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당 리뷰는 H.O.M #14에서 멋진 디자인과 함께 읽어보실 수도 있습니다.
https://drive.google.com/file/d/13mIVqLBRmHdH3Jkf-JDcQTJXJ_57Bsnw/view?usp=drivesdk
대피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다. 세상이 불타고 하늘에 떠 있던 것들이 모조리 추락하고 있는데도. 모든 것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는데도. 더 이상한 것은 아무도 알아서 대피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다들 그저 자신의 한 치 눈 앞에 몰두해있다. 이들에게 삶이란 그저 성공을 위한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 지금 발 붙이고 있는 곳이 극락이든, 이승이든, 불지옥이든 무슨 상관이랴. 그저 아득바득 아둥바둥 징그럽게 살아 붙어있을 뿐이다.
그런 도중에 누군가 눈에 밟힌다. 세상이 그에게는 마치 하나의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인 듯, 그는 팝콘을 들고 창가에 앉아 킬킬대며 밖을 내다보고 있다.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그의 태도에 유혹되어 말을 걸어버리고 만다.
"재밌지 않나? 저기 봐. 다들 자기가 어디 올라타고 있는지 정말 하나도 몰라. 그냥 우왕좌왕 사는 거야. 태어났으니까. 남들 다 이렇게 사니까. 그렇게 사는게 맞다고 하니까. 그게 자기를 불구덩이로 쑤셔넣는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지. 하긴, 지금 보니 세상에 불구덩이 아닌 데가 있긴 한가? 저기 건물 무너지는 것 좀 봐. 다 이러다 뒤지는 거야."
"나도 침몰하는 배에 같이 올라타 있는 입장에서 뭐 어쩔 수 있나 싶지? 야, 다 꺼지라 해. 난 적어도 내가 뭘 하고 있는지는 알아. 뭘 해야 하는지도 알고. 씨팔 저기 덩어리진 것들이랑 나랑 같을까? 니들은 그렇게 살다 뒤지는 거야. 내 팝콘 맛만 좋아지는 거라고."
"내가 봐둔 곳이 하나 있어. 난 죽더라도 거기서 죽을 거야. 아무 것도 쫓지 않고, 어떤 것도 쫓아오지 않는 곳에서. 저기 작은 섬 보이나? 난 저기로 갈 거야. 마음 먹었다고. 내가 마음 먹었다는 건, 조만간 해낸다는 뜻이야. 기회를 줄게. 같이 갈래? 가서 칵테일 한 잔씩 하면서 이 불바다를 구경하는 거야. 각별하겠지? 어때?"
그가 당신에게 먹던 팝콘을 건낸다.
화지의 <ZISSOU>. 21세기 히피가 만들어낸 걸작이자 우리에게 보내는 바하마로의 초대장. 히피는 현실의 중력에 붙잡히지 않는 이들이다. 시류라는 물살에 휩쓸리지 않으며, 사회라는 울타리를 거부하고 시대라는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시간과 궤도를 가지고 태양계 너머까지 항해하는 혜성과도 같은 존재인 이들 제일의 관심사는 즐거움과 재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지 자신 하나만을 위한 즐거움과 재미. 화지는 스스로를 히피라 일컫는다. 그 이름에는 굳은 자부심이 묻어난다. 난 내 할 거 해. 넌 어때? 그런 이에게 구물거리는 요지경 같은 세상은 얼마나 징그럽고 한심해 보일까.
갑자기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당신의 의무나 직업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그 삶, 쥐어진 것이 아닌 스스로 손에 쥔 것인가? '내가 할 일을 안다'는 것,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는 곧 존재론과 직결된다. 인간의 역사와 함께해온, 그러나 아직까지도 답을 찾지 못한 그 질문 말이다. 톨스토이의 작품 제목이기도 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말이다. 그리고 <ZISSOU>는 이 질문에 대한 화지만의 명쾌한 대답이자, 화지가 닳고 닳아버린 현대에 던지는 재질문이다.
이 입체적이고 다층적인 앨범을 한 단어로 함축한다면 '주체성'이 될 것이다. 앨범 내내 화지는 세상을 뒤쫓으며 사는 이들을 비웃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자신에 자부심을 느낀다. 오히려 그는 우리에게 물음을 던진다. 어차피 다 똑같이 태어나서 사는 건데 하고 싶은 것도 못 하면서 살면 그거 너무 비참한 거 아냐? 그렇게 눈 앞에 반짝이는 것들만 좇으면서 나방처럼 인분이나 흩뿌리고 살 거야? 조급해하지 마. 너나 나나 짧게 살다가 죽을 거고 저기 우주에서 보면 먼지만도 못 해. 우리가 뭐 못한다고 해서 세상 망하지 않고, 우리가 뭐 대단한 것 해냈다고 해서 갑자기 세상이 화려하게 변하지도 않아. 그냥 세상은 세상대로 흘러가고 우주는 우주대로 돌아가고 나는 나대로 살아가는 거야. 그러니까, 즐겨. 삶이란 주어에 어울리는 수식어는 아득바득이 아니라 유유자적이야.
이런 거시적 시야는 허무주의와 현실 감각을 동시에 가져다 준다. 야누스의 앞뒷면과 같은 이 둘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할 지는 결국 마음 먹기 나름이다. 화지가 말하는 '우린 우주의 작은 점'이라는 문장은 허무주의의 그것이 아니다. 언젠가 다 죽는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는 수용의 자세다. 멀리서 볼 때 우리가 아웅다웅하는 모든 것이 그냥 평온한 수면이나 다를 바 없다면 오히려 나를 위해 사는 것이 맞다. 때와 상관 없이 언젠가 다 죽는다면, 지금 내가 서 있는 현실을 최선을 다하여 음미하는 것이 맞다. 삶에 치여 상처투성이가 될 것이 아니라 삶을 옆구리에 끼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 맞다. 화지는 그렇게 떠난다. 바하마를 찾아, 이르바나를 찾아.
화지가 찾아 나선 이르바나는 멀리 있는 이상향이 아니다. 언젠가 도달할 극락이 아니다. 삶의 밀도를 낮추고 그 사이에 에어포켓을 만드는 일이다. 현실에 떠밀려 있던 나에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완충지대를 만드는 일이다. 이 앨범의 인간적인 면모는 화지가 단지 '너희는 나처럼 못해'라며 일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초반부에 보인 오만한 듯한 그의 태도는 자신의 철학을 전달하기 위한 표현 방법일 뿐이다. 오히려 '나도 너와 그다지 다르지 않아'라며 공감의 손을 내민다. 다만 그가 믿는 것은 단 하나, '이게 다는 아닐 거야.' 바로 희망이다. 아무리 이 세상이 망해간다 해도, 살아있는 모든 것의 목숨값이 매겨진다 해도 이게 다는 아닐 거라는 희망. 생존하는 동물이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그리고 다짐. 바로 이것이 <ZISSOU>의 위대함이다.
<ZISSOU>에서는 세심하면서도 과감하게 빚어낸 영소울의 비트 위에 풀어낸 화지의 삶에 대한 견해가 빛난다. <ZISSOU>가 발매된지 8년이 지났지만, 그 뒤로 세상은 더욱 더 극단으로 치닫고 있으며 사람들은 영혼이 바닥나 공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구출을 넘어선 구원이 필요한 시점에 <ZISSOU>를 다시 들어본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현실을 살다 삶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쾌락을 탐하다 꿈을 놓쳐버린 사람들. 남은 것은 텅 빈 시간을 채우는 우울과 창문 밖에서 넘실거리는 화마의 열기다. 그래서 더욱 우리 모두에겐 바하마가 필요하다. 석양을 보며 한 모금 들이킬 여유 한 잔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매 분 매 초 사이에 존재하는 이르바나를 찾아야 한다. 어딘가 빼꼼히 내밀고 있을 희망의 옷깃을 붙잡아야 한다.
우리는 인간이니까.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인간으로 죽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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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요즘 국게 너무 들어오기 싫었습니다. 특히 최근 몇 주는 쳐다보기도 싫을 정도였네요. 그래도 화지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보자, 하는 생각에 지난 매거진에 실었던 리뷰를 가져왔습니다.
그럼 즐겁게 읽어주시고 매거진에도 꾸준히 관심 가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티클이 진짜 예술적이네요
좋은 글은 추천!!!!
발매 당시에는 멋 모르고 들었었는데 그 사이 세상이 더 미쳐 돌아가서 그런가, 다시 들어보니까 와닿는게 많더라고요
화지 zissou 에 대한 글의 글쓴이분의 관점과 의견에 동감합니다 걍 즐기는거죠
좋은 글이네요. 화지는 가사 하나로도 소름이 돋게 만드는 몇 안되는 래퍼라고 생각합니다. 보컬도 매력적이고 랩도 그루브가 유연하다보니 자주 손이 가는 앨범인 것 같아요. 상아탑의 "꼼수쓰지 말고 그냥 열심히 하라던 아버지도 퇴근길 로또 하루 하나씩", 이르바나의 "내 유통기한은 축복이야" 이런 가사들 처럼 머리를 띵하게 만드는 명가사들이 앨범 전체에 포진해 있고요. 참 좋은 앨범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앨범 TOP 5 안에 들어갈 정도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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