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하지만, 본질적으로 이들은 두 부류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온전한 아티스트’로서의 음악가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자’로서의 음악가이다. 아티스트는 사실상 우리에게 가장 익숙할, 음악을 감정, 정체성, 미학의 표현 수단으로 삼는 존재이고, 그들은 소리 그 자체보다 그것이 발현하는 분위기와 의미에 집중한다. 또한 청중과의 교감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축한다. 반면, 기술자는 음악을 하나의 물리적 구조물처럼 다루곤 한다. 이들은 사운드를 구성하는 요소들, 즉 주파수, 그루브, 음색, 믹싱, 마스터링 등 보다 구조적이고 미세한 차원에서 음악을 조작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곡의 전달력보다는 음의 순도이며, 작품은 표현보다는 구현에 가깝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영역이 명확히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스펙트럼 상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음악가는 이 두 속성을 모두 어느 정도 지니고 있지만, 그 비율의 차이에 따라 접근 방식과 결과물이 극명히 갈린다. 예컨대 비욕(Björk)은 철저한 예술가이자 동시에 사운드 엔지니어링에도 깊이 관여하는 하이브리드형 인물이며, 브라이언 이노(Brian Eno)는 스스로를 "비연주 음악가"라 칭하며 개념과 실험을 음악의 중심에 둔 대표적인 기술 기반의 아티스트이다. 반대로 제프 버클리(Jeff Buckley)나 엘리엇 스미스(Elliott Smith)는 감정과 멜로디의 결을 누구보다 섬세하게 다루는 순수 아티스트형 음악가로, 기술보다 정서가 앞서는 유형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이야기를 먼저 꺼낸 이유는, 음악을 둘러싼 오래된 논쟁인 '과대평가’란 무엇인가' 에 대한 얘기를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많은 리스너들은 실제로 음악을 만들어본 경험이 없고, 음악적 결과물 뒤에 놓인 기술적, 개념적 과정에 대해 접근하기 어렵다. 이는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화성학이나 신시사이징, DAW 지식을 갖출 필요는 없다. 결국 대부분의 청취자는 ‘들을 수 있는 만큼’ 만 듣고, 느끼고, 평가할 뿐, 이는 자연스러운 방식이며 그 누구도 잘못된 태도라 지적할 수 없다. 하지만 동종업계에 있는 음악가들 또한 그 입장이 다르다. 사운드 메이킹을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해본 경험이 있고, 각종 샘플 팩이나 플러그인을 접하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본 그들에겐 음악이 단지 ‘완성된 소리’ 그 이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운드 하나, 리버브의 잔향 하나에도 제작자의 고뇌가 보이고, 그런 그들이 특정 곡을 들었을 때 ‘이건 직접 만든 사운드구나’, ‘이런 드럼 톤을 만들려면 얼마나 공이 들었을까’ 하고 단숨에 알아채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따라서 그러한 식별과 공감은 일반 청취자와는 다른 종류의 감상이며, 평가가 서로 다르게 나오는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이러한 공학적 깊이와 맥락을 고려한 ‘고평가’는, 일반 리스너에게는 때때로 ‘과대평가’처럼 보이기 쉽다. 청자 입장에선 그저 3분 남짓한 곡이 스쳐 지나갈 뿐이고, 그 이면에 들인 시간과 공정은 보이지 않는단 점이 그 이유이다. 관점의 차이를 ‘취향’이나 ‘감상력’으로만 치부할 순 없겠지만, 그 격차가 소통의 오해로 번지는 건 내게 조금은 안타깝다. 물론 음악을 듣는 방식은 결국 각자의 자유이다. 듣기 좋으면 그만이라는 입장도 충분히 설득력 있으며,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가끔은, 그 ‘좋음’ 이면에 깃든 수많은 선택과 미세한 장인정신, 그에 따르는 시간과 열정이 너무 쉽게 간과될 때, 그리고 그것이 단지 ‘과대평가’라는 말로 퉁쳐질 때, 창작자로서의, 한 사람의 팬으로서의 안타까움이 남는다. 모든 음악가를 무조건 인정사정 봐줘가면서까지, 존중 할 필요는 없다. 다만 너무 손쉽게 누군가의 작업을 단정 짓지 않는 태도, 그건 음악을 듣는 사람으로서의 예의이자, 더 깊은 소비를 위한 배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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