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케이팝이 비단 음악만으로 정해지는 건 아닐겁니다. 한국 아이돌 특유의 방송 친화적 시스템과 사업 구조, 안무/퍼포밍 - 뮤비가 반드시 포함된 구성 역시 중요한 부분입니다만, 여기서는 일단 음악만을 중심으로 써볼까 합니다.
(1.5)
부록.
80년대 컬러 텔레비와 전두환 정권에 의한 언론 통폐합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TBC라는 방송국은 하루아침에 KBS로 바뀌었죠. (그리고 아직 SBS는 개국하기 전입니다.)
경제 성장과 컬러, 티비 보급률의 증가로 티비가 대중 매체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아져가던 순간, 오히려 방송국 수는 줄어든 상황인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방송국 피디들의 영향력은 높아졌고, 방송을 통해 미디어믹스 스타들이 탄생하기 시작한게 80년대입니다.
예컨대, 조용필과 이용, 전영록은 모두 가수로서, 티비 음악쇼 프로그램으로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고 영화 배우로, 라디오 DJ로 스타 파워를 획득합니다.
한편 댄스 가수 역시 이때 처음으로 등장했습니다. 기존에 댄스 음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가수가 댄스를 하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70년대까지 댄스는 '거대한 버라이어티쇼'의 일부로 전속 댄서들이 하던 일입니다.
하지만 80년대, (아마도 마이클 잭슨의 영향으로) 본인이 직접 춤을 추기 시작한 가수들이 등장합니다.
80년대 초반에는 트로트의 BPM를 높힌 장르가 주축이 되고 (소방차), 85년 이후에는 힙합과 댄스-펑크 같은 장르들이 응용되기 시작합니다. (김완선, 박남정. 여담이지만, 김완선의 앨범들은 김창완, 이장희, 신중현처럼 락 베이스 사람들에 의해 프로듀싱된만큼, 생각보다 굉장히 락킹합니다.)
이러한 토양 위에서 등장한 것이 서태지와 아이들이죠. 스스로 춤을 추는, 댄스 음악을 하는 가수. 다만 이 댄스 음악이 유로 댄스와 힙합이었던 겁니다.
(2)
예전 글에도 썼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은 적어도 세 가지 장르의 선조가 됩니다. (a) 한국 힙합, (b) 한국 댄스 그룹, (c) 한국 아이돌 그룹.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과 사운드가 흡사한 그룹들이 등장하면서 속칭 아이돌 1세대가 형성됩니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H.O.T.입니다. H.O.T.는 사운드 자체가 서태지와 아이들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베이스 사운드가 굵은 힙합 + 샤우팅이 섞인 뉴메탈. (그리고 후속곡으로는 발라드 곡을 불렀죠. 이조차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반 구성과 흡사합니다.)
https://youtu.be/eVI3VKvbwsQ?si=Sx8E5rSgWZVJFVrc
2집 타이틀곡인 "늑대와 양"은 요근래 다시 들리기 시작한 (영파씨나 스카이민혁, 샤이니의 최근 곡에서) 둔탁한 붐뱁 비트입니다.
https://youtu.be/gOMJxap_8II?si=6hTE_86qfVN8tlkY
3집 타이틀곡인 "열맞춰"는 좀 더 뉴메탈 냄새가 강합니다. (그리고 지펑크 신스도 중간중간 들리네요.)
(3)
그리고 한국 아이돌은 한번 망합니다 (....)
다들 망각하고 있거나 모르는 사실이겠지만, 2000년대 들어가면서 댄스 음악의 인기는 굉장히 시들해졌습니다. 이때 인기 있었던 것은 발라드였죠. 브라운 아이즈 같은 한국형 알앤비라던가, SG 워너비로 대표되는 소몰이 창법이 차트를 휩쓸던 시기였습니다. 또한 그런지/이모의 영향을 받은 밴드 음악들도 차트에 많이 올랐고요.
이때 SM이 만든 아이돌 그룹은 죄다 망했습니다. 블랙비트, 이삭 앤 지연, 신비 등등. 단명한 아이돌이었죠.
그러다 03년도에 데뷔한 것이 동방신기인데, 타이틀곡을 들으면 알겠지만 그냥 발라드입니다.
https://youtu.be/5OrIrW3nhtc?si=-ZPTqJMzSE4Jd2fj
그리고 JYP에서 데뷔한 지오디 역시 알앤비 발라드에 가까운 노래를 가져왔습니다.
https://youtu.be/evb-3W3Wnls?si=UZlIoddYvAYWpRK-
(4)
그리고 07년도 빅뱅의 거짓말, 원더걸스의 텔미, 08년대 소녀시대의 데뷔와 09년대 지(Gee)의 히트로 다시 한국 아이돌 음악은 궤도에 올라옵니다. 그리고 이 때 만들어진 음악들이 속칭 "케이팝"의 정체성을 선명히 가지게 됩니다.
차례로 살펴보죠.
06년도에 빅뱅이 데뷔합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빅뱅의 데뷔곡은 당시 유행하던 가요 힙합입니다. 발라드 힙합이요. 발라드/알앤비 가수가 훅을 부르고, 래퍼가 벌스를 채우는 그 노래 맞습니다.
https://youtu.be/bjTEMBB-mjY?si=7m99jLCREvbRYH9Q
당시 차트에서 유행하던 힙합 음악들과 굉장히 흡사합니다.
https://youtu.be/2uyHtg56yTY?si=5kP6t66vgcU7g1KO
https://youtu.be/Q8gyOnaxzHU?si=pJYLtkanknnkOMdK
https://youtu.be/7j6S7zDB5pQ?si=Eho_xgV40DVmCCt-
(분위기는 키네틱플로우/MC 스나이퍼의 발라드 랩을, 대신 창법은 다이나믹 듀오의 알앤비/뉴잭스윙에 가까운 느낌입니다.)
그리고 빅뱅이 06년도에 낸 3장의 싱글은 다 이런 모양입니다. 그리고 06년 12월에 낸 정규 1집 타이틀은 드디어 대중성에 타협한 모양새입니다. 서태지와 아이들 - H.O.T.로 이어지는 유구한 남자 아이돌 사운드, 메탈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망했습니다 (...)
https://youtu.be/CAQIvr-rjBk?si=PS7oREoMt6ZQf0ok
(5)
한편 당시 댄스 음악은 그나마 여성 솔로와 남성 솔로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https://youtu.be/Lfgg_AVzyIg?si=J03KR35sC0mQAPwp
03년도에 나온 비 1집의 타이틀곡 <나쁜 남자>입니다. 전형적인 넵튠스/팀바랜드 스타일, 당대 힙합-알앤비곡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아는 케이팝의 대유행을 가져온 그룹, 원더걸스의 데뷔곡인 '아이러니'도 같은 스타일입니다. (07년도 데뷔)
https://youtu.be/uxFxoLxmcdg?si=EV9-1lfh0kQ5o8Xh
다만 JYP는 이 곡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은 듯합니다. 다음 타이틀은 "텔미"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나오거든요.
(6)
제가 볼 때, 원더걸스의 "텔 미"는 정말 예외적인 사건입니다. 박진영이 아무런 레퍼런스도 없이, 그냥 정말 안무에서 시작한 곡이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너무나도....프로덕션에 돈을 안 들인 티가 나기 때문입니다.
https://youtu.be/BlHv3BbBv6A?si=5nreryar0QKK0I37
들어보시면 알겠지만, 곡 구조도 굉장히 단순하고, 드럼 루프 몇 개와 뿅뿅 80년대 신스로 대충 때운 음악입니다. 데뷔 곡에 비하면 정말......심플하다 못해 대충 만든(...) 곡입니다.
이 노래를 다시 들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때 박진영에게 레퍼런스가 있다면, 80년대 트로트 메들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뵐 일이 있으면 물어보고 싶긴하네요.
https://youtu.be/JbrXboQsJjk?si=Oc3oQnCB-ZKyJY5y
(이 싸구려 신스 몇 개로 대충 만든 루프 비트에, 비성이 강조되는 간드러지는 창법까지....아무리 봐도.....비슷합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이게 히트를 칩니다.
아마 박진영 본인조차, 이게 왜 이렇게까지 히트를 쳤지? 물음표 그 자체였다고 생각합니다. 본인도 이게 왜 히트했는지, 한참을 고민하면서 다음 곡들을 만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다음에 나오는 원더걸스 곡이라던가 남자 아이돌인 2PM이라던가 곡의 방향성, 퍼포먼스의 방향성 모두 갈피를 못 잡고 있다는 생각 밖에 안 들거든요.
그리고 다른 아이돌 제작사들도 기회와 고민을 동시에 얻은 걸로 보입니다. 아 아이돌로 떼돈을 벌 수 있겠구나. 그런데 저 '텔 미'의 어떤 부분이 사람들을 꽂히게 만든거지?
(7)
그리고 아마 박진영과 SM/YG는 각기 다른 답을 내린 듯합니다. 박진영의 답은 퍼포먼스였습니다. 그래서 2PM은 곡 자체를 굉장히 미니멀하게 만들어서, 퍼포먼스에 집중하죠.
하지만 SM/YG는 퍼포먼스보다는, 곡의 구조 자체에 집중한 듯합니다. 훅. "어머나" 파트 같은 훅이 있어야 히트를 한다. 그래서 이들은 기존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곡 형태에 훅을 어떻게든 집어넣으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제가 볼 때, 이러면서 저희가 아는 전형적인 케이팝 형식이 탄생한 것 같습니다.
https://youtu.be/0k2Zzkw_-0I?si=9fdIoEAapA6jXZHm
소녀시대의 데뷔곡인 다시 만나 세계입니다. 원더걸스의 텔미와 거의 동시에, 07년도에 발매되었죠. 이 곡은 댄스 형식이긴 하지만, 들어보면 드럼 비트만 그럴 뿐 발라드의 영향이 굉장히 강합니다.
곡 전체를 지탱하는 피아노, 촘촘하게 들어간 사운드 소스들, 풍부하게 들어간 코러스와 화음. 무엇보다도 기승전결을 완벽히 지키는, 후반부에 나오는 지르는 파트.
https://youtu.be/U7mPqycQ0tQ?si=WLvzdh8-wHu-Cn04
이 다음 곡인 지(Gee)는 후크송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발라드의 영향력을 선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풍부하게 들어간 사운드 소스들, 마찬가지로 풍부하게 들어간 코러스와 화음들. 또 기승전결조차 완벽히 지킵니다. (게다가 특이한 점은, 기승전결을 만들기 위해 중간에 드럼 앤 베이스로 가속을 줍니다! 일렉트로니카의 드롭 파트를 응용한 셈입니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지금 들으니 요모조모 신경을 많이 쓴 노래입니다.)
이 지(Gee)의 성공으로, 저희가 아는 케이팝 사운드의 원형이 만들어졌다고 전 생각합니다. 기존 발라드 형식을 후크송에 맞게 마개조한 것이죠.
(8)
https://youtu.be/NeDeZUqNiVo?si=kI0vlYDL8-YE5x6n
빅뱅의 거짓말입니다. 이 역시 07년도 히트곡이죠. 그리고 재미있게도, 이 노래 역시 기승전결 발라드에 후크가 있는, 소녀시대의 Gee와 거의 동일한 형식입니다.
다만 제 생각에, 빅뱅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간 듯합니다. 빅뱅 데뷔곡을 들어보셨으면 알겠지만, 원래부터 힙합 곡은 벌스 + 훅의 후크 송이였습니다. 아마 빅뱅은 여기에 하우스 (아마 정확히는 시부야계)를 섞은 뒤, 좀 더 발라드에 가까운 기승전결 형식을 도입한 듯합니다. 순서는 반대이지만, 결과적으로 SM과 YG는 똑같은 지점에 온 셈입니다.
텔미가 원히트원더라구요,,?
게다가 아이러나는 멜론 연간 25위인데 망한 노래라고 할 수 없는 지표인데요.. 너무 저평가하시는듯
섬세하지 못한 표현이었나 봅니다.
'망했다'라는 말이 가리키는 정도가 사람마다 다 차이가 있을겁니다. 제가 여기서 망했다 라고 표현한 이유는, 적어도 JYP 회사에서는 '아이러니'라는 스타일을 지속할 유인을 못 느꼈다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가 (JYP 입장에서, 멜론 연간 25위일지라도) 충분한 수익/지속성이 없다 느꼈으니, 노래 스타일을 굉장히 많이 바꾼 것 아닐까요? (물론 회계 장부나 당시 사람들 인터뷰가 없으니 뇌피셜이긴 합니다)
또한 원 히트 원더라는 표현 역시, 원더걸스가 이후에 "텔 미"만큼의 히트곡을 내지 못 했다는 것을 의도한 말이었습니다. (아이러니는 물론, 그 이후의 후속곡들도 나름의 상업적 성공을 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바는 아닙니다만) 소녀시대나 빅뱅과 달리, 원더걸스 커리어의 가장 정점은 텔미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아가 원더걸스 전체 음악 중에서, 텔 미가 굉장히 튀는 스타일이라는 점. 그리고 당대 아이돌 음악 중에서도 굉장히 튀는 음악이라는 점에서, 갑자기 튀어나와서 차트 1등을 한 굉장히 이례적인 현상...정도의 생각 또한 '원 히트 원더'라는 단어를 쓰면서 의도한 바 같네요.
텔미만큼의 히트곡을 못내서 원히트원더면 아이돌 시장을 넘어서서 전체 음악 시장에서 히트곡이라는게 존재하지 않는거 같은데요.
그 기준이면 소녀시대도 gee가 피크고 빅뱅도 거짓말이 피크가 되는데 말이 너무 안 되네요. 나름의 성과라고만 한정짓기에는 소핫이랑 노바디는… 연간 1위급의 이례적인 성과를 거둔 곡들인데 너무 후려치기하시는듯. 이후 음원 성적 커리어도 원걸은 아이돌 중에서 최상단에 속했구요.
그리고 원걸이 데뷔하던 시점은 1새대 걸그룹이 활동을 마무리하고 유의미한 성과를 거둔 걸그룹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암흑기 시절인데도 원걸은 데뷔하자마자 나름 유의미한 성과를 냈었는데 이걸 가지고 망했다고 표현하신다는게 이해가 전혀 안되네요. 컨셉 노선을 선회한다는게 해당 표현의 이유가 돤다는 것도 인과관계 성립이 전혀 안된다고 생각하구요.
원걸 텔미가 곡 퀄로는 몰라도 포인트 안무부터 후크송까지 현재 아이돌 시장 히트곡 공식의 원형이고 그 자체만으로도 의의가 있는 곡인데요. 오히려 소녀시대 gee는 그동안의 sm 히트곡 공식에서 벗어나 텔미 이후로 바뀐 흐름에 제대로 편승한 사례죠. 텔미 없었으면 나오지 않았을 곡인데요.. 소녀시대의 영향력을 부정하는건 전혀 아니지만 말씀하시는 표현들 중에 이해 안 되는게 너무 많네요.
후려치기라 생각하시면, "망했다는 표현"을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원 히트 원더는 "예외적인 사건"이라는 말로 바꾸죠.
다만 몇 가지 말씀을 남기자면
(1) 우선 글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소녀시대의 gee가 텔미의 공식에 편승/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본문에서도 제가 직접 쓴 부분입니다. 말씀하신대로 텔미가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곡입니다. 이 부분을 왜 말씀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의견과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2) "컨셉 노선을 선회한다"는게 "망했다"는 표현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 동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3집이나 4집쯤 되면, 이미지 변신이나 여러 가지를 시도할 법하지만, 히트한 신인이 기존 컨셉을 버린다는 것은 당시든 지금이든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 전략처럼 보입니다. 무언가 히트했다면, 적어도 한 두번쯤은 더 그 컨셉을 유지하지 않던가요?
그러니 제 입장에서 원더걸스 컨셉의 선회는, 당시 상업성이나 미래 전망에 있어서, "아이러니"로는 만족하지 못한 JYP의 판단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망했다"는 표현이 "유의미한 성과"가 있기에 과하다 하더라도, 적어도 JYP에게 "그 성과가 만족스러워 보이진 않았다."는 게 제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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