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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딥플로우 (Deepflow)

Melo2015.06.30 12:10추천수 40댓글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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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플로우 (Deepflow)

힙합엘이(HiphopLE)가 햇수로 5년째 됐다. 인터뷰 코너 역시 당연히 5년 차다. 5년 사이에 꽤 많은 양의 인터뷰가 올라왔었는데, 에디터들은 매 인터뷰 때마다 인터뷰이에 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뽑아내려고 노력해왔었다. 그 덕에 역사로 기록되지 못하고 잊힐 뻔한, 한국힙합 씬을 논할 때 중요한 자료가 될만한 이야기들을 나름대로 잘 담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인터뷰를 해오고, 최종본을 올리면서 코너를 둘러볼 때마다 항상 마음속 어딘가에 찜찜함을 안기는 부분이 있었다. 힙합엘이 인터뷰의 전체적인 틀이 아직 잡히지 않았을 때, 인터뷰이가 되어주었던 아티스트들에 관해 아카이브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더 단단히 준비했다. 바로 <HIPHOPLE INTERVIEW REPAIR PROJECT>다. 어느 때보다 방대한 양을 자랑하고, 마치 인터뷰이의 자서전처럼 보이기까지 할 이 프로젝트 인터뷰는 어쩌면 짧고 즉각적인 콘텐츠가 인기 있는 요즘 시대에 맞지 않는 형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의도는 분명하다. 이 긴 인터뷰 속에 살아 숨 쉬는 인터뷰이의 수많은 증언이 아카이브되고 나면 당장에 소비되진 못할지라도 두고두고 볼 좋은 자료로 남을 것이라고. 자, 그 무식하다면 무식한 프로젝트의 첫 번째다. 주인공은 200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집단을 거쳐오면서도 힙합 씬에 우직하게 남아 있는 유쾌하면서도 든든한 MC, 딥플로우(Deepflow)다.



*본 인터뷰는 5시간 분량의 인터뷰로 양이 어느 인터뷰보다도 많은 관계로 편의상 인터뷰이의 커리어 순대로 챕터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점 참고하셔서 여러 날에 걸쳐 읽으시길 권장합니다.



- 근황 -

LE: 굉장히 오랜만에 힙합엘이와 인터뷰를 하게 되셨습니다. 지난 인터뷰가 2011년이었나요?

Deepflow: 2011년이었던 것 같아요.





LE: 거의 맨 처음에 하셨었는데, 그때는 조금 인터뷰 같지 않은 인터뷰였죠. (웃음) 간단하게 힙합엘이 회원들에게 인사 부탁합니다.

(웃음) 저는 딥플로우입니다. 반갑습니다. 얼마 전 [양화]라는 앨범을 냈고요. 오랜만에 힙합엘이 인터뷰를 하게 되어서 감사하고 영광이지만, 최근에 힙합엘이 게시판에서 제가 많이 까이고 있어서…





LE: 어떤 걸로 까이고 있나요?

랩이 구리다, 뭐 그런… 그래서 미묘한 감정입니다.





LE: 저희 공식 입장과는 다릅니다. (전원 웃음) 일단 말씀해주신 대로 앨범도 나오고, 단독 공연도 성황리에 마치신 걸로 알고 있어요. 최근 근황부터 여쭤봐야 할 것 같아요. 대학 축제 기간이기도 하고 바쁜 시기잖아요.

앨범을 발표한 후에 여러 곳에서 인터뷰도 하고, 앨범 낸 사람처럼 그 기간을 한 달여간 보냈어요. 가장 큰 건 제 콘서트였고요. [양화] 콘서트를 잘 끝내고 난 뒤에는 얼마 전에 뮤직비디오를 한 편 더 찍었어요. 그런 식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앨범 낸 사람처럼.





LE: 뮤직비디오를 새롭게 찍은 곡은 “당산대형”인가요?

네. “당산대형” 찍었고 그다음에는 “작두”를 찍고요.





LE: 총 다섯 곡의 뮤직비디오를 만드시는 거네요.

네. 리릭 비디오를 두 곡 했고, “잘 어울려” 뮤직비디오 하나 했고, 이번에 두 개 찍으니까 다섯 개 째네요.





LE: 단독 콘서트도 잘 되었던 것 같더라고요. 겉으로 보이는 것만 해도…

잘 된 것 같습니다.





LE: 단독 공연을 상상마당에서 하셨는데, 살짝 아픈 기억을 약간 건드려보자면, 예전에 [Heavy Deep] 1주년 공연을 하실 때, 저희도 힙합엘이 토크콘서트를 하던 시절이었는데요. 저희도 그때 살짝 티켓팅이 안 되던 시기였는데, 그래서 비슷한 시기에 다른 공연은 어느 정도 팔렸나 체크를 많이 해보고 그랬었거든요. 근데 그 1주년 공연이 잘 안 되었던 걸로 기억해요.

망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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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그때와 다르게 많은 관객분들이 찾아주신 게 감회가 새로우실 것 같기도 해요.

그렇죠. 그때는… 그걸 하기 1년 전에 코쿤(Coccon)에서 발매 기념 콘서트를 한 적 있었는데, 그때는 나름 성황리에 되었거든요. 1년 뒤에 제가 덥 사운즈(Dub Soundz)라는 회사를 나오면서 ‘이제 자유로워졌으니 해도 되겠다.’라고 생각해서 급조해서 실험적으로 해본 거였는데, 티켓팅이 안되서 완전 망하고… 그래서 그때 트라우마가 좀 생겼어요. ‘공연은 쉽게 열면 안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번에 만회해서 ‘앨범이 좋아서 그렇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LE: 아무래도 관객 수나 티켓팅, 주변에서 보이는 반응 같은 것들이 이전 앨범보다 훨씬 뜨거운 편이잖아요. 본인이 체감하는 차이점이나 달라진 점 같은 게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정규 앨범은 세 번째고, 믹스테입, 싱글, 프로젝트 앨범도 내봤는데… 단위가 다른 거지, 어쨌든 뭔가를 발표하는 기분은 항상 같았아요. 열심히 하는 걸 내는 거니까. 근데 지금까지 낸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고. 가장 크게 체감할 수 있었던 부분은 커뮤니티 반응보다는… 커뮤니티 반응도 평소보다 많아서 즐겁긴 했는데, 동료들의, 주변 업계의 반응을 가장 크게 체감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소위 스트릿 크레디빌리티라는 게 있다면, 그게 우리나라에서는 주변 뮤지션들에게 ‘Thumbs Up’이 되는 걸로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게 평소와는 되게 달랐어요. 저와 아예 관련이 없고, 평소에 연락도 안 하는, 제가 결혼을 해도 안 올 것 같은 사람들한테 (웃음) 전화가 올 정도였어요. (그렇게 하는 게) 굉장히 힘든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라도 제가 누군가의 것을 듣고 연락까지는 안 하거든요. ‘좋다.’ 생각하고 말죠. 더 좋으면 SNS에 한 번 남기고 그 정도지, 전화하고, 카톡 남기고 이런 건 쉽지 않은 것 같은데, 그렇게 해주시니 ‘좋은 건가 보다.’ 했어요. 평소와는 다른 기분을 느꼈죠.





LE: 신기하네요. 정말 그 전에 인연이 아예 없던 사람에게도 연락이 왔던 건가요?

네. 지나가다 인사도 안 했던 사람에게도 (그 사람이) 번호를 물어 연락이 왔어요. “작업하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 좋아서 전화했다.”라고 말하더라고요.





LE: 뿌듯하시겠어요.

그렇죠. ‘이것들 이제야…’ (전원 웃음) 이런 느낌도 들고?





- 가족, 학교, 인펙티드 비츠 & 메스퀘이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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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일단 간단하게 최근 얘기를 들어봤어요. 저희는 항상 인터뷰할 때마다 커리어를 처음부터 끝까지 털겠다는 생각으로 하는데요. 이번에는 워낙 방대하기도 해서 더욱더 꼼꼼하게, 길게 준비했어요. 일단 가장 원론적인 질문부터 할게요. 음악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하신 건가요?

랩을 어떻게 시작했느냐면… 저 중학교 때 힙합이 한참 유행이었고, 제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을 때, TV에 나오는 가수들이나 연예인들 모두가 힙합 바지를 입고 나올 때였어요. 6학년 때 반에서 친구들이 힙합 바지를 입는 게 유행이고, 어떤 상징이었어요. “야,나 엄마가 힙합 바지 입어도 된다 그랬어.” 이러고… (전원 웃음) 그러면 부러워하고.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때였어요. 힙합 바지를 입는 게 멋있는 분위기였죠. 또, 중학교 때 김수용 작가의 <힙합>이라는 만화책이 유행했었어요. 제가 남중을 나왔는데, 쉬는 시간만 되면 애들이 복도랑 교실 뒤에서 나이키, 원 킥, 투 킥, 윈드밀하고 막… 지금 생각하면 완전 이상한 건데, 학교가 브레이킹 댄스에 열광했었어요. 근데 그 학교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런 분위기가 있다 보니 힙합을 좋아하는 애들이 생기고 거기서 몇몇 좀 듣는다 하는 애들은 “야.” GOD 듣지 말고 원타임(1TYM) 들어.” 이랬죠. 그리고 거리의 시인들 나오고. “야, 랩에 욕이 있어.” 이러고. 그때 조PD도 나왔었죠. 한참 PC 통신이 생길 때였던 것 같은데, 리얼오디오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그런 프로그램을 통해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고 그랬어요. mp3 파일을 다운 받아서 듣지는 못했고요. 아무튼, 되게 저음질을 인터넷에서 접했고, 또 길거리에서 파는 믹스테입 같은 거 있잖아요. 최신가요 모음집. 그런 걸로 음악을 접했어요. 랩을 따라서 외우는 게 유행이었거든요. 춤을 못 추는 애들은 랩을 따라 외워서 노래방에서 멋있게 하는 거죠. “야, 나 조PD 그거… 외웠어.” 이런 게 스웩이 되는 친구들 사이에 있었는데, 저도 그런 걸 해보고 싶어서 그냥 가사 펼쳐 놓고서 랩을 따라 불러보고 그런 것들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자연스럽게 힙합이 좋아졌고, 스스로도 잘 따라 부르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집중적으로 들었죠. CB 매스(CB Mass) 듣고, [MP Hip Hop Project 超] 이런 거 듣기 시작하면서 언더그라운드 많이 듣고요. 버벌진트(Verbal Jint) 씨 것도 듣고. 나우누리 동호회 SNP 사람들 음악도 많이 들었고요.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가사를 쓰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힙합을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LE: 2000년도 그즈음이네요.

네, 그쯤이죠.





LE: 고등학교 때는 애니메이션 전공을 하셨는데, 아트워크 작업이나 영상 작업도 하시잖아요. 아무래도 시각적인 작업을 처음부터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이번 앨범에도 아버지를 닮아 뭔가를 만드는 걸 좋아했다는 내용이 있기도 하고요.

“개로(開路)”에서 약간 그런 걸 넌지시 이야기한 게 있었죠. 아버지가 미술학원 원장님을 하셨거든요. 그랬던 것 같아요. 아버지께서 미술을 하셨거든요. 고모도 화가고요.





LE: 그럼 가족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그림 그리는 쪽을 선택하시게 된 건가요?

네, 어릴 때 그림을 그리다가, 잘 그려서 학교에서 ‘그림 잘 그리는 애’로 통했죠. 중학교 때는 만화를 그려서 연습장 돌려 보고 그런 애였고요. 그래서 만화가를 초등학교 때부터 하고 싶었어요. 제가 고등학교 들어가는 해에 그런 학교가 생겼었어요. 지금도 오타쿠지만 오타쿠였으니까 게임 잡지 같은 걸 읽다가 애니메이션 고등학교가 설립된다는 기사를 보고 시험을 봤고, 운 좋게 합격을 했죠. 그때부터 제대로 그림 공부를 했죠.





LE: 애니메이션 같은 경우에는 그때 당시 새로운 창작 분야였잖아요. 약간 각광 받기 시작한…?

그렇죠. 지금은 아니지만요.





LE: 당시 시장이나 수익 규모 같은 게 크지 않아서 그런 분야를 어렸을 때부터 밟는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한데요. 아무래도 예술 쪽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는 돈 있는 사람이나 하는 거다.”라는 얘기도 있고요. 근데 듣기로는 딥플로우 씨 집안이 옛날부터 어려웠다고 알고 있거든요.

저는 그림 그리는 게 돈이 많이 들지 않았어요. 아빠가 미술학원에서 선생님을 하셨으니까요. 어릴 때는 집에서 ‘이렇게 해라.’ 정도의 지도를 받았고, 학원을 안 다니다 보니 돈이 많이 안 들었죠. 제가 고등학교 입학했을 때는 돈이 좀 드는 학교였던 것 같기는 해요. 재료도 사야 하고 하니 보통 일반 고등학교보다는 분명히 많이 들었겠죠. 제가 기숙사 생활도 했고, 그래서 생활비 같은 것도 다른 고등학생들보다는 많이 받아야 했죠. 근데 그때 당시에는 (경제적 관념이) 뇌에 탑재가 안 되어 있었어요. 나 하고 싶은 것만 하고 그런 사람이어서 (그런걸)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었는데, 기분은 좀 이상했죠. 집에 가면 분명히 (생활이) 빠듯해 보이는데, 어쨌든 지원을 받고 있었어요. 약간 애지중지 타입이었던 것 같아요. 어렵다고 해서 제가 하고 싶은 걸 못하고 그런 건 아니었고… 크리스마스 때 원하는 선물을 받지 못했지만요. (웃음) 학교 같은 건 다닐 수 있었던 그런 거였죠.






LE: 그래서 ‘서포트를 그만 받아야겠다.’ 혹은 ‘내가 이렇게 받기만 해서는 안 되겠다.’라고 생각한 순간이 있었나요?

20대 초반까지, 심지어 1집 앨범을 낼 때까지는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뇌에 탑재된 게 없었어요. 그냥 저만 생각하고, 당연히 집에 가면 엄마가 밥 차려주는 거고… 아들인 걸 되게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20대 초반을 지나고 나서 군대를 부양가족 사유로 면제를 받고 하면서 그때부터 책임감이 생기기 시작했죠. 아버지 건강도 안 좋아지고… 책임감이 생기기 시작한 게 그 시점부터인 것 같아요.





LE: 음악을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가족들이 우려하거나 걱정한 부분은 없었는지 궁금해요.

20대 초, 중반까지는 그런 걱정을 하셨죠. 근데 그게 음악을 해서라기보다는 부모님은 제가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걸 한다.’라고 생각하셨던 거죠. 공부를 안 해서가 아니라, ‘너 그림 그리다 왜 지금 헛물 켜냐?’와 같은 거였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창피했어요. 음악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요. 주변 친•인척, 친구 모두가 저를 그림 그리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런 거 있잖아요. 겉멋 들어서 ‘쟤 힙합한다.’ 이런 느낌으로 보는 게 부끄러웠어요. 일례로 고등학교 때 여자친구가 학교 애였으니까 그림 그리는 친구였기도 하고, 같이 다니는 애들도 다 그쪽 애들이잖아요. 하루는 제가 “나는 내 앨범을 한 번 만들어보는 게 꿈이야.”라고 했는데, “완전 오그라들어.”라고 하면서 “제발! 그런 얘기 하지마.” 이랬던 기억이 트라우마로 있었어요. ‘아, 이걸 내가 공개적으로 랩 하는 사람이라고 하고 다니는 게 뭔가 되게 떳떳하지 않구나.’라고 생각하는 게 좀 있었죠. 그래서 부모님께 ‘나 랩해.’라고 굳이 말씀 드린 적 없고, 방에서 시끄럽게 하고 있으면 ‘너 또 막 쿵딱거린다.’고 하시고… 1집 낼 때까지도 저는 그런 애였어요. 제가 콘서트에 초대하고, CD를 드리고 하니까 그때야 ‘아, 쟤가 이제 저거 하려나 보다.’ 생각하셨죠. 그리고 이미 만화 쪽 시장이 힘들다는 것도 알고 계셔서, 밥벌이 안되겠다는 걸 알고 계시니까 ‘저거라도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아마 최근까지도 생각하셨던 게 ‘쟤는 연예인, 가수.’ 이렇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싸이(Psy) 보면서 ‘너는 왜 TV 안 나오니?’, ‘넌 왜?’ 그런 식이었어요. 하지만 굳이 설명은 안 드렸어요. ‘난 이런 거 하고 있어.’ 정도였죠.





LE: 인덕대학교에 다니셨잖아요. 당시에 대학을 다니실 때까지만 해도 여러 가지를 병행하셨던 건가요?

대학 가서 느낀 게, 고등학교 1학년 때 배웠던 커리큘럼이 대학교 1학년 때 또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거에 전혀 흥미가 없었고, 저는 아예 그때부터 ‘만화를 왜 학교에서 배우지?’와 같은 생각이 있었어요. 그냥 알아서 하는 거지. 그때는 대학교는 일단 그냥 가는 거라고 생각해서 학교를 고를 때도… 인덕대학교가 그때 2년제였어요. 전문대잖아요. 4년제를 붙었는데, 상명대 천안캠퍼스 뭐 그런… 근데 그때 뇌에 뭐 탑재된 게 없어서 ‘나는 마스터 플랜(Master Plan)에 들어갈 거야.’, ‘무조건 서울에 있는 학교로 갈 거야.’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인덕대학교를 갔어요. 아예 학교에 관심이 없었고, 1학기를 다녔는데, 첫 날 첫 주에 한, 두 시간 들어가고 그냥 학교에 안 갔어요. 학교 간다고 뻥 치고 친구 집 가고 그런 식이었죠. 등록금 아깝고… 한 학기 다니고, 학고 맞고, 휴학한 뒤로는 학교에 안 갔죠.





LE: 그 와중에도 아이디 테크닉(I.D. Technic)이라는 힙합 동아리 활동은 하셨잖아요.

동아리만 갔어요. 학교는 안 갔고. 아웃사이더(Outsider)가 저 고등학교 때 밀림닷컴(millim.com)에 있었고, 인펙티드 비츠(Infected Beats)가 같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아웃사이더가 계속 컨택이 왔었어요. 피처링 해달라, 비트 달라 그랬는데, 저희는 아웃사이더를 좀 구리게 생각했었어요. 구리니까. 그때도 구렸거든요. (웃음) 그 후에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아이디 테크닉을 들어가진 않았는데, 제가 인덕대학교를 들어갔다는 소문을 듣고 (아웃사이더한테) 연락이 온 거예요. 만나자고. 딱 정장을 차려입고 왔었어요. (전원 웃음) 제가 스무 살이었고, 그 사람은 스물한 살이었단 말이에요. 정장을 차려 입고 와서, 학교 앞 술집으로 저를 데려가서 <슬램덩크>에서 유도부가 강백호 꼬시듯이 “들어와라.”라고 하더라고요.





LE: 그때부터 오글거림이 계속 있었나 봐요.

완전 심했어요. 문화충격이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스무 살이 봐도 ‘뭐냐 이건…’ 했죠. 들어와라, 아이디 테크닉이라고 내가 만들었다, 내가 1기고 너가 2기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알겠다고 했죠. 순수했으니까. 나한테 들어오라고 하니까 좋다고 들어갔죠. 맨날 술 먹고… 그런 식이었고, 학교 친구들은 아예 모르고 동아리 친구들만 알죠. 그 후로 지금까지도 공연하면 게스트 해주고 그런 관계가 된 거죠.





LE: 동아리 하실 때 만났던 분 중에 지금 저희가 알만한 분들도 계셨나요?

동아리 출신이 아웃사이더가 일단 있고, 키피쉬(Kyfish)라는 사람이 있고, 여포, 뢰붕괴… 메스퀘이커(Mesquaker) 사람 중에 아이디 테크닉 출신이 많아요. 그 외에는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 없죠. MC 스나이퍼(MC Sniper)가 인덕대학교 출신이라고… 아이디 테크닉하고는 상관없었고요. 아웃사이더 형 집에 처음 갔을 때, 아웃사이더 형 방에 MC 스나이퍼 포스터가 이만큼 큰 게 있었어요. (성대모사로) “나는 저 사람이 내 우상이야.”라고 해서 “오, 진짜요?”라고 반응해놓고 속으로는 ‘존나 구리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랬어요. 근데 그 후로 스나이퍼 사운드(Sniper Sound)에 들어가서 굉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기억이 있네요. 서로 법적 분쟁하고 그러는 것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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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인펙티드 비츠는 시기적으로 대략 언제쯤 활동했던 건가요?

그건 제가 고등학교 때 밀림닷컴 하면서 만났던 분들이랑 한 거였어요. 요즘 완전 어린 친구들 크루원 모집하는 방식 있잖아요. 힙합엘이 게시판에 ‘크루원 모집합니다.’ 글 쓰는 그런… 얼굴도 안 보고 카카오톡 아이디로 서로 알게 되는 그런 거였고요. 서로 MSN 메신저 아이디 추가해서 이야기하고, 채팅으로 친해져서 6개월 뒤에 처음으로 얼굴 보게 되고 그랬죠. 처음으로 얼굴을 직접 본 건 저는 서울이었고, 라임어택(Rhyme-A-) 형은 인천이라서 제가 라임어택 형 공연장에 먼저 가서였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본 게 라임어택 형이었죠. 포항에 인펙티드 비츠 멤버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포항에 내려가 친구들 만나고, 공연도 하고 그렇게 알게 되었죠. 오래가진 않았던 것 같아요. 1년? 1년 반 정도 하다 빅딜 레코드(Big Deal Records, 이하 빅딜)로 흡수되면서…





LE: [Story At Night] 같은 경우에는 인펙티드 비츠와는 별개로 작업하셨던 건가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인펙티드 비츠 멤버들이 서포트해서 만든 앨범이고, 그게 어떤 식으로 나왔는지는… 인터넷 무료 공개를 했고, 그 뒤로 (라임어택 형이) 신의의지로 들어가서 당시 저희는 배신자라고 생각했죠. (웃음) 빅딜 만들 거고, 막 그런 생각하고 있었는데, ‘신의 의지 가네...?’ 당시에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LE: 인펙티드 비츠는 밀림닷컴, 메스퀘이커는 동아리가 중심인 집단이었던 거군요.

동아리를 주축으로 해서 제가 만들었었죠.





LE: 메스퀘이커의 경우에는 동아리 내부에 또다시 조그맣게 멤버들을 추려서 했던 건가요?

동아리 안에서 몇 개의 파가 있었는데요. 아웃사이더 파, 딥플로우 파 이렇게 나뉘게 되었어요. 제가 후배지만요. 저를 조금 더 좋아하고, 그런 친구들끼리 모여서 (만들었죠). 저는 빅딜을 하고 있었지만, 개인적인 뭔가를 하고 싶은 그런 것 때문에 만들었던 것 같아요.





LE: 래퍼 분 중에는 여기에서는 일원이지만 저기에서는 리더인 그런 경우가 많잖아요. 메스퀘이커 같은 경우에는 많은 활동은 없었는데요. [Vismajor] 보너스 트랙 정도가 있었고… 가끔 모습을 비치는 분들이 있는 정도였는데, 유명무실한 크루였던 건가요?

원래는 제가 하자고 했다기보다는… 동아리 안에서 여포라는 친구가 그때 ‘간판클래스’라는 이름의 무슨 크루를 자기가 만들었었어요. 1인 크루였어요. 당시 로고를 만들어서 스티커도 뽑고 그랬는데, 그게 약간 멋있어 보였거든요. 그때 제가 “야, 왜 너 혼자 멋있는 거 하려고 해. 같이 하자.”라고 했어요. 저랑 여포랑 에네스테틱(Anesthetic)이라는 뚱뚱한 친구가 한 명 있는데, 셋이서 “야 우리가 동아리에서 랩 제일 잘하는 것 같아. 우리끼리 하자.”라고 하고 “간판클래스 별로야. 메스퀘이커 가자.”라고 하면서 제가 메스퀘이커로 이름을 바꿨어요. 그러고 나서 메스퀘이커를 멋있어하는 다른 동아리 형들, 뢰붕괴 형이나 사비(4B)나 이런 사람들이 모였죠. 크루 자체가 ‘우리는 구린 거 하지 말자. 근데 우리는 음악 하는 집단이 아니고 랩을 하긴 하지만 재밌게 놀자.’ 이런 분위기였는데, 그래서 음악을 열심히 하진 않았어요. 그러다가 몇 년 후에 제가 빅딜 활동이 약간 주춤하고, 아닌 것 같고, 내 맘대로 안 된다고 생각했을 때, 메스퀘이커 사람들과 뭔가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정식으로 단체곡을 하나 만들고 공연도 한 번 열고 그랬던 것 같아요. 당시 제가 서는 공연을 메스퀘이커로 바꿔서 멤버들도 공연에 서고, 공연을 하도록 유도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와장창 됐던 것 같아요. 멤버 형들과 저의 바이브가 조금 달랐어요. 그 형들은 ‘왜 이렇게 뭔가를 열심히 하려고 하냐’, ‘우린 좀 여유롭게 즐겁게 하자’는 식이었죠. 근데 저는 업계 분위기나 씬의 느낌을 아니까 ‘이건 빡세게 해야 하는 거다’를 유도하고, 그러다가 서로 페이스가 안 맞고, 자연스럽게 연락 안 하게 되고 그랬죠.





LE: 지금까지 이야기하면서 이름 이야기를 안 했는데, 언제부터 639에서 딥플로우로 이름을 바꾸게 되신 건가요?

639는… 처음에 저 중학교 때였나 고등학교 때, 인터넷 한창 보급될 때 그런 게 있었어요. 다음(DAUM) 한메일 계정 만들기가 학교 숙제 같은 거였어요. 그때 처음 만들었던 제 아이디가 제가 류상구잖아요. 그래서 ‘ryu39’라는 아이디를 처음 만들게 되었는데, 39가 재미있잖아요. 그래서 앞에 6도 넣어보고… 그런 식으로 해서… 그렇게 물어보신다면 제가 그런 계기밖에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어요. 인터넷 아이디처럼 639를 만든 건데, 딥플로우라는 이름이 쓰이기 싫을 때, 639라는 이름으로 대신 썼던 것 같아요. 알 사람은 알고, 모르면 모르라는 거죠.





LE: 검색해보니 맙 딥(Mobb Deep)의 음악이 너무 좋아서, 그런 스타일을 하고 싶어서 이름을 딥플로우로 지었다고 알려졌더라고요.

이게… 고등학교 때 제 밀림닷컴 페이지를 처음 만들 때, 처음 만들었던 랩 네임은 RK였어요. RK가 뭐였느냐면, 류군의 약자였거든요. 류군이면 RG잖아요. 근데 그게 어감이 구려서 류군의 군을 K로 하자고 생각해서 RK로 했죠. 근데 크루원 모집 같은 데에 (그 이름으로) 데모를 보냈는데 탈락을 하고 ‘창피하다, 다시 시작하자.’라고 생각해서 밀림닷컴 새 페이지를 만드는데, 새로운 이름을 하고 싶었어요. 거기는 이름을 기재해야 해요. ‘뭘 쓰지?’ 생각하다가 맙 딥을 좋아하니까 딥을 넣고, 인피닛 플로우(Infinite Flow)를 당시에 좋아했으니까 플로우를 넣게 됐죠. 인피닛 플로우도 있고, 메인 플로우(Main Flow)도 있고, 당시에는 ‘flow’ 붙는 게 멋있어 보였어요. 그래서 딥플로우라고 짓게 되었어요. 아무 뜻이 없습니다. (웃음)





LE: 깨알 같은 의혹인데요. MC 불곰이라는 랩네임을 쓴 적이 있으시다고…

불곰은 아니고 백곰이었습니다. 백곰이고… 백곰이라는 이름을 쓸 때는 전혀 알려지지도 않은 거고 저희끼리만 아는 건데, 인펙티드 비츠 사람들이 프리스타일로 번개송을 쓰고 그랬던 적이 많았어요. 당시 왕십리에 작업실이 있었는데, SM58 마이크를 딱 켜놓고 비트 틀어놓고 한 시간 동안 프리스타일하면서 놀고 그랬어요. 그럴 때 이름을 백곰으로 했고, UMF 랩 배틀에 나갈 때도 썼죠. JJK가 우승했던, 지금 큐보(Q-Vo) 자리에 있는 ‘흐지부지’라는 클럽이 있어요. 거기서 랩 배틀을 했는데, 이름을 백곰으로 하고 나갔었죠. 왜냐하면, 졌을 때 기록이 남지 않기 위해… 장난식으로 썼던 이름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JJK가 진짜 개 멋있었어요. 제가 붙은 상대가 언포기븐(The Unforgiven)이라는 분이었어요. 그분이랑 전에 UMF에서 붙어서 어쩌다 결승까지 올라갔는데 그 분한테 졌거든요. 근데 그다음 랩 배틀에서 1차전에 그분이랑 또 붙은 거예요. 저는 여기서 그때 한창 봤던 <8마일>을 떠올렸죠. ‘Put your hands up’을 유도한 다음에 “내가 너한테 저번에 졌지.”라고 했는데, 거기까지만 내용이 진행되고 제 타임이 끝난 거예요. ‘졌다.’까지만… 그래서 (언포기븐이) “그래, 넌 나한테 졌지.” 라고 하고 바로 탈락하고. 하여튼 그때 JJK가 진짜 멋있게 했어요.





LE: 예전에는 프리스타일 많이 하셨나 봐요.

당시 랍티미스트(Loptimist)가 페익 크로스(Fake Cross)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때인데, 그때 당시에 저한테 랍티미스트는 그냥 래퍼였거든요. 곡도 잘 만드는 래퍼. 근데 프리스타일을 굉장히 잘해서, 지금 쓰는 식의 라이밍 있잖아요. 요새 프리스타일 하는 사람이나 가사 쓰는 사람들이 하는 라이밍을 랍티미스트는 고등학교 때부터 이미 하고 있었어요. 저는 얘가 짱이고, 무관의 제왕이라고 생각했었죠. 당시 <힙합 더 바이브>를 보면 프리스타일 되게 이상하게 했잖아요. 저는 잽도 안 된다, 얘가 짱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걔랑 맨날 프리스타일 같이 하고 분위기가 있었어요. 지금은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고…





LE: 저희가 알 수 있는 곡 중에 639라는 이름으로 피처링이 기재된 경우라면 프로듀서 조성빈 씨의 ep 앨범 [ep130]의 “희생양”인 거 같아요. 그때가 처음 639가 표면적으로 등장한 때가 아닌가 싶은데, 실제로도 그게 맞는지 궁금해요. 또, 정확히 딥플로우로서 데뷔했던 시기는 언제인지도 궁금하고요.

제가 딥플로우라는 이름을… 당시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이렇게까지 랩을 할 줄 몰랐었죠. 딥플로우를 쓰든, 639를 쓰든 누가 불러주는 대로 그냥 하는 거였고… 라임어택 형이 계속 옆에서 “야, 딥플로우 이름 너무 구려. 639가 좋아.”라고 했었는데, 자기는 라임어택이면서… (전원 웃음) 그랬을 때였는데, 그래서 639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죠. “야, 딥플로우.” 이러기엔 외국 사람도 아니고 좀 그랬는지… “야, 639.” 이렇게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거에 대해선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당시 조성빈 앨범에 참여하면서 그 앨범을 기획했던 분이 당시 다음 힙합 명반 카페 주인장이었어요. 시삽 분이 조성빈 앨범을 제작했던 건데, 그분이 제가 두 트랙 정도 했으면 좋겠는데, 한 트랙은 딥플로우로 들어가니까 다른 하나는 639로 하자고 했었어요. 아무 생각없이 그렇게 결정이 되었고, 랩 피처링이 639로 들어간 건 그거 하나밖에 없어요.





LE: 아까 프리스타일 이야기를 하면서 <힙합 더 바이브>에 나오는 출연진들의 프리스타일은 이상하다고 하셨잖아요. 그 당시에 방송에 비춰지는 힙합의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요? 방송에 나오지 않는, 실제로 언더그라운드에서 프리스타일을 하시는 분들과 방송에 나오는 래퍼 분들 간의 실력 차이가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요.

그때 시대성에 비추어서 이야기하자면, <힙합 더 바이브>에 나와 프리스타일을 하는 기성 래퍼들의 수준이 지금 보면 낮은 거지, 그때는 멋있는 거였어요. TV에서 “요,요,요,요, 요,요,요,요” 이러면서 요를 한 100번 한 다음 시작하는 분위기. 그게 멋있는 거였거든요 사실. 그거밖에 없었으니까. 저건 멋있는 거라고 생각하며 보지만, 그런 거 있잖아요. “내가 지금 랩을 해.” 이 얘기만 존나 하는… 근데 그런 프리스타일을 “오 씻” 이러면서 보고. 근데 그게 다였으니까요. 하지만 당시에 제가 빠져 있었던 게 버벌진트 씨의 [Modern Rhymes]였고, 그때 이미 ‘(진짜 좋은 게) 이런 거구나.’라는 걸 혁신적으로 느끼고 있었어요. 나이가 어릴 때 대단한 걸 못 보는 건 어떤 하나에 꽂히고 그 나머지 것들을 별로라고 취급하고 그럴 나잇대라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SNP 식으로 라임 안 쓰면 다 X밥, 병신들, 쓰레기다 그런 식으로 생각했었죠. 아무튼, 방금은 좀 상징적으로 얘기했던 거고, 지금 생각해보면 장•단점이 확실히 있죠. 예를 들면, 당시 주석 형이 랩을 못한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지금 다시 들어보면 다른 사람보다 나은 점이 굉장히 많이 발견되는 그런 거죠.





- 빅딜 레코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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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이제는 빅딜 이야기를 시작할 텐데요. 커리어에 긴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우선 멤버들을 만나게 된 계기라든가, 빅딜을 결성하게 된 과정 같은 게 궁금해요.

인펙티드 비츠 사람들이랑 2003년 초반에 MT를 갔었어요. MT 많이 가는 강촌으로 갔는데, 그때 왔던 사람 중에 누구 통해 알게 되어서 온 사람들, 다이나마이트(Dynamite) 형, 넥스트플랜(Nextplan), 프라이머리(Primary) 형, 랍티미스트가 있었죠. 근데 그 사람들이 딱, 아무 개연성 없이 그날 우연히 그 MT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었어요. 아마 밀림닷컴을 주축으로 해서 모인 걸 거예요. 예를 들어, 프라이머리 형은 랍티미스트와 아는 사이였고, 다이나마이트 형은 누구와 아는 사람, 그랬던 것 같아요. 넥스트플랜은 프라이머리 친구여서 같이 온 거고… 인펙티드 비츠가 MT를 간다고 했을 때, 몇 명이 합쳐져서 같이 간 거죠. 근데 거기서 하룻밤 술 먹고 나니까 우리가 함께 하는 거가 된 거죠. 왜냐하면, (기존에) 저변이 없으니까 만난 사람들이 인연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 사람들끼리 한 번 더 만나고, 술 먹고 그러다가 우리끼리 뭔가 해보자는 분위기가 되니까 몰려다니다가 데드피(Dead’P) 형도 합류하게 된 거고… 데드피 형이 넥스트플랜이랑 대학힙합동아리연합에서 활동했던 형인데, 진짜 죽이는 형이 있다고 해서 소개를 받아서 공연도 같이 보러 가고 그랬죠. 그때 또 마르코(Marco)가 했던 모리얼(Mo’Real)이라는 팀도 합류했었어요. 그렇게 막 모였었어요. 데드피 형 통해서 또 누가 들어오고… 그렇게 열 몇 명이 모여서 레이블을 하자고 한 거죠. 저는 당시에 레이블이 뭔지 몰랐어요. 고등학교 때도 마스터 플랜이 없어지고 레이블화한다고 했을 때, 그게 어떤 개념인지 몰랐거든요. 근데 형들이 레이블을 한다고 하니까 ‘몰라. 나는 일단 여기 같이 있어야지~’ 이런 생각이었어요.

이름을 정한다고 했을 때, 프라이머리 형이 ‘락스타’로 하자고 했었어요. 근데 최근에 알게 된 건데, 진보(Jinbo) 형 쪽 크루였던, 흑락회에서 시작됐던 일진스(Ill Jeanz) 중 한 명이 프라이머리 형 친구 중 한 명이었는데, “야, 락스타는 내가 옛날부터 하기로 했던 건데, 너네 그거 하려고 하냐?”라고 했었어요. 그래서 프라이머리 형이 와서 “야, 안되겠다. 락스타 하지 말래.”라고 하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또 회의를 하면서 뭘로 할거냐고 했을 때, 랍티미스트가 빅딜 어떠냐고 했죠. 근데 저는 락스타에 꽂혀 있어서 “어, 우리 락스타 하기로 했잖아요!” 그랬죠. 이미 별 모양으로 로고도 만들었었거든요. 제가 그런 담당이어서… 그랬는데, 바꾼다니까 왜 바꾸냐, 나는 빅딜이 존나 싫다, 빅딜이 뭐냐, 일단 이름에 빅이 들어가서 싫다고 했죠. (전원 웃음) 그랬는데 저만 빼고 만장일치로 빅딜을 하기로 했고, 그랬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누가 대가리를 할 거냐고 해서 프라이머리 형이 대가리를 했고, 프라이머리 형이 6개월 정도 하다가 다이나믹 듀오(Dynamic Duo) 앨범에 곡을 주기로 해서 “난 나갈래.”라고 했죠. 저는 ‘자기가 레이블 하자고 해놓고서 왜 나가냐고!’라고 생각했었어요. 어린 나이에 이거 뭐냐, 배신하는 거 아니냐 그랬는데, 어쨌든 나가고 나서 샥이(Shock-E)라는 형이 “그럼 내가 맡아서 하겠다.”라고 하면서 계약서 같은 걸 막 보여주고 그랬었어요. 그게 2003, 4년의 일이에요. 그 후로 앨범들이 나오기 시작했죠.





LE: 말씀해주신 샥이 씨 같은 경우에는 뭐랄까 본인이 CEO를 하고 싶어서 했다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대신하게 된 건가요?

대신하게 된 분위기였어요. 왜냐하면, 그 형이 그 안에서 래퍼로서의 어떤 입지가 없었던 형이었는데 갑자기 (프라이머리 형이 나가니까…) 그 형 이미지가 훤칠하고 이미지도 좋고 그랬거든요. 과거를 더 디테일하게 말씀드리면, 대학힙합동아리연합의 니노리바(Ninoliba) 형을 주축으로 해서 무슨 7인의 전설 그런 게 있었어요. 무슨 코스트라는 팀이 있었어요. 전사 컨셉으로 대학힙합동아리연합 사람들끼리 몇 명 나와서 했던 게 있었어요. 뮤직비디오도 찍고, 방송도 하고 그랬었어요. 그중에서 머리 긴 래퍼. 저희가 그걸 또 놀렸었거든요. 그래서 입지가 없던 와중에 (CEO를 하게 됐죠). 말투도 항상 비즈니스 톤이고, 학교에서 전공도 경영학이었고 해서 적임자였던 분위기였어요. 그 후로 그 형이 빅딜이라는 컨텐츠로 레이블답게 비즈니스도 하고 다니시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 형이 좀 사셨는데, 강남에 있는 투룸 오피스텔에 장비를 다 가져다 놓고 거기서 녹음도 하고요. 프레싱 비용도 대주고요. 당시에는 비용이 드는 부분이 프레싱 비용이었거든요. 왜냐하면, 다들 알아서 믹싱하고 곡을 쓰고 그러니까요. 그래서 (샥이 형은) ‘프레싱비를 내주는 사장 형’. 그런 느낌이었죠.





LE: 빅딜이라는 이름 자체는 저희가 평소 생각하는 그런 뜻이었겠네요?

그랬던 것 같아요. 무슨 다른 뜻이나 메타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랬던 것 같은데… (웃음) 잘 모르겠어요.





LE: 당시 레이블에 래퍼 분들도 많이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레이블에서 비트메이커의 비중이 컸던 것 같아요. 지금은 활동 안 하는 분들이지만, 케슬로(Keslo)나 케이원(Kayone)이라는 분도 계셨었잖아요.

케슬로 형은 조금 후에 들어왔던 케이스고요. 케이원 형은 지금은 뭐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이 모든 것에 관여했던 분이었어요. 인펙티드 비츠도 케이원 형이 모집한 거고, MT로 락스타 멤버들을 모으는 움직임을 유도한 사람이 케이원 형이에요. 그 형이 “보자. 만나자.” 했던 거죠.





LE: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면, 지금은 레이블의 수장 혹은 우두머리 역할이지만, 당시에 딥플로우 씨는 경영이나 전반적인 분위기, 흐름 같은 걸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거나 주도하는 포지션은 아니었나 봐요.

전혀 아니었고요. 저는 그냥 제 개인적인 것에만 몰두해 있었어요. 랩은 어떻게 해야 하나, 자켓은 이렇게 해야 멋있다, 비트는 이런 게 멋있다, 그런 거에만 몰두했지, 그 외적인 거에 아예 신경도 안 썼어요. 그래서 트러블이 있는 부분도 그런 거였어요. 저 같은 사람이 몇 명 있었기 때문에… 예를 들어, 믹싱을 누가 그냥 해줘요. 믹싱은 어떻게 보면 돈이 굉장히 많이 들고 엔지니어에게 맡겨야 하는 그런 부분인데, 누군가가 열정페이도 아니고 그냥 열정만 가지고 해줘요. 그렇게 제 걸 해주면, 저는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어요. 데드피 형이 그때 믹싱을 해줬는데, ‘데드피 형이 내 거 믹싱 해줘야지.’, ‘랍티미스트가 내 곡 써줘야지.’ 그냥 그런 식이었죠. 그 외적인 것에 대해서는 아예 몰랐죠.





LE: 빅딜에서 제일 처음 나왔던 앨범이 [Undisputed]가 맞나요?

처음 나온 게 모리얼의 앨범, 그다음이 [Undisputed]였어요. 그다음이 어드스피치(Addsp2ch) 형, 그다음이 마일드비츠(Mild Beats), 이그니토(Ignito), 그다음이 저였죠. 다음 마르코 나오고 다이나마이트 형 나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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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모리얼의 앨범이 먼저 나왔지만, 아무래도 [The Undisputed]가 빅딜이라는 레이블이 확 부상하는 듯한 계기가 된 앨범이었잖아요. 그 앨범으로 ‘잘하는 사람들이 있는 레이블’로 각인됐던 것 같아요. 프라이머리 & 마일드비츠 프로젝트 앨범인 [Back Again]에는 그런 가사가 나오잖아요. 나중에 보니까 진짜로 데드피 형의 앨범이 [Illmatic]이 되어 있었다. (웃음) 당시 앨범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혹은 만드는 과정을 보셨는지, 지금도 여전히 [Undisputed]를 한국의 [Illmatic]이라고 칭하실 생각이 있으신지… (전원 웃음)

그때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고요. 제가 20대 중, 후반까지 빅딜이었으니까… 저는 제 앨범은 아니지만, 그 앨범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있었어요. 제가 속한 단체에서 제일 간판처럼 내놓을 수 있는 앨범이었고, 우리가 빅딜이라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으쓱해지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했다는 걸 당연히 본능적으로도 알고 있었고요. 그래서 ‘우리 형이 존나 멋있게 만들었다.’라는 식으로 생각했었죠. 씬에서 반응도 제일 좋았고요. 사람들이 명반이라고 하니까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게다가 그때는 우리가 최고고, 뉴 스쿨이고, 1세대를 보고 자란 세대였으니까… 우리가 이렇게 될 줄은 모르고… (웃음) (지금처럼) 새로운 세대 이전의 세대가 될 줄은 아예 몰랐죠. 그래서 감히 그렇게 얘기를 했던 건데요. 지금 생각해서 조금 더 길게 역사를 보면, 아직도 우리는 올드 스쿨일 수도 있잖아요. 지금 이 시대도 나중에 봤을 때는요. 그래서 그런 말들을 조금 더 조심하게 되는 거 같아요. ‘아니다. 그때와 마음이 변했다. 존나 구리다.’ 그런 건 절대 아니고요. 그때는 상징적으로 생각했었어요. 제일 좋은 앨범. 그런 식으로 상징적으로 얘기했던 거라서… 저도 나스(Nas)를 되게 좋아하지만, 그 형이 나스를 되게 좋아해서 그런 마음이 투영된 거죠.





LE: 열등감 같은 건 없으셨나요?

저는 처음에 데드피 형 랩을 듣고… 오디오로 들었는데, 그게 “날개짓”의 데모 버전이었거든요. 그걸 듣고, 진짜 그것도 저에게는 혁신이었어요. 일단 목소리가 흑인처럼 들렸어요. 제가 당시 동경하던 느낌의 목소리였어요. 거기서 ‘일차적으로 대단한 사람이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공연장에서 그 형 공연하는 걸 처음 보고 저는 완전 열등감에 사로잡혔었죠. ‘아, 나는 절대 저렇게 못 해. 저건 타고나는 거야.’ 그런 식의 감정을 처음 느꼈던 스무 살 때였어요.





LE: 아까 샥이 씨를 ‘프레싱비 내는 사장님’이라는 표현해주셨는데요. [Undisputed]같은 경우에는 다음 앨범을 내는 데 있어서 수익적인 면이나 여러 면에서 영향을 미쳤나요? 혹은 수익은 되지 않았고, 그저 샥이 씨가 계속 앨범을 내주셨던 건가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게, 그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각자가 얼마를 벌었는지 자체를 모르거든요. 그 당시만 해도 CD가 많이 팔렸던 때라서 수익이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죠. 제작비가 거의 필요 없기 때문에… 근데 돈을 모았던 사람은 없었던 것 같고요. 예를 들면, 모리얼은 앨범이 많이 안 팔렸었어요. 그건 어떻게 만들어 졌냐면, 마르코 형이 베스킨라빈스 알바를 해서 3개월 동안 모은 돈으로 (만들었어요). 녹음, 믹싱 전부 스튜디오에서 했고요. 그런 식으로 해서 돈이 좀 들었는데, 그만큼은 못 뽑았고요. [Undisputed]는 제작비를 투자받았었는데, 트리쉬(Trish)라는 SNP 출신 보컬 형한테 받아서 계약을 어떻게 했는지 아직도 저작권이 그 형한테 있어요. 돈을 정산을 못 받았다는 얘길 들었던 것 같고요. 어드스피치 형 것도 자기가 했던 것 같아요. 당시에 ‘앨범은 원래 자기 돈으로 알바해서 내는 건데, 나는 다행히 샥이 형이 내준대.’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당시까지만 해도 레이블이 뭔지 몰랐고, 회사에 들어간 거라는 생각을 안 하고, 크루의 또 다른 형태의 이름이니까 ‘각자 알아서 하는 거구나.’라고 알고 있었어요. 마일드비츠 형 앨범 때부터는 샥이 형의 돈으로 앨범이 나왔고, 정산표를 보면 제작비가 천몇 백만 원이 들어서 돈을 못 받는 그런 느낌. 뭔지 모르겠어요. [Vismajor] 제작비를 봤었는데, 천몇 백만 원이었고, ‘네가 이래서 내가 아직까지 적자야.’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요. ‘아, 돈 못 버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지. (웃음)





LE: 그런 거네요. 한국힙합 레이블이 진짜 레이블다워진 게 얼마 안 되었잖아요. 예전에는 사실상 크루 상태로, 자본이 개입되어 앨범을 만드는 정도에 그칠 뿐이지, 진짜 레이블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잖아요.

그래서 레이블이 회사의 구조라는 걸 인지할 때쯤부터 저는 이런 게 되게 소꿉장난처럼 보였었어요. 회사놀이 하는 거라고 생각이 들 때가 있었죠.





LE: 아까 한국의 [Illmatic] 이런 얘기를 잠깐 했는데, 많은 사람이 아직도 한국의 [Illmatic]이 무엇이냐를 두고 진지하게 논의하잖아요. 소모적인 경향도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요. 그만큼 [Illmaitc]은 상징적인 앨범이기도 한데, 본인도 나스를 좋아한다고 말씀하셨고, “Bring Rap Justice”에서는 직접 가사를 인용하셨잖아요.

나스 빠돌이였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LE: 근데 최근에는 [The Anecdote] 전체를 감상한 유일한 사람이시라고…

아니에요. 저뿐만 아니라 몇 명 있을 거예요. 저는 두 번 들었고요. (웃음) 처음에 사이먼 도미닉(Simon Dominic)이랑 같이 들었고요. 사이먼 도미닉이 듣다가 중간에 스케줄 때문에 갔고, 그레이(Gray)도 조금 들었고… 싸이코반(Psycoban)도 같이 들었고요. 작업실에서도 한 번 들려주고 그래서 같이 있었던 몇 사람은 들어봤죠.





LE: 어쨌든 한국의 [Illmatic]이 맞나요?

저는 그런 게 약간 있어요. ‘몰아주기’. 사실 이센스(E-Sens)가 지금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서 몰아주기의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해 우리나라 정서로는 지금 약간 꺼림칙하죠. 근데 저는 나스의 [Illmatic]은 그야말로 사운드적이거나 가사의 내용,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닌 것 같고요. (그 래퍼가) 상징적으로 씬 안에서 어떤 인물인가. 저에게 나스는 씬에서 주인공 같은 상징적인 존재였어요. 만화나 영화를 봐도 제이지(JAY Z)는 주인공이 아니에요. 멋진 주인공은 항상 악당보다 조금 약하고, 악당은 존나 부자고 권력이 있고 그렇잖아요. 권력에 맞서는 주인공. 스탠다드한 느낌의 그런 캐릭터가 저는 나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은 많이 늙어서 그런 걸 물려줘야 하지만요. 그런 대상을 저는 ‘국힙’에서 (웃음) 찾고 싶었어요. 어릴 때는 저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한 번 심사숙고하면 제가 되면 안 될 것 같고요. 그런 아이콘 같은 존재를 찾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센스만한 적임자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영화의 감독이라고 했을 때, 주연을 캐스팅한다면 제가 생각하는 나스와 흡사한 공통점이 이센스에게 있어요. 걔 자체도 나스 빠돌이기도 하고, 공연 제스처나 랩 이런 걸 영향을 너무 많이 받은 게 제가 봐도 보이거든요. 그러니까 상징적으로 몰아주기를 한다면 (이센스라는 거죠). 왜냐하면, [Illmatic]이라는 것은 큰 상징이기 때문에… 그 낱말을 붙여줬을 때, 그 대상이 포장되는 이미지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몰아주기라고 생각해요. 사실 그 대상이 내가 되고 싶지만, 그래도 내가 되고 싶은 그 마음까지 더 담아서 “네가 [Illmatic]을 만든 것 같아.”라고 한 거죠. 근데 이게 이렇게까지 될 줄은… 저는 그냥 샤라웃의 일종이었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막… 제가 죄짓는 느낌이 들고… 사실 그 말을 주워담고 싶어요.





LE: 나스라든가, 맙 딥이라든가 이런 이름이 계속 나왔는데, 사실 그런 아티스트들이 동부 힙합에서 제일 잘 나갔던 아티스트들이잖아요. 빅딜하면 모두가 하드코어한 음악을 지향하는 집단이라고 이야기하고 실제로도 그런 게 있었는데요. 그래서 제다이 마인드 트릭스(Jedi Mind Tricks)나 AOTP(Army Of The Pharaoh) 같은 팀을 떠올리는 분들도 계시는데요. 실제로 빅딜이 가장 많이 참고했던 스타일이나 조금이라도 더 많이 영향을 받은 계열이 있다면 어느 쪽인가요?

말씀드렸다시피 중구난방으로 개연성 없이 모였기 때문에, 그게 당연히 공통분모가 맞을 수가 없거든요. 예를 들어, 맙 딥 동호회에서 만났으면 이야기가 다른데, 다 다를거고… 어쩌다 모이게 된 거다 보니까 뚱뚱하고 수염 나고 크고 소울 컴퍼니(Soul Company)와는 대조되는 사람들이었죠. 그런 거 있잖아요. 입은 옷에 따라 걸음걸이가 바뀌는 것 같은 거요. 데드피 형 앨범 나오고 그런 분위기, 그런 느낌이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보기 시작한 거죠. 커뮤니티나 주변에서 “너네는 시커멓고 존나 하드코어야.”라고 하고… 그러다 보니까 빅딜 래퍼들의 가사에서 안 들어가 있던 ‘하드코어’라는 단어가 들어가고, 기사 제목이나 앨범, 공연 홍보 문구에 하드코어라는 단어가 들어가게 되고… 그걸 더 적극적으로 주도했던 게 샥이 형이었어요. 그때 당시에는 마케팅의 일환이었던 것 같아요. 저도 그랬고, 다이나마이트 형이나 마르코 형도 제다이 마인드 트릭스 풍, AOTP 풍의 음악과는 전혀 다른 풍이었어요. (물론,) 좋아했죠. 모든 걸 다 좋아했지만, 당시에 오히려 그런 걸 싫어했죠. 넵튠즈(The Neptunes) 스타일을 가짜라고 생각했었어요. 지금은 완전 다르죠. 패볼러스(Fabolous)가 “Holla Back” 이런 거 할 때 개 ‘Fake’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지금은 아니잖아요. 존나 멋있잖아요. (웃음) 이상했어요. 사람들이 진지하게 “야, 우리 존나 하드코어야.” 그러면서 (전원 웃음) 제다이 마인드 트릭스 이런 거 듣고… 근데 고등학교 때 데미갓(Demigod) 좋아하고, 그러긴 했죠. 멤버들 간에 교집합이 조금 있었죠. 그 부분에 조금 더 집중했던 것 같아요. 우리 느낌은 이런 거니까 갑자기 비트도 그렇게 만들고… 근데 어느 순간 그런 것들이 확 물리게 되고, 체감되던 순간이 공연장이었어요. 여자애들, 어린 애들 존나 많은데 이 앞에서 내가 뭐 하는 건가 생각도 들고, ‘내가 원래 이런 걸 하고 싶었나?’ 의문도 들고… 가사에서 쓸데없이 현학적인 얘기 하는 그런 게 안 맞더라고요. 이그니토 형은 원래 그런 걸 엄청 파는 형이었고요. 지금은 별생각 없지만, 엄청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시기가 있었어요. 누가 나를 하드코어 MC라고 부를 때 싫어했고, “하드코어 래퍼, 딥플로우!”라고 할 때 제가 제다이 마인드 트릭스 같은 느낌이 되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좀 싫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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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비트나 사운드 성향 말고 제가 진짜 동경하고 좋아했던 래퍼는 맙 딥, 나스, 제이지도 그렇고, 생각해보면 완전 다 개 커머셜 래퍼들이거든요. 거기서 오는 괴리감이 되게 큰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서 ‘나는 제다이 마인드 트릭스가 짱인 것 같다.’, ‘일 빌(Ill Bill)이 짱이야, 비니 패즈(Vinnie Paz)가 짱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많이 없거든요. 90%가 제이지, 나스,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 제이콜(J.Cole) 좋아하고 그런 건데, 완전 개 가수, 연예인이잖아요. 근데 우리나라에서는 언더그라운드 래퍼들이 그런 걸 좋아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나라로 치면 지드래곤(G-Dragon) 같은 사람을 좋아하고 있는 건데… 그러니까 괴리감이 오는 거죠. 그래서 언더그라운드 래퍼들이 지하철 타고 다니면서 루이뷔통(Louis Vuitton) 입으려고 그러고. 그게 어느 순간부터 혐오감이 들어서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B급 느낌을 되게 좋아하고, 본능적으로 거기에 가까워지려고 하죠. 합의점 같은 것들이 너무 부자연스러워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언더그라운드니까 제다이 마인드 트릭스 같은 걸 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고요. 그걸 우리나라식으로, 내가 좋아하는 커머셜한 사운드를 우리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하는 게 뭘까 굉장히 많이 생각하죠. 예를 들어, 일리네어 레코즈(Illionaire Records) 같은 애들이 지금 그런 걸 하는 이유는 그대로 가져와도 자연스럽단 말이에요. 근데 일리네어 레코즈가 아닌 경우들이 자연스럽게 하는 게 뭘까 생각을 많이 하는 거죠.





LE: 랍티미스트 씨가 “Tear It Down”이라는 노래로 AOTP와 작업한 적이 있었잖아요. 말씀하신 걸 들어보면 그때는 별다른 기분이 들거나 그러지는 않으셨을 것 같기도 해요.

랍티미스트는 어릴 때부터 형들의 예쁨을 굉장히 많이 받았었어요. 비트가 좋으니까요. 주변 뮤지션들도 걔를 엄청 많이 찾았고요. 그래서 부러움의 대상이었죠. 열등감도 많이 느꼈고요. 그리고 걔가 해외 컨택 같은 것도 어릴 때부터 되게 많이 되었어요. 그래서 AOTP랑 (작업이 성사)되었을 때는 신기하기도 하지만, 엄청나게 ‘와 미친 대박.’ 이런 건 아니었어요. 개인적으로는 그 비트가 랍티미스트가 저에게 줬던 거였거든요. 제 앨범에 들어가기로 했던 건데, 말도 없이 그냥 AOTP를 줘서 개인적으로 실망을 많이 했던… (웃음) 그건 다른 게 없었어요. ‘내 비트인데?! 와 진짜 대박이다. 하지만 내가 돈 준 것도 아니고…’ 그런 생각이었죠.





LE: 그러고 나서 랍티미스트 씨가 소울 컴퍼니로 가신 건가요?

시기는 기억이 안 나요. 나가고 나서 한참 후에 그랬으니까요. 빅딜 나가고 나서 소울 컴퍼니에 바로 간 게 아니고 타일 뮤직(Tyle Music)을 갔어요. 그리고 사실 [Undisputed] 비트들도 저에게 왔었던 것들이에요. 그랬다가 제가 가사를 안 쓰고, 게으르게 하고 “나중에 낼게요.” 했다가 다른 앨범으로 넘어간 거죠.





LE: 빅딜이 소울 컴퍼니와 양대산맥을 이뤘다고 해야 하나요? 그런 시기를 이야기해보려고 하는데, 많은 사람이 2000년대 중반에 두 레이블이 씬을 양분해서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야기해요. 실제로 본인이 느끼기에 빅딜의 멤버로서, 또 빅딜의 멤버들이 느끼기에 당시 어떤 형국(?)은 어땠나요?

일단 저희는 외부에 적이 되게 많다고 생각했었어요. ‘적’이라는 단어를 선택해서 좀 그렇기는 한데, 전혀 기득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씬을 양분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저희 바로 위에 무브먼트(Movement)로 대표되는 절대 뚫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생각했고… ‘언더그라운드 안에서 우리는 멋진 거 하고 있다.’, ‘우린 빅딜이다.’ 이런 마인드가 있긴 했지만, 사실은 X밥 마인드도 있었어요. 우리는 존나 밑에 있고, 저 형들은 뚫을 수 없는 벽이고. TV에도 나오고, 돈 많이 벌고 있고…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체감을 전혀 못 했었어요. 우리가 씬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건 실제로도 아니었던 것 같고요. 당시에는 아직까지 무브먼트가 패권을 잡고 있었고, 소울 컴퍼니는 그 다음으로 잘 나가는 언더그라운드 레이블이었고요. 그래서 저희는 소울 컴퍼니에게 굉장히 많은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소울 컴퍼니는 솔직히 비트도 별로고, 힙합 아닌 것 같은데 장사 잘 되네?’ 그런 식이었어요. 지금은 전혀 다르게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편협했었어요.





LE: 사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생각해보니까 소울 컴퍼니나 빅딜이나 프로덕션 측면에서 보면 드럼이 둔탁한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BPM도 비슷하고, 샘플링 기반의 작법을 주로 활용했던 것도 그렇고, 사실상 크게 다르지 않았던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대표적으로 랍티미스트와 더콰이엇(The Quiett)을 나눌 때, DJ 프리미어(DJ Premier)와 피트 락(Pete Rock)으로 나눴거든요. 드럼을 쓰는 스타일이 더콰이엇은 피트 락 스타일로 하고, 랍티미스트는 DJ 프리미어처럼 한다고 저희 안에서 생각했던 거죠. 지금 보면 도찐개찐이지만요. (웃음) 당시에는 굳이 그런 걸 나눴던 것 같아요. 근데 풍기는 바이브, 앨범을 구성하는 방식, 아트워크를 꾸미는 느낌, 평소 입고 다니는 옷의 느낌, 주제나 제목을 정하는 느낌 같은 것들이 소울 컴퍼니도 하드한 걸 안 한 게 아닌데 왠지 빅딜과 대조되어서 이미지가 좀 그렇게 되었죠. 걔네들도 우리가 있어서 손해 보는 게 있었죠. 자기들도 존나 멋있는 거 하고 있는데 느낌이 감성적이고 이런 것만 조명이 되는 것 같고 그랬겠죠.





LE: 빅딜이 2004년에서 2006년 정도쯤에 앨범을 꾸준히 발표하고 입지를 다져오기는 했지만, 뭔가 빅딜이 집단으로서 하나 보여줬다 싶은 트랙은 역시 “Deal With Us”가 아니었나 해요. 물론, 그 전후로 단체곡 형식이 많이 쓰이긴 했는데, 어쨌든 빅딜을 대표하는 단체곡이라고 하면 그 곡이 아닌가 싶은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솔직히 말하면 진짜 아무 생각 없는데… (웃음) 그때 했던 노래, 내가 12마디밖에 안 했는데 사람들이 되게 좋아했던 노래, 끝. 근데 상징적이죠. 그걸로 빅딜의 인기가 조금 많아졌었고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곡 너무 많은데 “Deal With Us”가 꼽히는 분위기도 참 재미있고 아이러니하고… 그렇게 느끼고 있어요. 지금 들으면 뭐… (웃음) 구린 랩도 존나 많아요. 저도 제 랩이 존나 구리다고 생각하고요. 뮤직비디오도 진짜 지금 보면 버티기 영상이고… (전원 웃음)





LE: 저희 에디터 중의 한 명은 그때 당시에 “Deal With Us” 뮤직비디오를 진짜 많이 봤었다고 하더라고요. 중학교 때인가 고등학교 때였다는데…

아, 그래요? (웃음)





LE: 네. 힙합 좋아하는 친구들끼리같이 모여서 “이거 또 보자.” “딥플로우 저 부분 또 보자.” 그러면서… 그러면서 ‘이게 진짜 힙합이구나.’ 생각하고…

그런… 네. 아무튼. (웃음)





LE: 촬영하는 방식도 나름 흥미로웠던 것 같아요. 타이트하게 컷이 넘어가는 것도 그렇고, 트랙의 분위기를 잘 살렸다 싶어요.

그때 언더그라운드에서 뮤직비디오 촬영을 처음 한 사람이 어드스피치 형이었어요. 한때는 영상 학원에 다니겠다고 해서 ‘저 형이 뭐하고 있는 거지?’ 그랬는데, 캠코더를 가져와서 뮤직비디오를 찍어주고… 언더그라운드에서 뮤직비디오가 아예 없었거든요. 근데 그런 움직임을 빅딜이 좀 하긴 했죠. “Deal With Us”는 단발적인 프로젝트로 ‘우리 뭐 하자!’ 그런 느낌으로 한 건데, 반응이 좋을 줄은 몰랐죠.





LE: 근데 그 뮤직비디오에서 쓰인 기법이 노가다가 심한 기법 아닌가요?

저는 뭐, 그때… 집에 빨리 가고 싶은데 왜 내가 여기서 이걸 기다려야 하나 싶었고… “저 언제 찍어요?” 그러고… (전원 웃음) 그런 거라서 기억도 안 나요.





LE: 아직도 기억하는 게, 뮤직비디오에서 다이나마이트 씨가 철창을 두고 찍는데 입김이 나오는 게 추워 보이는 거예요.

어드스피치 형은 그걸 너무 좋아해요. 막 씌워서 끌고 가고, 납치해서 패고, 트렁크에 넣고… (웃음) 영상이나 이런 데서 뭔가 상징하는 걸 넣어야 하니까 ‘저항’, ‘투쟁’ 이런 걸 넣은 것 같은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잖아요. 왜 쟤가 갱스터인 척 하느냐고 하죠. 아, 저는 못 보겠어요.





LE: 딥플로우 씨도 지금까지 영상 작업을 하고 계시는데, 어드스피치 씨에게 혹시 영향을 받은 게 있으신지도 궁금해요.

그런 적은 없어요. 영상 쪽으로 대화를 해보고 그러지는 않았어요. 지금은 그 형 진짜 잘 찍어요. 완전 프로가 되어서…영상감독님이시니까요. 아이돌 작업도 하고요.





LE: 영상이나 비주얼 쪽 이야기를 더 해보면, 요즘은 많이 안 하고 계시는 걸로 알고 있지만, 아트워크도 많이 하셨잖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영상 작업을 더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작년이었나 카메라도 새로 장만하신 걸로 알고 있고요.

네, 카메라도 새로 사고… 사놓고 잘 안 쓰죠. 더 좋은 카메라가 금방금방 나와서…





LE: 영상 작업물을 내놓으실 때는 ‘Directed by 639’라고 표기하시는 것 같던데, 아까 말씀하셨던 639 이름을 쓰는 이유와 같은 건가요?

타당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닌데, 선입견 (때문이에요). 딥플로우가 찍어서 더 엉성해 보일 수도 있잖아요. 래퍼가 디렉팅했으니까 ‘이제 랩 그만하고 영상 하는구나.’ 이런 이미지가 몇 있었어요. 어드스피치 형, 조 브라운(Joe Brown) 형 등등 그런 사람들이 있기도 했고요. 래퍼가 랩 안 하고 영상 찍는다고 하니까 부업 하는 느낌이고… 그렇게 돈 때문에 하는 건 아닌데 말이죠. 그런 이미지를 좀 희석하고 싶었어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639로 써놓고서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몰라라 하는 식이죠.




LE: 지금까지 찍었던 것 중에서는 어떤 게 가장 마음에 드시나요?

“강백호”? “강백호”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나왔던 거 같아요.





LE: 반대로 미안했던 거나 아쉬웠던 건 어떤 게 있나요?

미안했던 건… 이번에 브래스코(Brasco)라는 친구가 군대에 갔는데, 뮤직비디오를 하나 만들어서 올려줬어요. 그것도 계속 미루고 미루다 군대 가기 하루 전날에… “Skywalker”라는 곡인데, 그것도 영상을 2년 전에 찍었던 거거든요. 2년 전에 카메라 산 다음에 바로 시험 삼아서 찍어보고, “이거 소스도 별로고 (공개)하지 말자.”라고 했다가 군대 간다고 하니까 “이거라도 하나 편집해서 줄게.”라고 하면서 완전 나가리로 했죠. 심지어 이름도 안 박아놨어요. 그게 좀 아쉽죠. 거의 다 아쉽죠.다 아쉬운데 “강백호” 정도는 제가 기획부터 뭔가 제대로 한 거라서 맘에 드는 거고요.





LE: 뮤직비디오 디렉터로서의 딥플로우는 조금 다른가요?

글쎄요. 영상을 배우거나 그런 게 아니라서요. 현장도 많이 안 접해봤고요. 마구리로 하죠. 제가 다른 뮤직비디오 찍을 때와 비교해 보면, 효율적으로 하는 편이에요. 한 씬을 여러 번 반복해서 안 찍고 ‘이 정도면 나오겠다.’ 하는 식으로 바로바로 찍고 편집으로 해결하려는 스타일이죠. 머릿속에는 이미 그림이 다 있으니까요. 근데 외부 작업을 하게 되면 콘티를 보여줘야 한다거나 그런 귀찮은 것들을 해야 해서 외부 작업은 거의 안 하려고 하는 추세고요. 비스메이저(Vismajor) 거는 거의 다 제가 하는 편인데, 해놓고서 보여주지도 않아요. “내가 알아서 하는 거고, 내가 너네한테 돈도 안 받고 고생하는 거니까 내가 그냥 올릴 거야.” 이래요. (웃음) ‘멋없는 건 내가 알아서 다 뺀 거야.’ 그런 식으로 수용을 안 해주고 극단적으로 진행하죠.





LE: 영상이나 다른 쪽도 이야기를 해봤는데, 랩, 비트메이킹, 아트워크, 영상 등 인디펜던트 아티스트로서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 안 해도 될 정도로 다양한 걸 하시는 것 같아요. 이런 능력들을 일부러 키우게 된 건지, 표출하고 싶은 게 자연스레 여러 분야로 뻗어 나가는 건지, 아니면 내가 꼭 해야만 하는 불가피한 상황 때문에 그런 건지 궁금해요.

그런 것들이 다 섞여 있고요. 그래도 제가 하고 싶다는 이유가 조금 더 큰 것 같아요. 시각화하는 작업이 저의 취향과 능력 중에서도 조금 더 뛰어난 것 같아요. 음악적인 능력보다 그런 게 더 특이점이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넉살이나 던밀스(Don Mills), 우탄(Wutan) 이런 소속 뮤지션들의 음악 컨설팅을 하다 보면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거든요. 예를 들면, 뮤직비디오는 이런 식으로 나오고, 커버는 이런 식으로 되어야 하고 그런 거죠. 그런 그림이 쫙 그려지는 편이라서요. 근데 여기가 SM 엔터테인먼트(SM Entertainment)도 아니고 그런 컨설팅을 언더그라운드 뮤지션한테 (막) 하면 안 되잖아요. 어느 정도 이 친구의 능력을 존중해주고 그래야죠. 그런 게 보일 때는 설명을 해주고, 누군가 섭외해서 디렉터를 붙여 주고 그런 것보다 ‘내가 해볼게.’ 이런 느낌이 더 들어요. 아트워크도 그런 식으로 조언한 적이 많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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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건 최근의 이야기고요. 그전에는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들어줄 때가 많았죠. 거절도 잘 못 하는데, 이거 한다고 해서 인생 망하는 것도 아니고 ‘한 번 해주지, 뭐.’라는 생각으로 했는데, 돌이켜 보니까 제가 10년 동안 굉장히 많은 품앗이를 해줬어요. 재능기부를 너무 많이 해줘서 그 시간을 합치면 한 2년 정도 되는 것 같아요. 거기에 할애한 시간만요. 내 10년 중의 2년은 그런 걸로 쓴 것 아닐까 생각하면 아깝기도 하더라고요. 확실한 퀄리티로 해주는 것도 아니고… ‘구린데.’라는 생각이 들어도 일단 해달라니까 ‘약속은 지켰어.’라는 식으로 했던 거죠. 근데 전 상대방이 좋다고 해도 제가 구리다고 생각들면 그런 건 제 가치관에서 절대 좋은 게 아니라고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면, 디자인도 거의 다 거절을 하는데, 제가 지금 디자이너분들의 소스를 못 따라가거든요. 현재 유행이라거나 그런 걸 아예 공부를 안하고 있으니까, 완전 떨어지는데 사람들은 주변에서 조금 더 싸고 편하게 구하려고 저한테 의뢰하는 것 같아요. ‘쟤가 저런 것 한다.’라는 식으로 연락이 오는 게 저도 눈에 보이니까… 그러면 대부분 거절하는 편인데, 저도 안 하려고 마음먹은 게 이걸 하는 게 저 자신도 멋없어지는 거면 안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 하고 있죠.





LE: 요즘은 로우 디가(Row Digga) 씨가 있어서 그래도 좀 편하고 수월하시겠어요.

편한데, 소통이 잘… (웃음) 로우 디가는 완전 강경파라서요. 타협이 아예 없어요. 음악도 약간 내가 만든 비트나 내가 쓴 랩이 언제나 90점 이상일 수는 없는 건데, 그렇잖아요. 똥을 쌀 때도 있는 거잖아요. (근데 로우 디가는) 자기는 똥이라고 절대 생각 안 하는 거예요. 무조건 이거라고 (얘기하죠). “이거 글자 조금만 더 키우면…”이라고 하면 ‘아냐, 이건 레이아웃 때문에 안돼”라고 하는 그런 식이 있어서… 아무튼 그렇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잘 나오니까요.





- [Vismaj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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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이제 정규 1집 [Vismajor] 이야기를 해볼 텐데요. 우선 앨범 제목을 지금 크루, 레이블 이름으로 활용하신 것도 그렇고, ‘불가항력’이라는 말 자체에 부여하는 의미가 많으신 편인가요?

일단 1집 앨범 제목이 그거였으니까 지금 와서 의미가 되는 거지, 당시 이름을 지을 때는 지금 같은 의미가 아니었죠. 뜻을 해석해보면 오그라들기도 하고, ‘불가항력적으로 내 음악이 너희한테 다가갈 거야.’ 이런 건데… (전원 웃음) 지금은 개연성이 있으니까 이 이름을 계속 쓰는 거고요.





LE: 익숙한 단어가 아니잖아요. 잘 고르셨다는 생각도 들어요.

일단 우탱클랜(Wu-Tang Clan)의 영향도 있고, 한자의 오리엔탈적인 느낌과 힙합의 조화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어릴 때 DJ DOC의 “와신상담”이라는 곡을 들으면서도 멋있다고 생각했었어요. 한창 <이나중 탁구부>의 작가인 후루야 미노루의 만화를 보다가 “불가항력적이다!” 이런 대사를 보고 빡 꽂힌 거예요. 힙합적으로, 메타포로 해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불가항력을 네이버에 쳐보니까 ‘Vismajor’가 나왔죠. (웃음) 영어로는 다른 건데, 그건 약간 발음이 멋이 없었어요. 프랑스 법률 용어로 ‘Vismajor’가 있더라고요. 근데 이 이름을 쓰는 사람이 세계에 몇 있더라고요. 축구 팀도 있고요. 걔네도 구글(Google) 같은 데서 찾아서 쓰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나만 쓴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다행이기도 했죠.





LE: 후루야 미노루 작가 얘기를 하셨잖아요. 후루야 미노루는 웃긴 작품도 좋지만, <두더지>라든가, 어두운 계열의 작품이 굉장히 인상적인데요. 밝은 내용이 아니고 색채가 짙어서, 다른 일본 만화와 다르다는 생각을 많이 들어요.

저도 후반 작품을 더 좋아해요. 저는 그 작가의 만화를 다 봤고, 워낙 정서가 자극적이니까 그게 기준이 되어버렸어요. 만화든 영화든 선별할 때, 그 정서 같은 것들이 그 정도 확 파고드는 자극을 안 주면 어떤 영감이 안 들더라고요. 아예 오락 영화를 볼 때는 다른 기분으로 보지만, 약간 딥한 걸 보고 싶을 때는 그 정도 오지 않으면 임팩트가 없어서 애증의 작가에요. 취향을 그렇게 만들어버려서…





LE: 다시 돌아오면, 앨범이 나왔을 때, ‘빅딜의 차기 주자’, ‘빅딜이 다음으로 미는 래퍼는 딥플로우다.’라는 느낌이 있었는데, 멤버들 앨범이 차례로 나오던 시기잖아요. 본인의 앨범이 나왔을 때, 분위기는 어땠는지 궁금해요.

제가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앨범이 너무 늦게 나왔었어요. 원래 모리얼 다음으로 내정되어 있던 게 저였거든요. 그래서 2003년 말부터 2004년 초까지 당시에 저를 몰아주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랍티미스트, 프라이머리, 마일드비츠 이런 프로듀서들이 다 나한테 비트를 주던 분위기였는데, 제가 복에 겨워서 “아, 이거 좀 아닌데요?” 같은 소리도 하고요. “이건 할게요.”라고 해놓고 가사 쓰다 말고… 아이디 테크닉이나 나가고요. 나가면 술 막 먹고 재미있으니까요. 그런 거에 한창 정신 팔릴 때라서 시기를 놓쳤어요. 그 시기를 놓치고 형들에게 다시 차례가 돌아가니까 (미뤄졌죠). 저는 비트를 받는 것도 까다로워졌고, 또 랍티미스트랑 프라이머리 형이 나가버렸으니까 비트를 제가 만들기 시작했죠. (빅딜의 상승세) 분위기가 이미 살짝, 고조된 상태에서 내려가는 시기여서 당시 저도 주목되는 느낌은 아니었어요. 겨우겨우 늦게나마 하는 느낌이었죠. ‘이제 상구가 앨범 내네.’라고 하는 분위기였어요. 돈은 제일 많이 들였다고 샥이 형이 그러더라고요.





LE: 앨범이 중, 후반부부터는 주축 프로듀서의 곡이 아닌 사이먼 도미닉 씨나 슬리피(Sleepy) 씨 곡으로 채워져 있잖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비트메이커라고 칭할 만한 분들이 비트를 주신 건 아니더라고요. 여기저기서 모으셨나 봐요.

MSN 메신저나 네이트온(Nate On)으로 비트를 온라인으로 받을 수 있고, 주변 프로듀서들이 자기가 습작한 비트를 메신저에 접속한 친구들에게 보내주면서 “한 번 들어봐, 오늘 만든 거야.”라고 하는 분위기였거든요. 그때는 심지어 가사도 보내줬어요. “나 오늘 쓴 가사야.”라고 하면서요. (웃음) 그렇게 가사까지 서로 돌려서 보는 분위기였는데, 요즘 어린 친구들도 그럴 걸요. 그랬으니까 들어볼 기회가 많았고 그랬죠. 근데 랍티미스트랑 프라이머리 형은… 저는 프라이머리 형한테 비트를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10년 넘게 알았는데요. 프라이머리 형한테는 부탁을 안 했던 것 같아요. 어려워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랬고, 랍티미스트 거는 몇 개 들어갔고, 마일드비츠 형 것도 몇 개 들어갔고… 나머지는 그냥 제가 2005년부터 2006, 2007년 초반까지 2년 동안 대기만 엄청 하고 제가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집에서 만든 비트들이었죠.





LE: 그래서인지 중, 후반부 프로덕션이 아쉽다는 인상이 들어요. 예를 들어, 사이먼 도미닉 씨가 만든 곡은 락 어프로치가 좀 과하게 들어간 느낌이 있어서… 그래서 본인은 그런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존나 구려요. 못 들어주겠어요. (웃음) 그 당시에는 최선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제 목소리와 비트를 믹싱하는 과정을 처음 접했던 거고… 앨범을 만들고 나서 사운드를 잡는 과정을 처음 접해봤던 거죠. 다른 형들이 믹싱할 때도 따라가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다 한 앨범을 프로듀싱하고, 배열하고, 사운드 믹싱을 하고, 심지어는 멀티트랙을 뽑는 방법까지 알아가면서 만들었으니 실험작이었죠. 실험작이고, 이걸 하면서 배웠죠. 어떤 소스가 더 좋은 거고, 편곡은 어떻게 해야 느낌이 나고 그런… 공연을 많이 하면서도 알아갔어요. 공연 때는 이런 구성으로 해야 터지고 그런 것들을 알아가는 때였던 것 같아요. 지금 보면 당연히 완성도가 낮죠. 가끔 명반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못 들어주겠는데… 지금은 뭘 말하고자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LE: 그래도 “대답해줘” 같은 트랙이 기억에 많이 남는데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답답한 마음이나 현실적인 부분에서 오는 감정이 담겨있는 것 같아요. 20대 초반에 언더그라운드 힙합을 하는 사람으로서 속풀이 같은 걸 하는 느낌?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어떤 답답함과 힘든 게 있었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상대적인 거죠. 감기 걸린 사람이랑 암 걸린 사람이랑 아픈 건 마찬가지니까. 저는 감기 걸려놓고 아픈 척하는 그런 애 느낌이었던 거 같아요.





LE: 다른 트랙을 얘기해보면 “Beloved” 같은 경우에는 지금도 몇 없는 사랑 얘기를 하는 트랙인데, 뭐랄까 막 엄청 따뜻하거나 그런 느낌은 아니지만 흥미로웠던 것 같아요.

굉장히 연애를 많이 했고, (웃음) 일반적인 연애와 이성 관계를 많이 경험했는데요. 누구보다 사랑 이야기는 할 말도 많고 그래서 스탠다드하게 할 수 있거든요. 저 때 당시에도 그런 거였어요. 검열이 없었죠. ‘사랑 노래 하나 해야지. 여자친구 있으니까 걔한테 바치는 노래 해야지.’라는 생각에서 한 단순한 결정이었는데, 선입견이라는 게… 제가 저걸 하고 나니까 그런 피드백을 들었어요. 딥플로우가 사랑 노래를 하는데, “가사는 분명히 사랑하고 있다고 얘기하지만,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면 널 강간할 거고, 죽여버릴 거라고 하는 것처럼 들린다.”라고… 그런 얘기를 듣고 굉장히 상처를 받았었어요. 그 후로 (사랑 노래가) 차츰 줄어들었던 것 같아요. 20대 중, 후반까지는 사랑 이야기를 쓰는 것에 있어서 거리낌이 없었는데, 요즘은 일부러 안 하죠. 제가 달달한 거 듣고 싶고, 그런 바이브를 느끼고 싶을 때는 충분히 다른 사람이 많이 하고 있으니까 그런 걸 들으면 되지, 딥플로우한테서 그런 걸 듣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제가 만약에 그런 노래를 공연하게 되었을 때, 비주얼에서 오는 괴리감도 선사하고 싶지 않은 거죠. 이렇게 생긴 애가 달달한 이야기를 하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요. 최근에는 일부러 기피하고 있기는 한데, 저는 나름대로 섬세한 가사를 쓰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사랑 노래도 당연히 하고 싶죠. 인생의 많은 부분을 연애와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고 사는데… 하고 싶은 이야기고, 음악 안에서 뮤지션이 담을 수 있는 좋은 주제잖아요. 근데 제가 그런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 뮤지션이라는 게 너무 슬퍼요. (웃음)





LE: 사랑 얘기나 연애 얘기를 한국에서 랩을 통해 풀어놓는 아티스트들이 자주 하는 실수랄까요? 그 대표적인 경우가 장르 특유의 매력이 감소하는 경우인 것 같은데요. 접점을 찾기 어려운 부분도 있으실 것 같아요. 힙합의 방법론에 입각한 본인이 추구하는 음악을 하면서도 그 안에 연애 얘기를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라고 해야 하나요?

저는 좋은 교과서들이 미국에 많다고 생각해요. 이미 그 접점에 대해서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음악가가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들 보고 자란 게 그런 건데, 멋있는 접점이 진짜 많거든요. 근데 그런 접점을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하고 싶기도 해요. 커리어가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에, 멋있는 사랑 이야기를 멋있는 방식으로 하는 게 저의 과제 같은 거죠. 제가 싫어하는 건 그런 거죠. ‘알만한 사람이…’ 느낌이죠. 알만한 사람이 그런 걸 안 하고 편법으로 하는 것에 대해서 구리다고 생각하는 거죠. 사랑을 소재로 이야기하는 걸 구리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아요.




LE: [Vismajor]를 들어보면, 지금과 목소리 톤이 되게 다른 것 같아요. 당시에는 지금보다 조금 더 날카롭고 얇은 톤인데, 인위적으로 낸 건지 아니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두꺼워진 건지 궁금해요.

발성을 다른 식으로 했고요. 저 때 발성에서 교정한 거라 지금은 저 때 목소리를 못 내요. 들으면 ‘어우, 어떻게 이렇게 목소리가 나오지?’ 싶어요. 목을 굉장히 안 좋게 쓰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지금도 목 상태가 많이 안 좋거든요. 당시 꽂혀있는 톤이 있었어요. 빅 엘(Big L) 같은 하이톤 랩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커리어 초반에 라임어택 형 EP 앨범에 참여할 때는 아예 되게 걸걸하게 랩을 하고 싶었고, 바로 또 마음이 바뀌어서 [Illmatic] 때 나스 톤이나 빅 엘 같은 랩에 꽂혀 있어서 마일드비츠 형 앨범이나 어드스피치 형 앨범이나 제 앨범에는 하이톤으로 했죠. 제 앨범 할 때쯤 되면 살짝 안정되었을 땐데, 마일드비츠 형 앨범에서는 굉장히 하이톤으로 했었어요. 힘들더라고요. 목도 아프고… 그래서 안정적으로 가려다가 2집 할 때 즈음에는 꽂혀있던 래퍼가 또 따로 있었고…





LE: 지지(Jeezy)인가요?

지지나 게임(Game) 같은 래퍼들 톤에 꽂혀 있었죠. 한참 호스트 MC를 하던 때라서 목이 항상 과하게 쉬어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자극적인 톤을 내기가 힘들어요. 목이 많이 상해서 조금만 해도 목이 쉬고요. 그때 당시에는 지금과 완전 다르죠.





LE: 1집에 담겨 있는 모습이라고 하면 풋풋하면서도 당돌한, 패기 어린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처럼 리더의 느낌보다는 행동대장 같은 느낌도 있었는데, 그때보다 지금이 더 씬에서 활동할 때, 작품을 낼 때 부담감이 클 것 같아요.

양날의 검인데, 지금과 그때의 장•단점이 다른 것 같아요. 지금은 오히려 누구를 건드린다거나 자극적으로 가사를 쓴다거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에 있어서는 제약이 아예 없어요. 오히려 그때보다 조금 더 과감해진 것도 있어요. 지금은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제가 보여주고 싶은 바이브를 모순되게 가지고 있어요. 예를 들면, 사랑 노래를 아예 검열해버리고 안 하고… 내가 보여줘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쪽으로 많이 기울이고는 있어요. 아이러니하긴 한데, 오히려 저 때는 그냥 눈치를 더 보기도 했어요. 씹고 싶은 게 있는데 오히려 더 사린다거나 그런 거죠. 대신 이때는 사랑 노래를 한다든지, 락적인 곡을 한다든지 그런 것에 대해 거부감 없이 하고 싶은 건 다 해버리고 그랬죠.





- 지기 펠라즈, [Rap Hustl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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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Vismajor] 이야기를 좀 해봤는데, 당시 지기 펠라즈(Jiggy Fellaz)라는 크루에 소속되시는데요. 지기 펠라즈가 컴필레이션 앨범이 그때 당시에 되게 전격적으로 나왔었잖아요. 당시 티셔츠랑 포스터랑 이거저거 패키지로 다 같이 팔고 그랬는데… (웃음) [Xclusive]는 들어보면 편차가 되게 심한 편이에요. 잘하는 분도 있는데, 생소한 분도 있고요. 앨범 자체가 크루로 함께 만든다는 느낌보다는 제각각인 느낌이 컸어요. 지기 펠라즈의 멤버로 활동하게 된 계기나 과정이 궁금해요.

지기 펠라즈는 장고라는 형과 바스코(Vasco) 형이 주축으로 이뤄졌고요. 장고라는 형의 성향이 굉장히 부산 사나이, 부산 형님이기도 하고, 사람을 끌어모으고 지휘하고 그런 것에 능한 형이었어요. 그래서 사람을 굉장히 많이 끌어모았고요. 근데 그 방식에서 부작용도 있었죠. 슈프림팀(Supreme Team)도 초반에 들어왔다가 나가고요. 그때 당시에 저랑 데드피 형이 (지기 펠라즈에) 들어갔었어요. 데드피 형도 지기펠라즈였어요. 그게 당시에 어떤 느낌이었느냐면, 크루에 들어간다는 느낌이 아니고 표현이 웃기지만 클랜 있잖아요. 연대의 느낌? 너무 제각각의 사람들이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고… 장고 형이 술 먹으면서 “야, 우리 같이 하자.” 이랬을 때, 저는 뭔지도 모르니까 “알겠습니다.”하고 컴필레이션 앨범을 같이 했죠. 그런 부분에서 민감한 사람들은 나왔던 것 같고요. 저는 그런 게 일상이나 여러 부분에 큰 영향을 안 미쳤었어요. 저랑 친한 친구들도 많았고, 원래 알던 형들도 있고 하다 보니 불편한 게 없었고요. 가끔 공연에 불려가서 같이 공연하고, 사진 찍을 때 같이 사진 찍고… 작업하자고 하면 작업하고요. 그 정도였거든요. 빅딜 가면 빅딜 형들이 “너 지기 펠라즈잖아.”라면서 놀리고 “아, 아니라고요.” 하는 그런 존재. (웃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지기 펠라즈가) 장사가 잘 되었죠. 컴필레이션 앨범을 하고 움직임이 좀 있었고… 브이홀(V-Hall)을 꽉 채울 정도였어요. 싸이월드(Cyworld) 팬클럽 회원 수도 엄청 많았고요. 그러니까 저는 이 부분의 파이도 먹고, 빅딜의 파이도 먹고 그런 느낌이었어요. ‘나쁠 거 없는데?’ 지금 보면 자기 커리어나 입지를 정확히 하는 게 중요한 건데, 당시에는 자각을 못 했어요. 좋은 대로 하는 거였죠. 당연히 신경을 아예 안 쓰고 있었기 때문에 주력 멤버가 아닌 것에 대해서도 불만은 없었어요.





LE: 애매하다 싶은 부분이 [Xclusive]를 지나서 [Black Album]에도 참여하시는데, 주축이 아닌 것 같은 멤버는 딥플로우 씨 한 명밖에 없었던 것 같았어요.

그런 걸 제가 굳이 장고 형한테 “형, 저 나갈게요.”라고 하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과 (그냥 남아있는 것 사이에) 저울질을 해봤을 때, 굳이 나가는 게 오히려 더 불편했던 거죠. 그래서 가만히 있었죠. 앨범 해야 한다고 하면 벌스 쓰고 녹음하면 끝이니까요. 그런 식으로 많이 지냈어요. 지금과는 생각이 많이 달랐죠.





LE: 그럼 해체와 함께 자동으로 탈퇴하셨던 건가요?

근데 지기 펠라즈가 메스퀘이커와 비슷하게 해체 시점이 명확하지 않아요. 잘 되다가 어느 순간 장고 형이 잠수를 한 번 타고 그러면서 와해가 되었던 것 같아요. 지기 펠라즈 멤버들도 그런 식이었어요. 장고 형이 활발하게 하니 정신없이 휩쓸려서 다녔던 것 같은데, 핵심이 없어지니까 자연스럽게 자기 삶으로 돌아갔던 거죠.





LE: 지금까지 수많은 집단을 언급했는데, 딥플로우 씨가 이 이상으로 더 많은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정보도 있더라고요. 저희가 모르지만, 흥미롭고 재미있는 곳으로는 또 어떤 곳이 있나요?

힙합 크루의 덕목 같은 게 사전에 쓰여있는 것도 아니고, 한때는 크루 같은 걸 가볍게 생각했을 때가 있었어요. 지기 펠라즈 등을 하면서 ‘이게 뭐 중요한가. 좋게좋게 사는 거지.’라고 생각했던 거죠. 저는 20대라는 시기가 제가 힙합을 하고 있고, 랩을 하고 있고, 씬 안에 있다는 것 자체로 즐거웠던 때였어요. 그래서 크게 문제가 안 되었어요. ‘내가 랩을 하고 있구나. 내가 음악을 하고 있구나.’가 신났던 시기였거든요. 지나가다가 누가 “요, 너 우리 크루 같이 하자.”라고 하면 “네.” 이랬던 정도로… (웃음) 그런 식이었어요. 한참 잠잠하다가 요즘 싱글 내고 있는 와잇티즈(Whiteez)라는 크루에도 있었고요. 겹치는 멤버들이 많더라고요. 캐리 다이아몬드(Carry Diamond) 형이 하는 머니레인(MoneyRain)이라는 크루가 있었는데, 거기서도 그 형이 (성대모사로) “우리 머니레인 할 건데 같이 할래?”라고 하니까 “네, 해요. 형. 하죠, 뭐.”라고 하는 식이었어요. 왜냐하면, 그걸 해도 제가 표면적으로 어디 활동하거나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요. 사교 모임 정도로 생각했죠. 제가 저 술집에 가면 그 형들이 모여 술을 먹고 있고, 거기 모임이 있으면 전 그건 거고… 다른 데 모임이 있으면 또 그거고요. 저는 그때 너무 신났었기 때문에… 근데 제가 빅딜을 나오면서 이런 것들에 대해 염증이 생겨서 그때 각성을 조금 했던 것 같아요.





LE: 어느 집단에도 속해있지 않은 순간도 있으신가요?

빅딜 나오면서죠. 그것도 제가 이런 인터뷰에서 말하니까 아는 거지,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고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퇴장하셨습니다.’가 뜨면서 로그아웃하는 게 아니잖아요. 굳이 가서 “저는 이 순간부터 나오겠습니다.” 이것도 아니었고요. 그냥 표면적으로 “난 지금부터 아닌 거야.” 그랬던 거죠. 빅딜 나오면서 ‘나는 이런 거에 몸 담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한 시기가 좀 있었죠. 그게 한 2010년?





LE: 덥 사운즈를 나오고 나서 비스메이저로 건너가는 사이도 공백기 아닌가요?

덥 사운즈에 있을 때, 이미 비스메이저 크루가 있었고요. 나오고 나서 한 반년 동안 회사가 없는 상태로 있다가 고민 끝에 VMC(Vismajor Company)를 만들게 됐던 거죠.





LE: 얘기를 건너뛰면, 2007년 즈음이 슈프림팀이 한창 잘 나가던 시기, 언더그라운드가 부흥하던 시기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소울 컴퍼니, 빅딜이 잘 나가던 시기이기도 했어요. 2007년에 대해서 감흥이 따로 있으신지 궁금해요.

기억하기로는 제가 믹스테입을 발매했을 때가 2008년이고요. 2006, 7년에는 제가 구리에 살면서 음악만 만들던 때였고요. 2007년 초에 앨범을 내고 더 신났던 느낌이 들었죠. 믹스테입을 내고 나서 슈프림팀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때가 2008년이었는데, 제가 최고로 신났던 때였던 것 같아요. 저도 믹스테입 내고 ‘아, 이제 내가 중심으로 다가가고 있구나.’를 느꼈던 때였어요. 앨범도 내고, 믹스테입도 내고 하니까 ‘뭔가 활발하게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신났던 때였어요.





LE: 사실 그 2008년을 설명하기 좋은 키워드가 말씀하셨던 것처럼 ‘믹스테입’이잖아요. 정말로 이센스 씨나 사이먼 도미닉 씨가 믹스테입을 삼천 장씩 찍어도 일주일 만에 다 팔리고 그랬던 시기였었는데요. 당시에 딥플로우 씨도 [Rap Hustler]라는 믹스테입을 발표하셨었는데, 다들 재미있게 하니까 나도 재미있게 해보자 이런 생각이셨던 건가요?

당시 분위기가… 패션 스타일도 시기에 따라 계속 바뀌잖아요. 그런 것처럼 그때 유행과 경향 같은 게 몸으로 체감되니까… 그때 당시에 저도 믹스테입을 내야 하는 게 뭔가 약간 당연한 느낌이었어요. 그런 것도 있었고, 돈이 되니까요. 주변에서 믹스테입 많이 팔린다고 하니까요. 그때 돈이 필요했었어요. ‘믹스테입 내서 돈을 벌어야지.’ 이 생각을 되게 막연하게 했었죠.





LE: 그 당시에 믹스테입을 발표하시면서 스타일의 변화도 좀 있으셨던 것 같아요. [Heavy Deep]에서 엿볼 수 있었던 서던 스타일을 더 먼저 엿볼 수 있었던 결과물이 [Rap Hustler]였는데요. 그때가 딱 릴 웨인(Lil Wayne), 티아이(T.I.) 같은 남부 랩스타들이 잘 나가던 시기잖아요. 아무래도 그런 시류에 맞춰서 스타일을 변화시키신 거겠죠?

저는 커머셜한 래퍼를 되게 좋아했어요.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 접할 수 있는 채널로는 메인스트림 래퍼를 볼 수밖에 없잖아요. 유투브라든가… 예전에는 유투브도 없었고요. 우리나라 힙합 커뮤니티에서 조명받는 것도 다 메인스트림이었고요. 근데 힙합이 워낙 힙스터적인 장르이기 때문에 힙합 매니아나 래퍼로서 메인스트림 중에서도 최신의 어떤 것, 프레쉬한 걸 좋아하는 게 당연한 것 같아요. 다만, 각자가 수용하는 범위가 다른 거죠. 그래서 당시에 제가 꽂혀 있었던 게 서던이었어요. 더리 사우스라고 하기에는 좀 뭐하고 그냥 서던 힙합? 그런 풍의 노래들… 그래서 믹스테입 안에서 (그런 스타일을) 많이 하고 싶었죠. 어차피 내가 누구한테 받은 비트도 아니니까 이런저런 느낌을 시도해보고… 사운드를 구성하는 데에 있어서 도움이 되는 시기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굉장히 광범위한 바운더리 안에서 제가 비트를 고를 수 있었으니까요. 비트 셀렉하는 게 되게 재미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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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사실 [Rap Hustler]를 이야기하면서 믹스트릿닷컴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말씀을 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웃음)

당시에 저는 되게 신나 있었기 때문에… 뭔가 어떤 새로운 움직임 같은 걸 하고 싶어 했었어요. 믹스테입 사이트를 만들고 싶었어요. 당시에 저도 굉장히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신인들을 서포트해야 한다는 생각이나 신인들의 믹스테입 발표가 활발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냥 멋있는 걸 하고 싶었어요. 문화를 움직이는 거죠. 당시에는 힙합플레이야(Hiphopplaya)나 리드머(Rhythmer) 밖에 없었는데, 이런 데서 다뤄주지 않는 믹스테입이 막 올라가고, 거기서 영상 같은 것들도 거창하지 않은 선에서 UCC, PV 느낌으로 찍어서 올라가는 사이트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었죠. 그래서 사이트 작업을 하다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도메인도 사고, 호스팅 서버도 사고, 사이트 로고도 다 만들어놨었어요. 주변 서포트도 되게 많이 받았었어요. 슈프림팀이 서포트 해주기로 하고, 주변에 10명 정도의 래퍼들이 믹스트릿닷컴에만 올리는 용도로 믹스테입을 제작하기로까지 했었죠. 근데 제가 진행을 안 했죠. 그냥… 귀찮아지기도 했던 것 같고… 그리고 사실 결정적인 건 제 믹스테입 판매 개시를 시점으로 3일 만에 소니(Sony) 뮤직에서 전화가 온 거예요. “이거 다 걸린다. 하지 마라. 판매 중지해라.”라고 해서 힙합플레이야에서 판매가 중단됐죠. 근데 제가 믹스테입을 존나 많이 팔 줄 알고 한 오천 장 찍었었거든요. 천몇백 장 팔고 바로 중단되어서 집에 아직도 쌓여 있어요.





LE: 근데 그래도 3일 만에 천몇백 장이면 꽤 높은 수치 아닌가요?

네. 그때 많이 팔렸었던 거죠. 여태까지도 CD를 팔아서 돈을 번 건 그게 최초이자 아직까지도 마지막이죠. [양화]는 지켜봐야겠지만요. 정산이 안 돼서… (웃음) 하여튼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아, 이제 우리나라에서 믹스테입 못 내는구나.’ 생각했었죠. 근데 지금은 되게 당연한 거지만, 그때 당시에는 무료 배포라는 개념이 좀 생소했죠. 그냥 “망했다, 시발.” 이런 느낌이었어요. (전원 웃음) 그러면서 믹스트릿닷컴도… 근데 한 2년 전에 어떤 분들이 댓핍(datpiff.com) 같은 믹스테입 사이트를 만들 건데, 그걸 믹스트릿닷컴이라는 이름으로 하고 싶다면서 라이센스를 해달라고 찾아오셨던 적이 있어요. 저는 상관없다고, 해주면 좋은 거라고 했었죠. 제가 뭔가 약속을 지키는 기분이라서 좋다고… 그래서 그 사이트도 완전 기깔 나게 만들었는데, 갑자기 안 하더라고요.





LE: 사실 근데 기존 비트를 사용해서 믹스테입을 만들었는데도 돈을 받고 판다는 것 자체가 지금 조성된 인식으로는 용인이 안 되고 있잖아요. 그래서 지금의 시점에서 그때의 믹스테입 붐을 바라보면, ‘인식이 덜 잡혀 있었던 시기였구나.’라는 걸 실감 많이 하실 것 같아요.

시대의 특수성을 타고난 약 3, 4개월간의 붐이었죠. 그때 딱 내보지 않았다면 그 느낌을 모르는데… 아무튼,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건데요. 당시에 저희가 열심히 하고, 팬들이 언더그라운드를 조명하고 있긴 했지만, 그건 진짜 우리나라 0.01%만 아는 사실이잖아요. 그러니까 굉장히 마이너한, 어떤 비주류의 움직임이었죠. “와, 2008년에 진짜 그랬지.”라고 해도 사실 아무도 모르잖아요. (전원 웃음) 약간 해적판 느낌이었던 거죠. 옛날 와레즈(Warez) 사이트 같은… 그런 거죠. 그리고 저는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에 다니는 오타쿠였기 때문에 동인지 문화에 인식이 있었어요. 이를테면, <원피스> 패러디물을 만들어서 박람회 같은 게 열리면 거기서 오타쿠들이 자기가 만든 동인지들을 팔아요. 팬시 상품 같이 만들어서… 그런 걸 어렸을 때부터 접했기 때문에 약간 마이너한, 해적판 문화라고 생각했는데, 소니 뮤직에서 전화가 오니까 겁이 난 거죠. “아, 네. 알겠습니다.”하고… 근데 저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아마 그렇게 생각했었을 거예요. 워낙 우리가 마이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LE: 근데 또 나름대로 저변이 넓어졌던 시기기도 한 것 같아요. 스윙스(Swings) 씨도 그때 믹스테입을 내시면서 두각을 드러내기도 했었으니까요.

그렇죠.





- 블레이저스, 네스티즈, 빅딜 스쿼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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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또 시간을 뛰어넘어 보겠습니다. 2009년 이야기인데요. 2009년에는 마일드비츠 씨와 함께 블레이저스(Blazers)라는 팀으로 1MC 1PD 프로젝트 앨범 [Stubborn Guys]를 발표하시는데요. 이 앨범이 참 묘하게 묻힌 감이 없잖아 있어요.

많이 묻혔죠.





LE: 꽤 준수한 퀄리티였음에도 불구하고 묻혔었는데, 본인은 앨범에 대한 자신감이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그 당시에 반응이 별로 없어 아쉬우셨을 것 같기도 한데요.

생각해보면, 저는 한 10년 동안 약간 밍밍한 상태의 래퍼였기 때문에 저는 그런 상태의 아이콘인 거 같아요. 열심히 꾸준하게 하고, 주목도 어느 정도 받고 있는데, 뭔가가 인상적이지 않은… 그런 걸 저도 늘 체감하고 있어서… 지금 보면 제 랩의 성향이 그런 편인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제가 구사하는 랩 스타일이 사람들한테 인상적으로 들리려면 그걸 더 뛰어넘는 프로덕션과 컨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안 거 같아요. 그때 당시에는 그런 것들이 많이 결여되어 있었던 거죠. [Vismajor]도 그랬고, 블레이저스 앨범도 그랬고, [Heavy Deep]까지도 인상적이지 않았던 이유들이 다 각각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래퍼들은 다 자기가 짱이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하고 있는 게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때는 인정하기가 힘들었었죠. 커뮤니티에서 반응이 없다든가, 그런 것들을 부정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었죠. ‘왜 나를 인정하지 않느냐. 존나 다 X밥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식으로 부정하는 때가 오기 마련인데, 그때 당시에는 제가 그런 게 좀 있었어요. 근데 지금 보면 다 이유가 있는 거죠. 다른 얘기지만, 그래서 제 주변 신인들이라든가, 레이블 소속 아티스트들이 그런 감정을 느껴 할 때는 그런 걸 제가 어느 정도 설명해줄 수 있죠. 이런 이런 점들 때문에 니가 지금 인상적이지 못해서 주목받지 못하는 거고, 이런 이런 부분을 보완하면 더 좋을 것 같다고 조언해줄 수 있죠. 이전에 그런 것들을 겪었기 때문에… 블레이저스는 딱 그런 느낌이에요. 시기상으로도 애매했어요. 그게 참 시대를 잘 따라야 하는 것 같기도 해요. 어떤 뮤지션이 어떤 음악을 가지고 나오는 시즌 와중에 놓여져 있느냐, 어떤 이야기를 다뤘느냐, 어떤 프로덕션으로 구성했느냐, 어떤 풍의 플로우로 랩을 했느냐 이런 것들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그런 것들이 다 부합이 안 됐던 앨범인 거 같아요.





LE: 그래도 퀄리티는 괜찮다고 생각하시지 않나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닙니다. 지금 보면 굉장히… 아니에요… (전원 웃음) 블레이저스…





LE: 그래도 불에 관한 아이디어는 되게 신선했던 것 같은데, 우선 누구에게서 나온 아이디어였나요?

그냥 제가 한 앨범들은 다 저의 아이디어였어요. 제가 그래도 다른 래퍼들에 비해서 브랜딩을 한다거나 이미지를 시각화해서 보여준다든가 하는 요소가 있는 편인 것 같아요. [Vismajor]도 그렇고… [Rap Hustler]의 제목도 그렇고요. 당시에 약간 느낌이 있을 것 같은 요소들을 많이 하려고 했던 거죠. 근데 또 저의 랩 플로우나 음악적인 것들을 인상적으로 하지 못했던 건 실패의 요인… 실패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아, 다시 정정합니다. 실패라고 생각은 안 해요. (웃음) 저는 그냥 의미 있게 했던 거라고 생각하고요. 아무튼, 블레이저스의 아이디어들은 다 제가 생각을 했던 거죠. 홍보 영상에서 불을 막 지른다든가… 얼굴이 불에 타고 있다든가… 지금 제가 좋아하는 B급의 요소들을 되게 많이 시도했던 때라서…





LE: 블레이저스 당시의 재미있는 지점이라면 역시 당시 하셨던 원데이 원벌스 프로젝트 아닌가 싶어요. 실제로 하루에 한 벌스씩 쓰는 걸 실천한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왜 하셨는지, 그 외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궁금해요.

제가 랩을 한창 열심히 했을 때가 2006, 7, 8, 9년이었어요. [Vismajor]도 한 2, 30곡을 만들어서 그중에 열 몇 곡을 수록한 거니까요. 가사를 계속 쓰고 있었고, 그 외적으로도 저는 피처링을 되게 많이 한 편이거든요. 피처링 때문이라도 가사는 늘 써야 했죠. 약간 필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어서도 있고, 그때가 가사를 늘 쓰는 시기였어요. [Vismajor] 앨범이 끝나고 믹스테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시점에도 가사를 계속 썼었죠. 믹스테입에도 한 30곡 정도가 들어갔으니까요. 그다음에 블레이저스 앨범 작업을 바로 했으니까… 당연히 하루에 한 벌스씩 꼭 쓰는 건 아니었지만, 약간 체감상 매일 가사를 써야지 스케줄에 맞출 수 있었으니까 그게 약간 슬로건처럼 한 번 써보면 재미있겠다 해서 썼던 거죠. 그리고 그렇게 표면적으로 얘기하면 마치 SNS에다가 “나 살 뺄 거야.”라고 올리는 것처럼 공개적으로 약속한 거니까 거기에 따라 실천을 할 수 있게끔 한 거죠. 근데 그 후로는 아니었어요. (웃음) 많이 놀았죠.





LE: 사실 외국 아티스트 같은 경우에는 믹스테입을 진짜 많이 내잖아요. 구찌 메인(Gucci Mane)도 있고… 너무 안 좋은 예를 든 것 같은데… (웃음) 릴 웨인도 예전에 진짜 많이 냈었잖아요. 어떤 구상해놓은 곡에 맞춰 가사를 쓰는 방식이 있는 반면에 많이 써놨다가 그중에 제일 좋은 벌스를 쓰는 방식도 있잖아요. 그 중간을 유지하고 계신 분들도 있는데, 본인에게는 어떤 게 좀 더 맞는 방법론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그 중간쯤, 혹은 약간 빨리 쓰는 거에 기울어져 있는 중간쯤인 것 같아요. 제가 배웠고, 멋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은 방금 얘기 나왔던 릴 웨인의 방식이에요. 그게 멋있는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근데 우리나라는… 사실 릴 웨인이나 말씀하신 구찌 메인 같은 래퍼들은 가사 한 줄을 쓰면 그걸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단 말이에요. 근데 우리나라는 그게 안 되잖아요. 마치 어디 산골짜기에서 무술 수련하는 사람처럼 내공을 다지는 느낌이니까… 근데 저는 우탱클랜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래퍼가) 음악 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약간 무술을 하는, 자기만의 문파에서 무술을 연마하는 사람에 가깝다고 느껴져요. 그런 행위들을 어떤 수련의 느낌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 점을 원데이 원벌스 슬로건으로 푼 거 같아요.





LE: 사실 아마추어 래퍼들이 전반적으로 작업량이 너무 적다는 생각도 가끔 하거든요. 계속해서 연습하고, 결과물 내고 하면서 피드백도 받고, 또 그것들이 자기 안에서 체화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가끔 보면 경우에 따라서는 게으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개별 래퍼별로 다르긴 하겠지만요. 그런 작업량에 관한 전반적인 풍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때는 제가 지금보다 단순하고, 열정적이었는데, 그래서 ‘Fake과 ‘Real’을 나누고자 했었어요. 왜냐하면, 가사에 그런 내용을 많이 썼으니까요. 그래서 저한테는 그 대상이 명확했어야 했죠. 저는 되게 많은 사람을 두루두루 접했기 때문에 제 주변에 제가 생각하는 ‘Fake’ MC의 기준에 가까운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래퍼라고 하기에는 작업을 아예 안 하는, 어떤 구상 같은 거만 몇 년하고 있고, 자기가 랩을 하고 있다는 느낌에 취해 있지만, 그 무엇도 안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게 좋은 가사 소재가 되기도 했던 것 같아요. 원데이 원벌스 슬로건을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던 것 같고… ‘나는 저런 사람들처럼 하지 않고 내가 래퍼라면 열심히 할 거야.’ 생각했었죠. 그때 당시에는 막연하게 내가 랩을 잘하는 게, 지금보다 더 잘해지고, 또 더 잘해지고 하는 게 성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그런 거에 더 충실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싶어요. 어떤 게으른 래퍼들에 대해서 비난하고, 난 그렇지 않다는 걸 과시하고 그런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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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프라이머리 & 마일드비츠 앨범의 “죽일놈의 힙합”에서 이미 드러나긴 했지만, 블레이저스 앨범에 “Be Nasty”라는 곡으로 표면적으로 네스티즈(Nastyz)라는 팀이 드러나잖아요. 네스티즈라는 팀이 결성되었다는 소식에 팬들이 되게 기대하기도 했고, 또 그 기대에 팀이 부응할 거라 생각했던 팬들도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결국, 앨범을 내지 못하고 별다른 활동 없이 팀이 없어지게 되는데요. 네스티즈라는 팀이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없어지기까지의 전반적인 과정을 쭉 이야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그때까지 늘 데드피 형이 짱이라고 생각했고, 처음 데드피 형을 봤을 때부터 그 마음이 변하지를 않았는데… 그리고 저는 언더그라운드에 있었지만, 어릴 때부터 차츰차츰 이 안에서의 엔터테인같은 거에 대해서 되게 본능적으로 했었어요. 예를 들어, 제가 원데이 원벌스라는 슬로건이라든가, 블레이저스라는 팀에 쓰인 아이템들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이 안에서 제가 엔터테인을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거든요. 그런 점도 있어서 빅딜 안에서 데드피 형이랑 내가 같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본능적으로 했었죠. 저도 하고 싶었고요. 근데 어떤 랩 듀오의 특성상 누군가는 2인자가 되어야 하잖아요. 둘이 딱 밸런스가 맞는 건 메소드 맨(Method Man) & 레드맨(Redman), 혹은 블랙스타(Black Star) 아니면 없잖아요. 다이나믹 듀오(Dynamic Duo)도 (어떤 편차가) 존재하고… 저는 아무리 봐도 제가 이인자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작업을 하면서 ‘네스티즈를 하기 전에 내가 앨범을 하나 더 내서 입지를 다진 다음에 데드피 형이랑 작업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당연히 앨범이 안 나왔고요. [Heavy Deep]이 그런 앨범이었거든요. [Heavy Deep]을 내고 나서 “형, 우리 네스티즈 합시다.” 이런 단계였고… 결성하게 된 건 원래 같이 빅딜이었으니까요. 같이 하다가 공연을 형이랑 많이 하면서 어차피 공연을 맨날 같이 하니까… 이름은 제가 나스를 좋아하고, ‘Nasty’라는 단어의 어감이 좋아서 네스티즈로 하자고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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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회사도 알아보고, 다니다 보니까 덥 사운즈랑 계약을 하게 됐죠. 덥 사운즈가 처음에 저희한테 “너희를 제2의 드렁큰 타이거(Drunken Tiger)로 만들어 주겠다. 너희가 하는 음악을 아예 손 안 대서 TV에 내보내 주겠다.”라고 했었어요. 그런 조건으로 덥 사운즈와 계약을 했고, 들어가서 1년 정도 각자의 작업을 하다가 데드피 형과 싸우게 되어서 데드피 형이 덥 사운즈를 나왔죠. 저는 덥 사운즈에 남아서 [Heavy Deep] 앨범을 내고 나왔죠. 근데 그 회사가 약간 주축이 되는 사장 형, 대표 형… 직원이 그렇게 두 명이었는데, 그때 저희한테는 아쉽지 않게 환경 조성을 해주었어요. 어떤 공간도 마련해주고, 장비도 사주고, 밥도 사주고, 서포트를 많이 해줘서 고마운 형들이었어요. 근데 어떤 회사적인 기능을 못 했었어요. 그런 걸 처음 해보시는 분들이었고, 열정만 있어서 “너희가 존나 힙합이지.’ 이런 말만 해줬었죠. 예를 들면, 제가 앨범을 작업해서 커뮤니티에 기사를 보낼 때도 제가 직접 써서 보내야 했어요. 데드피 형은 그걸 알아채고 미리 나간 거고… 그래서 네스티즈는 뭐 한 거 없이 공연만 존나 했어요. 워낙 한 게 없으니까 “죽일놈의힙합” 같은 게 지금 회자되는 거죠.





LE: 불화에 관련해서는 더 이야기해주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이미 굉장히 많이 이야기해서요. 근데 보면, 많이 이야기해도 커뮤니티 안에서 자기들 멋대로 말을 하더라고요. 아무튼, 사실 제 포지션이 매번 바뀌었잖아요. 원래 막내였다가 핵심 멤버가 되었다가 어디에선 막내인데 어디에선 형이고… 계속 그 역할이 바뀌어서 20대 내내 저의 처세법이 혼란스러웠었어요. 그래서 표면적으로 볼 때, ‘쟤는 성격이 굉장히 착하고, 되게 이해심 많고, 순수하고 진국이다.’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데드피 형은 소시오패스라고 그랬어요. 그건 저한테 좀 너무 심하게 한 거 같기는 한데, 그 형이 그런 말을 하는 즉슨, 고마운 줄 모른다는 거죠. 예를 들면, 제가 아까 말했던 거 같은 거죠. 믹싱을 해줬는데, 당연한 줄 알고 그런 거죠. 그리고 제가 데드피 형이 좀 친해지려고 놀리고 그런 걸 많이 했었어요. 제가 누굴 한 번 놀리면 집요하게 하거든요. 가사 라인 하나 가지고 진짜 끊임없이 놀려요. 그걸 변형해서 놀리고. 외모로도 놀리고요. 이러다 보니까 그 형도 동생으로서 저를 더 이상 봐줄 수 없는 정도가 되고, 결국에는 저를 싫어하는 걸 느끼기까지 했어요. 그런 게 반복되니까 그 형도 저한테 주의를 주거나 정색을 할 때 너무 심하게 하니까 저랑 바이브가 안 맞는다고 생각하게 됐죠. 그렇게 진행되다가 공연장에서 몇 번 MR 선곡 같은 것 때문에 싸웠었는데, 그 형이 싸울 때 인신공격을 좀 많이 했었어요. 그래서 몇 번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일이 있었고, 마지막으로 참을 수 없었던 어떤 공연 날이 있었어요. 그때 심하게 싸우고 안 보겠다고, 당신과 더 이상 할 수가 없다고 했죠. 그렇게 네스티즈를 해체하고 당연히 저는 빅딜에도 있을 수가 없다고 했죠. 왜냐하면, 당신이 빅딜의 리더이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으면 당신을 필연적으로 봐야 하고, 당신이 나갈 것도 아니고 하니까 그럼 내가 빅딜을 나가겠다고 했죠. 근데 저는 당시에 빅딜이 싫었어요. 저는 항상 본능적으로 멋있는 게 뭔지 알고, 힙스터적으로 힙합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빅딜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느낌이 너무 싫었어요. 제가 거기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람이라는 게… 그래서 아무런 미련 없이, 거기 속해 있는 다른 좋은 형들에게는 미안해서 전화를 돌려서 “저는 나가겠습니다.”하고 나중에 오피셜하게 기사를 한번 띄웠죠.





LE: 데드피 씨와 작업량 관련해서는 별로 트러블은 없었나요?

그런 것도 있었죠. 근데 그 부분에 있어서는 책임을 같이 져야 할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저도 “왜 이렇게 안 해요?”라고 하면서도 제가 적극적으로 리드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항상 마음속으로는 그 사람의 타고난 점에 대해서 굉장히 동경하고, 인정하고 그랬지만, 성격이 안 맞는 부분이나 그 형이 힙합을 접하는 태도, 음악인으로서 활동하는 태도에 있어서 점점 저울질이 달라졌던 것 같아요. ‘아, 구리다.’라고 생각하는 쪽으로 좀 더 무게감이 실렸죠. 저도 형이 뭐라고 하면 “아, 죄송합니다.”라고 하는 게 맞는 건데, “아, 뭐 씨발…”이라고 하면서 나선 건 리스펙이 없으니까 그랬던 것 같아요. 어떤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서로 진짜 안 맞아서… 그리고 마지막에 욕을 하면서 심하게 싸웠기 때문에… (웃음) 그래서 다시는 어떤 뭔가가 될 수 없게 됐죠.





LE: 사실 이 네스티즈의 불화나 해체, 딥플로우 씨의 빅딜 탈퇴 자체가 빅딜의 붕괴가 시작된 지점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계시는데요.

저는 당시에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얘기를 했었어요. “내가 빅딜을 깰 거다.”라고. 계속 유지가 되는 건 멋이 없는 거고… 제가 나가면 감히 빅딜이 깨질 거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근데 그렇게 됐어요.





LE: 예전 인터뷰이긴 하지만, 저희 힙합엘이에 올라와 있는 버쳐 보이즈(Butcher Boyz) 인터뷰에서 딥플로우 씨가 살짝 언급되는데요. 혹시 읽어보셨었는지 궁금해요.

네, 봤어요. 근데 또 얼마 전에… 그런 게 꼭 주기적으로 올라오는데요. ‘데드피랑 딥플로우 왜 싸웠나요?’ 뭐 이런 글… 어떤 애가 그때 인터뷰 붙여넣기 하면서 인터뷰 부분 중에 어드스피치 형이 “상구가 정환이 열 받게 했지.”라고 하는 부분만 딱 따서 딥플로우가 존나 잘못했다고 써놨더라고요. 얼마 전에 어드스피치 형을 만났는데, “형이 그런 얘기해서 내가 존나 잘못한 것처럼 됐다.”라고 하니까 그 형이 존나 웃더라고요. (전원 웃음) “몰라. 기억이 안 나.” 이러면서…





LE: 근데 저번 달에 나가신 <슈퍼 루키 챌린지> 라인업을 보니까 호스트 MC가 데드피 씨더라고요.

네. 그런 경험 많아요. 지나가다가도 되게 자주 뵙고요. 근데 저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정말 열반한 느낌으로 사과하고 싶고… 왜냐하면, 지금 제 주위에 동생들밖에 없잖아요. 어떤 형의 고통에 대해서… 제가 정색하고 싶을 때 정색하면 꼰대 되고, 정색을 안 하면 병신 되는 그 미묘한 그 느낌을 잘 지키는 게 진짜 힘들고 스트레스받는 거라는 걸 알고 난 후부터… 그것도 이미 2, 3년 전부터 느꼈던 거예요. 당시에 이런 행동 때문에 데드피 형이 곤란했겠다,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다른 건 다 제쳐놓고 그냥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요. 만약에 제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다 떠나서 이제는 그냥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요. 편하게 지내고 싶고요. 근데 약간 그 사람이 저를 거부하는 게 있어요. 한 동안은 제가 지나가면서 인사를 하면 한동안은 안 받아주고 쌩깠었어요. 요즘에는 그냥 인사도 하고 그래요. 한번은 어떤 빅딜 모임이 있어서 같이 술을 먹다가 형들이 “야, 데드피 형 저기 있으니까 가서 이야기해 봐. 연결해줄게.”라고 해서 알겠다고 하고 가는데 막 화를 내면서 가더라고요. 그걸 보고 그냥 사과 안 해야겠다고 생각했었죠. 하든 말든 내 인생에 어떤 아무런 영향이 없으니까… (웃음)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데 내가 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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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 <슈퍼 루키 챌린지> 그 날도 데드피 형이 “야, 내가 멘트할 테니까 니가 올라와.”해서 “네, 알겠어요.” 했죠. 그 형이 호스트로 저를 소개하고 제가 무대를 올라가는 거였거든요. 그전에도 그런 적이 몇 번 있긴 했어요. “이번에 [양화]라는 앨범을 낸 완전 핫한 래퍼죠. ‘당산대형’ 딥플로우!” 이러면서 소개해주는데, 뭔가 느낌이 훅 들어오는 거예요. (웃음) “오, 씨발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데?” 이런 느낌이었죠. (전원 웃음) 그냥 “딥플로우입니다.” 이렇게 해줘도 되는데, 무슨 <인기가요> 방송처럼 수식어를 붙여가면서 저를 소개하니까 미묘한 감정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올라가서 바로 가사를 틀렸어요. 너무 당황해서… (전원 웃음) 그 생각하느라고…





LE: 다시 빅딜 얘기로 돌아오면, 당시 힙합 팬들이 빅딜의 내부 사정을 알 수가 없으니까 어느 순간 빅딜이 되게 약해졌다고 느꼈을 뿐이지, 그 중간의 과정들을 잘 모를 수밖에 없잖아요. 딥플로우 씨가 나간 이후지만, 어떻게 빅딜이 쇠퇴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제가 나간 후로 빅딜을 나간 사람들이 많아요. 후반에 들어왔던 드래곤AT(Dragon A.T)라든가, 새로 영입된 신인들 팀이었던 영 딜러즈(Young Dealers)도 나갔고… 소리헤다 형도 나중에 들어왔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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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근데 그 이후에 빅딜 스쿼즈(Bigdeal Squads)라는 집단이 또 등장하잖아요.

빅딜 스쿼즈가 생긴 건 원래 빅딜이었다가 샥이 형이랑 다들 결별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2008년 후반, 2009년 초반이었던 거 같아요. 저희가 다 안 하기로 했지만, ‘하지만 우리는 빅딜이라는 콘텐츠를 이어 가야 한다. 빅딜은 우리 거니까.’라는 느낌으로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죠.) 근데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지만, 당시에 샥이 형이 자기 돈을 투자하고 자기 시간을 할애해가면서 빅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멤버들이 “돈 정산 해줘요?” 같은 류의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마찰이 계속 있었어요. 아무튼, 그렇게 마찰이 있는 걸 생각해보면, 샥이 형 입장에서도 빅딜은 자기 거고, 우리 입장에서도 빅딜은 우리 거였던 거죠. 그래서 빅딜 홈페이지가 아직도 있어요. 제가 스물두 살 때 만들었던 홈페이지 레이아웃 그대로 해서… (샥이 형이) 그걸로 뭘 하시는지는 모르겠는데… (웃음) 아마 정산을 계속 받고 계실 것 같아요. 그에 대한 권한은 미련도 없고, 갖고 싶지도 않아요. 되게 뮤지션 성향마다 다른 게 누군가는 정산이 안 되는 데도 (권한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고, 저 같은 사람의 경우에는 아무 생각이 없고… 아무튼, 마찰이 있던 그 시점 이후에 빅딜이란 이름은 가져가고, 로고 바꾸고, 멤버 재정립해서 빅딜 스쿼즈라는 비영리 단체 크루로 가자고 하면서 시작했죠. 그래서 나왔던 첫 곡이 “Class Is Over”죠. 그때부터 빅딜 스쿼즈의 커리어가 시작된 거죠. 그 후로 제이켠(J’Kyun)이나 드래곤AT, 영 딜러즈가 들어오고요. 차붐(Chaboom)도 그때 들어왔죠. 그래서 레이블은 아니게 된 거죠. (빅딜은) 해체라기보다는 활동을 중단한 거죠.





LE: 자연스럽게 “Class Is Over” 이야기로 넘어가는데요. 딥플로우 씨가 스윙스 씨랑 인연이 참 깊잖아요. 스윙스 씨가 줄곧 딥플로우 씨가 처음으로 자신을 인정해 줬다면서 고마운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데요. 하지만 어드스피치 씨와의 디스전도 있었고, 또 “Class Is Over”라는 곡이 나올 때는 여러모로 껄끄럽고, 중간에 껴서 애매했을 것 같기도 해요.

그랬죠. 저는 스윙스의 엄청난 팬이고, 이센스 다음 정도 느낌인 것 같아요. 요즘에는 조금 달라졌지만… 당시에는 약간 이센스보다 스윙스를 많이 좋아했죠. 처음에는 제가 약간 선배 느낌으로 스윙스를 컨택해서 같이 놀고, 불러주고, 누구 소개시켜주고 이랬죠. 근데 금세 역전이 돼서 스윙스가 존나 잘 나가는데, ‘아, 저 새끼 존나 멋있는 애다. 역시 내가 처음 봤을 때의 그 선구안이 틀리지 않았구나.’ 생각했죠. 그런 식으로 재미있는 대상이에요. 걔가 되게 달변가라서 걔랑 얘기할 때 너무 재미있어요. 영감도 많이 받고요. 근데 어드스피치 형이랑 싸우니까… 근데 그 시점부터 저는 빅딜에 있긴 했지만, 제가 좋아하는 뮤지션들은 따로 있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저와 같은 집단에 있는 사람들보다 스윙스가 더 멋있었고, 슈프림팀이 더 멋있고 그랬었어요. 그래서 그때 당시에 처음에 어드스피치 형이랑 스윙스랑 디스전을 할 때, 그 계기가 뭔지 까먹었는데… 아, 싸이월드에서 있었던 일일 거예요. 버벌진트 씨가 뭘 잘못해서 어드스피치 형이 싸이월드에서 그걸 씹고, 스윙스가 어드스피치 형을 디스하겠다고 밝혔죠. 그래서 제가 어드스피치 형한테 큭큭대면서 “형, 스윙스가 형 디스한대.”라고 하니까 어드스피치 형이 “진짜?”하면서 큭큭대고 그랬죠. 근데 스윙스가 디스한 게 되게 난리가 나서 어드스피치 형도 하고… 근데 존나 웃긴 거죠. 주변 아는 사람들끼리 디스하니까요. ‘뭐야, 어드스피치 형이 랩 더 못하는데. 스윙스가 더 존나 잘하는데? 근데 난 어떻게 해야 되지.’라고 생각하면서 처음에는 재미있었다고 나중에는 곤란한 지경이 되었죠. 나중에는 제가 누군가의 편을 들어줘야 하는 분위기가 된 거예요. 근데 저는 마음이 어디로도 기울지는 않았으니까 어디의 편도 안 들었더니 약간 회색분자가 됐죠.


그때 배웠던 건 남자의 세계에서는, 그리고 랩 게임에서는 회색분자가 멋이 없는 거라는 거였어요. 다음에 또 원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상황에 부닥치게 됐으면 어떤 정치적인 색깔을 드러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죠.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누군가의 편을 들어주기는 싫었고, 마음속으로는 생각했던 거죠. ‘아, 이렇게 하는 게 내가 잘못된 거구나.’… 그랬는데, “Class Is Over”가 기획으로 공개적으로 어떤 편을 들게 되는 계기가 된 거죠. 오버클래스(Overclass)를 디스하는 곡에 제가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편을 드는 거니까… 근데 저는 그냥 쉽게 생각했어요. ‘아, 어차피 내 마음은 아무것도 아니고 다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인데. 난 스윙스의 빠돌이고, 버벌진트의 굉장히 빠돌인데. 그렇지만 이건 엔터테인이야. 랩게임 안에서 엔터테인은 필요한 거야.’라고 생각하고 참여한 거죠. 그래서 그 후에 어떤 누군가가 그에 관해 저를 이야기하면 그냥 무시해버렸죠. 이런 제 속내를 드러낼 필요도 없고, 알아서들 해석했으면 좋겠다 그런 느낌?





LE: 사실 그 당시에 스윙스 씨가 빅딜이라는 집단과 어드스피치 씨를 공격하면서 했던 얘기 중에 기억나는 게 ‘선배 힙합’, ‘유교 힙합’ 이런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빅딜에서는 그런 게 심하지 않았고, 지기 펠라즈가 그게 굉장히 심했죠. 저는 그거에 대해서 크게 느끼는 바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빅딜 안에서는 막내였지만, 형들한테도 막 했거든요. 맞지 않을 정도 선에서 놀리고… 편했기 때문에… 지기 펠라즈 가서도 제가 선•후배 관계 이런 걸로 불편해서 그런 게 아니고 리스펙하니까 형들한테 예의 있게 했죠. 그래서 저는 불편함이 없었어요. “야 너 물 떠 와. 청소해.” 이런 건 아니니까… 근데 누군가는 그런 걸 당했겠죠. 또 그런 걸 상대적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르니까요. 스윙스는 어떤 자리에서 굉장히 곤욕스러움을 느꼈을 수도 있어요. 근데 제가 생각했을 때는 우리가 모두 20대 초, 중반쯤에 오히려 더 꼰대에요. 동생들한테 하는 행동이라든가, 위계질서를 세우는 데에 있어서 그 시즌이 그래요. 저도 지금 비스메이저 동생들 처음 알 때가 20대 중반이었는데, 그때는 더 엄하게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애들이 저보고 돼지라고 존나 놀리고, 막 거의 욕까지 하면서 저랑 장난을 치는데, 그때는 그랬으면 정색했던 거 같아요. 물론, 지금에 와서 더 친해져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그때는 그런 걸 용납을 못 했는데 지금은… 누가 그래도 그러려니 하는 느낌인 거 같아요.





LE: ‘선배 힙합’, ‘유교 힙합’ 이외에도 얘기해볼 만한 디스전에 얽힌 담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게 또 있는데요. 스윙스 씨가 그때 “빅딜은 그냥 존나 갱스터인 척한다. 센 척만 하는 거다.”라고 하면서 코스프레 하는 거라고 했었는데요. 되게 기믹이고, 코스프레일 뿐이라고 되게 강력하게 공격했었단 말이에요. 이런 기믹, 코스프레에 관한 이야기가 단순히 빅딜과 스윙스의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도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는 담론이잖아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건 당시에 스윙스가 한 말이 정확히 맞고요. 근데 그 의견을 수용하는 사람들의 잣대도 중요하겠죠. 그렇다고 그 이야기에서 스윙스가 벗어날 수 있느냐.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느냐. 스윙스도 벗어날 수는 없다고 보고, 근데 그건 오히려 최근에 더 심해지는 거 같고요. 요즘 바이브의 영한 래퍼들이 더 심하다고 생각해요. 그때 당시에는 마음가짐이 어땠냐면, 저는 저희의 마음가짐에 관해서만 얘기할 수밖에 없는데요. 저희들보다 더 심했던 게 지기 펠라즈고, 저희는 갱스터라고 말한 적도 없고… (웃음) 당연히 실생활에서는 한국 사람이었고요. 존나 착하고… 다들 머리를 빡빡 밀고, 큰 옷을 좋아하고, 시꺼먼 색을 좋아하고… 왜냐하면, 우리가 좋아하는 패션이 그냥 그런 거였으니까요. 약간 그런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은데,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저희가 ‘하드코어 힙합’이라는 슬로건을 어쩌다 내걸게 돼서 그게 우리나라에서 갱스터 힙합이라고 불린 것 같아요. 오히려 듣는 사람이나 리스너들이 씬 안에서 부추긴 거죠. 저희가 그런 걸 말한 적은 없어요. 존나 황당했죠. “너네 왜 갱스터인 척해?” 하면 “씨발 내가 언제, 내가 언제!” 약간 이러고 싶은 느낌. 음악 자체가 공격적이니까 어쩔 수 없는, 피해갈 수 없는 거였다고 생각해요.





LE: 그런 이미지가 내부에서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외부의 시선, 반응이 ‘너넨 하드코어야.’라서 거기에 내부 사람들이 되려 갇혀 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 거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우스운 거죠.





LE: 시기를 건너와서, 데드피 씨와 스윙스 씨는 나중에 다시 또 디스전을 벌이잖아요. 그때는 어떤 감상이 있으셨는지 궁금해요.

그때는 이미 제가 빅딜을 나왔을 때고요. 저는 당연히 스윙스를 응원했죠. 심지어 스윙스가 녹음하는 걸 제가 받아줬어요. 저희 덥 사운즈와서 녹음 좀 받아달라고 해서 와서 했는데, “야 너 여기서 이렇게 해.”, “너 박자 방금 절었어. 다시 해.”라고 하면서 디렉팅도 봐주고… (웃음) 그랬었기 때문에도 있고, 그때는 제가 데드피 형에 대한 분노가 심했을 때라서 당연히 스윙스가 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죠. 근데 스윙스도 너무 그랬던 게 어디서는 “이제 빅딜에 감정 없다. 신경 안 쓰고 존중한다.”라고 해놓고, 어떤 공연장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 것처럼 “Fuck, 빅딜!” 막 이러니까… 데드피 형은 또 자존심이 상했겠죠. 자기의 명예를 건드리는 거니까요. 그러니 디스전이 일어났던 개연성은 있죠. 갑자기 데드피 형이 열 받아서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사실 스윙스가 건드린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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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이제 빅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 텐데요. 그 전에 전반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빅딜이 딥플로우 씨의 커리어라든가, 본인의 인생에서 어떤 부분으로 차지하고 있는지, 또 지금 와서 보면 어떤 집단이었고, 그때의 나는 어땠었고 이런 감상들이 있으실 것 같아요.

그냥 빅딜은 저한테 한 번밖에 없는 20대 인생에서 거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니까 굉장히 중요했고, 인제 와서 외부로부터 빅딜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레이블이라고 해석되기도 하니까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으로서 제가 얻었던 수혜도 분명히 있었죠. 정말, 지금의 저를 만들어준… (전원 웃음) 중요한 시기와 환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해석하기에 [Vismajor] 시절의 랩 가지고 지금까지 커리어를 이을 수 있었던 건 빅딜의 어떤 후광이 분명히 작용한 거 같아요. 아주 컸던 것 같습니다.





- [Heavy Dee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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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이제 [Heavy Deep]입니다. 일단 얼마나 준비하셨던 앨범이고, 어떤 컨셉으로 만들려고 생각하셨던 앨범이었는지 말씀해주세요. 열 트랙뿐이었지만 되게 단단한 앨범이었잖아요.

그때 저는 원래 네스티즈라는 듀오로 계속 활동할 생각이었어요. 아까 말씀 드렸던 것처럼 팀을 하기 전에 멤버간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서 좋은 앨범을 내고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앨범이에요. 당시에 제가 꽂혀 있었던 음악이 서던 힙합이었기 때문에 그런 느낌으로 많이 하고 싶었던 앨범이었죠. 1년 반 정도 작업했던 것 같아요.





LE: 앨범 제목 자체가 굉장히 직관적이잖아요. 어떤 특별한 컨셉이 따로 있진 않았던 건가요?

[양화]랑은 조금 다른 컨셉이었고요. [양화]는 애초에 다루고자 하는 테마가, 이야기에 중점을 두고 있는 앨범이고요. [Heavy Deep]은 좀 사운드적인 부분. 영화로 치면 미장센이 조금 더 강조되는 앨범이었어요. 어떤 사운드의 풍을 조금 더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목도 표면적인 느낌. 원래는 ‘XXL Music’이라는 제목의 앨범이었는데, 누가 유치하다고 반대해서… XXL이 약간 과한 힙합의 느낌이 나는 제목이기도 하고, 미국 매거진이기도 하고… 그러다 ‘Heavy Deep’으로 제목을 바꿨던 것 같아요.





LE: 말씀하셨던 것처럼 서던 힙합의 흐름이 더 짙게 느껴지는 앨범이었어요. [Rap Hustler]보다도 더요. 제작하는 과정에서 랩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고민이 좀 더 있었을 것 같기도 한데요.

그렇죠. 템포에 따라서 랩의 리듬을 구성하는 방법이 달라지다 보니까 플로우 디자인 같은 것도 조금 더 그런 비트 풍에 맞는 걸로 고민을 하던 때죠. 근데 그 이전에 믹스테입이랑 블레이저스를 하면서 이미 그런 작업들이 조금씩 이루어져 있어서 랩 디자인은 이미 좀 바뀌어 있을 때여서 편하게 했어요. 또 지금 생각해보면, 미완성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 당시에는 편하게 했었어요. 딱히 어려울 것 없이.




LE: 앨범이 발매됐던 시기인 2011년이 한국에서 트랩이 지금처럼 엄청 유행하던 시기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렇죠. 앨범을 기획한 건 그로부터 2년 전이니까 한 2009년 말부터였어요. 이미 그 이전에 믹스테입을 할 때도 제가 선호하는 비트나 바이브가 조금 바뀌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 트랩이라고 할 수 있는 풍의 음악은 몇 개 없었죠. 시초로 치면, 쥬비 트레인(Juvie Train) 형이 2000년대 초반에 조금 보여준 게 있죠. 하지만 앨범을 내진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더리 사우스를 표방하던 팀으로 스웨거(Swagger)라는 팀이 있었는데, 그 팀의 음악도 제가 생각하고 좋아하는 트랩은 아니었어요. 약간 릴 존(Lil’ Jon) 스타일 사우스였죠. 크렁크? 클럽튠 느낌이었는데, 제가 생각했던 건 클럽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우리나라에서 이런 거 처음 해봐야지.’라는 생각이 있었죠. 근데 당시에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거예요. 도끼(Dok2)도 그때 [Thunderground]였나 냈었고, 더블케이(Double K) 씨랑 같이했던 앨범이라든가, “비스듬히 걸쳐”같은 것들이 처음 나왔던 시기였죠. 근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 비트 좀 조악한데?’ 이런 느낌이 있었어요. ‘내가 더 잘 만들어야지.’ 생각했고요. 크라운 제이(Crown J) 씨도 그런 느낌의 곡을 발표했을 때였죠. 저는 렉스 루거(Lex Lugar) 필 나는 트랩을 먼저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래서 보도자료에도 일부러 ‘서던 힙합’이라는 말을 굳이 넣었었고요. 근데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서던 힙합이 아니잖아요. 우리나라는 그런 게 없잖아요. 그냥 서울 힙합인 건데… 그런데도 굳이 그 말을 썼던 이유가 조금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티를 내야지, 그렇게 해석해주니까요. 왜냐하면, 그때가 미국에서도 제이지가 트랩하고, 뉴욕 래퍼들이 사우스할 때니까 이제 그런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굳이 표기해야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해석해서 들어준다고 봤어요. 딱히 서던 힙합을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던 거죠. 그때 당시에 멋있는 힙합을 골랐다는 생각이었지…





LE: 그런 트랩 풍의 곡에 가장 해당하는 게 “생긴대로 놀아”인 거 같아요. “생긴대로 놀아”를 만들 때,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그때 당시에 메인 프로듀서가 제이신(J.Sin)이었는데, 제이신이 만드는 사운드는 제가 충족을 못 했어요. 더 ‘진땡’ 트랩 느낌이 났으면 좋겠어서 TK한테 부탁했었죠. TK도 원래 그런 트랙을 만들던 애가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번 갈아엎었죠. 비트 고르는 게 좀 힘들었어요. 앨범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다운되도록 트랩을 가미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래서 한 곡 정도만 넣고, 나머지 곡들은 샘플링 기반이더라도 템포는 서던, 트랩 템포로 가자고 생각했었죠. 근데 그 곡은 딱 티나게 누가 들어도 전형적인 트랩 느낌으로 하고 싶어서… 주변에 그런 스타일의 프로듀싱을 하는 친구가 많이 없어서 고르고 뒤엎고 많이 그랬죠.





LE: 요즘은 사실 트랩하면 트랩 플로우라고 해서 두 글자씩 끊어서 한다든가, 셋잇단음표같이 뱉는 전형이 생겼잖아요. 이제는 유망한 래퍼들이 장르의 특성에 갇힌다는 느낌도 들거든요.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해요.

정해져 있는 템포와 리듬 메커니즘 안에서 어울리는, 매칭이 잘 되는 리듬이 한정적이에요. 예를 들면, 나스가 트랩 리듬에 랩을 하는 걸 몇 번 봤는데, 나스는 나스대로 하거든요. 그냥 약간 슬로우하게 하되, 원래 자기 느낌대로 하는데, 나스를 참 좋아하지만, 그 맛이 안 나더라고요. 나스가 트랩하는 걸 굳이 듣고 싶지 않잖아요. 그래서 이미 그런 거에 특화된 플로우를 쓰는 사람들이 사실 정답이고, 우리나라에서도 그 한정된 범위 안에서 할 수밖에 없죠. 그리고 거기서 조금 벗어나서 변칙적인 것들이 새로 나오는데, 그런 것들도 사실 신선한 건 아니거든요. 어떻게 보면 신선함을 가장한 안 맞는 거라고 생각해요. 매칭이 안 되는 거죠. 근데 신선하다는 거에 초점을 두면, 좋아하는 애들도 생기는 거죠. 근데 사실은 음악적인 면에서 매칭되는 리듬 메커니즘은 따로 존재하는 거 같아요. 그게 말씀하신 트랩 플로우고,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미국에서도 제이지도 그런 리듬으로 랩을 하는 거고요. 그건 어쩔 수 없는 거 같아요. 전 이렇게 비유를 많이 드는데, 결혼식장에 당연히 수트를 입고 가는 게 맞는 거고, 수트도 입는 법이 있고, 양말은 무슨 색깔을 신고, 구두는 뭘 신어야 하고 그런 룰이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트랩에는 그렇게 하는 게 룰인 거죠. 시대가 바뀌어서 트랩이 재미없어지고, 다른 템포의 어떤… 뭔가 획기적인 게 나올 거라는 생각은 안 하는데… 하여튼, 다시 또 붐뱁이 온다고 치면, 붐뱁에 맞는 템포로 랩을 하는 게 멋있는 거죠.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면 될 거 같아요. 당연히 어떤 현상에 대해서 사람들이 비판하는 건 자연스러운 건데, 근데 이런 시기가 다시 지나갈 거라고 봐요.





LE: 다시 넘어와서, TK 씨가 되게 다양한 스타일을 구사하시잖아요. 그 덕분에 VMC가 프로덕션을 잘 갖춘 레이블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프로듀서로서의 TK 씨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TK는 제가 가장 신뢰하는 비트메이커에요. 미국에서도 그렇지만 힙합 음악이 곡을 구성하는 느낌이라든가, 작법이 어떻게 보면 특성상 만들기가 쉽거든요. 그래서 음악을 안 배운 사람들도 하기 쉬워요. 그리고 샘플링이 아닌 시퀀싱으로 넘어가도 요새 트랩 비트 잘 찍는 아마추어 프로듀서들도 되게 많거든요. 그게 약간의 규칙만 이해하면 만들기 쉬운 장르라서… 근데 그렇다 보니까 스펙트럼이 넓게, 조금 다른 편곡을 요구하는 스타일의 곡들을 못하는 힙합 비트메이커들이 되게 많아요. 할 수 있는 게 딱 한정된 거죠. 근데 TK는 그 범위에서 벗어나서 한마디로 ‘좀 배운 애’고, 음악을 제대로 배운 애니까 구현해낼 수 있는 범위가 굉장히 넓은 친구거든요. 그래서 제가 접했던 프로듀서들보다 신임이 가는 편이에요. 근데 이 친구는 힙합을 좋아하고 만든 지가 어떻게 보면 오래 안 됐거든요. 걔가 처음 힙합을 멋있다고 느끼고,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한 최초의 곡이 저한테는 너무나도 최신곡이에요. 제이지의 “On To The Next One”을 듣고 시작했으니까… 그래서 걔한테 예전 감성은 없어요. 걔가 처음에 비스메이저 크루에 들어오면서 힙합곡들을 만들어줘야 하는 상황이 된 후부터 힙합을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 감성을 (TK에게) 알려주는 데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어요. 초기 작품들에는 힙합적인 감성이 좀 없죠. 하지만 완성도는 진짜 뛰어난 경우가 많은데… 저는 TK가 굉장히 능력 있고, 재능 있는 친구지만, 지금 걔의 커리어로 봐서는 아직 과도기인 거 같아요. 커리어 상으로는요. 그래서 제대로 힙합적인 커리어를 쌓기에는 아직 초기니까 앞으로 보여줄 게 많은 거 같고, 이제 자기 앨범 만들면서 그런 것들이 드러나겠죠. 그리고 그 친구가 힙합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서… 초반에는 제가 힙합만 하니까 걔한테 “이런 비트 만들어달라.”, “이런 게 존나 멋있는 거다.”라고 하면서 요구를 많이 했어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걔 커리어를 망가뜨린 부분인 거 같고… 그래서 무조건 ‘TK를 써야 한다.’, ‘비스메이저 음악을 TK 비트로만 가야 한다.’라고 할 수는 없을 거 같아요. 자기 음악 커리어도 있으니까요.





LE: 그럼 TK 씨랑 처음에 알게 된 건 어떤 경로를 통해서였나요?

코쿤에서 알게 된 어떤 친구가, 코쿤에 자주 오는 손님이었어요. (전원 웃음) 코쿤에 저한테 인사하러 오는 애들이 많았어요. 랩 좋아하고 그런 애들이 저한테 인사를 하러 오고 그랬는데, 저는 사실 거기서 (그 친구들이랑) 대화하기가 싫었어요. 나는 그냥 일하러 갔는데… “어, 안녕하세요.” 하면 “알았어…” 약간 이런 느낌이었는데, 어떤 친구가 자기가 진짜 작곡 잘하는 친구를 소개시켜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만나서 짜장면을 먹으러 갔는데, 저한테는 그냥 거기서 알게 되는 수많은 애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저한테 평소에 데모를 보내는 프로듀서들이 많았기 때문에… 근데 다 도찐개찐이었어요. 근데 그 친구가 서른 곡 정도를 데모로 보내줬는데, ‘시퀀싱 잘하네.’라고 하면서 듣다가 제가 발표한 싱글 중에 “Realize”라는 곡이 있어요. 그 “Realize”가 보내준 곡 중에 제목도 그대로 ‘Realize’라고 되어서 들어있었어요. 그 비트를 하나 듣고 약간 가능성을 발견했죠. 그거 하나 듣고 딱 마음에 들었죠. 한참 후에 “Realize”가 나오긴 했지만… 그때부터 같이 다니면서 곡들을 많이 받고, 대화도 많이 하고 그랬죠. 그때까지는 그냥 딥플로우라는 이름도 모르고 그랬던 친구예요. 아는 형이 래퍼 소개시켜준다니까 나온 그런 느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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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Realize" 이야기가 나왔으니 좀 더 이어가보면, 딥플로우 씨가 싱글 앨범을 따로 잘 안 내시잖아요. 그래서 따로 싱글로 발표하신 “Realize”가 더 두드러져 보여요. 그만큼 또 가사가 의미심장하고 인상적인 것 같고요. 커리어를 반으로 쪼개서 다음 챕터로 넘어가는 듯한? 지점의 곡이었던 것 같아요. 따로 싱글로 발표하신 걸 보면 확실히 본인에게도 의미가 있는 트랙이었던 것 같아요. 

[Heavy Deep] 만들 때 같이 만들었던 곡이고, 그냥 앨범에 안 넣게 되어서 나중에 [Heavy Deep] 내고 나서 녹음하고 만들어서 냈던 곡이에요. 방금 말한 것처럼 TK를 처음 만났을 때 바로 고른 곡이라서 앨범에 안 넣긴 했는데, 다음 앨범에 넣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고 해서 싱글로 낸 거죠. 저는 싱글로 노래를 발표하는 걸 이해 못 했을 당시였어요. 그리고 그때 살짝 이전이 멜론(Melon)이 한참 각광 받기 시작하던 시기였어요. 원래는 싸이월드였거든요. 싸이월드에서 도토리로 음악을 사던 때에서 멜론으로 넘어가는 게 체감이 됐던 시기였어요. 우리가 그때 전만 해도 어떤 차트라고 한다면 싸이월드 차트였거든요. 근데 멜론으로 넘어가면서 다른 사람들은 싱글을 많이 발표하면서 그런 형태의 시장을 많이 겪고 있었는데, 저는 ‘왜 싱글을 내지? 한 곡을 왜 내는 거야?’ 약간 이런 식으로 생각할 때라서 “Realize” 낼 때도 ‘아, 나 싱글 뭐 이렇게 내도 되나?’라고 생각하면서 남들 내니까 나도 내보자고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좋게) 해석해주신 게 참 좋죠. 커리어를 절반으로 가른다는 등… 그냥 발표했던 건데…





LE: 그때 “Realize”가 나왔을 때, 1절은 어떻고, 2절에는 어떤 굉장히 중요한 함의가 담겨 있고 이런 게시판에 있었거든요.

아, 그래요? 못 봤는데…





LE: 네. 그때 사람들끼리 “이게 의미가 있는 거다.”, “괜히 한 곡이 아니다.”라고 했었거든요.

아, 작사했을 때는 제가 그런 걸 담았을 수도 있어요. (전원 웃음)





LE: 사실 이 곡을 프로듀서이자 저희 스태프 중 한 분인 트왱스타(Twangsta)의 결혼식장에서 축가로 하셨었잖아요. (웃음) 처음에 요청했을 때 어떠셨는지 궁금해요.

저는 일단 결혼식에 랩으로 축가한다는 거에 대해서 ‘극혐’이라고 생각하는데… 진짜 어른들 많고 굳이 이렇게 해야 하나 했는데, 트왱스타가 약간 변태인줄 알았어요. (전원 웃음) 그런 선택을 하는 걸. ‘아, 얘가 자기 결혼을 이용하면서까지 나한테 뭔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 건가?’ 생각했어요. (전원 웃음) ‘널 싫어해.’ 약간 이런 거. 거절할 수가 없어서 하긴 했는데… 아, 저는 그랬어요. JJK가 한다 해서 한 거거든요. 근데 (트왱스타가) 비즈니스를 한 거더라고요. JJK한테는 “야, 딥플로우가 한대.”라고 하고… (전원 웃음)





LE: 다시 돌아오면, 앨범에 참여한 벤(Ven) 씨도 이 당시에 생소한 이름이었는데요. 그럼에도 인상적인 목소리를 앨범에 담으셨었는데, 벤 씨와도 처음에 어떻게 알게 되신 건지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벤은 처음 본 게 어떤 장례식장에서… (웃음) 장례식장에서 뉴챔프(New Champ)가 데리고 왔다고…하기보다는 아, 영인. 할러백 영인이라고, 앤써(Answer)라는 팀에 있는 형이 자기 동생이라고 소개시켜준 걸로 알게 됐어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제가 코쿤 일할 때 어린 애들을 굉장히 많이 알게 됐었어요. 지금은 어린 애들이 아니지만, (웃음) 그때 당시에 어린 애들을 많이 알게 됐는데, 그중에 한 명이었어요. 그때 우탄이랑 뉴챔프랑 벤이랑 한창 제가 일할 때 많이 놀러 왔죠. 그렇게 같이 놀게 되면서 알게 됐던 거죠.





LE: 벤 씨는 이후에 PJR 엔터테인먼트(PJR Entertainment)와 계약하셨었는데, 그때는 옆에서 어떤 조언을 해주거나 그러셨나요?

예전에 벤이 회사를 알아보고 있을 때… 아실지 모르겠는데, 사실 벤도 덥 사운즈였어요. 근데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르죠. 왜냐하면, (덥 사운즈가) 회사의 기능을 거의 하지 못했기 때문에… 벤은 약간 작업실처럼 썼었어요. 사무실을요. 근데 계약 전에 어차피 비스메이저를 같이 하는 거였으니까 제가 벤을 좀 꼬셨죠. “야, 너도 덥 사운즈 같이 하자.”라고. 그래서 같이 했는데, 벤은 거기서 뭘 한 게 없고요. 근데 제가 추천을 해놓고서 그렇게 된 거니까 미안한 마음이 있잖아요. 해서 그다음에 어떤 회사에 소속되는 거에 대해서 제가 어떤 입김을 넣지 않았어요. 걔가 어찌어찌 하는 거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존중을 해줬죠. 그리고 저 자체도 덥 사운즈를 나오고 나서 아직 갈 곳을 안 정하고, 한창 러브콜이 들어오는 회사랑 얘기도 하고, 이것저것 알아보면서 한창 고민할 때였어요. 비스메이저를 레이블화하겠다는 생각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걔가 PJR 엔터테인먼트를 가겠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래, 파이팅. 응원할게.” 이랬죠.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을 해보라는 조언 정도는 해줬지만, 강하게 어떻게 하라고 하진 못했었어요.





LE: 코쿤 얘기를 계속 해주셨는데, [Heavy Deep]은 정확히 정중앙에서 분위기를 두 파트로 나누는 스킷이 인상적이잖아요. 되게 사실적이기도 한데, 스킷에 어떤 의도가 있었던 건지 말씀해주세요.

그때 제가 꽂혀있던 게 ‘코어한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었어요. 내가 지금 코쿤에 있는 걸, 이를테면 그게 알바를 하고 있는 건데, 알바로 하고 있는 걸 드러내는 게 멋있는 거라는 생각에 꽂혀 있었어요. 지금 하고 있는 걸 그대로 보여주는 게 존나 멋있는 거다. 그래서 그런 스킷을 꼭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근데 그것도 약간 드라마틱하게 포장을 한 거죠. 실제로 저런 말을 하지는 않았어요. 어떤 상황을 제가 약간 극화해서 얘기해야 상대방이, 청자가 느낄 수 있는 거니까요. 그래서 그런 걸 넣는 건 당시 저한테 필연적인 선택이었고, 그것들이 조금 더 극대화된 게 [양화]인 것 같아요.





LE: 실제로 코쿤에서는 얼마나 일하셨었죠?

햇수로 한 4년 일했고, 2009년 말부터 2012년 여름까지 일했던 거 같아요. 되게 오래 했어요. 진짜 오래 했네.





LE: 그럼 지금까지 커리어가 진행되어 오면서 음악과 관련 없는 아르바이트와 같은 일을 병행해오면서 산 게 언제쯤까지였는지 궁금해요.

호스트 MC를 음악적이지 않은 일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래서… 알바의 형태긴 하지만요. 20대 초반에는 제가 아까 맨 처음에 얘기했던 것처럼 뇌에 탑재된 게 없었던 때라서, 그래서 책임감이 별로 없었던 때였어요. 그때는 그냥 알바를 아무거나 했었어요. 스무 살 처음에 했던 알바는 피시방이었어요. 제가 그때 살던 데가 청량리였는데, 피시방 알바를 명동에서 했었어요.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알바몬(Albamon) 같은 데서 검색해서 바로 나오는 거에 전화해서 면접을 보고 그냥 거기로 정한.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던 알바를 2, 3개월 정도 했었고, 그 뒤에는 조금 더 머리를 영리하게 쓰면서 편한 걸 해야겠다 싶어서 그림 그렸으니까 출판사에서 삽화 그리는 일도 좀 했었고… 그게 재미없고 조금 더 돈을 받아야겠다는 생각했을 때는 다음에서 하는 쇼핑몰 디앤샵(d&shop)이라고 있어요. 거기서 디자인하는 일을 했었는데, 거기서 한 1년 했죠. 그때가 아직 [Vismajor]가 나오기 전이에요. 그런 알바들을 좀 하다가 포토샵하고, 디자인하고, 그림 그리는 이런 알바들을 주로 하다가… 근데 진득하지가 못해서 하다가 하기 싫은 마음 때문에 금방금방 관두고 그랬었어요. 코쿤에서 일하고 난 다음부터는 정규 느낌으로 일하는 거였는데, 그때부터는 제가 약간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었어요. 그전까지는 그냥 여자친구 만나야 하니까, 용돈 필요하니까 하는 이런 거였죠. 어린 친구들이 알바하는 느낌으로 저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LE: 그럼 그때는 생활과 음악 사이에서의 어떤 갭 같은 건 못 느끼셨었나요?

느꼈는데, 저의 어떤 관심사가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늘 비슷한 환경에서 살다 보니까요. 크게 불편하지 않았죠. 그런 거 있잖아요. 20대 초, 중반까지도 술자리에 나갔는데, 만원만 가지고 나가는 거죠. 술자리에서 회비를 만 원을 내야 하면 집에 갈 때 버스비도 없을 수도 있는 거고… 그런 상황들이 만연했기 때문에 크게 불만이 없었어요. 어디서 공연하고 10만 원을 받으면 ‘어! 완전 꿀!’ 약간 이런 느낌이었죠. 그런 식으로 경제적인 부분에 구애받지 않고 ‘아, 오늘은 집에 걸어가지 뭐.’ 아니면 ‘내일 술 먹어도 내가 돈 안 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20대 초반을 보냈던 거 같아요. 그때는 집에 돈을 가져다줘야 하는 상황까지는 아니었으니까요. 부모님이 알아서 하시고… 그랬던 것 같네요.





LE: 사실 코쿤이 생기기 전에 그 자리에 캐치 라이트(Catch Light)가 있었잖아요. 캐치 라이트가 <힙합플레이야 쇼>를 하던 장소였는데, 캐치 라이트가 코쿤으로 바뀌면서 본인이 느끼셨던 바가 있었는지 궁금해요.

캐치 라이트는 주로 <힙합 플레이야 쇼> 많이 하고, 큰 공연들 많이 하던 데라서 거기서 공연하면 ‘오늘 조금 되는 날, 멋있는 날’ 약간 이런 거였어요. 제가 그때 이미 홍대에 유입된 지 몇 년 됐을 때였는데, ‘여기 바뀌는구나.’ 생각한 정도였죠. 근데 존나 쌈마이라는 소문이 있었고요. 그러다가 제가 코쿤이 생기고 나서 한 반년 후에 들어갔는데, 그 반년 사이에 제 상황이 조금 바뀌었어요. 처음에는 베이비나인(Babynine)이라는 친구가 거기서 호스트를 하다가 저한테 넘겨준 거였어요. 그 친구한테 “야, 씨발 그런 거 왜 하냐. 존나 구려. 거기 존나 쌈마이야.” 이래 놓고서 제가 들어간 거예요. 애초에 선입견을 안 품고 들어갔으면 모르겠는데, 선입견이 있는 상태에서 들어갔으니까 자존감이 조금 내려갔었죠. 옛날에 캐치 라이트 때랑 같은 장소고 간판만 바뀐 건데, 들어갈 때 기분이 완전 달랐죠.





LE: 호스트 MC를 지금도 하는 래퍼 분들이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호스트 MC로서 살아가는 삶은 어떤지 궁금하기도 해요.

호스트 MC는… 사실 호스트 MC가 존나 멋있는 거거든요. 멋있는 건데, 우리나라 클럽 성향상 랩이나 래퍼를 어떤 도구처럼 활용해서… 뭐랄까, 자기가 평소 하는 음악이 뚜렷하게 있으면 자존감이 낮아질 수 있는 직업인 것 같아요. ‘Move The Crowd’가 MC의 뜻 중 하나이긴 하지만… 사람들 위에서 제가 재롱 잔치하는 느낌이 들고 그래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사실 저에게 관심이 없거든요. 제가 제 공연 무대에서 제 노래를 할 때랑은 확연히 다르니까, 같은 장소에 같은 마이크를 잡고 하는 건데 그 기분이 너무 다르다 보니까 자존감이 많이 떨어지더라고요. ‘이건 내 것이 아닌데.’ 이런 생각이 들고요. 근데 저 같은 생각 안 하는 래퍼들도 분명 많을 거예요. 그게 자신의 적성에 맞는 사람들도 있는 거고요. 근데 저로서는 제 개인적으로 많이 숙여가면서 하는 일이었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LE: 그런 감정이 4년 내내 있던 건가요?

아니었을 때도 있고… 하지만 늘 그런 시기였던 것 같아요. 근데 그것도 제 개인적인 성격 때문에, 그리고 제 캐릭터의 특성 때문에 갖게 되는 고통이었을 수도 있어요.





LE: 코쿤에서는 호스트 MC가 음악을 트는 걸 맡게 하기도 하잖아요. 음악을 못 틀어서 짜증 날 때도 있으셨는지 궁금해요.

그렇죠. 음악을 못 튼다기보다는… 저는 그전까지는 어떤 DJ의 실력에 대해서 사실 잘 몰랐어요. 근데 클럽에서 일하면서 많이 알았죠. 그런 면에서는 어떻게 보면 도움되는 것도 있었죠. 어떤 부분에서 빌드업이 되고, 어떤 부분에서 터지고 그런 구성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됐죠. 최신 노래들을 어쩔 수 없이 의무적으로 듣게 됐고요. 그런 것들은 좋았는데… 근데 말씀하신 대로 노래를 못 튼다기보다는 제가 안 좋아하는 장르의 음악들이 나왔었어요. 예를 들면, 하우스. 하우스를 완전 싫어하는 건 아닌데, 제가 거기다 랩할 필요가… 랩이 아닌 거죠. 그냥 샤우트를 하는 거죠. 그런 걸 할 필요가 없는 곡에서도 가게에서 요구할 때가 있었어요. 완전 일렉트로니카인데, BPM이 한 150까지 올라가는 일렉트로니카가 있어요. 완전 약하고 들어야 하는… 싸이코 어쩌구인데, 그런 거 나올 때는 ‘내가 여기에 왜 소리 질러야 하지?’ 생각이 들었고, 그럴 때는 ‘아, 싫다 진짜.’ 생각했었죠. 아니면 아이유(IU) 노래를 가끔 틀 때도… (전원 웃음) 존나 신나고, 막 파티 분위기에 흠뻑 젖어 있을 때는 저도 막 신나야 하는 것도 맞고, 할 수도 있는 건데요. 그게 성격상 그렇지를 못해요. 거기에 완전 동화되지를 못해서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는 게 너무 싫었었어요. 난 여기 있기 싫은데, 사람들은 완전 미쳐 있고… 게다가 그 이후에 성격이 조금 바뀌어서 술자리에서 갑자기 그런 고독을 느끼면 너무 괴로워요. 사람들은 다 취해 있고, 저는 아직 좀 안 취해 있는 걸 느끼면… 그때부터 약간 정신병이 생겼죠.





LE: 약간 “나 먼저 갈게”에 나오는 내용 같네요.

그렇죠. 그런 거죠.





LE: 호스트 MC 관련해서 이야기를 조금 길게 해봤는데요. 다시 딥플로우 씨 이야기로 돌아오면, 사람들이 은근히 모르는 것 같아요. 딥플로우 씨가 되게 가사를 잘 쓰는 래퍼인데, 과소평가되는 감도 없지 않아 있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네, 그렇습니다. (전원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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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사실 딥플로우 씨의 스타일을 감안하면, 한 마디 안에 그렇게 많은 음절이 들어가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적재적소에 어떤 단어를 쓸지, 어떤 표현을 쓸지를 되게 고민을 많이 하실 것 같은데요. 그런 부분들이 [Heavy Deep]에서 잘 드러났다고 생각하는데요. 실제로 본인은 가사를 쓸 때 어떤 부분에 집중하시는지, 또 그 집중하는 지점이 시기별로 다르기도 한지 궁금해요.

일단 랩의 사운드적인 부분은 제가 풍기고 싶은 분위기를 드러내는 부분이니까요. 그런 것들은 그때그때 유행하는 옷처럼 바뀌기 마련이었고, 같은 카테고리 안에 있긴 하지만 그 풍기려 했던 분위기가 조금씩 조금씩 바뀌었거든요. 그리고 또, 그 분위기가 제가 구현하고 싶은 만큼 100% 그대로 구현되는 게 아니잖아요. 제 성대로 나올 수 있는 느낌은 한정적이니까요.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늘 약간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염두를 늘 두고 있는 부분이긴 한데, 가사적인 건 오히려 작사를 하는 그 순간에 결정되는 편이에요. 그 순간에 제가 어떤 영감을 받았다든가, ‘빨’이 좀 잘 받을 때 나오는 편인 것 같은데… 제가 사운드적인 면에서는 외국 래퍼들을 많이 참고했지만, 가사적인 면에서는 DNA들이 다 섞여 있거든요. 우리나라에서 뭐, 버벌진트 씨라든가, 또 제가 제일 좋아했던 뮤지션들. 개코, 팔로알토(Paloalto), 최근에는 빈지노(Beenzino)도 있고요. 이센스, 스윙스 굉장히 좋은 뮤지션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 뮤지션들의 DNA들이 다 저의 랩 유전자에 영향을 미쳤다고 봐요. 그 안에서 제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요소들을 좀 가져오는 것 같고요. 제 스타일대로요. 어쨌든 늘 가장 염두에 두었던 건 라이밍인 거 같아요. 랩이 랩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게 라이밍이기 때문에… 랩을 한다는 느낌보다는 라이밍한다는 느낌을 조금 더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랩은 스탠다드하고, 베이직한 랩이에요. 그런 걸 하면 존나 멋있다고 느꼈고, 저도 그런 걸 선사하고 싶고… 그러다 보니까 제 랩이 예전보다 오히려 더 단순화되는 거 같아요. 그만큼 제가 내려놓는 음절들이 약간 슬로비디오로 판독하듯이 명확하게 들리니까 단어 선택에 있어서 비곗덩어리를 많이 빼고 살코기만 넣으려는 의도로 많이 하죠. 그런 걸 많이 신경 써요. 16마디라는 하나의 단위가 육상 경기로 치면 100m, 100m라는 어떤 종목에 제가 참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16번의 기회 안에서 최대한 많은 라인을 담고 싶어요. 마디마디가 다 살아 있는 걸 제가 추구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필요 없는 라인들은 다 빼버리고 싶어 하죠. 모든 벌스에 그렇게 할 수는 없는데, 배틀랩 같은 걸 할 때는 그런 것들이 최적화되게 할 수 있어요. 대신 서사를 풀어가는 느낌의 곡에서는 모든 라인을 다 살리기가 힘든데, 최대한 노력은 하고 있죠.





LE: [Heavy Deep]에서 가사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Handicap Race”였어요. 저희 에디터 중에 한 분은 이 곡을 듣고 잔뜩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기억에 남는 라인들이라면 “어차피 안 내면 지는 가위바위보”, “늘 줄이 늘어선 이 에스컬레이터 / 난 어쩔 수 없이 그냥 계단을 올랐어” 등등이 있는데요. 가사 속 표현들이 다 캐치하면서도 되게 와 닿았던 거 같아요. 혹시 “Handicap Race”에 대한 당시 팬들의 반응이 특별하진 않았었나요?

제가 모든 가사에 의미를 부여하니까 다 좋아하긴 하는데, 특히나 반응이 소소하고 잔잔하지 않고 제게 확 느껴졌던 게 “Handicap Race”부터였던 거 같아요. 그게 반응이 좋았다고 인지했던 거의 최초의 가사였던 걸로 기억해요. (웃음) 저는 그때부터 약간 ‘솔직한 이야기를 하자.’ 거기에 꽂혀 있었기 때문에… 그게 리쌍의 개리 씨의 랩을 두고 누군가는 ‘신세 한탄 랩’ 이런 식으로 분류해놓는단 말이에요. 제 가사가 그렇게 보이기는 싫었는데, 약간 그런 게 있었죠. 예를 들면, 나스가 [Illmatic]에서 보여줬던 솔직한 이야기, 약간 이런 식으로 해석되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그 약간의 온도 조절을 잘하고 싶었어요. 이게 신파가 되느냐, 코어가 되느냐 그 온도 조절을 어느 정도 했다고 생각한 게 “Handicap Race”였어요. 근데 그런 얘기를 할 때는 메타포가 있어야 하는 거고, 메타포의 힘을 잘 이용해야 하는데, 해서 제목을 ‘Handicap Race’라 지었죠. 그래서 반응이 어느 정도 있지 않았나… 울음을 터트린… (전원 웃음)





LE: [Heavy Deep]은 이후에 전곡 인스트루멘탈과 아카펠라를 공개하시잖아요. 저희 스태프 중 한 분인 어거스트(August) 씨가 리믹스 앨범을 만들기도 했었는데요. 생각해보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기도 한데요.

저한테는 완전 쉬운 결정이었어요. (전원 웃음) 저는 지금도 [양화] 앨범 인스트루멘탈이랑 아카펠라를 다 공개할 예정이에요. 그게 전 대단한 건가 싶어요. [Heavy Deep] 때처럼 프로듀서들에게 동의를 얻는 과정만 마치면 뿌릴 예정인데, 언제 뿌릴까를 고민하고 있는 정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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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시기가 이쯤인지가 맞나 모르겠는데, 아싸커뮤니케이션(Assacomz)에 들어간 적도 있으신 걸로 알고 있어요. 아웃사이더 씨와의 인연이 이때까지는 계속 있으셨나 봐요.

그게 뭐냐하면, 한 3년 전인가... 전화가 와서 “만나자고 하더라고요. 학교 선배니까… 기획사 같은 걸 건대 자기 집 앞에 차렸더라고요. 건물 보고 “와, 좋네요. 잘해놨네요.” 이러고… 들어가서 소파에 앉는데, 자리에 ‘신옥철 대표’ 명패가 딱… (전원 웃음) 그러더니 “상구야, 내가 회사를 만들었어.”라고 하더라고요. 자기들이 일을 따오는 에이전시 형태인데, 프로듀서 누구누구 같이 하기로 했고, 래퍼들 몇몇도 같이 하기로 했다더라고요. 주로 광고, 영화 음악 일을 따오니까 (작업이 성사되면) 커미션 얼마만 떼가면서 일거리를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사실 저는 어떤 그런 제안들에 대해서 별로 신임을 안 하거든요. 그렇게 말해놓고서 일을 안 따오는 경우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도움이 되겠어?’라고 생각하면서도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인드로, 그리고 선배가 저를 그렇게 불러서 이야기하는데… 그래서 알았다고 하면서 “일 있으면 보내주시면 좋죠.”라고 했는데, 그게 힙합 커뮤니티에 광고가 되더라고요. ‘아싸커뮤니케이션 계약’ 이런 제목으로 아티스트들이 쫙 있는데, 그중에 저랑 VMC 애들이 막 있고 그랬죠. 그래서 어떤 느낌인지 알았는데, “홍보해야지 뭐, 씨발.” 싶었죠. 약간 좀 짜증나지만 그러려니 했는데, 그 후로 일 한 번도 안 주고 한 번 있었는데, 타이미(Tymee) 꺼 곡 해달라고… 말도 안 되는 얘기하더라고요. 어쨌든 타이미도 옛날부터 알던 애라서 돈 드는 거 아니니까 이미 만들어놨던 거 줬는데, 페이도 안 들어오고… 이상하게 일을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전 존나 짜증났어요. 아웃사이더 짜증 났고… 원래 구리기도 했는데 그때부터 짜증이 존나 확 났고, 그리고 우탄이가 <쇼미더머니>를 나갔는데, 어떤 라운드에서 우탄이가 떨어졌었어요. 서포트해주러 같이 갔었는데, 우탄이랑 아웃사이더 둘 중의 한 명만 그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거예요. 근데 MC 메타(MC Meta) 형이 “아웃사이더로 결정했습니다.”라고 해서 ‘와, 다 싫어. 존나 싫어.’ 이런 기분이었어요. (전원 웃음) 그때 아웃사이더 형을 많이 싫어하는 게 시작됐죠. 원래 약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학교 선배이고 오래 알았던 형이니까 미지근했는데 확 도장을 찍은… 그 후로 아싸커뮤니케이션인지 뭔지 모르겠는 거기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냐는 오해를 당연히 할 수도 있는 건데, 그런 글이 올라오면 더 열 받는 거예요. 그런 글 한번 볼 때마다 또 더 싫어지게 됐고요. 지금은 아무것도 없어요. 계약을 2년을 했는데, 이미 2년이 지났어요. 그냥 아무것도 아닌… 제가 아까 얘기했던 소꿉놀이하는 그런 거에 껴있었던 거죠.





- 비스메이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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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이제 VMC 이야기로 본격적으로 넘어가 봐야 할 텐데요. 우탄 씨와 믹스테입을 만드시고, 멤버들을 이리저리 모으는 시기가 비스메이저라는 크루, 레이블이 공식적으로 출범하기 전이잖아요. 그 당시에 멤버들을 하나하나 어떻게 모으게 되셨는지 얘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일단 우탄 씨와의 인연을 먼저 얘기해주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우탄이는 제가 코쿤에서 일할 때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었어요. 그때는 그냥 홍대에서 노는 거예요. 보통 주말에 일하니까 나가서 주변 사람들이 술 마시러 많이 나와 있거든요. 트위터도 있고 하니까 누가 홍대에 있으면 연락해서 가서 마시고 같이 놀고 많이 그랬어요. 근데 어느 날은 홍대 준코에 할러밴 영인 형이 자기가 거기 있다면서 전화가 왔었어요. 여기 너 좋아하는 애가 한 명 있다더라고요. ‘여자인가?’ 싶었는데, 우탄이란 애가 딱… 완전 샌님처럼 생긴 애가… 그때는 지금보다 더 야들야들했을 거예요. 갑자기 자기가 제 팬이라고, 너무 좋아한다고 그런 전형적인 이야기들을 하는데, 당시에 제가 장난으로 많이 한 게 “랩해 봐.” 이런 거였거든요. (전원 웃음) 원래 바스코 형이 많이 하던 거예요. 바스코 형이 “야, 랩해 봐.” 이러면 진짜로 해야 하는, 할 때까지 민망하게 하는… 저는 그걸 약간 패러디한 거였어요. 왜냐하면, 랩해보라고 하면 다들 “에이~”하고 마니까 장난으로 했는데, (우탄이가) 진짜로 랩을 하는 거예요. “N.Y. State Of Mind” 랩을 갑자기 막 하는 거예요. 준코에서 존나 창피하게… (웃음) 근데 거기서 좀 멋있었던 거죠. 랩을 하라고 해서 한다. 거기다 나스의 “N.Y. State Of Mind”를 하니까… 그렇게 해서 알게 됐고, 며칠 후에 (코쿤에) 호스트 MC로 들어온 거예요. 어떻게 연이 닿아서 걔도 알바를 하고 싶었는지… 들어왔으니까 제가 “어, 너 그때 봤던 애네?”라고 하면서 호스트 MC를 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을 종이에다가 적어서 10개 정도를 써서 줬었어요. 그것도 약간 장난으로 웃기려고 그랬던 거예요. 근데 보니까 저랑 노는 방식이 잘 맞더라고요. 술 좋아하고… 그래서 자주 보게 됐죠. 걔 랩 톤이 마음에 들었어요. 당시에는 랩을 좀 이상하게 했던 것 같은데,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해줬어요. 제가 생각하는 방식에 대해서 얘기해주고… 그러다가 같이 하게 됐죠. 결정적으로 걔가 군대에 가야 한다고 했었어요. 코쿤에서 일하다가 얼마 안 되어서 관두고 군대 영장 나왔다는 거예요. 제가 “야, 미뤄.”라고… 갑자기 어떤 계획도 없이, 남의 인생을… (전원 웃음) “늦게 가. 뭐 좀 하고 가. 좀 더 하고 가면 좋지 않을까?” 이런 말을 해서 진짜 미뤘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제가 얘를 책임져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LE: 앞서 빅딜, 지기 펠라즈 등등 속해 계시던 여러 집단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요. 집단에 속해 있고, 그 집단 안에서 활동하다가 문제가 생기기도 하는 게 진저리가 나셨을 것 같기도 한데요. 근데 또다시 비스메이저 크루, VMC를 결성한 동기가 궁금해요. 지금에 와서 또다시 크루, 레이블을 만들었으니까 영입의 기준 같은 게 되게 엄격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요.

비스메이저를 처음 만들 때는 코쿤에서 만났던 멤버들이 주축이었어요. 저를 비롯한 사람이라는 게 연도별로, 나이를 1년, 1년 찰 때마다 어떤 관념이나 가치관이 바뀌기 마련이잖아요. 당시에는 크루를 다 나오고, ‘우리나라에서 비즈니스를 하려고 힙합 뮤지션들이 모여 있으면 무조건 싸우고 해체돼서 망한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을 때였어요. 그래서 크루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이고, 혐오할 정도였어요. ‘우리나라에서 무슨 크루야?’ 이랬을 때에요. 한창 만나고 놀던 그 시즌의 친구들이 맨날 바뀌니까 그것에 대해서도 염증이 많이 있었어요. 근데 만들 당시에는 그런 기분도 들었었어요. 이 친구들이랑 언제 또 헤어지게 되고, 언제 각자의 길을 가게 될 건가 하는 마음도 있었던 반면에 너무 좋았던 친구들이어서… 우탄이나 벤, DJ 카딕(DJ Kaadiq) 형… 특히, DJ 카딕 형은 마지막으로 빅딜 스쿼즈에 같이 들어갔다가 제가 나오면서 같이 나왔던 형이에요. 코쿤에서 알게 됐고요. 그 형이랑 진짜 맨날 붙어 다녔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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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탄이랑 몇몇이랑 한 네 명 정도가 ‘비스메이저라는 크루를 만들자.’라고 하면서 음악을 소소하게 하면서 재미있게 놀자고 했어요. 노는 게 다른 게 아니고 같이 다니면서 게임을 한다든지, 술을 먹는다든지, 밥을 먹는다든지 붙어 다니는 일종의 호미들이죠. 호미들 위주로 큰 야망을 갖지 말고 재미있게 놀자고 하면서 만든 거였어요. 처음에 크루 이름을 지을 때, 굉장히 많은 아이디어들이 나왔었는데, 3일 동안 탐앤탐스(Tomntoms)에서 이야기하다가… 남자들이 모여서 얘기하다 보면 또 멋있는 걸 말하고 싶어지잖아요. “야, 이거 너무 과한 거 아니야? 음악해야 할 것 같은데.” 이런 말 나오는… 그러다가 결국에는 비스메이저로 결정하게 되었죠. 초반까지는 정말 잘하고 잘 나가는 거에 대해서 연연하지 말고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즐겁게 같이 하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도 저는 또 동료를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고, 갑자기 어떤 야망이 생기고, 남자들끼리 있다 보면 일을 더 벌이고 싶어지고… 그런 것들 때문에 점점 덩치가 커졌죠. 그래서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게 음악 하는 집단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LE: 크루를 확장하는 시기가 있었잖아요. 확장 자체가 그 의도나 진행의 계기가 확실히 달랐던 것 같아요. 되게 의욕적이셨던 걸로 기억해요.

그게 약 1년 정도, 저의 의욕이 침체되어 있다가… 저희뿐만 아니라 씬의 판도가 스물스물 바뀔 때였는데, 한참 하이라이트 레코즈(Hi-Lite Records)가 부흥하면서 오케이션(Okasian)이 영입되고, 허클베리피(Huckleberry P)가 영입되는 딱 그 시즌이었어요. 일리네어 레코즈가 만들어지고, 그런 움직임들이 있을 때였는데, 뭔지 모르게 제 마음이 조금 촉박해지더라고요. 움직임이 달라지고 있는데, 도태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면서 그때그때 계속 바뀌고 성장하는 느낌이 들어서 감히 제가 그때 했던 생각을 단정 짓지 않기로 했어요. 제가 힙합 크루가 영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약간 인정하고, 지금의 순간에 충실한 것도 되게 좋은 거라고, 다시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들인데, 20대 중, 후반 이 기간에 충실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봤어요. 너무 염세적이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 동료들을 모았죠. 그래서 초반에는 애들한테 얘기한 게 있기 때문에 저희는 멤버 영입을 하더라도 찬반 투표를 했을 때, 만장일치가 아니면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었어요. 모두가 찬성해야지만 안건이 진행되는 거고… 이런 식으로 정해놓고서 또 제멋대로… “얘는 들어와야 하는 이유가…”라고 하면서… 동생들은 그때부터 저를 ‘답정너’로 보기 시작했죠. (전원 웃음) ‘형이 형 마음대로 할 거면 왜 물어보시는 거지?’ 생각하는 거죠. 그런 시기를 겪고 나서 한번 싹 많은 멤버를 모을 때가 있었어요. 그게 “Vcypher”할 때였는데, 던밀스, 락키엘(Rocky L), 브래스코, 로우 디가, 버기(Buggy) 이런 멤버들이 영입되면서 조금 더… 또, 컴필레이션 앨범을 만들고 있었고,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예전 빅딜, 메스퀘이커, 지기 펠라즈 할 때의 기억들을 쓸어 담아서 했죠. 이런 식으로 뭘 만들고, 어떤 식으로 움직임을 가져가고, 제가 공연을 할 때는 이런 멤버들을 옆에 같이 세워서 참여시키고, SNS에서는 이런 플레이를 하고… (전원 웃음) 그때부터 제대로 해봐야겠다고 해서 어떤 작전을 펼쳤던 거 같아요. 원래는 어떤 바운더리 안에서 발을 슥 빼고 있으려고 했는데, 살짝만 거쳐지는 형태가 되니까 발을 슥 넣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원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레이블까지 만들게 됐죠.





LE: 말씀하신 대로 비스메이저 크루가 VMC라는 회사로까지 이어지게 됐는데, 두 집단 간의 구분이 내부에서 잘 이루어지는지 궁금해요.

100% 자연스러운 건 아닌데, 서로 납득 가능할 정도고요. 왜냐하면, 지금 음악을 하지 않는 친구들도 있어요. 음악을 하고 있지만 하고 있지 않은… 애매한 친구들. 예를 들면, 스타일리스트(Stylelist)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 때문에 던밀스를 알게 됐어요. 저랑 동갑이고, 한국 사람인데 국적은 캐나다에요. 그래서 한국말 어눌하게 하는 그런 친구가 있는데, 원래 한국에 와서 음악을 하려고 했는데, 지금 영어 강사를 하고 있어요. 비트메이커기도 해요. 근데 되게 활발하게 뭔가를 계획하고 있는 친구가 아니에요. 그 친구의 라이프스타일의 바이브가 ‘그냥 비스메이저 하고 있고, 비트 만들고…’ 이런 느낌인데, 최근에 개리 씨 앨범에 비트를 주고… 그냥 가만히 있다가. (전원 웃음) 하여튼 그런 식으로 사는 친구한테 굳이 제가 레이블 대표로서 “너의 앨범을 제작해줄게.”나 “넌 이제 비스메이저 크루가 아닌 레이블의 일원으로서…” 이런 식으로 말할 필요가 없는 거죠. 그냥 자연스러운 분위기. 베이비나인이라는 친구도 원래 저랑 어릴 때부터 같이 랩을 하던 친구인데, 평소 가사 쓰는 습관이 없는 친구예요. 그래서 어떤 랩에 대한 재능은 있는데, 자기 하고 싶은 거 하고, 호스트 MC도 보고, 요새는 어떤 클럽에서 DJ도 하고… 그런 친구들을 보면, 저는 걔를 래퍼로서 알았지만, 걔 성향은 사실 DJ 같거든요. 어떤 음악도 가장 빨리 찾아 듣는… 음악을 선곡하거나 믹스셋을 만들거나 하면서 호스트 MC를 볼 수 있는 그런 데에 특화된 친구라서 제가 굳이 그 친구한테 “야, 너 가사 써야 돼.” 이럴 필요가 없는 거죠. 그렇게 된 케이스도 있고… 벤 같은 친구는 같은 크루긴 하지만, 회사가 있고, 자기 커리어가 있으니까… 그래서 그 외적으로 신경 써야 할 친구는 락키엘 같은 친구가 있는데, 락키엘은 또 엔피 유니온(NP Union)이라는 밴드를 하고 있어요. 제가 주축으로 신경 써야 하는 친구들은 스톤쉽(StoneShip)과 계약되어 있는 넉살, 우탄, 오디(ODEE), 던밀스, 버기가 있고… 되게 자연스러운 거 같아요.





LE: 운영 측면에서는 아무래도 레이블이다 보니까 그래도 옛날 빅딜처럼 약간 비체계적인 상태는 아닐 거 아니에요. 어느 정도 레이블 운영, 경영적인 측면에서 각 멤버 분들이 어느 정도 맡으신 부분들이 있을 거 같아요. 처음에 공식적으로 레이블이 출범했을 때는 딥플로우, 로우 디가, 우탄 씨 세 분이 CEO로 공개됐던 것 같아서요.

그때 저희가 그런 발표를 했던 건 저는 로우 디가랑 우탄이한테 약간 책임 전가를 하고 싶었던 것도 있고… 그때 당시에 우탄이가 <쇼미더머니> 나온 후로 약간 주목을 많이 받고 어떤 핫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 친구의 어깨도 으쓱했었고… (전원 웃음) 원래 우탄이랑 “같이 레이블을 만들자.”, “비스메이저를 레이블화시키자.” 했었는데, 로우 디가의 힘도 필요한 걸 느껴서 로우 디가도 같이 하게 됐어요. 지금 상황에서는 그냥 각자의 역할이 있고요. 우탄이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해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에 조금 더 플레이어로서 집중하는 상태예요. 소속 멤버지만, 발표를 사장을 한 정도… 저희가 법인이 아니기 때문에 지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웃음) 어떻게 보면 발표는 그렇게 했지만, 거의 다 저 혼자 이끌고 있죠. 제가 경영을 하고 있다기보다는 어떤 집단의 디렉터, 프로듀서 역할을 하고 있는 거 같아요. 제가 못하고,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스톤쉽 똘배가 거의 역할을 다 해주고 있고요. 장기적으로 보면, 저희가 VMC만으로 어떤 비즈니스를 하고, 레이블 역할을 하기까지는 약간 시간이 걸릴 거 같아요. 저도 똘배한테 일을 좀 배워야 하고요. 그래서 뮤지션들한테 아직 정확한 어떤 레이블로서의 역할을 해주고 있진 못해요. 같이 만들어가고 있는 입장이고, 저는 여태까지 [양화]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부터 약간 레이블 경영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시작하려고 하는 타이밍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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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VMC의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스톤쉽에 믿음이 있으신 거 같아요.

네. 제가 덥 사운즈를 나오고, 회사를 찾으려고 미팅도 많이 하고 할 때, 똘배가 저를 자주 찾아와서 자기가 언제나 저의 팬이고, 무조건 같이 하고 싶다고 많이 얘기했었어요. 처음에는 똘배를 예전부터 알긴 했지만, 그때가 회사를 정하고 파트너를 구하는 데에 있어서 신중해야 할 30대 초반의 나이였어요. 그래서 계속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똘배를 신임하기까지의 시간이 좀 걸렸고요. 지금은 같이 해보고 나니까 지금 저한테는 당연히 완전히 필요한 존재고, 똘배나 스톤쉽이 아니었으면 레이블로서의 운영이 거의 불가능한 정도로 많이 역할을 해주고 있어요. 똘배가 짱입니다.





LE: 재작년에 ADVMC를 했던 적이 있잖아요. 공연도 하고, 무료로 곡도 공개하고 그랬었는데, 같이 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해요. 그리고 지금은 어떤 관계신지 궁금해요.

그걸 솔직히 까먹었는데요. 하게 된 계기가 정확히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떤 합이 딱 맞았었고… 아, 뭐였지? (전원 웃음) 뭔가 개연성이 있어서 하게 됐었는데… 기억이 진짜 안 나네요. 근데 ‘어, 그래. 해야지.’ 약간 이런 느낌이었었어요. (전원 웃음)





LE: 그럼 그때 이후로는 ADV와 새로운 기획을 하실 생각은 없으셨던 건가요?

원래는 공연 날 재미있게 공연하고, 서로 시너지를 받고, 우리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자고 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죠.





- VMC, '가족의 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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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이제 [RUN VMC] 얘기를 조금 더 해 볼 텐데요. [RUN VMC]의 경우에는 조금 적은 참여 인원으로 앨범을 꾸리다 보니까 아쉽다고 느끼셨을 것 같기도 해요. 앨범을 진행하는 도중에 새 멤버들이 영입되다 보니까… 몇 퍼센트 정도 진행되었을 때, 멤버들이 추가적으로 들어오게 된 건가요? 뭔가 새롭게 들어온 멤버들과 함께 앨범을 다시 구성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으셨는지 궁금해요.

앨범을 다 끝냈을 때 “Vcypher”에 나오는 새로운 멤버들이 크루에 들어왔었고요. 마지막에 공장 넘기기 직전쯤 “Vcypher”를 추가했던 거고요. 그래서 앨범을 들어 보면, 보너스 트랙들이 많잖아요. “The Vgins”라는 트랙으로 마무리를 짓고, 그 이후 트랙들은 보너스 형식인데, 보면 약간 부틀렉 느낌이 조금 강한 앨범이긴 해요. 그때는 비스메이저가 입지가 없었기 때문에 아직도 저를 빅딜의 멤버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팬들 만나면) “저 지기 펠라즈 진짜 좋아해요.” 이러고… 그래서 비스메이저를 많이 알리고 싶어서 보통 저한테 들어오는 공연들을 비스메이저로 돌렸었어요. 예전부터 저는 단체 공연하는 걸 되게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단체 공연을 할 때 쓸 공연 세트로 4곡 정도를 만들어서 이걸 앨범으로 내자고 시작했었어요. 그런 기획이었는데, 조금 트랙수도 많아지고, 갑자기 몸집이 불어나면서 컴필레이션 앨범이라는 타이틀로 나오게 됐죠. 근데 하필 그때 비슷한 시기에 하이라이트 레코즈 컴필레이션 앨범이 나와서 비교가 되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LE: 근데 되게 좋은 평가를 받았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한국대중음악상 후보도 오르고요.

그거는 약간 아이러니하게 그쪽 분들이 좋아해 주셨는데, 저는 당연히 제가 프로듀싱한 앨범이니까 애착이 가죠. 저의 취향이 반영되어 있고… 근데 평단에서 인정해줬다기보다는 그… 그 뭐죠? 대회인가요?





LE: 한국대중음악상…

네. 그 시상식… (전원 웃음) 시상식에서 좋아해 준 게 약간 의아한? 왜냐하면, 리스너들도 별로 안 좋아해 줬거든요. 비교하면서 하이라이트 레코즈 앨범 짱이라고 하고… 그랬기 때문에…





LE: 앨범에서 주축이 되는, 가장 러쉬를 하는 래퍼가 역시 우탄, 오디 두 분이잖아요. 딥플로우 씨는 약간 전체적으로 잡아주면서 필요할 때 치고 빠지는 느낌이 강했거든요.

저는 아까 말씀 드렸듯이 몰아주기, 밀어주기 이런 거에 대해서 다분히 의도적이고… 거기서는 특히나 오디였어요. 오디랑 우탄이한테… 그 친구들한테 이를테면 벌스를 이런 식으로 고쳐보자고, 그런 식으로 어떻게 어떻게 하자고 했었어요. 녹음할 때 제가 일일이 디렉팅을 봐주고, 비트 셀렉도 다 제가 했고요. 구성도 제가 했고, 주제도 제가 잡았고요. 저의 의도가 그런 거였어요. 우리가 지금 신생이니까 얘네가 랩 잘하는 게 제 이름을 빌려서 레이블이나 크루에 속해 있지 않은 다른 친구들보다 약간이라도 더 알려져서 수혜를 받았으면 했던 거죠. 그래서 공연도 같이 다녔던 거고요. 당연히 그 친구들한테 중점을 맞추려고 했죠. 근데 저는 최선을 다한 거예요. (웃음) 일부러 제가 랩을 느슨하게 했다든가 그런 건 아니에요. 그게 앨범 안에서 그렇게 묻어난 거죠. 제 포지션이 그렇기도 하고…




LE: 사실 들으면서 딥플로우 씨가 그런 식으로 포지셔닝하는 게 진짜 랩 잘하는 사람이 아니면 못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어떻게 보면 완급조절이잖아요. 하이라이트를 장식하거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고 멤버들을 받쳐주면서도 자기 역할을 하는 게 마음대로 조절이 되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되게 잘했다고 생각하는데… (전원 웃음) 그런데 약간 그런 기분이 드는 거죠. ‘혹시 내 랩이 약간 자극적이지 않아서 완급조절을 했다고 하는 건가? 내 파트에서 하고 싶은 거 잘한 건데.’ 이런… 근데 뭐, 그런 식으로 해석해주신다면야…





LE: 항상 보면, VMC에서 나오는 음악이나 팀의 멤버들에 대한 자부심이나 자신감이 확실하신 것 같아요. 여태까지 소속되어 있던 집단에서 함께 해온 동료들과는 무언가 다른 게 있나요?

사실 비스메이저 이전에는 제가 선택했던 멤버들이 아니었잖아요. 비스메이저부터는 철저히 저의 취향과 필요에 의해 멤버 구성을 짠 거기 때문에, 당연히 차별성은 있죠. 이전에는 제가 합류한 느낌이었고 이제는 제가 합류를 시킨 거니까.





LE: 특히, 오디 씨 같은 경우는 레슨생 신분이었잖아요.

신분… (전원 웃음)





LE: 신분이 아니라 출신, 단어 선택이 조금…(당황) 하여튼 레슨생 출신이 레이블의 정식 멤버가 경우가 꽤 드문 케이스인데, 이 역시 확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인 것 같아요. 오디 씨를 영입할 당시의 개인적인 생각은 어떤 것이었나요?

일단 뭐, 만남이라든가 인연이라든가, 같이 동료를 구성하는 자체가 다 인연인 거 같아요. 여자 처음 만났을 때 한눈에 반하는 것처럼, 래퍼한테도 그런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목소리 톤이 딱 랩 한마디 듣고 알게 되는 거랄까 <쇼미더머니>에서도 이런 부분을 심사하는 거 같은데, 아무튼 오디의 랩을 처음 듣고 목소리에 먼저 반했고, 레슨을 하면서 걔가 써오는 가사의 디테일이나 감성에서 가능성을 봤어요. 목소리가 이런 풍인데 랩의 속도감이나 리듬 같은 부분은 로우톤 래퍼가 많이 하지 않은 쪽이었고, 플로우 디자인도 좀 하는 래퍼였어요. 가사도 재미있는 부분이 많았고, 저에겐 그런 점이 충족되었죠, 제가 한 100명쯤 넘게 레슨을 했는데, 그중에서 오디 한 명밖에 없었어요, 얘랑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경우는요.





LE: [RUN VMC] 이후에는 던밀스 씨의 활약이 남다른데, 황마 케이(Hwangma K) 때부터 봐오신 걸로 알고 있어요. 예전에 저희와 어떤 영상을 촬영할 당시에도, “황마 케이라는 친구는 잘됐으면 좋겠다.”라고 말씀을 하셨었는데, 그 이후에 어떻게 같이 하시게 된 건가요? 영입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나 던밀스 씨만의 매력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던밀스가 황마 케이 시절에 상상한 것 이상으로 많은 곡을 만들었어요. 앨범을 낸 적도 있고, 믹스테입도 자기 말로는 20개 이상이 있었다고 하고, 자작 녹음 게시판에 엄청나게 많은 노래를 올리기도 했고요. 유투브에 가도 진짜 엄청나게 많은, 무슨 릴 웨인마냥… (전원 웃음) 존나 징그러울 정도로 많더라고요. 그러니까 걔는 이런 곡을 하면 이런 식으로 나오고 저런 곡을 하면 또 다른 느낌이 드는, 한 마디로 가정법이 굉장히 많았던 친구예요. 그간 작업한 트랙들을 보니 걔한테 맞는 거랑 안 맞는 게 저한테는 보였고요. 당시에 저는 기본적으로 멤버를 늘릴 생각이 없어서, 약간의 매력으로는 함께할 개연성이 크게 없었거든요. 근데 던밀스는 예전에 제가 디씨 트라이브(DC Tribe)에서 처음 랩을 들었었어요. 이름도 특이하고 톤도 특이해서 기억에 남은 상태였어요. 그러다 나중에 스타일리스트가 자기가 캐나다에 있을 때 같이 하던 동생이라고 강추한 래퍼가 있었는데 걔더라고요. 근데 그때 들어본 랩은 완전 제 취향이 아니었어요. 완전 스나이퍼 사운드 같은… (전원 웃음) 막 “Better Than Yesterday”에 랩할 것 같은 플로우라 너무 싫었어요. 근데 또 다른 곡 들으면 존나 멋있고… 그래서 “어 뭐 이런 애가 다 있지?”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실제로 한 번 만났는데 애 자체가 멋있더라고요. 저는 멋이라는 측면도 MC가 풍길 수 있는 매력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자주 만나게 됐고… 그리고 이 친구가 당시에 데모 CD 돌리면서 엄청 열정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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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당시에 저랑 비슷한 이유로 다들 던밀스를 컨택 안 한 것 같아요. ‘얘 뭐지? 뭔가 느낌 이상해…’ 이런 느낌이랄까요. 무슨 웹툰 <정열맨> 같이 생겨 가지고. (전원 웃음) “휴학한 유학생”이라는 뮤직비디오가 있는데, 그거 보고 진짜 깜짝 놀랐어요. “뭐지? 얜 어디서 온 애지?”, 막 뒤에 태극기 휘날리고… (웃음) 그래서 ‘와, 특이한 놈이다.’ 생각했는데, 자주 만나니까 정도 많이 들었고, 얘가 말하는 것도 존나 특이하고 재미있거든요. 진짜 듣도 보도 못한 캐릭터라 매력적이더라고요. 근데 얘가 갑자기 또 군대에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전까지는 크루였으니까 제가 ‘군대 잘 갔다 오고, 휴가 나오면 내가 도와줄 테니까 공연도 같이하자.’같은 느낌으로 얘기했었어요. 그러고 나서 그 다음주쯤 공연을 하는 걸 처음 봤는데, 에너지가 대박인 거예요. 아예 느낌이 완전 다른 거에요. 그때 ‘빡’ 왔어요. 내가 얘를 만들고 싶은 느낌이요. 그래서 “너 군대 미뤄라.”라고 했죠. (전원 웃음) 원래 제가 그런 말을 함부로 안 하는데… 남의 인생이잖아요. 그리고 그 친구는 성격상 군대를 미루면 안 된다는 생각에 휩싸여 있어서, 제가 미루라고 적극 추천했죠. 이름도 개명을 시키고요. 황마 케이의 시절을 세탁하기 위해서… (웃음) 던밀스로 이름을 바꾸고 초반에 디렉팅도 많이 해줬죠. 그래서 지금의 던밀스가 탄생했죠.





LE: 지코(Zico) 씨, 얀키(Yankie) 씨, 또 빈지노 씨의 앨범에도 참여하는데, 그분들이 왜 던밀스 씨를 선택했을까요?

저는 던밀스에게는 두 명이 있다고 생각해요. 딥플로우와 빈지노. 딥플로우가 딱 처음에 던밀스를 만들었을 때… 아, 뭔가 3인칭으로 말하니까 존나 웃긴데… (전원 웃음) 그때는 사람들이 긴가민가했을 텐데, 그걸 보고 빈지노가 과감한 선택을 해서 사람들이 오픈 마인드가 된 거죠. ‘아 던밀스 되는 거구나. 던밀스 존나 빨리는 거구나.’라고 느끼면서요. 일종의 조삼모사 같은 거죠. (웃음) 만약 빈지노가 던밀스를 컨택하지 않았다면 걔의 매력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았을 거예요. 빈지노의 과감한 선택이 던밀스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LE: 우탄 씨 [ZOORECA]나 던밀스 씨의 [Young Don] 같은 앨범을 낼 때는 어떤 조언을 해주셨는지, 또 실제 나왔던 앨범들에 아쉬운 점이 있지는 않으셨는지 궁금해요.

우탄이가 [ZOORECA] 같은 경우는 VMC가 처음 레이블화 하면서 처음 나온 앨범이고, 데뷔 앨범이기도 해서, 제가 신경을 많이 쓴… 그렇다기보다는… 제가 우선 우탄이 형이잖아요. 저에게 권한이 100% 있지도 않은 상태이니까 형으로서 해줄 수 있는 말을 많이 했어요. 당시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이야기를 많이 해줬죠. 트랙 배치라든가, 곡 안에서의 구성이라든가 그런 부분을 신경 써줬죠. 타이틀 선정에 있어서도 “나비야”는 타이틀로서 너무 의도도 뻔하고 조금 더 좋은 곡이 있지 않나 싶었어요. “이런 곡이 타이틀이 돼야 하는 건 편견 아니냐?” 뭐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죠. 근데 우탄이는 그때 ‘나비야’라는 키워드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 대해 꽂혀있었어요. 그래서 그걸 또 방해하는 건 저의 역할이 아닌 것 같았죠. 던밀스 앨범 같은 경우는 우탄이 앨범보다는 조금 더 신경을 많이 써서, 훅 같은 경우도 조언을 해주고, 녹음 디렉팅도 제가 많이 보기도 했어요.





LE: 평소 SNS나 공연 멘트 등을 보면 VMC 멤버들은 정말로 사이가 좋은 것 같아요. 근데 솔직히 대표로서 관리해야 한다고 해야 하나요? 누가 제일 힘들게 한다, 혹은 반대로 누가 제일 힘이 돼주고 편하게 해준다 같은 게 있나요?

다들 각자 역할이 다르고, 힘들 게 하는 포인트도 달라요. (웃음) 근데 그게 힘들다기보다는… 반대로 애들이 저 때문에 힘들 수도 있는 거잖아요. 뭐랄까, 이게 성격이 다 다른데, 융화될 때는 또 재미있게 융화되기도 해요. 공통적으로 다 저라는 교집합이 있는 상태에서 모인 사람들이라서 저에 대한 신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제가 물질적으로 돈이나 권력이 있어서 얘들을 아우를 수 없다면, 그 외적인 스트릿 크레디빌리티 같은 거로 애들한테 입지가 있어야 하는데, (웃음) [양화] 내기 직전에는 그 부분이 페이드 아웃되고 있다고 체감했었어요. ‘얘들이 앨범을 내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내가 그 뒷바라지를 한들 나는 내 역할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싶은 거죠. 근데 딥플로우에서 류상구로 변하는 시점에서 제가 [양화]를 냈기 때문에, 얘들이 다시 저에 대해서 처음의 모습 그대로 보는 느낌을 받는… (전원 웃음) 근데 이게 또 시간이 지나면… 어쨌든 아직까지는 저를 신임하고 말을 잘 듣고 있어요.





LE: [RUN VMC]의 실질적인 마지막 트랙 “Forever I”에서 우탄 씨 파트 중에 “영원이라는 단어 존재 자체가 거짓말 / 그것을 봤던 목격자는 없으니까”라는 가사가 나오잖아요. 아무래도 여러 집단을 많이 거쳐오셨기 때문에, VMC라는 집단이 오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실 거도 같으면서도 마지막이 있을 거라는 상상도 좀 하셨을 거 같기도 한데요.

그건 당연하고요. 저한테 VMC를 떠나서 힙합 자체가 영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최근에 많이 한 생각이지만, 힙합은 젊은 음악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가장 멋있을 정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뿐만 아니라 VMC 다른 멤버들 모두 플레이어로서의 최전선에서 물러날 때가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개개인의 욕심을 떠나서 힙합 문화 전반적으로 봤을 때, 자기가 도움되지 않는 형태로 전면전에 계속 나서면 그건 구린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많은 나이 많으신 분들이 그렇게 하고 있고, 구린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는데… 그래서 그때는 겸허하게 자기가 그 시기를 받아들이고, 디렉터로 전환을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발현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저희가 최대한 이 순간에 열심히 하고 있는 게 유효할 때까진 최선을 다하고, 또 그런 부분을 VMC라는 테두리 안에서 할 수 있으면 좋은 거고요. 저는 그런 형태가 됐으면 좋겠어요. VMC는 명문구단처럼 계속 유지가 되고, 계속 그 안에 멤버가 교체되는 형태요. 지금의 우탄이나 던밀스가 나이가 차고 멋없어 졌을 때는 후배들을 양성하고, VMC 안의 ‘OB’로서 챙겨주는 형태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요. 당연히 우리가 45살 돼서, 아 45살된 래퍼 형들이 있으니까… (전원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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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50살쯤 돼서 롤링홀(Rolling hall) 이런 곳에서 공연하는 모습 상상하면 너무 싫어요. 멋있는 느낌으로 VMC가 리프레쉬되는 모습이었으면 좋겠어요. 뭐, 각자의 생각은 다르겠지만, 저는 일단 친구들에게 이런 마인드를 이해시키고 있고요. 예를 들면, 넉살이 같은 경우는 크루로 들어온 게 아니기 때문에, 걔한테는 제가 영입 제안을 할 때 이렇게 말했어요. “너가 아무것도 아니고 이렇게 밍밍한 시기에 너를 도와줄 테니까 이걸 발판으로 삼아서 하고 싶은 걸 해라. 나중에 다른 좋은 회사를 가도 좋아. 다만 이 기간에는 최선을 다해서 멋있는 걸 하자.”라고요. 사실 마음 같아서는 제가 쏟은 것만큼 같이 계속했으면 좋겠는데, 만약 YG 엔터테인먼트(YG Entertainment)에서 넉살이 보고 오라고 하면 보내줘야죠. “축하… 하지만 얼마나 잘먹고 잘사나 보자.”라고 하겠지만, (웃음) 걔 의사를 존중해주고 축하해줘야죠. 근데 또 그 와중에서도 각자 성향에 따라서, 예를 들면, 제가 생각하기에 넉살이 같은 래퍼는 걸어가고 있는 길이 굉장히 길어 보이거든요. 제가 앞에서는 말을 그렇게 했지만, 경우에 따라서 얘는 50살이 돼서도 자기 랩을 할 수 있는 래퍼라고 생각해요. 그런 뮤지션이 되면 정말 멋있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저는 멋있는 전례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를 하는 건데 몇 명 애들이 그런 길을 가면 멋있겠죠.





LE: 앞으로 VMC로서 또다시 단체 앨범 계획이 있는지 궁금해요. 만약 그렇다면 [RUN VMC] 때와는 전혀 다른 밸런싱을 선보일 것만 같아 기대되는데요. 혹시 계획이 있으신가요?

다 계획이 있고요. 원래 작년에 하려고 했는데, [양화] 때문에 많이 미뤄졌고, 일단 저희는 ‘지금보다 올라가자. 더 성공하자.’ 이런 느낌보다는 장기적으로 리프레쉬하는 걸 생각하고 있어요. 컴필레이션 앨범을 하면 분위기 환기도 되고, 전체적으로 도움이 돼서 기획하고 있어요. 컨셉 같은 부분은 이미 정해져 있고요. 우선 저희의 브랜딩을 약간 해야 할 거 같아요. 지금보다 더 입지가 확실해지고, 입지가 높아진다는 거는 저희의 공연 페이가 올라간다거나 관객 동원력에서 더 파워가 있는 집단이 된다거나 그런 식이겠죠. 그래서 컨셉이 있긴 있지만, 더 확실해지면 발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확실히 조금 더 저희만의 색깔을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을 계획해서 올해 안에는 앨범을 (발표)하고 싶습니다.





- [양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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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자, 이제 단체 앨범을 미루게 된 그 앨범에 대해서 말해 볼까 해요. 올해 들어서 나온 [양화]에 관한 이야기를 할 차례인데요. 되게 오래 전부터 준비 중이었던 앨범이라고 들었는데요. 언제부터 준비하셨는지, 또 실제 작업은 언제부터 들어가신 건지 궁금해요.

제가 덥 사운즈에서 나오고, 연남동에서 반 년 동안 있다가 당산동으로 거취를 옮겼었는데, 그게 아마 2012년 말이었고요. 그때부터 쭉 준비해서 2015년에 나오게 됐죠. 당산동에서 쭉 작업했던 앨범이고, 마무리는 이 곳(합정동)에서 했죠. 그래서 작업시기는 약 3년 가까이 걸렸죠. 그 이유는 비트를 계속 갈아엎는 부분이 많았어요. 해야 할 어떤 일들이 있는 시기에는 작업이 멈춰있다가, 어떤 시기에는 또 작업하고, 이런 식을 반복하다 보니 굉장히 오래 걸렸어요. 작업만 했던 시간은 한 6, 7개월 정도인 것 같고, 그걸 분산해서 하다 보니 3년이 걸렸어요.





LE: 말씀하셨듯이, 비트 셀렉에서 고민이 많으셨던 것 같던데, “Bucket List” 같은 경우는 거의 발매 직전에 비트가 바뀌었다고 들었어요.

네. 원래 가안이 있어서 그걸 밀려고 하다가… TK가 한 번 더 만들어보겠다고 하더라고요. 원래는 샘플링 곡이었고, 가이드 라인까지 나왔었거든요. 근데 TK가 갈아엎으니까 그게 더 좋더라고요. 그래서 회의를 했죠. 어떤 곡이 더 좋으냐를 두고요. 근데 너무 정확히 반반이 나왔어요. 그래서 제가 조금 더 고민을 해보고 “TK가 새로 만든 곡으로 하자”라고 해서 그걸로 진행하게 됐죠. 그에 따라 가이드도 다시 짜고 우혜미 씨를 섭외하고… 사실 우혜미 씨가 녹음실로 오기 전까지도 고민을 했어요. 그래서 가이드도 두 개를 준비했었고요. “두 개 다 녹음을 해보고 더 좋은 거로 하자.”라고 마음먹었었는데, 우혜미 씨가 먼저 녹음한 곡이 TK가 새로 만든 거였고, 그때 그냥 마음을 정했어요. 근데 그 이전 버전은 이나겸 씨에게 부탁했었는데, 까먹고 우혜미 씨에게 부탁했어서… 이게 죄송스러운 이야긴데, 이나겸 씨도 가이드를 해서 보내주셨었어요. 근데 그것도 좋더라고요. 그래서 그 버전 녹음을 받아서 리믹스 버전으로 공개하려고요




LE: 우혜미 씨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Bucket List”에 관해서 힙합플레이야 인터뷰에서 어디서 크리솃 미셸(Chrisette Michele)을 데려왔느냐는 질문이 있더라고요. 저도 듣자마자 나스의 “Can’t Forget About You”가 떠오를 정도였는데요. 실제로 그 곡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으셨던 건지, 우혜미 씨는 어떻게 섭외하신 건지 궁금해요.

네, 그건 들으신 대로 당연했어요. 저는 레퍼런스가 어떤 의도냐에 따라서 다른 것 같아요. 어떤 특정 곡이 연상되는 거라면 어떤 의도로 만들었느냐가 중요하죠. 제가 만약 이 곡을 좀 팔려는 의도로 만들었으면 더 좋은 예가 많았겠죠. 그런데 저는 그 곡을 레퍼런스로 잡은 거지만, 태도에 있어 이 곡을 펼쳐놓고 코드 진행을 따라가거나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TK한테 설명했죠. 넌지시 이 곡하고 나스(Nas)의 “Cherry Wine”도 들려주고… 그리고 “Can’t Forget About You”가 냇 킹 콜(Nat King Cole) 곡을 샘플링 한 거거든요. 그래서 그 시대의 음악을 많이 들려줬었어요. ‘이 곡이 이런 식의 느낌을 샘플링 한 거다.’라는 식으로 알려주려고요. 그런데 이걸 샘플링하기에는 데이터가 방대하잖아요. 많이 들어보고 해야 하니까요. 그럼 나중에 선택장애가 오니까 (웃음) TK에게 “너가 시퀀싱해라.”라고 했죠. 이런 풍으로 빅밴드 재즈 느낌도 나면서, 50년대 라디오 톤의 재즈 보컬도 나는 느낌으로 만들라고 설명을 충분히 해주고 나서 (TK가) 곡을 만들었죠. 그래서 당연히 레퍼런스고, 뭐 그렇습니다. (웃음)





LE: 다시 전체적인 앨범 이야기를 해보면, 오랫동안 쥐고 있던 앨범인 만큼 처음 구상했던 그림과 지금의 그림이 많이 바뀌었는지 궁금해요.

맨 처음보다 조금 더 빈티지한 느낌으로 마감이 됐어요. 맨 처음에는 전형적인 밴드 사운드에 릭 로스(Rick Ross)가 많이 하는 풍의 조금 더 고급진 사운드를 만들고 싶었어요. 근데 또 만들면서 취향이 바뀌고, 메이백 뮤직 그룹(Maybach Music Group) (풍의 음악)에 흥미가 떨어지기도 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도 들어서 전체적으로 많이 바뀌었어요. TK한테 어떤 걸 주문했다가 또 바꾸고… 그래서 비트 셀렉이 오래 걸렸죠. 또, TK 감성으로 만질 수 없는 부분은 제가 만들어야 해서, 샘플을 디깅한다거나 초안 디자인을 새로 짜야 해서 시간이 오래 걸렸죠. 2014년은 거의 비트를 고르는 해였어요. 가사는 이미 2013년에 다 끝났었고요.





LE: 앨범을 들어보면, 담긴 감정들이 뚜렷하게 담겨있지만, 한 번 더 집어주시는 차원에서 양화대교를 오고 가면서 느낀 감정을 여쭤볼게요. 사실 그 감정이 두 가지 이상의 일을 하는 사람들 혹은 역할갈등을 체감하는 사람들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감 같은 거라고 생각해서 보편적인 것 같기도 해요.

그렇죠, 제가 조금 더 극단적인 예인, 무대에서 서는 래퍼와 집에서의 아들로 대비를 확실하게 한 거지, 많은 사람이 이런 감정을 느낄 거라 생각해요. 누구나 각자 역할 갈등이 있으니까 모두가 느끼는 부분이라 생각해요. 당시 저는 ‘내가 왜 나의 이야기를 해야 하나?’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했는데, 제가 느끼고 혼자 곪아 터지는 생각들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고, 술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건 배설 같은 느낌밖에 안 들었어요. 여자친구에게 이런 걸 이야기한다고 위로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채워지지 않는 부분들을 음악으로 발현하고 싶었어요. 힙합도 예술의 범주에 속한다면, 예술가가 해야 하는 동기부여 중에 하나가 이런 부분에서 시작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제가 제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해방되는 느낌이 들 것 같고, 진솔하게 무언가를 털어놓은 느낌이 들 것 같아서 ‘아,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최대한 자세하게 이 서사를 전달해서 (청자가) ‘아, 네가 그런 생각을 했구나.’라고 느끼게 하기 위해서, 적절히 설득력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했고요. 혹은 이게 약간 극적으로 꾸며낼지언정, 그렇게 해야 내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LE: 양화대교를 건너는 버스에 광고를 부착하는 건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궁금해요.

처음에는 똘배가 양화대교에 현수막을 걸자고 했는데, 조금 웃길 것 같아서 안 했어요. 그래서 생각을 바꾼 게, 누가 먼저 이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저작권이 어디에 있는지… (웃음) 저라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아닐 수 도 있어서… 그런데 똘배한테 넘겨주기도 싫고… 아무튼, 같이 이야기해서 버스에 광고하자는 말이 나왔고, 보면 버스 광고에 영화 포스터를 부착하는 경우가 엄청 많이 있잖아요. 저도 영화를 좋아해서 제 앨범을 영화처럼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영화를 보는 기분으로 내 앨범을 들어달라.’라는 식으로 광고하게 됐죠.





LE: 사실 효과를 체감하기는 힘드시죠?

그렇죠. 근데 이게 한 달에 얼마 이런 거였는데, 기간이 이미 지났는데도 종종 보이더라고요. 오늘도 지나가다 봤거든요. 광고주가 새로 안 나타난 거죠. (웃음) 저는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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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사실 [양화]의 중심인 양화대교, 이 다리라는 게 전통적으로 단절과 연결 둘을 모두 상징하잖아요. 그 두 이미지가 한 인물 안에서 공존할 수 있다는 것 역시 흥미로운 부분이었어요. 매번 그 다리를 통해 두 동네를 오갈 때마다 가사에 나온 것처럼 래퍼 딥플로우와 인간 류상구 사이에서 피어나는 괴리감을 느끼셨을 것 같아요. 혹 그 괴리감이 정점을 찍은 에피소드 같은 게 있을까요?

([양화]에 담긴 내용이) 다 코쿤에서 일할 때 많이 생각했던 거예요. 어느 시점인지 확 오진 않지만, 거의 햇수로 7년째 양화대교를 매번 건너면서 이런 감정이 당연하게 느껴졌어요. 왜냐하면, 어떤 날을 굉장히 슬픈 날도 있고, 누구랑 싸우고 난 뒤 패배감을 느끼기도 하고, 또 누구랑 대화를 했는데 X같은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요. 그러면 집에 가는 양화대교 택시 안에서 중2병 같은 그런 감정이 샘솟고, 스스로 한없이 처량해지는 감정을 느끼기도 했고요. 굉장히 재미있던 날이나 성취감 있는 날에는 풍경이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이런 식으로 다리 위에서 여러 감정을 나눌 수 있었어요. 그 배경이 굉장히 좋거든요. 앞에 여의도 전경이 보여서 야경이 좋기도 하고… 아무튼, 그런 점도 있고 애초에 클리셰한 의도도 있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래퍼들이 지역색을 나타내는 그런 걸 동경했어서, 사실 나스가 퀸스 브릿지(Queens Bridge)에서 대해서 이야기하는 그런 거에서 영감을 받았죠. 그래서 ‘나에게도 그런 대상이 있나?’라는 사고에서 출발했고, 양화대교라는 컨셉으로 그 아다리가 굉장히 잘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LE: 앨범의 흐름이 전반부는 강하게 끌고 가다, 중반부에서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가 다시 후반부로 갈수록 터지는 구성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부분별로 어떤 점에 초점을 맞추어서 작업을 진행하였는지 궁금해요.

어떤 분위기로 기승전결이 있을지는 애초에 양화라는 컨셉이 생각되자마자 떠오른 거였고, 저한테는 그게 당연한 덕목 같은 거거든요. 앨범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고, 트랙 배치는 어떤 식으로 하고 이런 것들이요. 저는 예전부터 웰메이드한 앨범들을 좋아했고, 기본에 충실한 구성을 따른 거예요. 제가 집에서 일어나서 홍대에 나가고,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서 다음 날을 준비하는 과정을 제대로 곧이곧대로 설명하고 싶어서 가정을 했죠. 그런 스토리를 생각하며 앨범의 기승전결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LE: “열반”도 그렇고, “나 먼저 갈게”, “양화” 등 여기저기에 딥플로우든, 류상구든 간에 본인을 둘러싼 상황에 진저리난듯한 가사가 많이 퍼져 있어요. 오랜 기간 씬에 몸담으며 집단, 사람, 상점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상황은 매번 똑같은 데에 대한 지루함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맞아요. 제가 굉장히 염세적으로 변했을 때가 20대에서 30대 넘어가던 시절이에요. 지금은 많이 고쳤는데 그 정신병을… (웃음) 그때는 동생들에게 너무 X같은 말을 많이 했어요. ‘야, 그거 하지마. 그런 거 해 봤자 안돼.’ 이런 말투를 많이 사용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제가 그런 기운을 너무 많이 뿜으니까 안 좋더라고요. 한창 혈기로 가득 찬 애들에게 어두운 느낌을 보이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어서 지금은 많이 고쳤는데, 아무튼 한창 그럴 때 많이 썼던 가사들이에요. 2012, 13년 그 쯤인데… 근데 사실 감정은 달라졌지만, 아직도 상황은 유효하기 때문에, 저는 그냥 이 내용을 앨범에 실을 수 있었어요.





LE: 앨범을 들어보면 역시 스킷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어요. 딥플로우 씨는 유독 스킷을 잘 활용하는 아티스트인 것 같은데요. 이번 앨범도 곳곳에 심어 놓은 스킷이 윤활유 역할을 해요. 특별히 작업에 있어 스킷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지 궁금해요.

때때로 달라요. 이번 작업 같은 경우에는 곡을 다 만들어놓고 스킷을 짰지만, 중간중간 몇몇 트랙은 [양화] 전에 생각했죠. 그래서 택시를 탈 때마다 항상 녹음기를 켜놓고 탔고요. 저는 가사로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노랫말, 랩 가사에서는 굳이 설명 안 해도 이해할 수 있는, 너무하면 ‘설명충’ 같으니까… (전원 웃음) 그런 걸 잘 소화할 수 있는 형태가 스킷인 거죠. 좋은 앨범들 들으면 앨범 적재적소에서 스킷들이 제 역할을 하잖아요. 저는 (스킷 형태를 활용하는) 이유가 분명 있다고 생각했어요.





LE: 앨범의 스킷들은 연출이 아닌 건가요?

아, 스킷이 총 4개가 들어갔는데, 맨 처음에 “잘 어울려”에 들어간 거는 이런 스킷을 녹음하고자 하는 마음이 기존에 있었어요. 제가 항상 택시를 탈 때마다 굉장히 많이 듣는 말이 “뭐 하는 사람이에요?”, “스님이에요?”, “왜 머리를 그렇게 밀었어?” “운동하냐?” 뭐 이런 거거든요. 굉장히 이상한 아저씨들이 많거든요. (웃음) 근데 이렇게 항상 듣던 말을, “스킷에 써야지.” 하니까 (그런 말을) 한 번도 못들은 거예요. 심지어 마스터링 3일 전까지도 기다렸어요. ‘오늘은 있겠지?’ 생각하면서요. 아니, 너무 자주 있었던 일인데 하필 이럴 때 머피의 법칙처럼 그런 상황이 안 나오더라고요. 그러다가 정 안 돼서 “어디 가주세요.” 이런 말만 실제로 따놓고, 나머지는 아는 형에게 부탁했어요. 그래도 “머리 잘 어울리네.” 이런 부분만 조금 연출로 가고 나머지는 전부 리얼로 갔죠.





LE: 요즘에는 스킷을 따로 트랙으로 해서 10곡을 채워 정규 앨범으로 발표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 경우가 간혹 꼼수로 느껴지기도 하는데, [양화]에는 스킷들이 다 트랙 뒤에 붙어있잖아요. 앨범의 유기적인 흐름을 생각하신 구성을 하신 것 같아요.

네. 그런 부분을 고민했는데, 말씀하신 전자를 저는 [Heavy Deep]에서 한 번 했기 때문에… 이렇게 저격을… (전원 웃음)





LE: 아닙니다. [Heavy Deep]을 두고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웃음)

저는 어떤 선택이라고 봤어요. 이번 앨범에서는 그런 방법을 하기 싫었던 거고요. 고민했던 거는 좋은 앨범을 들으면 따로 스킷이 트랙으로 들어있지 않은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경우가 별로 없어서 고민하긴 했어요. 우리나라는 워낙 곡을 따로따로 듣잖아요. 예를 들어, “Bucket List”가 카페에서 나오는데 뒤에 우탄이와의 전화 통화가 1분이나 나올 때의 분위기가 어떨지 걱정되기도 하고, 그리고 개별적으로 곡을 들었을 때 왜 이게 들어가는지 이해가 안 갈 거 같다 생각도 하고… 근데 그냥 ‘X까’ 마인드로 했죠. 실제로 “Bucket List”가 편의점이랑 떡볶이집에서 나오는데, 뒤에 우탄이 목소리가 계속 나오니까 사람들이 “이게 뭐야, 전화 연결됐나?” 이러더라고요. (웃음) 미안하더라고요





LE: 앨범을 들어보면, 전체적으로 서울에 대한 애착 같은 부분이 보이는 거 같아요. 본래 서울에 대한 애착이 많으신 건지 그런 부분이 궁금해요

제가 “곧 죽어도 서울로.” 이런 가사를 쓴 거는 약간은 역설적인 거예요. 사실 저는 서울에 살고 있지만, ‘서울 놈’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요. 제가 워낙 지역을 많이 옮겨 다니기도 했고, 약간 우리나라에서 서울 놈이라는 말이 가진 상징에 관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저는 서울 놈이 아니지만, 서울에서 살고 있는 것에 관해 이야기했던 거고, 사실은 ‘서울에 집 없이 월세로 꾸역꾸역 사는 사람이 과연 진짜 서울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생각과 감정들을 담아낸 거죠. “빌어먹을 안도감”과 연결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LE: 그럼 혹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 다른 나라에 살고 싶다면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살고 싶은 곳은 없는데… 사실 서울에 살고 싶어요. 외국이라고 한다면 일본? 미국은 아니고, 제가 만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일본에 가면 재미있지 않을까 해요. 초밥도 먹고… (웃음)





LE: 사실 딥플로우 씨가 개인의 서사를 늘어놓은 게 이번 앨범이 처음이기도 하잖아요. 그 이전 앨범에도 20대 초반의 딥플로우, 20대 후반의 딥플로우가 있긴 했지만, 가족, 여자친구, 개인사 등의 사적인 이야기가 정면으로 등장하는 건 [양화]가 처음인데요. 30대 초반이 되어서 그런 이야기를 하니 더욱 정돈되고 정갈하게 나왔다는 느낌도 있어요.

서사를 안 넣던 방식의 작업에서 서사를 넣는 방식으로 바꾸면서 적응기간이 필요했어요. 너무 한 번에 바꿀 수는 없었어요. 어느 정도 제가 정제된 시점에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 같아요. 뭐가 멋있는지에 대한 관념도 계속 바뀌고 또 그게 최근에야 정립됐어요. 때를 기다리고 이런 거는 절대 아니고요. (웃음) 최근에 드래곤 에이티는 저한테 “이번 앨범이 너 1집이야.”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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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인터뷰에서도 웰메이드에 대한 강조를 많이 하셨잖아요. 사실 앨범의 기승전결이 이미 다른 작품에서도 접할 수 있는 구성이잖아요. 그래서 너무 일반적이고 전형적이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어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언더그라운드면 실험적이어야 하지 않냐는 의견도 있잖아요.

저는 제가 굉장히 스탠다드한 스타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저는 누군가가 저를 끊임없이 ‘하드코어 래퍼’고, ‘먹통 힙합’ 이런 식으로 과대 포장하는 것에 반감이 있어요. 그래서 ‘나는 웰메이드하고 스탠다드해.’라는 걸 강조하는 편이에요. 극단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 이그니토 형처럼… (전원 웃음) 그런 의미도 있고, 사실 제가 좋아했던 래퍼들이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다 커머셜 래퍼들이었잖아요. 그러다 보니 ‘내가 언더그라운드 정신을 어디서 배운 거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스가 얘기했나? 아닌데?’ 막 이런 생각도 하고, ‘가리온이 천리안에서 얘기했나?’ 생각도 하고… (웃음) 그런 생각을 하니 뒤통수를 빡 맞는 느낌이더라고요. ‘내가 래퍼는 클럽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어떤 미덕이 있고 등등 이런 걸 대체 어디서 배운 거지?’에 대한 의문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괜히 앨범에다가 언더그라운드 정신이나 “keep It Real” 이런 말을 하기 싫다는 반감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냥 ‘내가 좋아했던 거에 충실하자.’라고 마음먹었어요. 저는 [Illmatic]이 좋고, [The Blueprint]가 좋고, [King], [The Documentary], [The Chronic] 같은 게 좋거든요. 그간 굉장히 스탠다드한 웰메이드 앨범만 좋아해 온 거죠. 그런데 제 앨범이 여건상 메인스트림 회사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서 나오는 대형 작품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냥 제 역할에 충실한 이야기를 하고, 대신에 프로덕션이라든가, 제가 보여줄 수 있는 미장센은 꿀리지 않게 기깔 나게 하자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 식으로 저는 웰메이드라는 단어를 계속 어필하는 거예요.





- 못다 한 이야기 -

LE: <예언자>, <히어로>. <10억>과 같은 영화 OST에 참여하신 경력이 있어요. 각각 어떤 점에서 참여하게 된 건지, 이런 작업에 있어서 특별히 어떤 조건을 거는 게 있으신지 궁금해요. 에이전시를 통해서 하신 건가요?

그전에는 에이전시 형태로 하지는 않았어요. 굉장히 여러 형태로 일이나 공연이나 행사나 이런 작업들이 들어오거든요. 그런 식이었고, <예언자> 같은 경우는 바스코 형이 하자고 한 거였고, <히어로>도 바스코 형이 하자고 그랬던 거고, 바스코 형한테 들어온 일을 저랑 같이 한 거죠. 그리고 <10억>은… 어디서 전화가 왔는데… 그냥, 아무것도 몰라요 저는. 어쩌다가 하게 됐어요. 돈 준다고 해서… (웃음)





LE: 엑소(EXO) 앨범에 랩 메이킹으로 참여하신 적도 있는데요. 어떤 계기로 참여하시게 된 건가요?

엑소는 엑소라서 한 거예요. 웬만하면 저한테 크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굳이 자잘한 일, 이를테면 아이돌 작업 같은 걸 하는 게 거부감이 든다기보다는 제 안에서의 엔터테인이 성립하지 않으니까 안 했는데, 엑소니까 했죠. ‘이것 좀 되겠는데?’ 하면서요. 실제로 어느 정도 맛을 보기도 했죠.





LE: 엑소처럼 실제로 도움이 되는 작업도 있지만, 도움이 많이 되지 않는 작업도 많이 하셨잖아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곡에서 피처링을 보게 된다거나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거든요.

그게 대체로 어떤 느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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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직접 리스트를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여기 리스트를 가져왔습니다. 그동안 딥플로우 씨가 피처링한 트랙 리스트입니다. (웃음)

아… 뭔지 알겠어요. (웃음)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남 때문에 시간 쓴 것만 한 2년 정도 되는 것 같아요. 그게 바로 이런 리스트 된 거고요. 이게 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같은 데에 있는 거죠? 사실 이거보다 더 많아요. 그냥 한 거죠. 참여 기준이… 어느 정도 있긴 하죠. ‘친하다’. 그런데 그 친하다는 것도 진짜 친해서가 아니고, 전화 오면 받아야 하고 지나가다 보면 인사할 수 있는 사이면 친한 거잖아요. 약간 웃기지만, 아는 사이라면 이미 인연이, 관계가 형성된 거잖아요. 물론, 완전 구리면 안 하죠. 그런데 어느 정도 서포트해주고 싶은 애라는 느낌이 들면 해줘요. 대신 어느 시점에서는 이렇게 얘기해줘요. 제가 이걸 해줘도 별로 도움이 안 될 거라고요. 그래도 “저는 형이랑 해서 이런 느낌을 내고 싶고…” 같은 말을 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면 저도 그냥 하자고 하고 하는 편이죠. 보통은 제가 약속을 안 지킬 때도 잦고, 하자고 해놓고 까먹었던 일도 많아요. 되게 중요한 거면 몰라도… 예를 들면, 개리 씨가 피처링을 해달라고 하는데, 녹음이 내일모레면 바로 가사 써서 녹음하러 가요. 그 정도면 그게 되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동생이 와서 부탁하면 알겠다고 해놓고도 솔직히 까먹죠. 제 일상의 우선순위가 뒤로 밀려나니까요. 그러다 보면 제가 무례한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고… 그래서 제가 다시 연락해서 해줄 때도 있어요. 그런 식으로 한 작업이 많았어요. 그런데 지금 와서는 굉장히 후회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각자에게 도움이 되는 형태의 작업이 아니었거든요. 특히나 저한테는 희소성이 완전히 바닥나는 모습을 연출하게 돼서…





LE: 말씀하신 것처럼 본인의 에너지도 많이 뺏겼을 것 같아요.

그럼요. 엄청나게 뺏겼죠. 소스라든가 그런 것들이 많이 바닥나게 되니까요. 그래서 최근에는 아예 이렇게 얘기해요. ‘힙합적인 거, 힙합 느낌 나는 거, 씬 비판하는 거’ 할 때 꼭 저를 부르는데, 부르면 “나 이제 할 얘기 없다. 그런 거 아니면 하겠다.”라고 해요. 그런데 그런 게 아닌 게 없더라고요.





LE: 그렇게 참여한 곡이 정말 많은데, 곡마다 요구하는 게 조금씩 다를 수 있잖아요. 그 요구 사항과 부합하기 어려워서 거절하신 경우도 있으신지 궁금해요.

진짜 저랑 안 맞는데 이해관계 때문에 할 때도 있어요. 옛날 빅딜 시절이랑 뭐 그런 걸 생각해보면, 요즘 친구들은 친구들끼리 하는 작업도 무척 신중하게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제가 했던 방식은 옛날의 품앗이 느낌이 강한, 절제하지 않는 작업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반대로 생각해보면, 찾아줬던 사람이 많았던 게 행복한 일이긴 하지만요. 그런데 남는 게 없네요.





LE: 조PD 씨와의 작업도 있고…

네. 그 작업은 재밌었어요. 조PD 씨 덕분에 랩 시작했으니까요.





LE: 재미있는 작업 중에 하나로는 기린 씨와의 작업이 있어요. 뮤직비디오도 찍고 하셨잖아요. 재미있게 하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사실 저는 제 앨범 커리어가 중요해요. 남는 것도 그런 거고요. 그런데 기린이랑 한 거는 제가 방향 잡은 거랑은 완전 다르지만, 좋아하기도 하고, 기린의 감성 같은 게 제게도 존재하고, 기린이 저한테 원하는 바가 뭔지 확실히 아니까 재미있을 것 같아서 했어요. 저한테 엄청나게 큰 피해가 오겠다, 이미지에 타격을 주겠다는 생각은 안 들었거든요. 그래서 그냥 재미있게 했어요.





LE: 그렇게 피처링 작업도 많이 하셨고, 또 본인 앨범에 많은 게스트가 참여하기도 했어요. 개인적으로 가장 호흡이 잘 맞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누구인가요?

너무 많아서 하나 딱 고르기는 힘들어요. 그래서 제가 피처링한 곡 중에 잘했다고 생각하는 곡을 말하면 될 것 같아요. 근데 잘 모르겠어요. 뭐 하나 딱 생각나질 않네요. 의미 있는 작업도 너무 많았고, 그만큼 의미 없는 작업도 많았어서 그런지 정말 생각이 안 나네요.





LE: 최근 관심 있게 본 신인은 누가 있는지 궁금해요.

특별한 사람은 없어요. 쉬는 시간에 잠시 얘기했던 제가 레슨했던 친구 중 한 명인 빈센트(Vincent)라는 친구는 믹스테입이 아직 안 나왔기 때문에 뭔가 말하는 게 웃긴 것 같기도 하고요. 그 친구 믹스테입이 나오면 좀 멋있을 것 같고, 나플라(Nafla), 루피(Loopy), 던말릭(Don Malik), 오왼 오바도즈(Owen Ovadoz), 데비(Debi). 뭐 많죠. 요새 주목받고 핫한 애들 다 좋아하고, 더 밑으로 들어가서 찾기에는 안 보이고요.





LE: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친구들, 쉽게 말하자면 자신들끼리 공연을 만들어 열거나, <슈퍼 루키 챌린지>에 나가는 친구들에게 굉장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계신 걸로 알고 있어요. 많이 도와주시기도 하는 것 같고요. 그런데 사실 그렇게 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렇죠. 완전 개 빡세죠. 저는 나름대로 수혜를 받았다고 생각해요. 빅딜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 환경의 수혜를 많이 받은 케이스였고, 나머지 친구들은 진짜 힘들어 보여요.





LE: 예전 인터뷰 중에서도 피드백이 사라진 씬에 대해서 아쉬움을 얘기하신 적이 있으세요. 지금도 그런 점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릴 웨인이 가사를 그렇게 빡세게 쓸 수 있는 이유가 마디마다 돈을 환산할 수 있다는 점인데요. 그게 열심히 하는 데에 동기부여가 되는데, 저희는 약간 그러기 힘든 환경이잖아요. <쇼미더머니> 같은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수혜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99%라고 생각해요. 그런 친구들이 동기부여를 받을 수 있는 건 반응이거든요. 어떤 곡을 내고 칭찬도 듣고, 아니면 욕이라도 들어야 다음 곡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건데, 허공에다가 손 휘두르는 느낌이 들면 진짜 힘이 빠질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힘을 줄 수 있는 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게시판이나 커뮤니티, 웹진 같은 곳에서 그 분위기를 조금 더 유도해낼 방법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애들이 보통 글쓰기 귀찮아하고 쉬운 똥글이나 쓰는 편이잖아요. 그 대신 쓰기 부담스러워하는 글과 제대로 된, 영향력 있는 글을 쓸 수 있게끔 유도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서 피드백을 좀 더 원활히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면 어떨까 싶어요. 믹스테입 내는 애들이 이제 알더라고요. 그렇게 (믹스테입을) 내도 아무 소용 없다는 걸요. 그런 생각하고 있는 게 너무 슬펐어요.





LE: <REbyDEEP>도 그런 차원에서 하셨던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 것도 있었고, 신인들을 좀 더 들어보고 싶기도 했는데, 너무 벅차서 못했어요. 공약을 너무 쉽게 깨버리고 한 달도 못하고 다시 제 생활로 돌아왔죠.





LE: 그렇게 하시는 동안 하고 싶은 건 없고 되고 싶은 것만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현실을 자주 맞닥뜨리셨을 것 같아요.

그렇죠. 그런데 저도 사실은 그랬어요. 되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동경하는 래퍼처럼 되고 싶고, 돈 벌고 싶죠. 저는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마스터 플랜에 들어가고 싶어서 대학교도 서울 어디 전문대로 가고 그랬거든요. 그럴 정도로 되고 싶은 것에 대한 욕망은 당연한 건데, 초기에 유입되는 친구들은 어쩔 수 없지만, 랩을 한참 열심히 하고 있는 친구들에게서 그런 냄새를 많이 맡았어요. 어떤 친구가 맨날 고민하는데 그 문제의 포인트가 예술하는 사람, 음악 하는 사람, 창작자의 입장으로서 어떤 존나 멋있는 걸 만들어야 하나가 아니고 ‘언제 뜨지?’에 있는 거예요. 그런 고민을 많이 들어보면 아이러니한 거죠. 저 자신도 거울을 보듯 반성하게 되고요.





LE: 레슨은 지금도 계속 하고 계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블랩(BLAB)도 아직 하고 계시나요?

네. 계속 하고 있어요. 근데 어거스트가 하고 있는 것도 블랙랩(Black Lab)이더라고요. 우연히 겹쳤는데, 제가 베낀 건 아닙니다. (웃음) 개인 레슨의 느낌보다 약간 더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고 싶었고, 지금은 5기째 하고 있고요. 반년씩 해서 졸업공연도 하고 있어요.





LE: 블랩을 통해 직접 체감하는 성과 같은 것도 있으신지 궁금해요.

제가 얻을 수 있는 성과는 제가 디렉팅함으로써 조금 더 나아지는 데에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애들한테 그렇게 얘기해줘요. 내가 어떤 기술을 전수해주는 게 아니라 너희의 감독이 되고 코치가 되고 헬스 트레이너가 되는 거라고요. 믹스테입이나 작품을 설계할 때, 방향을 잡는 데에 도움을 주는 거라고요. 그리고 제가 애들한테 해주는 것도 어떤 모의실험처럼 이미 몸에 베서 뭔가 조언해주거나 피드백해줄 때 현실적으로 말해주는 버릇도 생겼고, 포인트도 정확히 짚어주게 된 것 같아요. 그런 성과가 있죠. 그리고 오디나 빈센트 같은 케이스처럼 제가 굳이 찾지 않아도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보물들이 생기는 느낌도 있고요.





LE: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사실 딥플로우 씨는 유독 작은 무대든, 큰 무대든 가리지 않고 본인의 상황이 어떻든 간에 올라가시는 것 같더라고요. 페이가 없을 것만 같은 무대조차도요. 어떤 본인만의 철학이나 기준 같은 게 있으신 건가요? 

피처링이랑 좀 비슷하고요. (전원 웃음) 이해관계에 의해 하는 경우가 많고, 대부분 동아리 출신 동생들이 동아리가 아닌 다른 형태로 프로젝트를 기획한 경우고요. 진짜 오래 알던 애한테 요청이 들어와서 좋은 리스펙을 받고 “형님, 이거 제가 얼마를 드려야 하나요?”라고 할 때가 있거든요. 그럼 저는 “내가 너 입장료랑 공연장 규모를 알고 있는데 나한테 얼마를 주려고 그러니?” 하고 서로 대충 맞출 때도 있어요. 아예 개연성 없는 사람 공연은 절대 안 해요. 비스메이저의 컨텐츠를 계속 양질로, 고급화시켜야 해서 아무거나 할 수는 없죠. 최근에 ‘굳이 이런 것도 해야 하나?’ 싶던 공연들은 다 개인으로 갔어요. 그런 공연은 제가 집에서 TV 보고 컴퓨터하는 것보다 훨씬 값어치 있는 일이니까 하고 있죠.





LE: 지금까지 랩을 하시면서 많은 사람을 공격하기도 하셨어요. 특히 팻두(Fatdoo) 씨는 많이 까인 것 같아요.

팻두는, 그 친구는 아까 제가 이센스 얘기했던 것처럼 어떤 상징적인 존재로서, 그에 걸맞은 거였던 것 같아요. (웃음) 굳이 팻두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제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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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방송이나 엠넷(M.Net)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신 적도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 거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기도 해요.

미디어 자체에 대해 거부감이 있다고 하기에는 제가 좋아하는 래퍼들이 다 커머셜 래퍼였어요. 그래서 꼭 그런 건 아닌데, 우리나라에서는 워낙 그 부분이 편향되어 있으니까요. <쇼미더머니>에 다 몰려있고, CJ가 다 기득권을 갖고 있잖아요. 힙합이라는 장르 음악, 문화를 한 기업이 갖고 있다는 게 정말 구린 거잖아요. CJ도 아닌, CJ에 속한 일개 회사원들이 우리나라 힙합 씬을 쥐락펴락하고 MC들의 커리어를 망가뜨리고 하는 게 저는 너무나도 혐오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소위 말하는 선비적인, 어떤 ‘씹선비’의 자세인가 봐요. 제가 씹선비라 그런가 봐요. 근데 이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그래서 ‘존나 구린 거 아니야? 그냥 딱 생각하기에도 존나 구린 거잖아. 내가 왜 여기에 그 이유를 존나 말해야 하지. 그냥 구린 건데. 왜 설득해야 하지?’ 이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주변 사람들도 사실은 같이 화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화를 안 내지? 왜 입을 조심하고 있지?’ 이런 생각이 드니까… 그런 시점에서 “열반”이라는 노래도 나온 것 같아요. 굳이 저의 어떤 입장 표명을 하는 게… ‘예전에 내가 회색분자였던 때가 있으니까 이제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내 입장을 표명하는 게 맞아. 만약 내 안에서의 엔터테인이 있다면 이건 나의 자세고, 나의 엔터테인이다.’라고 생각하는 거죠.





LE: 회색분자라고 말씀하셔서 그런데, 컨트롤 대란 때 공개한 곡이 누군가를 공격한다기보다는 ‘이제 그만해!’ 같은 식으로 중재하는 느낌이 강했거든요.

제가 네 번째였을 거예요. 스윙스가 하고, 어글리덕(Ugly Duck)이 하고, 테이크원(TakeOne)이 하고, 제가 했으니까 네 번째였어요. 그런데 그때는 ‘너희들 그만해!’ 같은 느낌보다는 그 대화에 껴서 얘네가 지랄하고 있는 거에 훈수를 두는 느낌이었죠. ‘왜 이런 얘기들을 하냐?’ 같은 거였지, ‘너네들 다 피쓰!’ 같은 거창한 느낌은 아니었어요. (웃음) 다음 수를 둔 거죠. 장기의 다음 수를 둔 건데, 사람들이 해석하기에는 ‘평화주의’, ‘싸우지 말라’ 뭐 그렇게 보시더라고요. 그런데 그건 뒤에 나온 해석이에요. 제가 한 건 타이밍 상 얼마 안 됐을 때 어글리덕이랑 테이크원이 올렸길래 ‘어, 나도 이거 해봐야지, 이런 가사 해봐야지.’ 생각해서 한 건데, 제가 올리려고 할 때 이센스한테 전화가 와서 “형, 저도 했는데 들어봐요.”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들어봤는데, 한 2분쯤 되니까 “대답해 개코…”가… (전원 웃음) 나오는 걸 듣고 ‘아, 나 X됐다. 내가 몇 시간 동안 한 건 아무 것도 아니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야, 센스야, 나 지금 올릴게. 너 좀 있다가 올려.’ (전원 웃음) 그랬고, 이후 바로 두 시간 만에… 재미있었어요.





LE: 사실 앞서 입장 표명해주신 것과는 별개로 우탄 씨는 <쇼미더머니>의 혜택을 받았잖아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해요.

우탄이가 <쇼미더머니>의 혜택을 받은 건 정말 걔 인생에서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고, 저희한테도 큰 도움이 많이 됐어요. 그런데 그건 그거고, 지금은 또 지금이죠.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해요. 제가 문화 전반적인 면에 대해 걱정한다고 해서 그만큼 저한테 보장되는 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하는 걱정들이 마일리지처럼 쌓여서 혜택이 생기는 게 아니잖아요. <쇼미더머니> 보고 구리다고 계속 주장해 봤자 우탄이의 인생은 누가 책임져줘요. 그래서 우탄이가 나갔을 당시에는 약간 반박으로 서포트를 해줬어요. 우탄이가 거기 나가서 나름대로 주목을 받고 하게 된 건 좋은 경험이었다고요.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후로는 개인적인 감정이 들어간 거죠. 오디가 나갈 때도 저는 반대했어요. “나가지 마. 너까지는 아니야.”라고 했는데, 우탄이는 자기가 수혜를 받은 입장에다가 작가들에게서 계속 “오디 내보내라.”라면서 전화가 오고 그러니까 오디를 푸쉬했죠. 저는 말리는 입장이긴 했지만, 속으로는 도움이 되겠다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그렇게 오디가 나갔는데 그렇게 됐으니까 저도 그때부터 정말 싫어지게 됐죠. 저는 그런 개인적인 감정이 섞일 수밖에 없었어요. 이번부터는 아예 강경하게 하고 있고요.





LE: <언프리티 랩스타>에 잠깐 나가셨었는데, 그건 어떻게 나가게 되신 건가요?

그거는 이즘(izm.co.kr)과의 인터뷰에서도 이야기했는데, 그날이 “잘 어울려” 뮤직비디오 찍은 다음 날이었어요. 3일 뒤에 뮤직비디오를 공개해야 해서 너무 바빴는데, 그 며칠 전에 CJ한테 전화가 와서 “CJ 인데요~” 그러더라고요. 거기서부터 존나 싫었어요. ‘뭐! 시X!’ 하는 느낌으로 싫었는데, <언프리티 랩스타> 현장에 와서 공연 관람하고 투표해달라고 하는 거예요. “다른 래퍼 분들도 많이 오세요. 누구도 오고, 누구도 오니까, 함께 오셔서 투표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방식인데요? 심사요?” 하고 되물었죠. 그랬더니 “심사는 아니고 관객 투표처럼 해주시면 됩니다. 다른 래퍼들도 다 와주시기로 해서…” 라고 하더라고요. 시간 되면 가겠다고 했죠. 때마침 우탄이한테도 연락이 왔는데, 자기도 간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같이 가자.” 하고 갔죠. 이런 거였는데, 막상 현장에 도착하니 그런 포맷이었던 거죠. 낚였죠. 





LE: 싫으셨겠어요.

존나 싫었죠. 





LE: 인터뷰도 따로 하셨었나요?

전 인터뷰는 안 나왔어요. 인터뷰는 안 나오고, 중간중간에 마이크로 돌아가면서 뭐 하고, 또 웃길 때 웃고 그런 게 있었는데, 카메라가 계속 돌아가니까 이상하게 편집해서 들어가더라고요. 그래서 ‘아, 역시 이렇게 나올 줄 알았어.’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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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최근에는 국내 공연 기획사와의 논란이 있었어요. 어떻게 잘 풀었는지, 또 옴니버스 공연 기획자들의 병폐가 심각하다면 얼마나 심각한지 얘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이런저런 공연을 많이 하는데, 거기서 제가 참석할 때마다 온도가 다 달라요. 개연성 없는 사람들이 와서 브리핑하면서 자기가 어떤 사람이며, 이 문화에 얼마나 도움을 주고… 막 그런 얘기를 할 때면 완전 진절머리가 나요. 그래서 제 마인드는 ‘지랄하지마, 뻥 치지마. 니네 한 번 하고 말 거잖아.’에 가깝거든요. 근데 그렇다고 해서 제가 미친 노인네처럼 “안녕하세요. 저희 어디 공연 기획사인데요.”라는 전화를 받자마자 “지랄하지마!” (전원 웃음)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일단 듣고 그러죠. 그런데 이제 그런 일들이 너무 만연하니까 조금만 실수해도 민감하게 대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리고 이번에 그게 터진 거죠. 솔직히 ‘안 좋아하는데 잘 걸렸다. 지랄해야겠다.’ 같은 식으로 대했던 거예요. 제가 그때 막 별로 상관없는 <스픽쇼> 이런 데도 얘기를 했었어요. ‘Chino XL, Fuck You, too’ 같은 느낌으로. (웃음) 그랬더니 전화가 와서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걔는 저한테 뭐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뭐 그랬던 일도 있었어요.





LE: 비단 공연 기획사뿐만이 아닌 것 같아요. 돈 냄새를 맡고 찾아온다고 해야 하나요? 이런 식이죠. “문화에 기여하고,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냉정하게 말하면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그렇잖아요. 오히려 그 사람들이 도움을 받죠.

그렇죠. 저도 그래요. 문화 얘기하면서 도움이 될 거라고 하시는데… 네, 여기까지 이야기하겠습니다.





LE: 힙합 페이스북 페이지가 엄청 늘어났는데, 그런 것들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쇼미더머니>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많이 알려지고 좋아요 수가 늘어나면 모르는 애들이 알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관심이 생기고 하는 나비효과가 분명히 있겠죠. 그게 예측할 수 없는 거니까 효과가 있긴 있을 거예요. 그런데 일단 꼴불견이라는 선입견이 (저한테) 각인되어 있어요. 나비효과를 인정하지만, 저는 ‘없어도 그만이야. 씨X.’하는 느낌이에요. 그 페이지들에서 좋아요 수를 늘리기 위해 저희 사진을 퍼다가 우스꽝스럽게 꾸며 놓고… 그게 당사자들이 본인 SNS에서 하는 건 자기들 마음인데, 그걸 이용해서 컨텐츠화하는 건 구린 일이죠. 페이지마다 컨텐츠 겹치고, <쇼미더머니>나 <언프리티 랩스타>할 때는 그것만 또 우후죽순처럼 올라가고. 그래서 우리 편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요. 





LE: 가끔은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 캡처해서 올리고 그러잖아요.

네. 제 거 엄청나게 퍼가요. 퍼가서 지들끼리 막 웃고 있고…





LE: 남성 팬이 가득하던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을 모두 겪어보셨는데, 직접 겪고 본 관객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궁금해요.

이제는 인정하는 건데, 소위 말하는 ‘아이돌 빠순이 문화’가, 그런 형태가 힙합에 유입된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영화 <8마일> 속 랩 배틀 장소에서 보이는 ‘흑형’의 느낌과는 현실적으로 괴리감이 있고요. 거기도 ‘Backpacker’, ‘Groupie’ 엄청 많고… 걔네도 외형만 다를 뿐, 마찬가지예요. 다 똑같은데 우리나라는 비교적 연령층이 낮을 뿐이죠. 이제 그 부분은 받아들이게 됐어요. 그래서 제가 ‘쉰이 될 때까지 하는 게 과연 멋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예요. 그리고 지금도 남성 팬이 많은 공연장에서는 남자들이 많아요. 그런데 예전부터 여자 팬들이 많긴 했어요. 싸이월드 시절부터 여성 팬들이 쪽지 보내고, 방명록 남기고 했기 때문에…





LE: 딥플로우 씨에게는 ‘힙합을 우직하게 지켜온 사나이’, ‘한결같은 수호자’ 등의 수식어가 붙어요. 혹시 이런 말이 부담되지는 않으신가요?

저는 이제 그걸 이용하려고요. (웃음) 저한테 그런 걸 붙여주시면 좀 멋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근데 너무 극단적으로 (이미지가) 가게 되면 안 좋을 것 같긴 해요. 적당 선에서 멋있는 느낌이면 저도 좋죠. 제 생각이랑 부합되기도 하는데, 너무 ‘우직한’ (웃음) 같은 느낌이면 저를 결정짓는 느낌이라 미묘하게 싫긴 하죠. 저도 막 이상한 거 하고 싶고 한데…





LE: 영화를 자주 보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냥 상영 중인 영화보다는 딥플로우 씨 취향에 맞는 영화를 자주 보시는 것 같던데, 맞나요?

제가 영화관을 직접 찾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우리나라 스크린 쿼터 때문에… 그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너무 보고 싶은데… 근데 그게 저의 완전한 취향 때문에 그런 건 아니고, 간혹 그러는 거예요. 예를 들면, 홍상수 감독님 영화는 잘 안 걸리잖아요. 어디 극장에 가야지만 볼 수 있고요. 그런 것만 가서 보고 그래요. 근데 대부분은 다운 받아서 봐요.





LE: 취향이 확고하신 것 같더라고요. 남들이 안 볼 법한, 매니악한 것들이요.

꼭 그런 건 아닌데… 두루두루 봐요. 제가 막 매니아처럼 빠삭한 편이 아니라서요. 저는 일단 평론가의 글에 굉장히 의지하는 편이에요. 이동진 평론가님이 굉장히 스탠다드한 평론가시잖아요. 그분의 평에 되게 좌지우지되고요. (전원 웃음) 먼저 (이동진의 평론을) 보지는 않아요. 대신 제가 본 영화에 대해 이동진 씨가 칼럼을 쓰면 가서 딱 보죠. 그리고 ‘그래 맞아. 오케이!’ 하는 편이에요. 이동진 씨가 보라는 영화 보고…





LE: 영화도 그렇고, 만화도 되게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만화는 더 오타쿠적으로 좋아하죠. 





LE: B급 감성 같은 걸 많이 좋아하시는데, 그 B급 감성이 전체 컨셉인 작품 같은 걸 하고 싶으신지 궁금해요.

앞으로 싱글은 [양화] 느낌의 웰메이드 싱글을 계속 낼 생각인데, 앨범은 엄청 B급으로 만들 거예요. 공짜 앨범이나 믹스테입 같은 것들? 아예 취향이 바뀌어서 그래요. 옛날로 돌아가려고요. 그런데 그게 조이 배대스(Joey Bada$$) 같은 느낌이 아니라 우탱클랜 같은 거. 처음에 좋아했던 것들, 이를테면 맙 딥 사운드 같은 거. 그런 걸 생각하는 단계가 됐어요.




LE: 최근에는 액션 브론슨(Action Bronson)을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요. 

아, 액션 브론슨 짱이죠. 개짱이죠. 딱 제가 원하던 게 나왔어요. 걔가 저보다 후배예요. 나이는 저보다 한 살 많은데 저보다 후배더라고요. 제가 선배로서 얘기하는데, 아주 멋있는 친구예요. (웃음)





LE: 예전부터 딥플로우 씨의 SNS가 많이 주목받았잖아요. 전에는 트위터가, 지금은 인스타그램이 그런데, SNS를 하시면서 ‘이렇게 하면 재밌겠지.’하고 하시는 게 있나요?

당연히 저는 SNS를 일처럼 하고 있고요. (웃음) 너무 작위적인 느낌이 안 나는 선에서 하는 게 제 취향이기 때문에, 그 기준에 의거해서 일처럼 하고 있어요. 그런데 트위터는 아예 안 해요. 왜냐하면, 옛날에 똥글을 너무 많아 남겨서요. 인스타를 많이 하죠.





LE: 인터뷰 막바지입니다. 저희 힙합엘이에는 자주 오시는 편인가요? 평소에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워낙 저희 대표님이랑 알고 지내신 지는 꽤 되긴 했지만요.

하루에 3회 이상 들어가요. 힙합엘이 뿐만 아니라 힙합 커뮤니티가 별로 없기 때문에… 특히 제가 앨범을 내거나 저희 동료, 소속 아티스트들 앨범이 나왔을 때는 당연히 모니터링 해야죠. 네이버 뉴스 가서 볼 수는 없으니까요. 힙합엘이는 물론이고 힙합플레이야, 리드머도 다 가서 보고 있어요. 지금 힙합엘이는 짱이고요. 현재 컨텐츠 짱이고, 모든 뮤지션들이 다 보고 있을 거예요. 매일매일 가서 보고 있을 거라고 저는 분명히 생각하고, 그중에 하나가 저고요. 근데 국내 게시판은 상태가 조금 안 좋은 것 같아요. (웃음)





LE: 서두에서 얘기 나왔던 것처럼 딥플로우 씨가 또 힙합엘이 완전 초창기 인터뷰이셨어요.

아, 그래요? 아마 팔로알토가 먼저 하고 제가 했던 거 같아요. 제가 두 번째 아니면 세 번째였어요. 팔로알토, 제리케이(Jerry.K), 저… 뭐 그런 식이었어요.





LE: 그런데 업로드 순서는 제일 먼저로 되어 있으세요.

아, 그래요? 





LE: 당시 어떻게 하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히맨(Heman) 형 때문에 한 거죠. 히맨 형이… 그때도 제가 좀 대우를 해줬죠. “어우, 힙합엘이가… 어쩌고저쩌고…” (전원 웃음) 디씨 트라이브에서 그 형이 힙합부인가? 힙합뉴스부로 불렸었어요. 원래는 시크릿 게시판에서 하던 분이셨는데, 그걸 알고 “그게 형이었어요? 대단하네요 형. 그럼 영어 잘해요?” 그러기도 했어요. 형이 인터뷰해달라고 해서 하게 됐었죠.





LE: 최근에는 힙합이든지 어떤 장르든지 간에 어떤 아티스트, 어떤 앨범, 어떤 류의 음악을 많이 듣고 계신가요?

저는 솔직하게 말하면, 올해 앨범을 아예 안 들었어요. 지금 제가 제일 좋아하는 액션 브론슨의 앨범이 나왔는데, 이게 나온 지 얼마 안 됐잖아요. 근데 그것도 안 들었고, 켄드릭 라마 2집 앨범도 아직 안 들었어요. 소문은 존나 듣고 있고, 애들이 듣는 거 옆에서 듣고는 있는데, 약간 ‘아껴서 들어야지.’ 같은 느낌이에요. [양화] 앨범 마무리 작업을 한창 할 때부터 영감 받기가 싫었어요. 계속 영감을 받으면 또 고치고 싶고, 또 고치고 싶어서 남의 거는 안 들었어요. 우리나라 애들 새로 나온 거는 듣는데, 앨범 단위로 좋은 뮤지션들 거는 아예 안 들었어요. 디안젤로(D’Angelo) 것도 안 들었고요. 그때부터 안 들었어요. 그 뒤로 하나도 안 들었고… 스탤리(Stalley) 앨범이 마지막이었어요. 디안젤로는 한두 곡만 들었고, 액션 브론슨도 싱글 나온 것만 들었어요. 최근에는 아예 음악을 안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최근 뭐가 좋았는지 말하기가 애매하네요.





LE: 이제는 앨범을 발표하셨으니 다시 듣기 시작하셨나요?

아니요. 아직 (그 시기가) 안 왔어요. 저한테는 아직 [양화]의 마무리가 안 된 느낌이라서요. “작두” 뮤직비디오까지 찍고 난 다음 마음이 평안해졌을 때, 힙합엘이 인터뷰도 끝나고… (웃음) 양화에서 벗어나게 됐을 때 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LE: 그럼 그 동안 예전 곡이라도 들으셨는지, 아니면 정말 아무 것도 안 들으셨는지 궁금해요.

[양화]만 들었어요. 왜냐하면, 강박증이 심해서 ‘내 것만 들어야지.’하고 생각했어요. 영향을 받기 싫어서요. 





LE: 데뷔한 지 이제 10년도 더 넘었는데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좋겠어요. 가까이에 있는 계획도 좋고, 좀 멀리 보고 있는 계획도 좋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계획이라면 우선 제 활동을 마무리 짓는 거고요. 넉살 앨범 작업이 거의 다 끝난 상태라서 녹음하고 마무리 작업을 해야 하거든요. 거기에 집중할 생각이고, 그다음 앨범은 TK랑 오디가 준비하고 있고, 던밀스랑 우탄이도 작업을 계속 하고 있어요. 제가 아직 신경은 못 쓰고 있지만요. 사실 제 계획은 연말쯤에 컴필레이션 앨범도 하나 내고 그러는 거라서 그 계획에 맞춰서 움직일 생각이에요. 그리고 비스메이저 브랜딩도 올해 안에 확실하게 구축해 나가려고요. 그게 제 목표입니다.





LE: 아까 쉰이 되어서도 메인으로 나서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렇다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딥플로우라는 아티스트 또는 기획자가 앞으로 마흔, 쉰이 되었을 때 어떤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으실 것 같아요.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이상향은, 청사진은 그때도 제가 비스메이저의 헤드가 돼서… 그런데 사실 감이 떨어지면 끝이잖아요. 힙합적인 감이 한 쉰, 예순이 되도록 있으면 다행인데, 만약 없다면 저는 이걸 서포트 해주는 사람이 될 것이고, 새로운 헤드를 둬야겠죠. 그게 넉살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넉살보다 한참 후배가 될 수도 있고요. 그게 제 청사진이에요. 저는 그냥 행복하게 살면서, 목숨을 유지하면서 계속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들만 하고 싶어요. 영화도 찍고 싶고, 단편 영화 같은 경우에는 시나리오를 짜고 있는 것도 있고… 뭐, 그냥 그런 식으로 살고 싶어요. 힙합 좋아하면서 하고 싶은 거 하는 거요. 이게 될까 안 될까는 잘 모르겠지만요.





LE: 마지막으로 하지 못하신 말이 혹시라도 있으시다면…

아니요, 전혀 없어요. (웃음) 하고 싶은 말보다 더 많이 했어요.





LE: 그러면 인터뷰 소감을 부탁 드려도 될까요?

인터뷰 소감은… 저한테 진심으로 의미 있는 시간을 쓰고 또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힙합엘이의 컨텐츠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컨텐츠가 저로 소비된다는 게 정말 감사하고 뿌듯해요. 개인적으로 저의 커리어와 일대기를 쭉 한번 훑어보니까 무슨 자서전 쓰는 것도 아니고… 사실 이런 기회가 별로 없거든요. 제가 일기장에 쓰는 것도 아니고요. 정말 좋은 시간이었어요. 힘드시냐고 하셨는데, 하나도 안 힘들고 행복했고요. 제 입으로 저에 대해서 말하면서 심리 치료받는 기분도 들었고요. (전원 웃음) 진짜 재미있고 즐거웠던 시간이었고요, 제가 감사하다는 말씀드리고 싶네요.





LE: 그럼 인터뷰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관련링크 |
딥플로우 트위터: @Deepflow39 / 인스타그램: deepflow39
VMC 공식 트위터: @vismajorcompany



글 | Melo, bluc, Beasel, Pepnorth(녹취)
이미지 | 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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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6
  • 6.30 12:15
    옛날 생각나네ㅋㅋㅋㅋㅋㅋ
    한국힙합 전체 분위기가 좀 낭만이있었다고 해야되나
    지금은 비즈니스가 상당히껴있다는 느낌 일까
    나쁜건 아니지만
  • 6.30 17:25
    @dubbleGT
    진짜 확실히 그런게 있는듯 해요
    크루나 레이블간의 뭔가 감정적이고 순수(?)한 그런 느낌이 갈수록
    없어지는 듯한 .. ㅋㅋ
  • 7.1 01:09
    @폴라미
    ㅋㅋㅋㅋ단어선택이 좋으시네요
    빋딜쪽 같은 무서운음악들도 뭔가 그 열정같은게 순수하게 느껴지는..
  • ppp
    6.30 13:26
    정독했네요. 재밌게 잘 봤습니다.
  • 6.30 14:27
    5시간 인터뷰라니 ....엘이무릎팍인가 암튼 스웩
  • 6.30 15:09
    꽤 긴 글인데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ㅋㅋ
  • 6.30 15:16
    와 진찌 좋은 움직임!꼭꼭 아껴 읽겠습니다 ㅎㅎ
    글고 딥형...이번 콘서트 저도 갔었는데 정말 분위기 좋았습니다. 잘됬다니 눈에서 땀이 나네여
  • 6.30 15:17

    와..인터뷰 정말기네요 음악적인 부분 외 에피소드들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이렇게 긴 글 정독한건 오랜만인듯 하네요 

    예전부터 느낀거지만 딥플로우 성격 정말 솔직하군요 

    이런식의 인터뷰 너무 좋아요 .. 

  • 6.30 17:36
    인터뷰도 대답도 너무 성의가 듬뿍 담겻네요
    굉장히 재밋는 인터뷰엿습니다
    이런식의 커리어를 한번 쭉 보는 인터뷰도 굉장히 좋네요
  • 6.30 18:34
    좋은 인터뷰 감사합니다~!
    이걸 바탕으로 자서전 내도 될듯하네요 ㅎㅎ
  • 6.30 21:19
    상구형멋있어여
  • 6.30 21:36
    아 이런 기획 참 좋아요 긴 인터뷰 편집하느라 고생하셨겠네요 감사히 보겠습니다
  • 6.30 21:50
    인터뷰 정말 잘 읽었습니다.

    딥플로우는 누구나 Respect 할 수 밖에 없는 랩퍼인듯.
  • 6.30 21:53
    감사합니다1!!!!!!! 진짜 멋있는형같네여
  • 6.30 21:56
    20대부터 한 10년 남짓한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남자의 성장 스토리가 다 담겨 있는 것 같네요.
    책임감 없고 놀기 바빴던 어린 시절에서
    무언가를 책임지고 이끄는 위치에 올라서기 까지의 모습들.
  • 존멋
  • 6.30 23:14
    잘 봤습니다!
  • 7.1 01:15
    올...너무 솔직한 인터뷰 잘봤어ㅏ요
  • 7.1 02:27
    미적지근할거같아서 양화도 안들었는데
    들으러 가야징
    인터뷰가 위인전 본 느낌 딥플로우가 위인은 아니지만
    이 댓글보고있겠지 빡구 메롱
  • 7.1 02:48
    개쩐다 엘이 감사합니다 이런인터뷰
    내 넘버원 딥상구형님 인터뷰를 보면서 빅딜시절에 음악을 듣던 나와 현재 양화를 들으며 질질싸는 나를 쭉 훑어본느낌마저 드네요.
  • 7.1 20:00
    와우.... 정말 알찬 인터뷰 감사합니다!
  • title: Kendrick Lamar (2)KIJ
    7.1 21:54
    정말 잘봤습니다.
  • 7.1 23:16
    잘 봤습니다.
  • 7.2 05:23
    릴웨인은 한줄이 돈으로 바뀌지만
    우리는 허공에 주먹질일 뿐. . !?..!!..
  • 7.3 13:59
    아웃사이더 썰은 안웃긴게 없네 ㅋㅋㅋㅋㅋㅋㅋ
  • 7.3 17:22
    좋은글 잘읽고갑니다
  • 딥플로우형님 이름만큼 인터뷰의 양질도 묵직하네요~ 정말 나눠서 읽어야겠네요.
  • 7.4 00:14
    다읽었습니다 ㅋㅋ당산대형 화이팅!
  • 7.4 18:30
    근데 국내 게시판은 상태가 조금 안 좋은 것 같아요. (웃음)
    근데 국내 게시판은 상태가 조금 안 좋은 것 같아요. (웃음)
    근데 국내 게시판은 상태가 조금 안 좋은 것 같아요. (웃음)
    근데 국내 게시판은 상태가 조금 안 좋은 것 같아요. (웃음)
    근데 국내 게시판은 상태가 조금 안 좋은 것 같아요. (웃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딥플로우님 이 댓글도 보고 있겠죠? 응원합니다 ㅋㅋ
  • 7.5 15:29
    정독했습니다. 좋은 인터뷰 감사합니다
  • 7.18 23:37
    진짜 이런 길고 긴 인터뷰들 더욱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정말 잘 봤고, 다시 한 번 힙합엘이라는 사이트의 존재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네요. 뭐 국게가 시끄럽다 질이 안좋다 그런 의견들도 많고 그렇지만 이런 걸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당연시하게 여기고 소중함을 잊고 있던 것 같기도 하네요.
    결론은 힙합엘이 파이팅입니다! 딥플로우도 파이팅!
  • 1 7.21 10:13
    딥플로우 너무 카와이데스내
  • 7.27 14:26
    Swag
  • 10.7 16:29
    상구형님 양화 듣고 완전 팬됐습니다 ㅎㅎ
  • 1.7 15:32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10.24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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