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앨범의 역사성이라면 그 당시의 발라드구조의 완결성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유재하를 기점으로 여러 곡들은 훅의 반복과 브릿지로의 변주라는 구성을 완성해 구사하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유재하가 이 앨범의 작사/작곡/편곡을 도맡았다는 사실에 그의 재능을 발견하고 이 역시 맞다. 하지만 나는 그가 본격적으로 음악을 수학한 세대로서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작법을 이해하고 결실을 맺은 인물이라는 점서 그 재능을 보고 싶다. 그의 음악은 ‘팝’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특기할 사실이다. 그리고 단조의 사용에 국한된 경향을 보이던 당시 대중음악의 틀에서 벗어나 장조와 단조의 결합을 이끌어낸 곡들로 소위 말하는 ‘뽕짝’과 ‘감정의 과잉’을 걷어낸 아티스트라는 것 역시 이 앨범의 빛바래지 않는 역사적 가치에 기여한다. 이는 유재하의 가사에도 드러난다. 가리워진 길이나 그대 내 품에 같은 곡의 가사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그대와 같이 있는 것이라는 소박한 사실은 이 앨범이 가지는 담백한 가치를 보여준다.
유재하의 가장 큰 공로라면 결국 감성의 탄생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문학계 감수성의 혁명이라고 불린 김승옥의 무진기행과 같은 면모가 이 앨범에 함유되어 있다는 말이다. 소위 ‘기교없는’ 창법과 질척거리지 않는 서정성을 획득하는 곡과 가사는 한국대중음악계에 새로운 화법과 감수성을 선물했다는 것이다. 유재하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분명 이 앨범은 후대들에게 다른 길을 열었고 감수성의 전환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팝 발라드의 전형을 제시했다는 사실보다 더 큰 공로이며 어쩌면 그의 음악이 지금까지 사랑받고 통용되는 이유일 수도 있다. 예컨대 나는 잔나비의 음악에서 그의 향취를 읽는데 잔나비의 음악이 록에 기반하고 있다고 하되 보유하고 있는 서정성은 유재하의 그것에서 거리가 멀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그보다 2년 전 들국화가 제시한 에너지와 체화한 록문법의 유산 못지 않게 유재하의 잔잔한 목소리에 담긴 감성의 생명력은 길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발라드가 우리가요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되짚어본다면 그의 후예들이 나아간 길은 유재하가 이 앨범으로 단단히 다진 반석 덕이었음을 반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 명의 싱어송라이터로서 그가 걸어간 걸음은 결국 한국대중음악계의 큰 진보였다. 하지만 구슬프게도 유재하는 그의 영향과 결실을 보지 못하고 요절했다. 그 결과로 나는 그의 어머니의 사랑이 꾹꾹 담긴 편지를 읽으며 그의 음악을 듣는다. 어머님은 아들이 전설이 되는 앨범을 남기고 당신을 훌쩍 떠나는 것보다는 옆에 남아있기를 바라셨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그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세상을 등졌다. 어쩌면 나는 이 앨범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이 어머니에게 부치는 편지라는 생각을 하며 듣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가 다르게 들린다.
근래 본 글중에 최고로 멋진 글이네요
유재하를 기억하며..
살인의 추억에서 박해일은 그저 유재하 빠돌이였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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