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EMO 밴드인 Sunny day real estate에 대해서 좁고 얕은 지식을 제공한다.
1. 라멘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라멘은 가루로 만든 길고 얇은 면을 삶아 돼지고기, 닭고기, 가츠오부시, 멸치 등으로 우려낸 육수에 넣고 다양한 재료를 첨가하거나 고명을 올려 만든 일본의 면 요리다. 그러나 한때 유행했던 지로계 라멘을 비롯해 두꺼운 면을 사용하는 라멘들, 츠케멘이나 아부라소바와 같이 면을 육수에 넣지 않는 라멘들도 존재한다. 재료, 조리법에 따라 라멘 종류만 수십, 수백 가지가 넘어갈 수도 있는데 이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하나의 정의를 내리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이에 대해서 인기 라멘점 ‘세류보’의 점장 세리자와 타츠야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내놓는다.
‘일본에서는 어느새 '중화 면요리의 총칭'을 '라멘'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또 거기에 일본식의 어레인지가 잇따라 가해짐으로써 '중화의 면요리' 범주로부터도 점점 더 불거져나와서... 라멘은 정의불능의 자유분방한 장르가 된 거야. 그런 라멘의 세계에서는... 라면장수가 '이것은 라면이다'라고 말을 하면, 그것이 우동이든 파스타든 라멘인 거라고.’
2. 또 하나의 질문을 던져본다. Emo란 무엇인가?
Fugazi를 연상시키는 Rites of spring, Embrace 등의 1세대 이모코어 밴드들. 실험적이고, 멍하고, 혼돈스러운 연주를 선보였던 Cap'n Jazz. 부드러운 아르페지오 리프로 한때 전세계의 힙스터들을 매료시켰던 American football. 반대로 과격함과 공격성을 극한까지 몰아붙였던 page 99, Orchid 등의 Screamo.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포락갤의 자랑 파란노을도 넓은 범주에서는 Emo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이중에서 real emo와 fake emo를 구분하는 것은 장르 팬들에게는 오랜 골칫거리이다. 특히 팝펑크와 결합하며 보다 대중친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My chemical romance, Fall out boy와 같은 밴드들은 자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주장이 아주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다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모 팝 펑크가 유행한지도 거의 20년이 넘어가는 와중에 아직까지 논쟁을 이어가는 것은 다소 진 빠지는 일이다. 이들이 포켓몬 1세대 근본론자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결국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도 비슷한 답변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상식을 넘어서지 않는 선에서 (아무도 오아시스를 Emo라고 주장하지 않듯이) Emo 역시 정의불능의 자유분방한 장르라고.
https://www.youtube.com/watch?v=41YqzHoCgk4
3. Emo의 애매모호함을 설명하기 위해 위의 밴드들을 모두 열거할 필요는 없었다. 사실은 Sunny day real estate(이하 SDRE)라는 이름 하나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Emo는 하드코어 펑크의 ‘더 빠르고, 더 과격하고, 더 시끄럽게’라는 모토에 사람의 입체성을 덧씌웠다. SDRE도 그 중 하나였다. 그들은 지저분하고 거친 기타로도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연주를 선보일 수 있었다. 또 반대로 잔잔하고 고요하다가도 금방 다시 파도처럼 요동치기도 했다. 제레미 에닉의 목소리는 투박하고 단조로웠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가끔씩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노래할 때면 어느 미드웨스트 이모 밴드처럼 ‘뜨거운 심장’을 느낄 수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Fd75JDPUJ8
이러한 soft-loud dynamics는 그들의 데뷔작이었던 <Diary>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였다. ‘48’의 화자는 연인 앞에서 자기 자신을 숨긴다. 연애를 하면서 행복해하지만, 관계가 깊어지면서 자신의 나약한 모습이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겉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진다. 이에 맞춰 담담한 독백으로 시작되었던 곡은 후렴에 이르러서 처절한 샤우팅으로 변한다. 이 소심한 소년의 울음소리(또는 기타소리)가 들리신다면 당신은 SDRE의 팬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hVAxNO6JNlw
이처럼 <Diary>가 부드러움과 시끄러움 사이를 오고 가는 삐뚤빼뚤한 선이었다면, <LP2>는 둘 사이를 잇는 부드러운 곡선이었다. 밴드는 격정적으로 연주했지만, 그들의 격정에는 더 이상 요란함이 없었다. 그 자리는 몽환적인 드럼, 비직관적인 멜로디, Lo-Fi한 질감과 더 섬세해진 감정선이 대신했다. 물론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었다. 제레미는 계속 열정적으로 노래를 불렀고 <LP2>는 여전히 훌륭한 Emo 음반이었다. 무엇보다 이 정도의 변화는 정규 3집 <How It Feels to Be Something On>에 비교하면 세 발의 피에 불과했다.
<LP2> 발매 직후 개인적인 사정으로 밴드는 해체하고 멤버들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제레미는 SDRE와는 전혀 다른 성향의 솔로 앨범을 발표했고 (rym에 따르면 챔버 팝, 아트 팝으로 분류되는 듯 하다) 베이스와 드럼은 푸 파이터스에 합류했다. 제레미의 홀로서기는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고, 밴드는 2년만에 재결합한다. 그러나 이 공백의 2년은 밴드의 앞날에 어떤 영향을 줄 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MMpYIuDMlg
4. 그렇게 발매된 <How It Feels to Be Something On>은 어딘가 달랐다. 앨범은 의미를 알 수 없는 꿈 같았다. 한 층 더 우울해졌지만 묘하게 따뜻한 부분도 있었다. 레딧의 한 유저는 SDRE 버전의 서전트 페퍼를 듣는 것 같다고 평했다. 반면 피치포크는 ‘Fugazi를 동경하던 밴드가 Led zeppelin과 U2가 되고 싶어졌을 때’ 나온 결과물이라고 표현했다. <How It Feels to Be Something On>에는 프로그레시브 록, 싸이키델리아, 아트 록 등이 모두 뒤섞여 있었고, 모두 기존의 Emo 팬들에게 있어서는 낯선 것들이었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SDRE는 더 이상 Emo 밴드가 아니라고 말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들이 Emo를 새롭게 재정의했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더 마음에 든다. 성향이 급변한 이후에도 밴드는 계속 비주류들을 위해 노래를 불렀고, 그런 부분에서 내가 생각하는 Emo의 핵심 가치와도 계속 맞닿아 있었다. ‘In circles’에서 ‘pillars’에 이르기까지, 망가진 인간관계, 그 속에서 소외된 사람은 여전히 그들의 단골 소재였다.
어쨌거나 SDRE는 제2의 Fugazi가 되지도 않았고, 제2의 U2나 Led zeppelin이 되지도 않았다. 대신 그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이는 <Diary>도 매한가지였다. 80년대 이모코어 밴드들과 90년대의 그런지,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을 정확히 반쯤 닮아 있었다. 이처럼 여러 장르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미드웨스트 이모를 대표하는 밴드로 여겨지면서도, 정작 동시대에 활동하던 미드웨스트 이모 밴드들과는 조금씩 달랐다. SDRE는 비주류가 되기를 자처했고, 그 속에서 밴드 고유의 미학이 탄생했다. 그들의 커리어는 Emo가 얼마나 모호하고, 또 매력적인 장르인지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5. 결론적으로 나에게 SDRE가 왜 가장 위대한 Emo 밴드들 중 하나라고 묻는다면 간단하게 답할 수 있다. 그들은 끝까지 비주류를 위한 비주류의 밴드였기 때문이다.
(Q: 월별 청취자가 30만명이 넘어가는데 어떻게 비주류인가요? A: 그래도 드레이크 월별 청취자의 1%도 안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Qa_CrPHdX0
2000년에 발매된 <The Rising Tide>를 끝으로 밴드는 활동을 마쳤다. 이후에도 간간이 재결합해 투어를 돌기도 했으나, 아무래도 새로운 음반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작년, <Diary>의 30주년을 기념해서 <Diary at London Bridge studio>가 발매되며 약간의 희망이 생겼다. 앨범에서는 <Diary>의 라이브 버전과 함께 24년만에 공개된 신곡 ‘Novum vetus’를 들어볼 수 있다. 밴드 후기에 보여줬던 프로그레시브한 성향이 잘 드러난 7분 32초의 대곡이다.
오아시스도 15년 만에 재결합했고, 더 큐어도 16년만에 새 앨범을 낸 와중에 불가능이 어디 있겠는가. 아직은 호들갑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2044년 발매 예정인 <I am Music>보다 SDRE의 신보를 먼저 볼 수 있겠다는 말을 끝으로 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런 글 너무 좋습니다 종종 눈에 밟히던 앨범인데 시간될때 들어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
선추후감
오랜만에 Diary랑 How It Feels To Be Something On 돌려야겠네요. 잘 읽고 갑니다~~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