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언어의 정의부터 하고 가겠다. 언어라는 것은 생각을 담는 틀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머릿속에 피어나는 생각들이 명료한줄 착각하지만, 그건 사실 머릿속에서 언어로 그 생각들을 정의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울한 심상에 지배되어 있을 때, 말로 뱉든 생각으로 하든 결국 ‘우울하네’ 라는 단어에 우리의 심상을 구겨 넣는다. 우리가 단어에 생각을 넣지 않는다면 그것은 해석 이전의 상태로 남아, 색깔과 같은 그런 본연적인 것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언어에서 중요한 것은 방금 말한 해석인데,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어떤 기준으로 언어라는 틀에 담을까 생각해본 적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허나 나는 이 기준이라는 것이 우리의 심리상태를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만약에 어떤 사람 A가 다른 사람 B와 지나가다 어깨를 부딪혔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A의 생각에 부정적인, 빨간색이 떠올랐다고 했을때, A는 이 생각을 어떤 단어에 담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당연히 ‘저사람 뭐야, 화나네’ 정도의 언어에 담길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허나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나는 왜 맨날 이래, 화나네.’ 같은 생각. 즉, 우리는 생각을 심리상태에 따라 다른 맥락의 언어에 구겨넣는다. 우리는 타인만이 우리의 생각을 왜곡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의 생각을 왜곡한다. 또한, 그렇게 언어로 생각을 틀에 끼워 넣어 심리속에 저장함으로서 그 당시는 그렇게 남아버린다. 그렇기에 우리가 떠올리는 과거는 그렇게 남은 맥락대로 왜곡된 것을 떠올리는 것이다. 물론 그 과거를 다시 꺼내면서 지금의 심리에 따라서 또 왜곡한 것을 말이다.
이러한 언어의 진실은 또 이게 전부가 아니다. 우리의 생각은 명료하지 않다. 온갖 색이 섞여서 총체적으로 보면 뭐가 뭔지 알수도 없는 혼돈 그자체다. 이때 우리는 여기서 언어를 씀으로서 그나마 비중이 큰 생각들을 앨범속에 보관한다. 허나 문제는 언어를 씀으로서 다른 생각들은 그대로 없는 생각 취급을 받아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막 언어로 보관한 당시에는 다른 생각들이 조금은 남아있을 수도 있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엑스트라 생각들은 그대로 심리 구석탱이에 잔류하게 된다.
이제 다음 페이즈로 넘어가볼까 한다. 이때까지, 나의 사유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감정을 언어에 담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제 말할것은 감정이 아닌 정의적 생각들을 단어에 담는 것이다. 이 말을 보고는 다들 뭘 말하겠다는 건지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그렇기에 예를 들어보자면, 그냥 그런거다. 심심하지 않게 해주고 손을 적극 활용해 성취를 하는 것 = 게임. 이런 식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물건이나 그런 것을 언어로 딱 규정짓는 것 말이다. 이렇게 보면 이러한 정의적 언어 행위는 왜곡이 없어보인다. 허나 이 정의적 언어 행위는 감정적 언어 행위가 심리에 따라 왜곡되듯이, 맥락에 따라 왜곡된다. 예를 들어, 책을 떠올려보자. 허나 도서관에서 책을 떠올린다면 자연스레 인문학, 과학 책 같은, 전문성있는 책들을 떠올릴 것이다. 허나, 만화카페에서 책을 떠올린다면 자연스레 만화책을 떠올릴 것이다. 또한, 내가 2005년도 쯤 시기에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그 다음 ‘사랑스러워’를 떠올릴 것이지만, 2020년도 쯤 시기에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가짜사나이’를 떠올릴 것이다. 이처럼, 시공간에 따라 바뀌는 것이 정의적 언어 행위이다. 그렇기에 언어는 매일같이 변한다. 시공간은 항상 멈추지않고 유동적으로 흘러가기에, 결론적으로 우리는 각자 쓰는 언어가 다르다.
허나 아이러니한 점은 대다수가 결국엔 자기가 속한 나라에서 쓰이는 언어를 계승받는다는 점이다. 같지만 다른 언어를 서로 뱉는다. 허나 다들 잘만 소통한다. 그 이유로는 일단 서로 대화를 한다고 가정하면 동일한 시공간에서 말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나마 서로의 언어가 비슷한 양상을 띠게 된다. 하지만, 결국 모든 맥락을 함께 할 수는 없기에 그 비슷한 부분으로만 언어가 손실되어 머릿속에 들어온다. 결국, 잘만 소통한다는 것은 그냥 서로의 말을 조각내면서 먹고 있는지도 모른 채 뱉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통은 오류가 필수 불가결하다. 그리고 그 오류라는 것은 정의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일어나는데, 정의적 오류는 단순히 각자의 맥락이 달라 일어나는 것이고, 감정적 오류는 청자의 심리상태에 따라 그 언어의 맥락을 자기 담대로 틀어버리는 것이다. 예로 들자면, 프로이트의 투사 개념이 있겠다. 해당 개념은 요약적으로 말해,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불만스러운 부분을 남에게 뒤집어 씌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집어 쓰워지는 대상은 언어다. 그렇기에 어찌보면, 청자가 들은 순간부터 말한 사람이 뱉은 언어와 달라지는 것이다.
자, 또다른 측면으로 언어를 봐보자. 언어를 해석의 명료화로 바라보는 것 말이다. 해당 측면에서 언어는 사실 해석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해석은 위에서 말한 것과 비슷한, 특정 맥락의 강조와 그 외 맥락의 단절이다. 만약에 책상을 본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해당 책상 위에는 blonde 바이닐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올라와있다고 가정하자. 만약에 음악에 관심있는 사람이 해당 책상을 봤으면 ‘오! blonde!’ 하면서 곧바로 카라마조프가는 안중에도 없이 blonde 바이닐만을 응시할 것이다. 허나 문학에 관심있는 사람이 해당 책상을 봤다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개명작이지’ 하면서 곧바로 카라마조프가만을 응시할 것이다. 그렇다면 음악 좋아하는 사람에게 카라마조프가는, 문학 좋아하는 사람에게 blonde 바이닐은 언어로 치환되었을까? 아니다. 그 책상을 보고난 후의 이 두 사람에게 책상에 다른 거 있었냐고 물으면,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모른다라는 언어에 속하게 된 그 바이닐 혹은 책의 존재는 뭉게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맥락 없는 것들로 우리들의 세계관을 만들 수 없다. 그야 우리와 맥락이 다른 건 전부 사라져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생각만을 편애하듯, 주변또한 그렇게 편애한다.
음. 또다른 언어의 측면을 보자면, 언어는 결국 우리의의 생각을 타자화 시킨다는 것이다. 언어로 만들기 전 우리의 생각들은 우리 머릿속에 내재되어 있다. 허나 이러한 내재된 생각을 언어로 담아 꺼낸다면 그건 이제 외부에 있는 우리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냐 물을 수 있는데, 상상이상으로 매우 차이난다. 일단, 우리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은 우리가 마음대로 조물락 거릴 수 있다. 하지만 그걸 외부에 꺼낸다면 이제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디메리트로 인해 외부로 꺼낸 언어는 우리가 또 다시 해석하여 언어는 처음과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또한, 언어가 꺼내진 순간 나와는 다른 맥락을 걷기 때문에, 우리가 꺼낸 언어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왜곡한다. 그렇기에, 언어는 우리의 생각을 타자화 시킨다는 것이다.
또 언어는 외부의 예술 같은 것과도 연계되지만, 전에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다룬 적 있으므로 그 글과 알아서 연관시키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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