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영화들
1.헤어질 결심
박찬욱의 영화는 언제나 구원과 경계,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헤어질 결심은 그가 새로운 장에 돌입했음을 아름답게 선포하는 영화다. 그가 홍보활동서 종종 언급하였듯이 그의 작품세계와 미묘하게 다른 작품이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2000년 이후로 그는 안주한 적 없이 매번 새롭게 쇼트를 찍고 편집했다. 그는 작가로서 끊임없이 본인을 갱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헤어질 결심은 그 정점이다. 박찬욱은 자주 영화의 결정적 순간들에 직부감을 사용했다. - 올드보이, 복수는 나의 것, 박쥐 등등. 헤어질 결심의 종반부 등장하는 직부감은 경계와 불가능한 구원의 테마를 시적으로 함축해 표현한다. 그 압축된 평면감은 인물들의 무력감을 완벽하게 시각화한다. 헤어질 결심은 얼굴과 선 그리고 연결의 영화다. 종종 잡히는 옆얼굴은 상대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고 서로 시선을 맞추는지 아닌지의 표현은 감정을 그러내며 직선과 곡선, 대각선의 구도는 반복되면 의미를 생성한다. 무엇보다 헤어질 결심은 연결의 영화다. 디졸브이든 행동/반응의 숏이든, 아님 인물의 마음을 대변하는 카메라 무브먼트이든 영화는 영화적 밀도로 가득찬 연결을 표현한다. 보는 행위와 다시 보는 행위, 시선의 마주침,엇갈림, 와이드스크린, 푸름과 노랑, 트래킹 숏, 디졸브 등등 이것들을 통틀어 박찬욱은 그가 구사하는 영화언어를 극단으로 추구해 불가능한 구원, 경계, 사랑과 부조리에 대해 아름다운 영화를 완결시켰다. 영화의 놀라운 숏 중 하나를 고르자. 나는 서래가 해준의 집에 들어올 때 우측에서 좌측으로 움직이는 카메라 트래킹 숏을 기억한다. 일반적인 동선의 반대로 향하는 트래킹숏은 그 감정의 힘을 간명하게 담아낸다. 해준과 서래의 사랑과 구원은 미결이지만 이 영화가 완결인 이유가 여기 있다. 칸 영화제 감독상, 메타스코어에서 북미평단가들의 순위를 집계한 리스트 10에 든 것이나 그에게 부정적이었던 카이에 뒤 시네마조차 극찬을 했다는 사실로 대표되는 평단의 극찬들조차 이 영화가 성취한 미학의 극히 일부만을 보여주고 있다.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이라는 거장이 다시금 세계영화사에 남긴 성이다.
2.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나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가장 위대한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한다. 아. 아니다. 나는 다른 누군가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역사상 최고의 영화라고 해도 수긍할 수 있다. 영화 초반부의 대사를 되돌아보자. 꽃에 대한 엄마의 대화에서 치히로는 그녀가 꽃을 전에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꽃이 물과 만나면 다시금 싱그러워질 것임을 알게 된다. 이 영화는 이 대화와 같다. 잊어버린 과거, 그리고 있어야할 자리에 있는 것에 관한 영화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성장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에 반영된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대가의 놀라운 상상력과 정서, 그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메시지들은 분명 아름답다. 하지만 나는 치히로와 하쿠가 하늘에서 조우했을 때 눈물이 위로 상승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물이 위로 올라가고 다시 내려오는 순환의 이미지. 있어야할 곳에 있는 것. 그것이 행방불명의 핵심 모티브다. 치히로는 결말부 그녀가 원래 존재하는 곳으로 돌아갈 때 ‘뒤돌아보지 마라’는 말을 한다. 에우리디케를 연상시키는 이 말을 치히로는 지킨다. 인생은 순환과 변화의 반복이다. 그 과정서 뒤돌아보지 않으며 나아가야할 시기가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자연스럽게 대가의 능력으로 이를 표현한다. 이 영화는 모든 세대가 평생동안 간직할 영화다. 그리워하는 시간들, 그럼에도 되돌아보지 않고 나아가는 것의 반복이 삶임을 이보다 잘 표현한 작품은 없다. 이 영화는 물처럼 부드럽고 순환하며 아름답다.
3.페인 앤 글로리
페인 앤 글로리는 고통과 영광, 삶과 예술, 사랑과 상처, 후회와 미래, 작별과 믿음, 인생과 죽음에 관한 영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 가지가 결국 같은 것임을 말하는 영화다. 영화의 아름다운 숏들을 다 차치하고 멋진 대사들을 다 건너뛰고 나는 한 장면과 한 대사만을 언급하겠다. 이 영화의 엔딩은 고다르의 경멸과 반대다. 영화가 영화 속의 영화의 앵글로 합치되는 고다르와 달리 영화 안의 영화의 앵글이 확대되어 영화의 앵글과 합일된다. 그리고 소년은 뒤돌아본다.
이 쇼트로 알모도바르는삶,죽음,작별,상처,후회,슬픔,예술,사랑을 완전하게 결합시킨다. 이 숏은 그동안의 플래시백들이 약에 취한 노인의 과거회상이 아니라 과거와 올바르게 작별한 자가 나아간 미래임을 알게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미처 잘못 이별한 자가 다시 쓰는 작별인사이며, 잘못 판단한 과거를 되돌아봄으로써 미래로 나아가는 자의 여정이며, 고통과 영광을 모두 끌어안는 생의 찬가이다. 이 영화의 문장을 되돌아보자. 그 극장에는 지린내와 자스민 향이 여름 바람을 타고 흘렀다. 이게 우리 인생이 아니면 무엇일까.
4.마스터
폴 토마스 앤더슨은 분명 우리 세대 가장 위대한 감독들 중 하나다. 그리고 그의 영화들은 모두가 훌륭했지만 그의 미학적인 정점은 아마도 데어 윌 비 블러드와 마스터에 있을 것이다. 내가 마스터를 고른 이유는 데어 윌 비 블러드는 모두가 보기에 압도되는 걸작인 반면 마스터는 모호하고 난해한, 이미지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후자를 조금 더 옹호하고픈 마음이 크다. 마스터는 불가능한 삶의 구원과 불가해한 타인에 관한 영화다. 먼저 비스타버전의 화면비와 망원렌즈는 인물에 집중하게 하고 그들의 부적응을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감독이 클로즈업을 활용하고 인물들의 얼굴에 빛과 그림자를 배치시키는 방식은 대가의 경지다. 예로 배의 밑바닥에서 프레디와 랭커스터의 대화장면이 프레디의 얼굴 대다수를 메운 어둠으로 갈무리되는 것은 그의 내면 속 어둠을 암시한다. 동시에 초반부 프레디의 달리기를 트래킹숏으로 따라가는 장면은 프레디의 이동을 제자리걸음으로 만들며 무화시킨다. 프레디와 랭커스터의 갈라짐은 그들이 오토바이를 타는 방향이 반대임을 통해 암시된다. 그리고 랭커스터의 질주에 대한 리액션숏에 프레디는 랭커스터의 가족과 함께 마스터숏으로 있다면 프레디의 질주에 반대로 랭커스터는 클로즈업이다. 이는 둘 사이의 권력관계가 역전됨을 시각화한다. 마스터의 오프닝과 엔딩의 조응은 완전하다. 오프닝과 엔딩 둘 다 프레디는 바닷가에서 모래 여인과 함께 하고 있다. 바다와 모래 여인은 바스라지고 사라지는, 허무한 관계이고 불가능한 구원과 실존의 고독을 상징한다. 엔딩에서 프레디는 얼굴 반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그는 불완전하다. 그런데 사실 우리도 그렇다.
5.아이리시맨
마틴 스콜세지, 텔마 슌메이커, 로버트 드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가 나온다. 위대한 영화인들이 만났다. 그리고 위대한 영화가 출현했다. 1970년대를 어찌 정의할지는 각자의 몫이지만 마틴 스콜세지가 택시 드라이버를 개봉한 다음해에 스타워즈가 나왔다는 사실과 아이리시맨이 어벤져스 엔드게임과 동시에 개봉했다는 사실이 그리는 평행선은 의미심장하다. 상업적으로 변혁을 겪는 시기, 영화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들이 영화의 현재와 미래, 정의를 물을 때 마틴 스콜세지는 76년에도 그랬던 것처럼 19년에도 해답을 제시한다. ‘이게 시네마야’
위대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배우들의 연기는 직접 보라. 하이라이트인 무도회 장면의 블로킹과 시선의 교차와 편집의 경지도 직접 경험하라. 이 영화의 위대함은 그 무심함에 있다. 시간의 순서를 뒤집은 구성은 역설적으로 시간의 힘을 느끼게 만든다. 죽음을 무심히 처리하는 연출은 그 거대한 시간의 힘과 무상함을 온전히 드러낸다. 그리고 감옥에 있는 이들을 지나가는 수평 트래킹숏은 - 그가 가장 잘 구사하는 것이다- 늙은 범죄자들을 보여주면서 시간을 시각화한다. 그리고 문의 반복된 변용으로 의미를 생산해내는 방식은 대가의 완전함을 보여준다. 계속 닫히던 문이 반쯤 열려있다. 거기에 프레임에 갇힌 채로 로버트 드니로가 앉아있다. 그 프레임은 무엇을 말하고 있고 우리는 무엇을 응시하고 있나. 시간을, 인간을 보고 있다가 정답이겠지만 내가 본 것은 시네마의 미래와 희망이었다. 아이리시맨을 넷플릭스든 작은 극장의 소규모 개봉이든 누군가가 선택한다면 영화는 살아있을 것이다. 영원히.
6.바튼 아카데미
남아있는 자들이라는 원제가 더 마음에 든다. 이 영화는 카프라의 멋진 인생 이후 가장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영화다. 그리고 빌리 와일더의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이후로 가장 완벽하고 정석적인 연출,연기,각본의 합을 보여준다. 내가 과장하고 있냐고? 전혀 아니다. 이 영화는 21세기에 내보일 수 있는 가장 사려깊은 이미지와 이야기다. 1.66:1의 비율은 사선도,수직도,수평도 강조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기본 설정은 거의 40분이 지나서야 겨우 제시된다. 가장 감정적인 순간. 가장 상처받은 인물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깊다. 알렉산더 페인의 이 영화는 디졸브, 얼굴, 손의 영화다. 디졸브는 과거와 현재, 상처를 시각화한다. 그리고 서로 손잡는 장면들의 대비와 감동은 남다르다. 담담하게 결말부 두 남자가 작별을 고하며 악수하는 장면은 기교 없이 고전적인 숏/리버스숏으로 찍혔다. 그렇다. 이 영화는 새로운 언어에 대한 탐구가 없다. 그저 이야기가 있고 사유가 있고 감정이 있다. 그렇게 이 영화는 오랜 시간 기억될 것이다. 엔딩에 대해서 논해보자. 영화의 주된 동선은 좌에서 우이다. 하지만 계속 좌에서 우로 가던 그가 방향을 반대로 갈 때, 그 움직임이 주는 시네마틱함은 설명할 수 없다. 이 동선이 영화 전반부 버려진 장갑 한 짝과 같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더더욱. 삶은 힘들고 당신은 외롭다. 괜찮다. 그럼에도 연대는 가능하다. 혼자이든 아니든 삶은 아름답고 살아갈 가치가 있다.
7. 언더 더 스킨
언더 더 스킨는 난해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낯선 영화이기도 하다. 외계인에 관한 영화로 보이지만 어쩌면 당연하게 인간에 관한 영화다. 외계인은 거울을 반복해서 본다. 처음에는 작게 보이던 그녀의 얼굴만 있지만 마지막에 그녀는 그녀 전체의 나신을 본다. 그녀가 그녀 스스로에 대해 자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성관계에 실패한다. 하지만 숲은 그녀와 합일된다. 디졸브로 숲과 하나가 된 그녀의 이미지는 연대는 피부 아래로- 마음으로 - 가능함을 넌지시 알린다. 불탄 이후로 숲에서 걸어나가는 그녀를 잡은 롱숏은 냉정하지만 슬프다. 영화는 안개,눈 등 순환의 이미지를 강조한다. 영화는 순환되는 거대한 세계에서 작은 존재의 실존을 다루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클로즈업의 반복, 롱숏의 사용은 조나단 글레이저가 얼마나 영상언어에 통달했는지를 보여준다.
외계의 공간은 극단적인 공간구성으로 영화성을 적극적으로 러낸다. 무엇보다 알몸인 배우들이 강조되는데 이는 외계인이서서히 옷을 벗는 동선과 겹친다. 여기서 각 배우들의 육체적인 섹시함은 탈색되어 있으며 자연스레 스킨에 집중하게 한다. 더 주목해야할 점은 이 공간에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아무 것도 없는 세계와 달리 지구의 세계는 많은 것으로 가득차있다. 거슬리는 듯한 사운드는 외계인이 이 세계에 느끼는 감각에 가까울 것이다. 외계인을 말 그대로 지구 바깥에서 왔으며 그렇기에 인간의 기준은 무의미하다. 그가 아기를 버리거나 바다의 남자를 죽이는 장면은 충격적이지만 도덕의 바깥에 있는 존재이기에 그 어떤 판단도 불허한다. 이를 표현하듯이 외계인의 전반부 동선은 정방향과 반대인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설계되어 있다.
비인간적이고 효율적이던 외계인이 변하는 순간은 아이의 울음소리를 차에서 들었을 때다. 그 때 분명 그는 해변의 아이를연상했을 것이다. 그 덕분에 그는 고통을 학습했다. 인간의 고통을 알게 되었다. 다음 장면서 그의 오른쪽 얼굴을 잡는 클로즈업이 등장한다. 이 앵글은 이 영화서 처음 나오는 앵글이다.이 순간에는 남자들이 그에게 작업을 걸고 있다. 앞까지는 외계인이 먼저 그랬지만 이 때는 반대다. 그가 피해자의 상황에 서는 것이다. 타인의 입장이 되는 순간이였기에 클로즈업으로중요하게 다루었다. 그렇다면 그가 파티장에서 뒤돌아오는 이유가 설명된다. 본인 역시 피해자가 될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본인에게는 유혹이 곧 죽음이였으니. 그 다음 여자들과 함께 다시 파티장으로 향하는 데 이는 외계인이 여성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이다. 비슷한 존재를 통해 본인의 정체성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후 외계인은 달라진다. 초반부 남성들만을 찾았던 포식자가 아니라 여성들을 쳐다보며 본인을 고민한다. 도시의 일상적 풍경 속 사람들을 스케치하는 몽타주는 그가 이 세상에 대한 고민을 한다는 암시이며 그들이 겹치는 화면에 주인공의얼굴이 떠오르는 디졸브는 그에게 인간성(혹은 인간에 대한 인식)이 생기는 순간을 포착한다.
피부병을 앓는 남자와의 만남은 큰 분기점이다. 이 남자를 부르고 대화를 나눌 때 이전의 클로즈업 앵글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피부병 걸린 남자는 외계인과 비슷한 사이즈의 클로즈업 앵글로 싱글샷으로 찍힌다. 그 순간 외계인과 피부병환자는 일종의 교감을 나누고 겹친다. 그들의 피부(skin)이 맞닿는다. 그들은 피부 아래로(under the skin)연결되고 그 공통점은 고독일 것이다. 결국 외계인이 그를 풀어준 이유도 그를 이해했거나 연민을 느껴서일거다.
풀어준 이후 외계인은 안개를 마주한다. 영화에서 물은 매우 중요한 소재이다. 인간들은 물에 죽는다. 그리고 물은 안개, 폭포, 바다, 눈의 형태로 변한다. 이런 순환은 작품을 관통하는 테마 중 하나다.안개는 외계의 공간처럼 온 세상을 하나의 색으로 칠한다. 하지만 안개는 지구의 소산물이다. 지구의 공간과 외계의 공간으로 이분법되어있던 세계가 겹치는 순간이다. 주인공은 허물어진 경계에 있다. 조각케익을 먹는 시도가 실패하고 버스에서 친절을 마주하고 연인(?)을 만나는 등 여러 경험을 한 외계인은 숲에 들어간다.이 숲은 수직적인 나무가 같이 서있는 공간이다. 쉼터에서 주인공은 잠을 청하는데 그 때 숲과 그가 디졸브되며 겹친다. 마치 그와 숲이 교감을 나누는 듯한 장면이다. 흥미로운 것은 앞의 남자와의 섹스는 실패했지만 숲과의 교감은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연대가 겉의 문제가 아닌, 피부 아래의 문제이기때문이다. 그것도 잠시 그는 강간범에게 당한다. 강간범은 나무를 베는 벌목꾼이다. 나무는 그를 감싼 숲을 구성하는 요소다. 그는 차를 타지만 차는 나아갈 수 없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와의 반대인 동선(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간다. 피부가 벗겨진 이후 그피부를 응시하는 외계인의 장면은 그의 내면을 향한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의 고민을 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외계인은 강간범에 의해 불에 타서 죽는다. 불에 탄 외계인이 숲에서 추방되는 롱숏은 냉정하다. 그리고 불에 의해 연기는 상승하고 눈은 하강한다. 이 순환의 이미지는 세계의 질서다. 영화서 탁월하게 사용된 롱숏은 이 세계에 비해 작고 나약한 존재들을 표현한다. 영화의 시선은 냉정하고 거리감을 둔다. 그리고 흔히들 말하는 낯설게 하기를 통해 몰입하기 보다는 생각하게 만든다. 종종 사용된 비현실적인 장면 역시 그런 의도다. 결국 이 영화는 냉담한 순환의 질서에 무력한 존재를, 그 존재들의 연약한 교감과 자아를 더없이 영화적으로 담아내었다.
8. 멀홀랜드 드라이브.
언더 더 스킨에 대해서 방만하게 적었기에 이 영화에 대해서는 짧게 적고 싶다. 일단 내가 이 영화를 완전히는 무슨 2할도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로하다. 그런데 왜 이 영화를 선정했냐고? 치피 할 말도 없으면서?
그 이유는 다들 이 영화가 고전이라고 떠들고 모두가 21세기 최고의 영화로 이 작품을 선정하기에 그것에 편승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보라색 배경에 춤을 추는 커플들의 복제된 이미지들이 병치된 것을 보고 나는 압도되었다. 똑똑한 이들은 시뮬라크르니 차이와 반복이니를 떠올리겠지만 나는 그 이미지들의 기괴함과 떠오름과 가라앉는 이미지의 반복에 사로잡혔다. 이 영화는 매우 매우 난해하다. 왜냐하면 완전히 다른 언어와 다른 사고방식의 영화이기 때문디. 실렌시오라는 단어와 연극적인 미장센을 영화와 결합시키는 린치의 절묘한 연출, 분명 인물의 시점쇼트였는데 어느 순간 영화의 시점쇼트로 변모하는 장면, 1부와 2부 사이의 논리젹인 연결을 파괴하는 연출과 구성, 그리고 미묘하고 신비스러운 사운드 구조. 내가 이 영화를 이해했냐고 아니 나는 이 영화의 조금도 이해못했고 여전히 존나 어렵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신한다. 데이비드 린치는 새로운 언어를 발명했고 너무나 영화적이다. 이 작품은 영화가 꾸는 꿈이고 영화가 만든 영화다. 환상과 실재 사이를 헤매는 인간실존의 공포이고 결국 침묵으로 함축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관한 영화이다.
9. 화양연화.
왕가위 영화의 최고봉이다. 영화는 왕가위와 장만옥을 가둔다. 프레임으로 장애물 사이에 그들은 갇혀있다. 그들의 파트너는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편집은 종종 끊기면서 인물의 심리를 표현하고 때때로 슬로모션은 시간의 스쳐감을 봉인한다. 양조위의 얼굴은 세상 그 누구보다 품위있게 사랑과 그리움을 조각한다. 영화가 대화장면을 어떻게 연출하는지를 보라. 규칙을 어기고 리듬을 형성하는 방식은 왕가위가 만든 영화라는 사실을 각인한다.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엔딩이다. 고대유적에 양조위는 시간을 간직하고 숨긴다. 고대 유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의 흔적이다. 사랑이 존재했음을 부재로 증명하는, 흔적만 잔존하고 있다.
그것이 사랑이고 시간이고 영화다.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숏은 프레임들이 가두는 그들이 서있는 모든 장면들이다. 양조위와 장만옥은 우아하고 품위있다. 그리고 왕가위는 그만의 방식으로 감정을 포착한다.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10. 멜랑콜리아
라스 폰 트리에는 제정신이 아니다. 아 물론 로렌 바콜의 말대로 영화판은 개판이지만 영화는 매력적이다.그리고 그 개판 속에서도 라스 폰 트리에는 특기할 존재다. 아 물론 어린애를 학대한 미친놈들 천지이던 오즈의 마법사나 총을 들고 촬영장에 갔다던 프리드킨만큼은 아니지만 라스 폰 트리에도 분명 비행기를 기다리며 편안히 이야기할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몇몇 작품들은 아름답고 훌륭하다. 내가 멜랑콜리아를 고른 이유는 내가 도그빌을 덜 보았기 때문이고 다른 영화들은 도저히 볼 수가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도 크다. 나는 우울증을 이렇게 다룬 영화를 본 적이 없고 엔딩을 보고 울었다. 이 영화는 내가 아니라 세상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자폐적인 칭얼거림이 아니다. 그보다는 삶과 우울, 종말에 관한 정서적,사유적 질문이다. 내가 마지막 쇼트에 충격받은 이유는 아름다워서기도 하지만 그 종말을 지켜보는 누군가의 시점쇼트나 설정쇼트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가 표현한 것이 무엇인지 언어로 옮길 재간이 없고 솔직히 추천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언한다. 이 영화는 잊을 수 없는 미학적 체험이다.
11.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는 21세기 최고의 각색이 21세기 최고의 촬영과 21세기 최고의 연기, 그리고 21세기 최고의 연출이 존재한다. 간단히 말하겠다. 이 영화는 그냥 온갖 비속어를 때려박아서 찬사를 보내고 싶을 정도로 훌륭하다. 영화를 한 단어로 정리하자면 ‘흔적’이다. 영화에서 중요한 장면 중 하나는 보안관을 살해하는 안톤 시거다. 부감으로 보안관의 미력한 저항이 남긴 바닥의 흔적들을 찍은 숏은 인간의 무력함과 무지를 압축한다. 액션 시퀀스에도 인물들은 서로의 흔적을 통해 각자를 추적한다. 로저 디킨스의 기념비적 촬영은 프래티컬 라이트를 효과적으로 활용해서 빛과 빛의 흔적인 그림자를 표현하다. 가장 핵심적인 장면은 늙은 보안관이 모텔 방문을 열고 차의 헤드라이트가 쏘는 빛에 그의 그림자가 벽에 어린 이미지다. 영화는 시간이, 불가해한 폭력이 지나간 흔적을 보여준다. 거기서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인간의 무지와 무력감이다. 추신으로 코엔 형제와 로저 디킨스는 아이 픽스, 빛과 그림자의 활용, 고전적인 구도와 실험적인 구도의 조합에 있어서 황홀한 경지에 다다랐다.
12. 파벨만스
스필버그는 과거에는 할리우드 고전기를 종료시킨 인물로 보였지만 이제는 최후의 고전주의자로 불린다. 그리고 이 평가들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는 여전히 세계 최고의 엔터네이너-장인이면서 역시 세계 최고의 영화작가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지해야할 것은 두 종류의 영화들을 대하는 태도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영화언어를 숨쉬는 것처럼 구사하는 대가로서 그는 자연스럽게 인물들의 감정과 생각,이야기,상황을 전달하고 시각화한다. 이 방법론은 그가 레디 플레이어 원을 찍든 링컨을 찍든 변하지 않았다. 내 말은 그가 보여주는 고전주의적 연출- 존 포드와 카프라를 연상시키는-이 무엇을 다루든 아름답고 우아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카메라 무브먼트와 블로킹으로 다양한 시각적 구도를 형성하고 다채로운 앵글을 오가면서 영화적 리듬을 형성하는 롱테이크- 2분 내외의 길이로 구성된- 를 활용한 연출이다. 여하튼 스필버그의 21세기 작품들은 대다수가 걸작이다. 그 중 최고봉은 링컨과 파벨만스, 우주전쟁이다. 그럼에도 내가 파벨만스를 고른 것은 엔딩 때문디. 위대한 대가는 또다른 위대한 대가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들 중 하나에 캐스팅했다. 이제 스필버그는 존 포드의 가르침을 받는 존재로 본인을 소개해도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스필버그는 영화의 엔딩을 카메라로 멀어지는 자신으로 마무리한다. 그러니까 새미- 스필버그는 화면에서 서서히 작아진다. 그리고 재치있는 마지막 카메라 움직임은 이걱이 영화임을 드러낸다. 나는 오프닝에서 영화에 대한 두 설명을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편집없이 한 테이크에 담은 선택을 떠올린다. 스필버그는 여전히 영화에 대해 고민하는 청년이고 그래서 서서히 작아지면서 영화를 끝낸다. 그런데 이 선택은, 그를 오히려 더 크게 만든다. 맞다. 그는 대가고 위대한 존재다. 그런데 여전히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를 어떻게 찍을 것인지, 영화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청년이다. 이게 나를 울게 만든다. 내가 할 말은 이것밖에 없다. “정말 고마워.새미!”
13. 문라이트
당신의 인생을 세 만남으로 함축하자면? 문라이트는 달빛과 문,바다로 표현한 영화다. 나는 샤이론을 이해한다. 나 역시 가난한 한 부모 가정에서 자랐고 부모의 불화를 겪었고 가정은 고통이었다. 그리고 성소수자다. 샤이론과의 차이라면 운좋게 학교생활은 즐거웠다는 것? 영화 연출은 단단하고 시적이다. 영화는 세 가지 연으로 구성된 시이다. 영화의 제목은 달빛이지만 영화는 달을 보여주지 않는다. 삶의 구원과 희망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부에서 샤이론이 케빈의 식당을 향할 때 파랑과 붉음이 공존하다. 그게 삶임을 영화는 알고 있다. 1부와 2부는 문이 닫히며 끝난다. 3부는 문을 여는 일이다. 그래서일까 케빈의 식당문을 열 때 특별한 인서트숏이 삽입된 것은. 샤이론의 삶이 3부 이후에도 고될 것임은 모두가 안다. 하지만 아름다운 해변가의 달빛 아래서 소년이 뒤돌아볼 때 나는 그 아이가 샤이론 혹은 블랙을 보았다고 확신하다. 바다에 서면, 달빛 아래에 모두는 푸르다. 우리 모두가 그 아름다운 푸른 빛에 있음을 이 영화는 알려준다. 영화가 달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상관없다. 영화는 시작부터 푸른 빛으로 가득차 있고 달빛은 은은히 우리를 비추고 있다. 그렇게 당신과 나는 푸르게 바닷가에 서있는다.
14. 엉클 분미
엉클 분미에서 나를 매혹시킨 첫 숏은 바로 유령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객관적인 설정숏에 유령이 말그대로 불투명하게 등장하는 순간 나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단어를 체감했다. 영화는 카메라를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고정되어 있는 숏은 그대로 시간을 붙잡아두는 것 같기도 아님 미술적인 감각을 느끼게 만드는 것 같기도 관객이 보고있는 것이 영화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 같기도 하다. 무엇인가 현대미술을 보는 듯 비디오아트를 보는 듯 몽환적이면서 현실적인 이 영화는 분명 21세기 영화가 멀리 나아간 선들 중 하나이다. 영화는 동굴에 들어갈 때는 핸드헬드로 카메라를 움직인다. 그리고 동굴의 어둠 속에서 별들이 반짝이는 것 같은 숏이 등장한다. 그리고 영화는 갑자기 인서트 숏으로 초현실적인 사진들을 넣기도 한다. 이 영화는 역사에 관한 것으로 보이기도 반대로 탈역사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집단적으로 보이기도 개인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적으로 보이고 생각된다. 이런 영화는 매우 드물다.
15. 러시아 방주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영화는 그 완성도에 비해 국내에 덜 알려져 있다. 러시아 방주는 영화사에 기억될 이름인 소쿠로프의 대표작들 중 하나이다. 이 영화는 거의 가능한 카메라의 앵글과 구도들이 거의 다 사용된 영화다. 몽타주 효과로 대변되는 러시아의 영화감독임에도 소쿠로프는 영화 전체가 거대한 롱테이크인 영화를 만들었다. 그 결과로 타르코프스키의 표현대로 시간을 각인시키는 것에 성공한다. 타르코프스키의 말대로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시간을 느끼기 위해 극장에 간다면 분명히 소쿠로프의 영화는 그 증거다.
16. 마더
봉준호는 화면비를 가장 독특하게 쓰는 감독들 중 하나다. 스펙타클해야할 괴물에는 비스차버전을 내밀한 영화인 마더에는 와이드스크린을 사용한다. 그리고 마더의 와이드스크린 사용은 미학적으로 휼륭하고 정확한 선택이다. 왜냐하면 2.35:1 비율은 인물 외의 빈 공간을 창출시키며 이 비어있음은 인물 내면의 공허함을 시각화한다. 다들 이야기하는 마더의 엔딩을 이야기해보자. 그것은 군무이며 실루엣이다. 그 순간 김혜자의 모습은 다른 이들과 구별되지 않으며 그림자들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희미해진다. 김혜자가 내뱉은 “너 엄마 없어?”라는 대사 후 병렬된 취조실들을 보여주는 숏은 한국의 아니, 모든 인간들이 모인 사회 속 부조리를 반영한다. 그의 대외적 대표작은 기생충이겠지만 그의 미학적 최고작은 여전히 마더다.
17. 맨체스터 바이 더 씨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낚시를 나간 평화로운 가족들의 모습으로 문을 연다. 두 형제와 아들, 세 명의 따스하고도 일상적인 풍경. 그런데 감독은 이들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이 장면은 계속 롱숏으로 멀리서 찍혔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아름다운 순간이 지금의 리에게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멀리서 보는 듯한 희미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 다음 현재의 리 플레처가 나타난다. 그의 직업은 아파트 관리인, 무덤덤하고 무기력해보이지만 갑자기 화를 내는 평범해 보이는 인간. 하지만 그는 반지하인 자기 집처럼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존재이다. 눈이 덮은 그의 창처럼 그의 맘에는 차가운 상처로 가득차 있으며 간신히 숨을 쉬고 있다. 그런 그에게 형의 부고를 알리는 소식이 온다. 그리고 리는 어쩔 수 없이 마을로 돌아간다. 이 영화에서 과거의 플래시백과 현재는 쉽게 구별할 수 없다. 영화는 과거장면임을 알리는 표식을 삽입하지 않았다. 리에게 그 과거의 상처는 현재형이며 그가 과거와 현재가 무의미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리가 형의 유언에 대해 아는 순간, 당연히 그는 끔찍한 밤을 떠올린다. 그 때 영화는 리의 얼굴과 과거에 발생한 그의 실수 그리고 창 밖의 풍경을 교차시킨다. 창 밖의 황량한 모습은 리의 마음이며 볼 수는 있지만 닿을 수 없는 창문처럼 회상할 수 있지만 수정이 불가능한 과거다. 리의 상처를 드러내는 과거연출서 리가 맥주를 사기 위해 걷는 장면을 길게 보여준다. 왜 감독은 별다른 일도 없는 이 장면을 트래킹쇼트로 따라가며 길게 찍었을까? 리가 걷는 시간은 곧 리가 하는 후회의 시간이다. 그는 걸었던 그 길과 시간을 얼마나 후회하고 고통스러워했을까. 리가 불에 탄 집을 목격했을 때 그동안 절제된 카메라워크를 사용하던 영화는 가장 극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그리고 감독은 클로즈업을 쓰지 않고 리와 카메라 사이에 장애물을 두거나 뒷모습을 찍는다. 이 때까지 리는 이 거대한 비극을 마주하지 못했다. 그리고 리가 실수를 자백하는 경찰서 장면서 천천히 카메라는 리에게 줌인하고 그 때 리는 본인의 멍청한 실수를 응시한다. 그리고 본인의 자식들이 가장 아프게 떠났음을 알아차린다. 그 다음에 리가 자살을 시도하는 이유는 그제서야 그 상흔을 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평화로운 마을의 풍경을 인서트샷으로 자주 보여준다. 리의 함몰된 마음과 반대되는 아름다운 마을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리의 슬픔을 묘사하는 동시에 리와의 거리감을 표현한다. 장면과 이질적으로 쓰인 클래식곡들도 같은 의도이다. 영화는 관객이 리에게 완전히 마음을 몰입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 이유는 관객을 포함한 그 누구도 리의 고통을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리의 슬픔은 온전히 리만의 것으로 두는 사려깊음이다. 다 알고 있다는 오만한 공감이 아니라 그저 단단히 옆에서 같이 견디는 애정어린 응원이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태도이다. 리는 형의 선물을 발견하고 아주 잠시 웃는다. 그 때 우리는 여기서 끝나기를 염원한다. 그토록 아팠던 리가 희망을 발견하고 나아가기를 바란다.
하지만 리는 전부인을 만나고 우리는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벗어날 수 없는 과거를, 극복할 수 없는 고통을 본다. 가장 내밀하고 용기 있는 대화를 하는 둘 사이에도 벽이 만든 수직선이 있다. 그 용기조차도 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뜻이다.
리가 패트릭에게 한 말, '버틸 수가 없어'는 가장 진실되고 정확한 대사이다. 쿨해 보이던 패트릭이 냉동고기를 보자 무너지던 것처럼 리는 그 마을의 사소함조차 견딜 수 없다. 마을의 풍경을 촬영할 때 사람을 찍지 않고 롱숏으로 건물들만 담은 이유이다. 리는 관찰자처럼 멀리 떨어져있을 때나 겨우 견딜 수 있다.
시간이 흘러 장례식 날이다. 형이 떠났고 전부인의 자식이 삶에 도착했다. 겨울은 끝나가고 봄은 오고 있다.
리가 미래를 이야기하고 사랑하는 조카 패트릭과 남자들이 하는 바보같은 이야기들을 한다. 그리고 그가 바다를 바라보며 패트릭과 내밀한 대화를 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겨울이 끝나가는 장면으로 끝났지만 영화의 엔딩은 희망이 아니다. 결국 영화에는 겨울만이 있다는 뜻이니까. 이 영화에서 봄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마 앞으로도 리의 인생에 봄은 올 수 없다. 봄이 올 수 없는 시렵고 냉혹하고 긴 겨울을 그는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땅은 조금 녹았다.
18. 패딩턴 2
당신이 반려동물과 함께 살지 않는다면 당장 같이 살기를 추천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패딩턴 시리즈를 보라. 벤 위쇼의 훌륭한 연기와 더불어 패딩턴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영화고 캐릭터다. 바야흐로 배드애스의 시대에 이 다정다감하고 예의바른 이방인은 우리 사회에 따스한 질문을 던진다. 맞다. 패딩턴은 동화다. 말하는 곰이 나와서가 아니다, 또 사람들이 말하는 곰을 보고도 놀라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 곰을 입양한 가족들이 말하는 곰을 팔아넘기지 않아서도 아니다. 이 작품이 동화인 이유는 힘들이지 않고 쉽게 마음을 가져가고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의 후반부만큼 스릴 넘치면서도 재밌는 클라이맥스를 21세기에 본 적없다. 그리고 이 엔딩만큼 모든 면에서 따스하고 모두에게 완벽한 결말도 목격한 적 없다. 이 영화는 봄날의 곰 같다. 마치 봄날에 놀고 있는 우리에게 다가와 놀아달라는 아기곰 같다. 그런 곰은 없다고? 맞는 말씀이다. 하지만 패딩턴은 그런 곰이 있는 사회와 가족을 꿈꾸게 한다. 이 영화는 자연스럽게 사랑스럽고 다정하다. 판타지라고 똑똑한 이들은 지적하겠지만 멍청한 나는 오늘도 내 고양이에게 츄르를 주며 그런 세상을 꿈꾼다.
19. 자객 섭은낭
자객 섭은낭은 오즈 야스지로가 찍은 무협영화같다. 허우샤오셴이라는 대가의 영화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납득이 가는 평이기도 하지만 혹자는 게으른 평이 아니냐고 지적할 것이다. 이 영화의 미는 수직과 수평의 움직임에도 있고 흑백/컬러 그리고 화면비를 오가는 자유로움에 있기도 하고 오즈 야스지로 식의 필로우 샷에 있기도 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숏은 목욕을 하면서 회상하는 섭은낭의 플래시백인데 이 때의 인물들을 찍는 롱숏은 은낭의 기억의 희미함을 우아하게 표현한다. 이런 방식도 대단하지만 내가 이 영화에 완전히 매혹된 것은 끝난 후였다. 왜 노래가 나오는 장면에 화면비가 길어질까 고민하던 나는 답이 너무나 간단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인이 연주하는 악기가 수평으로 길기 때문이었다. 이 간결한 투명함은 이 작품이 도달한 고고한 높이다.
20. 홀리 모터스
이 영화의 오프닝은 아름답고 시적이다. 그렇다 이 영화는 산문이 아니라 시에 가까운 영화다. 레오스 카락스는 본인의 이미지를 가지고 영화를 진행하는 소수의 예술가다. 솔직히 지루했고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두 장면에서 이 영화가 걸작임을 깨달았는데 처음은 바로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장면이다. 그 때의 움직임, 운동감, 배우들의 육체성, 리듬감은 마치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의 동작에 자크 타티 영화에 그리고 비브르 사 비의 안나 카리나가 추던 춤에 진 켈리의 탭댄스에 버금간다. 그리고 엔딩이다. 엔딩, 엇비슷한 부감에 멈추어있는 기계들의 대화. 축제가 끝나고 마주한 죽음. 이 영화는 삶에 대한 찬가와 죽음에 대한 통찰이 공존하는 걸작이다.
21. 소셜 네트워크
데이비드 핀처는 우리 세대의 마틴 스콜세지이고 아론 소킨은 우리 세대의 폴 슈레이더이며 소셜 네트워크는 우리 세대의 택시 드라이버다. 신들린 편집과 리듬감. 여러 사건들과 인물들을 거쳐서 결국 주인공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굴절력. 모두 핀처가 대가이 경지에 올랐음을 보여준다. 영화에 재밌는 쇼트는 미니어처와 광각으로 우스꽝스럽게 묘사된 조정장면이다. 여기서 감독은 전통을 조롱한다. 하지만 클럽 씬에서의 화려한 조명은 새로움에 대한 경고를 함유한다. 오프닝의 대화에서 감독은 ‘너는 개자식이야’ 라는 대사를 들을 때 싱글샷을 잡는다. 그리고 엔딩에서 변호사가 “너는 개자식이 아니다’ 라는 대사를 한 후 영화는 처음으로 정면 클로즈업숏을 사용한다. 핀처가 매우 신중히 클로즈업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인간은 개자식인가 아닌가. 정확히 말해 인간은 무엇인가
22. 업
업은 그 오프닝만으로 완벽한 애니메이션이다. 그리고 칼이 사진첩을 넘기는 장면으로 완전해졌다. 나는 오프닝에서 낙태 소식을 들은 후의 수평 트래킹숏이 주는 아픔을, 후반부의 디졸브와 반복된 언덕 장면들 사이의 차이가 전달하는 감정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업은 아름다운 영화다. 그리고 올바른 영화다. 영화는 꿈의 가치를 전달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일상의 가치를 표현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일상은 매일매일이 모험이다. 그러니 붙잡아라.
23. 패터슨
업과 유사한 영화다. 이 영화는 일상이 된 예술, 예술이 되는 일상의 미학을 보여준다. 아담 드라이버의 사려깊은 표정연기에 힘입어 이 영화는 반복의 미학을 실현한다. 짐 자무시는 비슷한 장면들을 반복한다. 하지만 반복되는 것은 차이이다. 영화는 일상 속 차이의 반복을 포착하고 담아낸다. 매번 반복되지만 다른 대화와 일상들 거기에 삶이 있다.
24. 토리노의 말
벨라 타르는 아마 마클로시 얀초 이후 가장 유명한 헝가리 감독일 것이다. 토리노의 말은 그가 새로 쓴 창세기다. 그는 여기서 창세기를 뒤집는다. 예로 영화의 마지막은 빛인데 창세기의 첫 구절을 떠올려보라. 타르는 여기서 롱테이크로 거의 모든 장면들을 구사한다. 왜일까? 롱테이크는 생략하지 않는다. 편집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 삶과 유사하다. 우리의 인생과 일상도 편집할 수 없으니까. 분명히 토리노의 말은 묵직한 실존과 구원의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자질구레한 우물에서 물을 뜨는 일, 식사하는 일, 이사하는 일,옷을 입고 벗는 일을 잊지않고 차분히 또박또박 보여준다. 스티븐 그린블랫은 셰익스피어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의 상상력은 익숙하고 친밀한 것들에도 가까이 놓여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는 비범한 것들의 중심에서 평범함을 드러내기를 좋아했다…. 셰익스피어의 상상력은 일상의 범주 위로 광활히 높이 날아가지도 않았고 형이상학의 장대한 홀에 들어가서 매일매일의 삶을 뒤로 한 채 문을 닫지 않았다.”
이 점이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인류의 정점에 올린 이유다. 삶의 묵직한 질문과 일상의 평범함과 고됨이 토리노의 말에 깃들어있다. 그 합일이 이 영화가 위대한 이유다.
25. 폭스캐처
폭스캐처는 결핍과 고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 그리고 미국이라는 국가의 초상을 담은 작품이다. 실패한 구원의 이야기이며, 무시무시하고도 깊은 걸작이다. 인간과 체제 모두가 빠져나올 수 없는 균열을 조용히 응시하는 영화다. 결국 이는 이해받고자 했던 존재들의, 끝내 이해받지 못한 이야기다. 존 듀퐁은 결핍된 존재다. 그는 인정을 갈망하고, 고독을 채우기 위해 공허한 가치에 집착한다. 미국, 롤모델, 애국심 같은 단어로 자신을 감싸지만, 실상은 텅 비어 있다. 그가 처음 등장할 때, 서재에서 마크와 마주하는 장면은 롱숏으로 찍힌다. 이 구성은 그의 고립감, 약함, 실존의 초라함을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카메라는 이미 그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 마크 또한 존과 닮은 사람이다. 그들은 모두 타인의 그늘 아래 있다. 마크는 형 데이브, 존은 어머니의 그림자 아래 존재한다. 둘 다 친구가 없고,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한다. 마크가 반복적으로 거울을 바라보는 장면은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고 싶다는 심리를 드러낸다. 영화는 마크를 좁은 공간에 가두거나, 나뭇가지로 둘러싸인 프레임 안에 위치시킨다. 존은 무기를 수집하고, 조상의 초상화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둘 다 무언가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와 고독을 안고 있다.존과 마크의 대화는 그 유사성을 더 분명히 보여준다. 평범한 대화는 미디엄숏으로 촬영되다가, “나를 친구처럼 대해달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클로즈업으로 전환된다. 둘의 결핍이 서로를 향해 반응하는 장면이다. 존이 고백할 때도 클로즈업이 들어간다. 영화가 그의 핵심을 고독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점을 시각적으로 강조하는 순간이다.존과 어머니의 관계는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어머니는 단 두 번 등장하지만, 그의 결핍과 불안, 욕망은 모두 그로부터 비롯된다. 존이 어머니에게 억눌린 후 체육관에 홀로 있는 장면에서는 익스트림 롱숏과 측면 클로즈업이 연속으로 등장한다. 조명을 최소화한 이 장면은 그의 초라함과 고독을 명확히 드러낸다. 측면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는 방식은 인물의 불완전함을 시각화하는 연출이다. 이 구도는 어머니가 죽은 이후에도 반복된다.데이브는 존에게 질투와 선망의 대상이다. 존이 원하지만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데이브는 자연스럽게 지니고 있다. 세계선수권 장면에서, 존은 데이브를 바라보다 장애물 뒤편에서 찍힌다. 카메라와 존 사이에는 사람들의 실루엣과 구조물들이 놓여 있다. 존과 그의 이상향 사이의 거리, 그리고 넘을 수 없는 벽이 시각적으로 표현된다. 그는 데이브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이 영화의 색조는 매우 절제되어 있다. 햇빛은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전체적으로 어둡고 청회색 계열의 화면이 이어진다. 인물들을 빛을 거의 죽인 상태로 촬영함으로써, 그들의 어두운 내면을 형상화한다. 감정이 숨죽이고, 침잠한 세계를 은근하게 드러내는 색감이다.폭스캐처라는 공간은 단순한 스포츠 팀이 아니라, 듀폰 가문의 사유지이자 미국이라는 신화의 상징이다. 존과 마크는 이 공허한 공간에서 유사한 결핍을 공유하며 무너진다. 반면 데이브와 어머니는 이 허상을 꿰뚫어보는 인물이며, 그들만이 죽음을 맞는다. 이들의 죽음은 우연이 아니다. 허위의 가치와 결핍의 체계가 살아남고, 진실을 지닌 자들이 사라진다. 레슬링은 미국의 국기이며, 1:1의 고독한 스포츠다. 개인의 고립된 투쟁이라는 면에서 이 영화는 <성난 황소>를 떠올리게 한다. 육체를 갈아 넣고, 자신과 싸우며, 결국 무너지는 남성성의 초상이 중첩된다.존이 데이브를 죽인 이유는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다. 마크가 떠난 순간, 존은 다시금 자신의 본질을 자각한다. 마크는 존과 같은 결핍을 지닌 존재였고, 그의 유일한 거울이었다. 그 거울이 사라지자, 존은 자신이 만든 허상의 왕국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다. 이는 본질을 견디지 못한 자의 파국이다.하지만 이 모든 해석은 추측일 뿐이다. 영화는 판단하지 않는다. 관찰하고, 응시하고, 기다린다. 클로즈업과 롱숏 사이를 오가며, 조용히 인간이라는 존재를 바라본다. 결핍과 고독 속에서 몸부림치는 인간의 실패를 정직하게 지켜본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영화가 주지 않는다. 오직 관객의 몫으로 남긴다. 영화는 묻는다. 인간은 완전히 채워질 수 있는 존재인가. 결핍은 외면한다고 사라지는가. 이 조용한 질문들이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돈다.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는 것으로밖에, 도달할 수 없다.
1. 하나 그리고 둘 +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인간에게는 영화가 필요하다. 당신이 왜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그저 당신이 에드워드 양의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과 하나 그리고 둘은 시간이고 얼굴이고 거리감이며 빛과 어둠이며 삶 그 자체이다.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은 부정확하고 불성실한 태도이지만 고령가는 모든 장면들이 아름답다. 이 영화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이 끔찍한 세상에서 너무나 연약한 존재들을 액자틀의 그림자로 시각화할 때 오는 그 슬픔을, 소년이 빛을 내는 전구를 깨트릴 때의 아픔을, 혹은 라디오를 듣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뭐라고 말해야할까. 이럴 때 언어는 부박하고 너절해서 불필요하다. 영화는 가까워지기보다는 멀어진다. 핵심적인 장면서 클로즈업이 아니라 롱숏을 사용한다. 영화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근사치로만 삶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 그리고 둘을 나는 고등학생 때 독립 극장에서 보았다. 영화는 미친듯이 지루했다. 사람들은 다 잤다. 그리고 영화가 끝났을 때. 나는 한 가지 진실을 깨달았다. 나는 평생 이 영화를 기억하리라는 것을. 그렇게 영화는 평일의 생활이자 주말의 휴식이 되었다.
다시 앞의 질문을 다시 해보자. 왜 인간은 영화를 필요로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삶과 생존은 다르며 그 간극을 이 영화는 메운다. 우리는 이런 영화들이 있기에 살아간다. 하나 그리고 둘. 계속 이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것. 살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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