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연] 허클베리피 분신 5 (焚身 5)
그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뜨겁다’라는 수식어를 넘어 ‘미쳤다’라는 표현이 본 공연 앞에 늘 따라다녔다. 벌써 5회째를 맞는 허클베리피(Huckleberry P)의 단독 콘서트 시리즈 분신(焚身)에 대한 이야기다. 게다가 올해는 불과 30초 만에 1회 공연이 매진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기대감이 더욱 치솟았다. <분신> 시리즈는 국내힙합 공연계의 ‘돌연변이’다. 옴니버스식의 구성 혹은 특정 헤드라이너의 명성에 기댄 다수의 콘서트와는 달리 본 공연은 오로지 허클베리피의, 허클베리피에 의한, 허클베리피를 위한 무대이기 때문이다. <분신> 시리즈는 어느새 5회 차를 맞이했고, 올해는 그 성원에 힘입어 양일로 한 단계 판이 키워지기도 했다. 자기 몸을 스스로 불사른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뜨거운 무대, 분신 5(焚身 5)가 홍대 예스24 무브홀(Yes24 Muv Hall)에서 11월 28·29일 양일에 걸쳐 진행됐었다.

콘서트의 시작인 6시 이전부터 해당 공연장은 관객들로 가득 찼다. 한파가 불어 닥친 날씨에도 허클베리피를 만나기 위해 달려온 이들의 열기는 뜨겁기 그지없었다. DJ 짱가(DJ Djanga)와 G2의 등장으로 오프닝 무대가 시작됐다. G2는 조이 배대스(Joey Bada$$)의 “Big Dusty”에 맞춰 맞추어 특유의 걸걸한 음성을 뽐내는 "Big Dusty Remix"와 “999”, “Space Ninja” 등으로 흥을 끌어 올렸다. 시그니처와도 같은 금발 드레드 머리를 휘날리며 목소리를 뱉어내는 그의 모습은 강렬했다. 오프닝이 끝나고 백그라운드 영상 속에 허클베리피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그간 진행돼 온 <분신> 시리즈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열렬한 지지를 보내주는 팬들에 대해 고마움을 건넸다.


이어 “그 때.”가 흘러나왔고 오늘의 주인공 허클베리피가 등장하며 분신의 불꽃이 본격적으로 타올랐다. 허클베리피는 첫 등장부터 마치 마지막 무대인 듯 사력을 다해 목소리를 올렸다. 특유의 몰아치는 랩은 물론 완급조절로 탄력을 더하는 그의 모습은 베테랑다웠으며 여유로웠다. 매 <분신> 시리즈에 참여할 정도로 깊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는 관객과 아티스트의 호흡은 그 어떤 호응이 부럽지 않았다. 허클베리피는 처음 분신을 관람하러 온 신입들에게 저력을 보여주자며 “Rap Badr Hari”의 비트를 틀었고, 그야말로 장관이 펼쳐졌다. 바로 관객들이 아티스트를 대신해서 곡의 모든 부분을 소화한 것이다. 후렴구를 ‘떼창’하는 수준을 넘어 벌스 전체를 따라 부르는 700명의 목소리는 하나로 뭉쳐졌고, 이는 마치 종교 집회를 연상케 하기도 했다. 이 많은 이들이 오직 허클베리피를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았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어 “분신 (焚身)”이 이어졌고, “우린 참을성 부족한 시한폭탄”이라는 가사처럼 분위기는 폭발적이었다.

당일 공연에는 수많은 아티스트가 참여하며 무대를 더욱 풍요롭게 했다. 첫 타자는 레디(Reddy)였다. 그는 “그냥해”와 “1985”의 무대를 허클베리피와 함께 꾸몄다. 둘은 가사를 주고받으며 완급을 조절했고, 곳곳에서는 속도감 넘치는 랩을 펼치기도 했다. 뒤이어 사이먼 도미닉(Simon Dominic)이 깜짝 등장했다. 어느새 중견급 아티스트가 된 84년생 동갑내기들의 무대는 원숙했고 여유로웠다. 둘은 [Man In Black]에 실린 “History Is Made At Night”를 함께 열창했고, 뒤이어 사이먼 도미닉은 자신의 싱글컷인 “사이먼 도미닉”을 공연했다. 그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가사인 “래퍼 vs 래퍼”를 “헉피 vs 쌈디”로 개사하는 재치를 보였고, 관객들은 모두 후렴구를 따라 부르며 호응했다. 허클베리피는 이어 “Peace & Love”와 “My Team”의 벌스를 소화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분신에 500명 오는데 왜 신경 써”라는 가사가 거짓이 아님을 해당 공연장에 있던 이들이라면 모두 수긍했을 것이다.



분신은 허클베리피의 커리어를 함께 공유한다는 측면이 더 강한 공연이었다. 프리스타일 챔피언으로 주목받았던 경력 초반과 피노다인(Pinodyne), 겟 백커스(Get Backers), 그리고 하이라이트 레코즈(Hi-Lite Records)의 솔로 아티스트까지, 그의 넓은 스펙트럼은 3시간에 달하는 무대에 꽉꽉 채워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갑작스럽게 등장한 마이크 스웨거(Mic Swagger) 영상은 특히 반가웠다. 이미 국내힙합 씬의 전설적인 영상으로 평가받고 있는 본 클립을 관객이 모두 따라 부르는 모습에 엄지를 치켜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어 올티(Olltii)가 등장했고 둘은 “Freestyle Tutorial”을 부르며 프리스타일로 이어진 연결고리를 뽐냈다. 이어 JJK와 서출구(Xitsuh), 루피(Lupi)가 오르며 ADV의 무대가 진행됐다. ADV는 “360도 Remix”와 “SRS 2015”를 부르며 거리의 수호신다운 자유로운 모습을 선보였고, ‘길바닥 Rap Shit’이 무엇인지 몸소 증명했다. 즉흥 랩이라는 키워드로 뭉쳐진 허클베리피와 ADV의 무대는 거침없었고, 관객들은 ADV 사인으로 이에 화답했다.



관객과 아티스트 모두 쉴 시간이 없었다. 이어 제리케이(Jerry.k)와 계범주가 무대에 올랐고, “캥거루 (Kangaroo)”를 열창하며 열기는 지속됐다. 그리고 배우 박수진의 사진을 담은 영상이 틀어지며 “단발머리”의 무대가 계속됐다. “박수진 I like it”을 외치는 관객들과 계범주의 능수능란한 애드립은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이어 수다쟁이가 등장하며 겟 백커스가 오랜만에 호흡을 맞췄다. 둘은 “I`m Sorry”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이어갔고, 군무와 막춤을 함께 선보이며 웃음을 유발하기도 했다.


뒤이어 얼마 전까지 하이라이트 레코즈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이보(Evo)가 “Today & Tomorrow”를 꾸몄다. 허클베리피는 본 곡이 올해 들었던 가장 좋은 트랙 중 하나라고 치켜세웠고, 이보는 더욱 진솔하게 곡을 소화했다. 팔로알토(Paloalto)의 등장과 함께 “불을 켜 (Lights On)”와 “Seoul (서울)”, “거북선 Remix”와 “Good Times”가 이어졌다. 올해 최고의 훅 중 하나인 “거북선”의 중독성은 말할 필요가 없었고, “Good Times”의 무대는 대축제와 같았다.



중·후반부는 조금 더 진중한 무대로 채워졌다. 허클베리피는 “Love Is Pain”과 “My Piano”를, 김사랑과 함께 “쓰다”와 “멀미”를 부르며 차분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어 피노다인 최고의 히트곡으로 손꼽히는 “Nightingale Film”은 어머니의 인터뷰 영상으로 더욱 풍성하게 채워졌다. 어머니의 내레이션 위로 그의 어린 시절 사진과 인터뷰가 더해지자 곡의 감정은 더욱 뚜렷해졌다. “Nightingale Film”을 따라 부르는 아티스트와 관객은 마치 한 가족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어 차별적인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이어졌다. 허클베리피는 본 트랙의 가사에 대해 자부심을 표하며 더욱 열정적으로 무대를 꾸몄다. 게스트들의 등장 역시 계속됐다. 딥플로우(Deepflow)와 넉살(Nucksal)이 무대에 올랐고 익숙한 판소리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얼마 전 온스테이지(ONSTAGE)에 유려한 호흡을 선보인 세 아티스트는 올해 최고의 곡 중 하나인 “작두”를 펼치며 굿판을 펼쳤고, 이그니토(Ignito)가 등장하며 “무언가 (無言歌)”가 울려 퍼졌다.


후반부의 하이라이트는 “Everest”였다. 본 공연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라이브 무대였기에, 더욱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허클베리피는 진중한 피아노 선율에 맞춰서 차분하게 무대를 이어갔고, 후반부에서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뽐내기도 했다. 빨라지는 박자 앞에서도 잘게 쪼개며 랩을 이어가는 그의 모습은 유려했고 뛰어났다. 에베레스트 산의 장엄함을 표현한 영상과 함께 한 허클베리피의 목소리는 격정적이었고 곳곳에서는 포효가 느껴지기도 했다. 이어 “Man In Black”의 무대, 김박첼라와 함께 한 “GoLD”가 이어지며 대장정의 막이 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끊길 듯 끊어지지 않는 앵콜 무대가 계속 이어졌다. 이미 3시간에 달하는 시간을 달려왔지만, 관객들은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Rap Badr Hari”를 열창하고, “허클베리핀의 모험”을 따라 부르며 마치 처음 공연장에 들어온 듯 에너지를 표출했다. 이렇게 능동적인 관객을 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분신을 찾은 700명은 열정적이었다. 3시간 30분에 달하는 러닝 타임동안 아티스트와 관객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매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분신 5는 허클베리피만의 단독 무대가 아니었다. 허클베리피와 관객들이 함께 만들고 함께 지켜 온 공연임과 동시에 그들의 유대감으로 구성된 공연이었다. 뮤지션과 팬이라는 분리된 영역을 넘어서 당일 공연에 함께한 이들은 분명 하나 된 목소리를 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기 싸움을 펼치기도 하고, 자극하기도 하면서 이어지는 공연에는 서로에 대한 자부심과 고마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왜 <분신> 시리즈가 공연계에서 주목받고 있으며, 이 많은 팬이 한 자리에 응집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은 3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모조리 담겨 있다. 허클베리피와 그의 분신(分身)들이 불사르는 순간은 열정적이라는 수식어로는 부족하다. ‘미친 아티스트’와 ‘미친 관객’이 뭉친 자리, 그곳에 한 번 참여해보길 권유해본다. 하루쯤은 허클베리피의 분신이 되는 것도 멋진 경험일 것이다.
글 | Beasel
사진 | EtchForte for kick&snap(kicknsna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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