한 포터 로빈슨의 라이브 공연은 죽기 전까지 제 인생 최고의 경험 중 하나로 남을 것 같습니다.
쓰고 나니까 이게 뭔 글이지 싶을 정도로 주접이 되어버렸지만... 결국 제 결론은 하나입니다. 최고의 공연이었습니다.
여러분 포터 로빈슨 많이 사랑해 주세요.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음악 취향 잘맞는 친구가 둘 있다는게 나무 부럽네요ㅋㅋ
저도 정말 그 점은 행운의 여신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ㅋㅋㅋㅋㅋ 제 취향 또 찾기 쉽지 않거든요…
Most disappointed drop of all time ㅋㅋㅋ 저도 봤는데 영상은 뭔가 팍 식긴 하더라고요 현장감은 달랐나보네요
글에서 진짜 포터 음악을 사랑하시는 게 느껴지십니다. 축하드립니다
공연본건 안부러운데 포터 좋아하는 친구가있는게 부럽다..
전 내한에서 봤었는데
모든 순간이 다 좋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건
(한국에선 오프닝 공연 없었으니 제외하고)
인터미션 사이 사이에 nurture, worlds 테마 로고 나오는게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앨범 작업 시기가 함께 나왔던거도)
테일러 스위프트 팬은 아니고
Eras tour도 가본 적 없지만
포터 로빈슨의 그간의 디스코그래피를 전반적으로 되돌아본다는 점에서
스위프티들이 eras tour에 간 느낌이 이런걸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쉬운게 하나 있다면
Nurture 때
Sweet time
Mirros
Mother 안해준거....
Nurture 앨범 중에서도 진짜 킥이라고 생각하는 노래들인데
아쉬워서라도 다음 포터 로빈슨 공연에 기회 된다면 가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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