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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Dilla [Donuts] 리뷰

title: Illmatic앞날 Hustler 2023.10.30 20:47조회 수 1348추천수 19댓글 10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아티스트가 몇 명이나 될까. 죽음을 직면한 순간에도 개인의 저작물에 손 뗄 수 없을 정도로 예술을 완성하려는 거룩하고 찬란한 순간을 잊을 수 없는 걸까. 막연히 생각해도 그 저편의 아름다움과 잔혹함은 아직까지 이해하기 힘들다. 데이비드 보위의 [Blackstar], 파라오 샌더스의 [Promises], ATCQ의 [We got It from Here...Thank You 4 Your Service] 그리고 최근에 별세한 류이치 사카모토의 [12]를 듣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조차 든다. 감히 죽음을 운운하게 되지만, 그들에게 예술이라는 것은 죽음 이전에 세상에 무언가 하나라도 더 남기고 싶다는 욕망의 동기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위와 마찬가지로 필자에겐 그 동기가 너무나 강렬하게 느껴진 앨범이 있다. 바로 제이 딜라(J Dilla)의 [Donuts]로, 희귀병을 앓으면서도 음악을 손에 놓을 수 없던, 유난히도 삶과 죽음을 잇는 궤적과 그 궤적을 아우르는 그의 섬세한 손길이 아름다운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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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서 요람, 만남과 작별, 광채와 칠흑, 생존과 죽음, 각자가 상반되는 것 같지만 결국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 법이다. 그것이 삶이라면 사랑도 그러할 테고, 음악 역시 그럴 테다. 기대감을 갖고 음악을 플레이하는 순간이 언젠가 음악의 끝을 맞이한 뒤의 허탈함으로 변모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삶과 죽음을 윤회로 그리기 위해 동전의 양면과 같은 양가의 감정선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허탈함과 기대감의 순환 속을 자유로이 비행한다. 그것을 오직 딜라 혼자서 ‘SP-303’이라는 기계로 사람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고 마는 것이다. 누군가의 대단한 게스트 보컬 피쳐링 없이 오직 그의 턴테이블리즘에 입각한 기술 하나만으로 보컬 샘플을 첨가해 개인의 이야기를 하는 듯한 느낌은 쉬이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본 앨범을 들을 때면 조각조각 난 파편화된 감정의 군상들을 느끼기도 하지만 마지막에 가면 조각이 하나가 되어 도넛을 좋아하는 딜라의 얼굴이 자연스레 떠오르곤 한다. 그만큼이나 나에게 있어서 [Donuts]는 딜라의 삶을 응축해 놓은 작품 같다는 것이다.

 

제이 딜라의 섬세한 샘플 차핑(chopping)과 물 흐르듯 이어지는 앨범 구성은 [Donuts]가 얼마나 개인적인 삶의 고뇌가 담겨있는지 보여주는 듯하다. 마치 인간의 희로애락이 가득 담긴 것과 같은 트랙들의 제목과 트랙 간의 배치를 보자. 한 곡씩 넘어갈 때마다 묘한 감정선을 오가며 듣는 이에게 특수한 정취를 제공하는데, 이 출처를 알 수 없는 오묘함에 끌리고 마는 것이다. 평균 2분 조차도 넘지 못하는 짧은 시간의 흐름 안에서 수없이 이동하는 샘플의 움직임, 점핑 내지 스킵해 버리는 순간들, 재조합된 샘플들, 자연스러운 박자 변환 등의 수많은 작법은 오로지 우리가 막연하게 떠올리기 힘든 아련한 감정선을 제공하는 데 사용된다는 것이다. 수많은 작법을 포용한 이 앨범이 순전히 제이 딜라 단 한 명의 손에서 탄생했다는 것과 커다란 그릇의 포용력에도 난해함을 벗어나는 신비로움이 놀라울 뿐이다.

앨범의 첫 트랙은 ‘Donuts(Outro)’라는 아웃트로이며, 마지막 트랙은 ‘Welcome to the Show’라는 인트로라는 것이 재밌다. 이렇게 된 이유는 도넛의 모양과 같이 윤회의 인생을 표현하기 위해 같은 샘플(Gary Davis - Stay with Me)로 묶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실상 앨범을 시작하는 지점은 ‘Workinonit’이다. 앨범에서 유일하게 3분에 가까운 이 트랙은 제이 딜라의 샘플 재능과 비트 구성의 능력을 한껏 발휘한 훌륭한 오프닝 트랙이다. 당장 샘플을 뜯어보아도 ‘10cc - Worst Band In The World’라는 곡의 형체가 딜라의 손 아래 드럼과 베이스, 보컬들이 쪼개져 원곡을 찾기 어려운 새로운 딜라만의 트랙이 되었다. 그뿐인가?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 Beastie Boys의 보컬과 과장된 사이렌 소리마저 어울릴 줄은 누가 알았을까. 여러 번 편집되고 뜯어지며 다시 조합된 샘플의 마무리가 다음 트랙 ‘Waves’를 위한 기술적 설정임을 생각하면 그 강렬함과 아쉬움과 설렘의 혼재로 두뇌에 새로운 직격탄을 선사하기도 한다. 예측 불가능한 감정의 파고는 듣는 이를 흔들기에 충분한 긴장감을 제공했으니 말이다.

그뿐인가, 'Stop’에서 ‘People’의 전환이나, ‘Two Can Win’에서 ‘Don't Cry’로 이어지는 변화는 놀라울뿐더러, 'Airwork'의 마지막 부에서 'Lightwork'로 넘어가기 위한 포인트를 주는 점도 앨범의 목적의식을 분명히 하는 데 기여했다. 페이드아웃 페이드인 기법도 역시 빠짐없었으며, 음악의 연결을 위한 앞뒤의 트랙을 섞는 방식은 당연하게도 존재했다. 아니면 'Mash'에서 'Galt MacDermot - Golden Apples Pt. 2'에 템포와 사운드를 변화시켜 한층 더 감미로운 트랙을 만들거나, ‘Time : The Donut of the Heart’에서 Jackson 5의 소울 피치를 변화시킨 감성 트랙 역시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구구절절한 설명도 물론 중요하겠으나 보다 중요한 것은 딜라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냐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위의 작법들을 하나하나 설명하기에는 내 실력이 모자라는 것도 있겠거니와 그저 감정이 동하는 부분이 많기도 하다. 어쩔 때는 그 감정이 당연스럽게 느껴진다. 왜 그런 감정이 드는지 추적해보면 결국은 딜라는 앨범에 분명한 메시지를 넣어놨다는 식으로 귀결된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본인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본인과 본인을 둘러싼 가족, 친구, 듣는 이들에게 메시지를 넣어두었다. 가족을 향한 'Anti-American Graffiti', 친구 내지 듣는 이에게 전하는 'Dilla Says Go'와 같은 트랙 말이다. 딜라는 본인이 어떤 상황에 놓이던 간에 가족과 친구들의 유대가 지속될 것이며 삶을 살길 원했던 것 같다. 세상의 공장 'The Factory'와 같은 아픔에도 당신을 사랑한다는 'U-Love'는 먹먹한 감동을 남기며, 인사와 작별을 동시에 남기는 'Hi'와 'Bye'는 'I feel you'라는 말을 나지막히 남기며 마무리한다.

그리고 사실상 끝을 담당하는 'Last Donut of The Night'와 인트로지만 마지막 트랙인 'Welcome to The Show'의 배치는 묘한 감상을 남긴다. 전자가 어렴풋하게 끝을 나타내는 것 같지만 후자가 새로운 시작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니까 말이다.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다. 곡에 존재하는 단어인 'Ladies and Gentleman'은 극의 첫 장에도 막장에도 사람을 소개하거나 마무리할 때 따라붙는 용어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해석은 제이 딜라의 연극이자 삶은 어떤 식으로든 계속되는 것이다. 그게 누군가의 기억이 되었든, 리스너들에게 계속 플레이되는 방식으로든 말이다.

제이 딜라의 도넛이 대단한 이유는 샘플 내의 존재하는 위대한 가수들 혹은 음악의 장르를 가리지 않고 본유의 감정을 추출하여 본인의 것으로 융해하여 만든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롤러코스터와 같은 감정의 선상을 오가지만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향하는 움직임이 듣는 이에게는 짜릿함과 흥미로움을 준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Slum Village 시절부터 배워온 힙합 기존의 샘플링 방식을 The Pharcyde, Q-Tip, Common을 거치며 기존의 작법을 독파했기에, 이전작 ‘Welcome 2 Detroit’와는 한참 다른 규칙을 파괴하거나 넘어서는 ‘Donuts’을 만들 수 있던 것이다. 파블로 피카소가 ‘전문가와 같이 규칙을 배워야 예술가처럼 규칙을 깰 수 있다’는 말처럼, 딜라는 [Donuts]를 통해 수많은 프로듀서 중 한 명에서 단 하나의 아티스트적인 영역으로 넘어갔다. 그 누구보다도 힙합 본질의 샘플링을 적절하게 해체하고 재조합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준 점은 어떤 누구보다도 주류의 힙합 샘플링 방식을 잘 다룰 줄 알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존재했다. 개인적으로 [Donuts]은 단순한 인스트루멘탈 앨범도 아니며 오히려 익스페리멘탈 힙합에 가까운 힙합의 형태가 되었다고 보고 싶다. 우리가 늘 인식했던 랩이 존재하지 않아도 힙합의 태동과도 같은 샘플링이라는 점을 극대화하여 본인을 표현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제이 딜라가 보컬 샘플로 포개놓은 메시지가 담긴 이 앨범이 충분히 먹혀들었고 실제로도 좋았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리스너로 하여금 특수한 어떤 감정의 교차 선상에 올려두며 끝을 향해 달려간다는 행위 그리고 그 기록은 반복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은가. 끝내 제이디의 죽음 뒤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음악으로 남아 플레이되듯이, 그것도 아니면 리스너 본인이 음악이 끝난 순간 알게 모르게 다시 앨범의 첫 시점으로 돌아가듯이, 그야말로 끝과 시작이 공존하는 상황이 계속되리라 믿는다. 마치 연속되는 삶의 굴레, 도넛처럼.

 

https://youtu.be/fC3Cthm0HFU?si=0zuFTZ3EjpOquckW

 


저는 제이디의 도넛을 들을 때면 항상 지미 헨드릭스, 존 콜트레인과 같은 인물들이 떠오릅니다. 그들의 연주에도 혼이 담겨있다는 두루뭉술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딜라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기타와 색소폰이 그들의 악기였다면 딜라에겐 비트머신이 있는 것처럼 음악에 무언가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은 참 찡한 내용을 선사하는 것 같습니다. 여담으로 본 앨범을 꼭 LP로 듣고 싶어서 찾아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직구가 좋을 것 같아서 찾아보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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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0
  • 1 10.30 20:49

    전에 못느꼈는데

    리스트에 추가해야 겠네요

  • 1 10.30 20:51

    재해석이 순수 창작을 뛰어넘은 순간이 있다면, 그건 아마 Donuts일 것 같네요

  • 1 10.30 20:53

    정말 비트에 제이디의 혼과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게 아닐까 싶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1 10.30 20:55

  • 1 10.30 21:14

    좋은글 읽고 배워갑니다

  • 1 10.30 21:32

    둥글게 둥글게 . . . 제이 딜라는 우리나라였으면 불교 신자였을듯 !

     

    그리고 사실상 끝을 담당하는 'Last Donut of The Night'와 인트로지만 마지막 트랙인 'Welcome to The Show'의 배치는 묘한 감상을 남긴다.전자가

    '전자가' 부분에 띄어쓰기 안 됐어용 ! ! !

  • 1 10.30 22:19

    진짜 글 맛있게 잘쓰시네요.. 부럽

    오늘은 도나쓰 돌려야겠네요

    원래 제 감상은 endtroducing보다 약간

    아래에 있었지만 왠지 오늘은 바뀌는것도 가능할 것 같은 느낌이군요

  • 1 10.30 22:41

  • 1 10.30 23:05

    딜라는 세상을 떠난지 오래지만

    이 앨범만큼은 말씀해주신 것처럼 도넛마냥 계속 반복해서 리스너들에게 회자되겠지요

    RIP....

  • 1 10.31 19:54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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