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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REWIND II: 분리를 화합으로, Sly & The Family Stone

title: [회원구입불가]greenplaty2015.07.17 15:02추천수 7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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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WIND II] 분리를 화합으로, Sly & The Family Stone


가만 보면, 음악 감상의 즐거움과 완성도를 충돌하는 개념쯤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만연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음악은 음악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일까? 이런 물음에 나는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 이하 패밀리 스톤)의 음악을 그 해답으로 제시한다.
 
다분히 대중적인 성향의 소울 발라드에서 시작해 흥겨운 댄스 음악을 거쳐 음울한 분위기가 운무처럼 휘감는 훵크(Funk)까지, 폭넓은 영역을 아우르는 패밀리 스톤의 음악은 대개 사회·정치적 가사로 채워져 있다. 이들의 음악은 60·70년대 흑인 음악가들이 그랬듯 인종적, 성적 차별에 반기를 든 것이었지만, 단순히 음악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공허한 이상으로 가득했던 여타 그룹과는 달랐다. 이들의 태도는 이미 그룹의 구조부터가 현실 참여적이었다. 백인과 흑인, 여성과 남성, 친족과 외부인이라는 대립적인 관계로 구성된 훵크 밴드 패밀리 스톤의 구조는 이들이 음악에서 그려낸 이상세계의 현실화였다. 당시까지 세상을 지배했던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을 깨뜨려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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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밀리 밴드에서 혼성·다인종 밴드로

 

패밀리 스톤의 리더 슬라이 스톤(Sly Stone)의 본명은 실베스터 스튜어트(Sylvester Stewart)다(슬라이라는 예명은 지인들이 그의 이름 실베스터(Sylvester)를 슬라이베스터(Slyvester)라고 잘못 적은 것에서 유래했다). 어릴 적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실베스터와 그 형제들은 스튜어트 포(The Stewart Four)라는 패밀리 밴드를 결성한다. 50년대에 스튜어트 포는 몇몇 장의 로컬 싱글을 발표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실베스터는 이런저런 밴드에서 활동을 이어갔는데, 그중 두왑 그룹 비스케인즈(The Viscaynes)는 그의 운명을 바꾸었다. 흑인 실베스터와 필리핀인 멤버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모두 백인이었던 것이었다. 다인종으로 구성된 이 밴드는 훗날 결성하는 패밀리 스톤의 모델이 된다.
 
우리 나이로 20세가 되던 해에 실베스터는 KSOL 라디오 방송국의 DJ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슬라이 스톤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KSOL은 흑인음악 방송국이었지만 슬라이 스톤의 취향은 여기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흑인음악뿐만 아니라 백인들의 록 음악도 방송했다. 이런 잡식적인 음악 취향은 흑인의 소울 음악과 백인의 록 음악을 혼합한 훵크 스타일을 개발하게 되는 자양분이 된다. 폭넓은 음악적 감식안을 가졌던 그는 음악가로서의 재능도 인정받아 어텀 레코즈(Autumn Records)는 그를 프로듀서로 발탁했다. 이때 작업한 곡 중엔 바비 프리먼(Bobby Freeman)의 "C'mon And Swim"이 대표적이다.
 
슬라이 스톤은 어텀 레코즈에서 곡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이는 성공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이 무렵 그는 슬라이 앤 더 스토너즈(Sly & The Stoners)를, 그의 동생 프레디 스튜어트(Freddie Stewart)는 프레디 앤 더 스톤 소울즈(Freddie & The Stone Souls)를 결성했다. 슬라이 스톤과 프레디 스튜어트는 두 밴드를 결합하기로 하는데, 이 결과로 탄생하는 것이 패밀리 스톤이다. 패밀리 스톤은 주류 음악계 최초의 혼성·다인종 밴드였다. 기존의 밴드에서 슬라이와 프레디 스튜어트는 둘 다 리드 기타리스트였으므로 둘 중 한 명은 리드 기타 자리를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그런데 의외로 쿨하게 슬라이 스톤은 전자 오르간을 포함해 다른 악기를 두루 연주하겠다며 리드 기타 자리를 프레디 스튜어트에게 넘긴다. 비틀즈(The Beatles)의 기타 자리를 두고 존 레논(John Lennon)과 다투다가 매니저의 설득으로 어쩔 수 없이 베이스를 연주하기로 했던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의 경우와는 달리 훈훈한 끝맺음이다.
 
에픽 레코즈(Epic Records)에서 1967년 발표한 데뷔 앨범 [A Whole New Thing]은 평단의 찬사를 받았지만, 상업적으론 처참히 실패했다. 대중들과 연결할 수 있는 고리가 거의 없던 탓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실패는 타이틀곡이 100위권에 턱걸이로 안착하는, 그런 식의 이야기가 아니다. 앨범이고, 싱글이고 차트에 오른 것이 무엇 하나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실패가 어느 정도였는지조차 정확히 가늠할 수가 없을 정도다. 상황의 심각성을 느낀 프로듀서 클라이브 데이비스(Clive Davis)는 슬라이 스톤을 만나 히트송을 만들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렇게 해서 슬라이 스톤이 히트를 염두에 두고 쓴 "Dance To The Music"은 싱글 차트와 알앤비 차트 모두에서 톱10에 진입했다. 그러나 이 곡이 수록된 동명의 소포모어 앨범 [Dance to the Music]의 판매량은 여전히 좋지 않았고, 이어진 3집 [Life]는 앨범의 완성도와는 무관하게 히트 싱글조차 배출하지 못하며 저조한 판매량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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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시대의 시작


레리 그레이엄이 직접 선보이는 슬래핑 주법
 
그러나 앨범 [Stand!]가 발표되자 모든 상황은 역전되었다. 요즘의 CF와 영화에서도 자주 삽입되는 사이키델릭 소울 넘버 "Everyday People"은 빌보드 싱글 차트와 알앤비 차트에서 동시에 넘버원을 기록했고, 앨범은 앨범 차트에서 13위, 알앤비 앨범 차트에선 3위를 기록했다. 이 앨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혁신은 베이스 연주법이다. 밴드의 베이시스트 레리 그레이엄(Larry Graham)은 어릴 적 자신의 밴드에 부재했던 드러머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드럼 소리를 모방한 주법을 개발했는데, 그게 바로 슬래핑(Slapping)이다. 그의 슬래핑 기술에 대해 어떤 이는, "레리 그레이엄의 엄지는 훵크가 독자적인 장르 음악으로 인정받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말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공연하는 패밀리 스톤

 

이들의 음악은 소울/훵크 음악에 심취했던 흑인들과 록에 열광했던 백인들을 동시에 충족시켰다. 이 기세로 패밀리 스톤은 우드스탁 페스티벌(Woodstock Festival)에 참여하기에 이른다. 비록 패밀리 스톤은 흑인들이 다수를 이루는 그룹이었지만, 사이키델릭 록을 수용한 훵크 음악, 자유와 평등을 향한 투쟁, 각 멤버가 악기를 연주하는 밴드라는 요소를 갖춘 패밀리 스톤은 히피들의 집결지인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일부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페스티벌의 들러리 정도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패밀리 스톤은 우드스탁에서 빛나는 스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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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점에서의 흑과 백

 

[Stand!]를 통해 그룹이 커리어의 정점에 올라선 상황에서 슬라이 스톤이 마약중독의 기분파가 된 것은 팀에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그는 예정된 공연의 ⅓을 '펑크'냈다. 그나마 등장한 공연장에서도 무의미하게 연주하거나, 쓰러지거나, 도중에 퇴장해버리기 일쑤였다. 마약에 빠진 슬라이 스톤은 음악 활동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소속사의 임직원진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클리이브 데이비스는 슬라이 스톤을 독촉해서 싱글을 하나 작업하게 했고, 그렇게 해서 슬라이 스톤은 "Thank You (Falettinme Be Mice Agin)"을 발표한다. 이 곡은 싱글 차트와 알앤비 싱글 차트에서 넘버원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이상의 눈에 보이는 진척은 없었다. 조급해진 레이블은 이 곡을 실은 베스트 앨범을 작업하기 시작한다. [Stand!]에 수록된 싱글 "Everyday People"과 "Stand!", 그리고 초기의 히트곡 "Dance To The Music"을 제외하면 히트곡은커녕 대중들에게 알려진 곡도 없었지만, 레이블은 "Thank You (Falettinme Be Mice Agin)"와 이 싱글 앨범의 비사이드(B-Side, 음반의 뒷면)에 수록되었던 "Everybody Is A Star"와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연주해서 큰 호응을 이끌어냈던 "Hot Fun In The Summertime"을 채워 넣어 베스트 앨범을 제작했다. 베스트 앨범 [Greatest Hits]는 앨범 차트 2위, 알앤비 차트 넘버원이라는 종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대형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대중들이 패밀리 스톤의 차기작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높았는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는 기록이다.


♬ Sly & The Family Stone - Thank You (Falettinme Be Mice Agin)


그러나 사실 슬라이 스톤이 녹음 작업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레코드 플랜트(The Record Plant)라고 불리는 스튜디오에서 녹음하곤 했었다. 침대가 있었고 무선 마이크도 있어서 그는 마약에 취한 상태로 누워서도 내키는 대로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할 수 있었다. 이때 그의 작업방식은 [Stand!]와는 판이했다. [Stand!] 때에는 그룹 멤버들이 모여 함께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원 룸(One Room) 레코딩 방식이었다면, 이때 그는 혼자 작업을 하고 싶어 했다. 혼자 작업을 하거나 밴드 멤버를 한 명씩 데리고 와서 녹음을 한 위에 다시 녹음하는, 이른바 오버더빙(Overdubbing) 방식을 택한 것이었다. 잦은 오버더빙 방식 활용과 지속해서 테이프에 가한 수정은 음질의 악화를 초래했다.

 

이때 슬라이 스톤이 겪었던 스트레스는 엄청났다. 당시 흑인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가했던 흑표당(Black Panther Party)은 슬라이 스톤에게 백인 연주자들과 매니저를 쫓아내고 흑인 연주자를 영입하라며 압박했고, 소속사는 그들에게 대중적인 히트곡을 빨리 내놓으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때 패밀리 스톤은 심각한 내부분열을 겪고 있었다. 이전까지 조짐만 보였던 스튜어트 형제들과 나머지 멤버들 간의 대립이 심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슬라이 스톤은 밴드의 드러머 그렉 에리코(Gregg Errico)를 대신할 방법을 모색했고, 그런 고민의 결과로 리듬박스를 사용하게 된다. 드럼머신의 앞세대 장비인 리듬박스를 사용한 것은 음악계의 혁명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슬라이 스톤은 스무 개에 달하는 악기를 직접 연주했다. 어찌 보면 오버더빙 방식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는 아이크 터너(Ike Turner), 바비 워맥(Bobby Womack), 빌리 프레스턴(Billy Preston)과 같은 음악가들을 동원해서 음악에 살을 붙였다.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되는 [There's A Riot Goin' On]은 앞섰던 앨범 [Stand!]와는 현저하게 달랐다. 희망을 품은 낙관주의라는 60년의 사조를 담았던 [Stand!]와는 달리 [There's A Riot Goin' On] 속 음악은 앨범의 제목처럼 불길하고 암울했다. 슬라이 스톤은 "기쁘지도 즐겁지도 않은 현실 속에서 마치 그런 척 행세하고 싶지 않다."고 담담하게 자신의 음악관을 풀이했다. [There's A Riot Goin' On]은 앨범 차트와 알앤비 앨범 차트 모두에서 넘버원에 올랐고, 앨범의 타이틀인 "Family Affair" 또한 싱글 차트와 알앤비 싱글 차트에서 동시에 넘버원을 기록했다.

 

음안뿐만 아니라 그룹의 구성으로도 표출했던 패밀리 스톤의 철학은 아주 단순하게 보이는 앨범 커버에서도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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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s A Riot Goin' On] 앨범 커버 


"커버의 검은색은 색의 부재를, 흰색은 모든 색의 조합을, 붉은색은 모든 사람이 가진 것(피)을 의미한다. 성조기의 별 대신 태양을 넣은 건, 별은 사람들이 달성해야하는 그 무엇으로 여기지만, 이 세상에는 이미 무수히 많은 별이 존재한다. 하지만 태양은 하나다. 그리고 태양은 절대 사라지지 않으며 항상 당신과 함께한다."

 

평단은 '패밀리 스톤이 이 앨범을 통해 '훵크 음악의 진지한 면모'를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대중·상업적 성공과 평단의 찬사까지 이끌어낸 이 앨범은 음악잡지 롤링 스톤(Rolling Stone)이 선정한 '위대한 명반 500선'에서 99위에 올랐다([Stand!]는 118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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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 스톤의 몰락

 

이어진 두 앨범 [Fresh]와 [Small Talk]도 상당한 성공을 이뤄냈지만, 그룹은 혈흔으로 가득했다. 이들의 불성실한 태도 때문에 공연이 잡히지 않았으며, 설령 일정이 잡히더라도 이들을 찾는 팬은 극소수였다. 재정적 어려움과 내부분열로 그룹 멤버들은 하나씩 탈퇴하기 시작했고, 슬라이 스톤은 결국 솔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솔로 커리어라고 했지만, 그는 여전히 패밀리 스톤이라는 이름을 유지한 채 두 장의 앨범을 추가로 발표했다. 하지만 과거의 영광은 재현하지 못했다.

 

그 이후의 슬라이 스톤의 모습은 애처로움, 그 자체였다. 음악계를 이끌던 그는 이제 남에게 의지해야하는 신세가 되었다.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의 공연에 함께하며 기회를 노려야 했다. 이후에 조지 클린턴은 슬라이 스톤의 앨범을 함께 작업하려고 했으나, 이땐 조지 클린턴도 이미 '퇴물' 취급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조지 클린턴이 워너 브라더즈(Warner Brothers)와의 계약이 해지되면서, 슬라이 스톤의 앨범도 백지화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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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 스톤이 생활하고 있다고 알려진 캥핑카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2011년, 뉴욕 포스트(New York Post)는 슬라이 스톤이 캘리포니아의 캠핑카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보도했다. 어느 부부가 그에게 먹을 것을 챙겨다 주고 있으며 샤워도 그 부부의 집에서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슬라이 스톤의 변호인은 이 보도는 사실이 아니라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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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회 그래미 어워즈

 


슬라이 스톤에게 헌정된 공연


2006년에 열린 제48회 그래미 어워즈(Grammy Awards)에선 패밀리 스톤 헌정 공연이 있었다. 데이브 샤펠(Dave Chappelle)이 MC를 봤으며, 애덤 리바인(Adam Levine), 씨애라(Ciara), 윌아이엠(will.i.am), 조스 스톤(Joss Stone), 존 레전드(John Legend), 나일 로저스(Nile Rodgers) 등의 스타 음악가들이 무대에 올라 패밀리 스톤의 대표곡을 열창했다. 그 도중에 (슬라이 스톤을 제외한) 패밀리 스톤 멤버들도 등장했다. 얼마 지나고 나서 그들이 슬라이 스톤을 호명하자, 그 또한 무대에 등장했고 헌정 공연의 일부가 되어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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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밀리 스톤이 남긴 것

 

패밀리 스톤의 음악은 훵크, 록, 힙합, 디스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재즈도 마찬가지였다.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가 퓨전 재즈라는 장르를 개척하게 된 가장 큰 영감은 패밀리 스톤과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의 음악이었다. 그리고 이 영감은 마일즈 데이비스가 [On the Corner]를 제작하는 결과를 낳았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밴드에서 건반을 연주했던 허비 행콕(Herbie Hancock)도 슬라이 스톤의 음악에 충격을 받고 [Head Hunters]라는 재즈훵크 음반을 발표한다. 일회성으로 끝난 게 아니라, 허비 행콕은 아예 헤드헌터즈(The Headhunters)라는 전설적인 재즈훵크 밴드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허비 행콕은 패밀리 스톤의 음악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현실적인 메시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훵크 음악을 개척, 타악기적인 베이스 기타 주법, 사회·정치적 메시지, 드럼머신의 활용 등등, 패밀리 스톤이 음악계에 가져온 혁신을 셀 수가 없을 정도다. 하지만 나는 이 밴드를 단순한 음악 그룹으로 한정 지어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이들은 혁명가였다. 차별과 구분을 지워내려 했던 이들의 노력은 이제 현실의 너무나도 당연한 일부분이 되었다.

 

지금 와서 잘 생각해보면, 성별과 인종의 구분은 애초부터 슬라이 스톤의 고려대상이 아니었던 것 같다. 슬라이 스톤이 그렸던 평등은 인종과 성별 따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정말 순수한 의미의 평등이었을 테니 말이다.

 





추천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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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밀리 스톤의 경우엔 따로 앨범을 추천받을 필요가 없다. 누구에게 묻건 대답은 거의 동일할 테니 말이다. 아마 이구동성으로 그룹의 전성시대를 연 [Stand!]와 비록 약물에 중독된 폐인의 상태였지만, 음악적 완성도는 최고조에 달했던 [There's A Riot Goin' On]을 들어볼 것을 권유할 것이다. 전자의 음악이 희망적이고 밝은 소리라면 후자의 음악은 침체되고 우울하다. 슬라이 스톤의 조울증적인 음악 스타일을 가장 대비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두 장의 음반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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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에 발매된 [Greatest Hits]도 반드시 들어봐야 한다. 베스트 음반이라고 해봐야 데뷔 앨범에서 [Stand!]까지 이어진 네 장의 앨범 수록곡들을 몇 개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여기엔 "Hot Fun In The Summertime", "Everybody Is A Star"과 "Thank You (Falettinme Be Mice Agin)"이 수록되어 있다. 이 세 신곡의 존재만으로도 [Greatest Hits]는 반(半) 정규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다. 패밀리 스톤에게 헌정된 앨범도 참고해보자. "Everyday People"의 유명한 구절("Different strokes for different people")을 패러디해서 제목을 지은 [Different Strokes By Different People]에는 더 루츠(The Roots), 마룬 파이브(Maroon 5), 존 레전드, 조스 스톤, 윌아이엠 등이 참여했다.

 





주요 샘플링 사례



Dr. Dre - Deep Cover (Feat. Snoop Dogg) (1992)
원곡: Sing A Simple Song (1968)



 

Brandy - Sittin' Up in My Room (1995)
원곡: Thank You (Falettinme Be Mice Elf Agin) (1969)



 

The Black Eyed Peas - Weekends (Feat. Esthero) (2000)
원곡: Family Affair (1971)


 


Wu-Tang Clan - Windmill (Feat. Cappadonna) (2007)
원곡: Brave & Strong (1971)



글 | greenpla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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