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음악은 많아졌고, 기억에 남는 음악은 적어졌다. 그러나 가장 억울한 건 지나간 줄도 몰랐고, 기억에 남을 기회조차 없던 숨은 보석을 뒤늦게 발견했을 때다. 그런 슬픈 순간을 막기 위해 힙합엘이 매거진 에디터들이 열 장의 앨범을 준비했다. 행여나 잊으셨을까 싶어, 한 번씩은 꼭 들어봤으면 하는 마음에 추천하는 2021년 7월의 보석 같은 앨범들이다.
누구나 인생을 살다 보면 예기치 못한 시련을 겪기 마련이다. 이미 오케스트라와 소울의 근사한 합을 선보이는 건 물론, 두 장의 좋은 정규 앨범으로 평단의 찬사를 받았던 로라 음불라(Laura Mvula) 역시 그랬다. 로라의 전 레이블은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이메일을 통해 방출 통보를 내렸고, 그녀는 상심해 긴 휴식기를 가지게 된다. 우여곡절을 겪은 로라 음불라가 들고 온 건 1980년대의 포스트 디스코 사운드다. 로라 음불라는 자칫 과잉처럼 느껴지는 사운드와 직선적인 보컬 운용을 통해 음악 업계에 상처받은 자신의 마음을 토해내고,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을 치유한다. 발매된 지 채 몇 달도 안 된 앨범이 올해 머큐리 어워즈(Mercury Awards) 부문에 이름을 올린 것도 개인과 음악의 맥락이 맞물려 많은 이에게 감흥을 자아낸 덕분일 거다.
뻔하디뻔해진 씬 안에서, 과연 새로운 무언가가 나올지에 관한 의심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와중, 주목할 필요가 있는 신선한 신예가 등장했다. 싱글 “Touchable”을 통해 1,000만 회의 유튜브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는 렘블(Remble)은 비트의 때깔이 곧 퀄리티를 좌우하는 흔한 신예 래퍼들과는 동떨어져 있다. 출신지를 따른 웨스트 코스트 스타일의 사운드에는 별 주목할 부분이 없다고 할 수 있지만, 특이점을 만들어내는 건 렘블의 전달력. 커버 아트가 전달하는 분위기처럼 호전적이고 콧대 높은 가사를 뱉되, 아무리 내용이 달아올라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냉철한 톤과 무심한 듯 쳐내는 라이밍이 기묘한 중독성을 만들어낸다. 게다가 분명 흔한 ‘트랩 놈들’ 테마인데, 문장의 청아한 완성도 덕에 마치 도서관 안에 꽂힌 마약 제조법을 합법적으로 읽는 느낌이다. 선배 블루페이스(Blueface), 올블랙(ALLBLACK) 등이 부흥시킨 ‘오프-비트’ 스타일과 시인 수준의 필력이 만들어낸 영리한 트래퍼의 훌륭한 첫 발걸음.
브리트니 하워드(Brittany Howard)는 본인의 첫 솔로 앨범인 [Jaime]를 통해 지난 가족사와 자신의 인생, 음악적 여정을 풀어 낸 바 있다. 이번에 발표한 앨범은 일종의 차트 성공 공식처럼 굳어져 버린 인스턴트 리믹스 형식과는 달리, 뚜렷한 개성과 음악성을 자랑하는 음악가들을 한데 모아 원곡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해 냈다. 대표적으로 차일디시 감비노(Childish Gambino)는 “Stay High”에 건반 사운드와 함께 본인의 보컬을 얹었고, 정글(Jungle)은 “History Reports”에서 후반부에 더욱 역동적인 사운드를 더해 몰입감을 준다. 여기에 시드(Syd)는 “Baby”, 로라 음불라는 “Run To Me”에 참여해 각각 LGBTQ, 1980년대 포스트 디스코 사운드 등 개인의 맥락을 앨범에 더하기도 한다. 여러모로 브리트니 하워드, 그리고 참여진들의 음악 세계를 파악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감흥이 전해질 앨범.
차일드(Chiiild)는 대중음악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음악가들로 이뤄진 캐나다의 익스페리멘탈 소울 그룹이다. 이들은 각각 클로이 앤 할리(Chloe X Halle), 빅토리아 모넷(Victoria Monet), 이모셔널 오렌지스(Emotional Oranges)의 앨범에 참여하며 다양한 장르를 시도해 왔다. 마침내 발표한 첫 정규 앨범에서는 10여 년 간의 음악적 여정을 토해내듯 풀어낸다. 특히 “Weightless”에 담긴 입으로 만든 트럼펫 소리나, “Wasting Time”에 담긴 다이나믹한 전개에서 무르익은 이들의 음악적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앨범은 프로듀서 디마일(D’Mile), 마할리아(Mahalia) 등 여러 참여진을 함께 끌어들여 장르의 경계를 자유롭게 허물어 낸다. 어렵게만 느껴진다면, 메시지를 전부 차치하고 곡 속 디테일에 귀를 기울여 보기만 해도 특유의 무드에 흠뻑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019년, 21세의 나이로 영국 내 권위를 인정받는 상 머큐리 프라이즈(Mercury Prize)를 획득한 데이브(Dave). 데뷔 앨범 [Psychodrama]를 통해 그는 마치 자신이 이미 래퍼의 길을 걸을 줄 알고 삶을 살아온 것처럼 그간 지켜봐 온 절망적인 세상, 불안한 관계, 불확실한 자신에 관한 가사를 적어냈던 바 있다. 그런 그의 진중함과 번뜩임을 사랑했다면,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We're All Alone in This Together] 역시 당신을 만족시킬 수밖에 없다. 데이브는 [Psychodrama]에서 등장했던 진중한 주제들을 다시 한번 영리하게 다루는 한편, 21세의 나이로 거머쥔 부와 명성 덕에 전작에선 느낄 수 없던 아예 다른 시각도 선보여진다. 한편, 듣는 맛만으로도 절대 꿀리지 않는다. 스톰지(Stormzy), 스노 알레그라(Snoh Aalegra), 제임스 블레이크(James Blake) 등의 피처링진은 보증된 퍼포먼스를 선사하며, 현 영국 랩 씬을 지탱하는 주역들인 4명의 래퍼가 참여한 수록곡 “In the Fire”는 영국 힙합 씬을 사랑하는 팬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기기도 한다.
2018년 데뷔작 [Brain Damage]를 통해 맥아리(?)가 전혀 없는 기묘한 얼터너티브 알앤비 음악을 선보였던 베이비아프리카(Bbyafricka). 그녀는 올해 스위티(Saweetie)의 [Pretty Summer Playlist: Season 1]에 래퍼로서 참여하는 등 본격적인 랩 뮤지션으로서 커리어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다행히 지난 6월 첫 랩 앨범인 [BIGAFRICKA]가 호의적인 평가를 획득했으며, 한 달 만에 깜짝 공개한 두 번째 랩 앨범 [Freak of the Nile] 역시 꼭 맞는 옷을 찾은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흐물흐물한 랩과 대조되는 공격적인 힙합 사운드와 함께, 베이비아프리카는 트위터 권위자(?) 시절부터 지녔던 파격적인 정신세계를 가감 없이 소리 위에 풀어낸다. 릴 야티(Lil Yachty), 제루퍼즈(ZelooperZ), 베어캡(Bearcap) 등 피처링진의 벌스 역시 1인분 몫을 톡톡히 해냈다. 단번에 느껴지는 멜로딕한 비트와 랩을 좋아한다면 불만족스러울 수 있지만, 틀을 깨는 독특한 랩 스타일과 리듬감에 관심을 둔 장르 팬이라면 한 번쯤 손대볼 가치가 있는 재밌는 프로젝트.
사운드클라우드를 통해 주목받았던 알앤비/힙합 뮤지션 브리 스티브스(Bri Steves)가 히트 트랙 “Jealousy” 이후 약 3년 만에 마침내 커리어 첫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었다기엔 다소 열기가 식었다고 볼 수 있는 지금이지만, 그만큼 데뷔작 [TBH]에는 서두른 티 하나 없이 원숙하고 촘촘한 트랙들로 가득하다. 칸예 웨스트(Kanye West)의 “Devil in a New Dress”를 샘플링하며 진한 알앤비 스타일로 재해석한 “GAF”에서는 그녀의 작곡 능력과 보컬 퍼포먼스를 확인할 수 있으며, 바로 이어지는 “Til It’s Gone”에서는 랩과 보컬을 넘나들며 두 분야를 한꺼번에 수려하게 소화해내는 재능을 뽐내기도 한다. 기성 뮤지션과 비교하자면, H.E.R.가 어릴 적부터 힙합 음악을 더 깊게 사랑했다면 선보였을 법한 매끄러운 얼터너티브 힙합/알앤비 프로젝트다. 수록곡 “ANTI QUEEN”에서 그녀는 “너무 빡센 여자라 ‘업계 표준’들이랑은 안 만난다”라며 자신감을 드러내는데, 이 정도 수준으로 커리어가 이어질 예정이라면 그 문장에 기꺼이 보증을 서주고 싶다.
우선, 올해 프로듀서 해리 프로드(Harry Fraud)가 선보여온 작업물을 감상해본 이라면 당연히 주목할 수밖에 없는 앨범이다. 각각 짐 존스(Jim Jones), 베니 더 부처(Benny the Butcher)와 빚어낸 합작 프로젝트 [The Fraud Department], [The Plugs I Met 2]의 탁월한 완성도와 함께 장르 팬들의 극찬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올해 세 번째로 해리 프로드의 파트너가 된 데이브 이스트(Dave East)와 함께한 [HOFFA] 역시 기꺼이 지난 두 앨범과 합쳐 ‘트로이카’로 묶일 자격을 지녔다. 이미 물이 올라 있는 해리 프로드의 프로덕션은 온갖 샘플과 신스를 주무르면서 제 몫을 단단히 해내며, 데이브 이스트는 마약으로 얼룩져온 자신과 가족의 삶과 거리 위 주제들을 해상도 높게 다루며 마치 한 편의 갱스터 영화를 보는 듯한 몰입감을 제공한다. 커렌시(Curren$y), 킹 슈터(Kiing Shooter) 등 피처링진의 이유 있는 참여 역시 데이브 이스트와 그 주변인들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더욱 특별하게 다가올 것이다.
듀랜드 존스 앤 디 인디케이션스(Durand Jones & The Indications)는 아이작 헤이즈(Isaac Hayes), 커티스 메이필드(Curtis Mayfield), 그리고 델포닉스(The Delfonics)와 같은 고전 소울 음악에 대한 애정을 본인들의 작품에 듬뿍 드러내고 있는 밴드다. [Private Space]는 더욱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1970년대 후반의 소울/디스코 음악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그런 만큼 밴드는 기존처럼 심포닉 소울 사운드는 물론, “Witchoo”, “The Way That I Do”에서 디스코/하우스 음악을 구사하기까지 한다. 특히 이번 앨범은 솔로작을 발표한 리드 보컬 애런 프레이저(Aaron Frazer)의 활약이 두드러져 이전보다도 더욱 팝에 가까운 사운드를 들려준다. 실크 소닉(Silk Sonic)의 앨범을 기다리고 있다면, 먼저 듀랜드 존스 앤 디 인디케이션스를 들으며 기다림을 달래보길 바란다.
리라 제임스(Leela James)는 2000년대에 데뷔 앨범을 발표한 이후 꾸준히 인디펜던트로 활동을 해 온 내공 가득한 음악가다. 이번 앨범 [See Me]는 그의 풍부한 인생과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진하게 묻어나는 프로젝트. 일례로 잽(Zapp)의 노래를 재해석한 “Complicated”, 지미 잼 앤 테리 루이스(Jimmy Jam & Terry Lewis) 식의 훵크 넘버 “You’re The One”, 티나 마리(Teena Marie)를 오마주 한 “I Want You” 등이 있다. 더군다나 앨범에는 블랙스플로이테이션(Blaxploitation) OST를 듣는 듯한 “Tryin To Get By”, 디스코 넘버 “Rise N Shine”까지 수록되어 있어 알앤비/소울의 다양한 하위 장르를 맛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리라 제임스는 “Break My Soul”, “See Me”에서 음악 비즈니스에서 소외되는 흑인 여성으로서의 이야기를 풀어내기도 한다. 장르적 요소와 메시지까지 모두 잡아낸 정통 알앤비 앨범이라 할 수 있겠다.
Editor
snobbi & INS
2게 빼곤 다 들어봤네요. 진짜 거를 타선이 없는 앨범들이라 생각합니다.ㅋ
크 컨텐츠 굿이당..
매일 하나씩 듣고있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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