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힙합을 좋아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또 사람들이 힙합을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요?
국내에도 힙합이 메인스트림 장르가 되면서 사랑받는 주요인은 좀 달라졌지만, 그래도 역시 타 장르와 차별화되는 가장 큰 매력은 본인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가사와 그 안에 담긴 솔직함입니다.
하지만 힙합의 작법에 있어서도 본인의 이야기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소설이나 영화처럼 지어낸 설정에 따르는 것이 랩으로도 당연히 구현 가능하고, 그 작법을 스토리텔링이라 부르기로 했지요.
그런데 그 솔직함이 아무래도 힙합만의 가장 큰 차별점이다보니 유난히 타 장르, 타 분야에 비해 스토리텔링이 스토리텔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고, 그로 인해 많은 관심과 혼동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철저히 국힙 기준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pgKDIE8bHc
사랑해 누나 - Verbal Jint (2001)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 전혀 힙합을 모르던 내가 조금씩 변하고 있었네
호기심으로 가입한 동호회가 나의 삶을 힙합의 그 짜릿함에 중독시키는 사이
난 그녀를 만나게 되었어"
국힙 스토리텔링 랩은 생각보다 유서가 깊은 편입니다. 한국힙합의 교과서로 칭송 받는 [Modern Rhymes EP]에서 한국어 라임론과 함께 들여왔던 것이 스토리텔링 랩이니까요.
하지만 '사랑해 누나'에서 버벌진트의 스토리텔링에 대한 반응은 희한하게 돌아옵니다. "너 고딩 때부터 랩 시작했다매? 근데 왜 말이 다르냐?"
같은 앨범 안에 있는 제목부터 친절한 'Drama'는 걍 딱 봐도 픽션인 게 보이니까 전혀 논란이 생기지 않았지요. 하지만 '사랑해 누나'는 평소 래퍼들이 본인 이야기를 뱉는 방식을 그대로 가져오면서 또 일상에 있을 법한 얘기로 스토리텔링을 쓰니까 사람들이 현실과 픽션 사이에서 혼동을 갖게 됩니다. 여기서 몰입도가 올라가는 효과가 생기게 되지요.
앞서 언급한 'Drama'처럼 100% 의심 없는 스토리텔링으로 받들어지는 곡들 또한 적지 않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JWSXdx5Ha0
夏夢(하몽): M2-Part 1 - MC Meta (2003)
"또 다른 생각 없이 난 전화를 끊는데 순간
내 귀를 의심케 만든 소릴 듣고 말았어 그만
″이것 참 오랜만이구만, 내 오랜 친구.
결국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날 운명이군.″
그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으로 다가온 그 말"
"그놈의 억센 말이나, 약속 따위나, 지난 날이나 생각 안 나
확실히 생각나는 건 딱 하나
그 새낀 분명 내가 10년 전에 죽인 친구잖아"
이런 '하몽'과 같은 곡은 스토리텔링의 유려함과 곡의 완성도에서 극찬을 받는 것이지, 실화 여부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닙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S399GWTdw4
Ghostwriter feat. Kebee - Loptimist (2008)
"몇 달이 지나 TV를 틀었는데 what?
내가 썼던 가사를 왜 녀석이 부르고 있어?
작곡? 작사? 네가 힙합의 전도사인지는 몰랐어
가슴을 후벼파는 가사라는 극찬
네 가슴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그 천재라는 훈장, 그건 내 것이어야 해"
"후속곡의 가사도 부탁한다면서
계좌번호를 묻고 새 작업물을 꼭 맡아 달라며 대답은 안닫고 끊었지
이튿날 0원이던 잔고가 250만원, 여태 음악으로 번 돈보다 이게 훨씬 많아"
00년대 당시 현실과 픽션의 혼동이 가장 절정에 다다랐던 곡은 바로 '고스트라이터'입니다.
'사랑해 누나'는 그나마 도입부에서 VJ 본인의 상황과 다른 '힙합동아리 막 가입한 힙알못 대딩'이라는 가상의 설정을 박아놓고 시작하기라도 했는데, 이 곡은 키비가 아주 작정하고 배경 설정 및 화자가 자신인 마냥 설정하고 랩을 썼습니다.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키비 이야기가 맞다고 봐도 이상할 게 없는 내용입니다.
[Mind Expander] 자체가 당시에 적지 않은 관심을 받았지만 그 안에서도 특히 큰 이목을 끌었던 건 매드 클라운의 '이빨'과 더불어 '고스트라이터'의 실화 여부였었지요. 실화와 픽션의 줄타기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작전에 성공한 겁니다. 키비는 시간이 한참 지나고서야 이 곡은 100% 픽션이라며 못을 박았었지요.
분명 비교적 사람들이 순수한(?) 때이던 2000년대라 더더욱 사실이라 믿었던 것도 있지만, 이 모호한 경계는 현대에도 여전히 먹히는 작전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aHiT-tDPRs
우성인자 - QM (2017)
"애들을 불러 모아 *** 바지를 벗기고 자위를 하라 했지
나에겐 *** 팔을 잡고 있으라며 시켰지
안 잡으면 나도 바지를 벗겨 버리겠다고
무서웠던 난 두 눈을 감고 걔 팔을 잡아채고
그날 *** 새벽에 옥상에서 힘껏 날았지
이 양아치새끼, 우린 다 네 짓인걸 알아"
비교적 최근인 2010년대 후반, QM이 자신의 실화인지 스토리텔링인지 분간하기 힘든 가사를 써냈고 이 역시 "이거 실화냐?" "요즘 학폭 논란 있는 걔 아냐?" 라며 리스너들의 관심을 이끌어 냅니다.
QM는 그 줄타기를 더 아슬아슬하게 즐기기 위해 실명을 거론한 척 벌스 곳곳에 삐 처리를 하는 치밀함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스토리텔링 랩에는 부정적인 이면도 있습니다. 픽션인 만큼 가상의 인물에게 수위를 맞출 필요가 없었고, 막상 그게 청자들에게 불편함을 야기시킨 것이죠.
https://www.youtube.com/watch?v=Av1chAlaJkQ
졸업앨범 - Black Nut (2010)
"거세게 저항하는 그녀의 몸을 붙잡아
아까 찍은 그놈의 시체사진을 봐
그러자 눈깔이 뒤집힌 채로 바닥에 엎어져 몸을 부르르 떨어
난 더 쾌감을 느껴, 기왕 이렇게 된거 난 끝까지 즐겨
그리고 질내사정 후에 그녀를 죽여"
블랙넛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그를 비난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곡이지요.
표현 자체가 상스러워서 싫다는 견해엔 그럴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여자를 (혹은) 동창생을 저렇게 여길 수가 있지? 사상이 글러먹은 거 아냐?" 라는 반응도 적지 않은데, 이게 스토리텔링 작법에서 벗어난 과몰입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저 가사를 실화라고 믿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텐데 말이죠.
이 이전에 NODO가 양아치 기믹을 달고서 2008년 오버클래스 크루 인터뷰에서 "헤이터들 다 칼로 찔러 죽이고 싶다" 라는 뉘앙스의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힙합 커뮤니티들이 "저게 사람이 할 소리냐?" vs. "컨셉 달고 하는 소린데 뭐가 그리 못마땅하냐?"로 불타올랐었지요.
https://www.youtube.com/watch?v=IG2DXJqmI_w
꼴 - Verbal Jint (2008)
"말 많았던 OVC interview에 대해서는 글쎄..
추격자를 보고 하정우를 길에서 볼 때
나쁜놈이라고 욕하고 때리는
시골에 계실 것 같은 노인네 같은 리스너들이 많아서
솔직히 실망했고, 민망했고, 화났어
뭐 그리 민감해 또? 가사는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잖아 꼭"
이에 대해 같은 크루의 VJ가 이러한 대답을 남깁니다. 아직까지 기믹에 대한 개념이 정착되지 않았을 때 혼동을 넘어 잘못된 과몰입으로 비난하는 이들에 대한 일침이었지요.
2008년 곡이지만 훗날 블랙넛 논란에도 여전히 유효한 라인이라 생각합니다.
현대에 이르러 스토리텔링 랩이 온전히 정착이 된 후론 곡 단위를 넘어서 앨범 단위, 혹은 래퍼 스스로를 현실과 픽션의 미묘한 줄타기에 놓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나는 경찰차 맨날 타, 하지만 금방 또 풀려나" / Hit Up My Plug (2018)
"Uneducated Kid, 나는 조직이랑 연관이 돼 있어" / Unknown Verse Cypher ep.4 (2018)
앞서 언급한 노도와 더불어 래퍼 자신을 기믹화한 경우는 이전에도 종종 있어왔으나, 그래도 국힙 기믹 래퍼의 대표주자는 단연 언에듀케이티드 키드일 겁니다.
아예 본인의 신상을 아무 여자랑 자고, 마약을 하고, 돈을 만지다 경찰서 들락날락하는 인간으로 설정해 버리고 그 기믹 안에서 쓰는 가사들은 전부 본인의 이야기로 만들어버린 것이지요.
한 명의 래퍼로서 솔직한 이야기와 스토리텔링을 구별하는 수고를 없애버리고 래퍼 자체가 각본이 되어버리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언에듀 자체로서 돈이랑 여자 많은 거, 깡패들이랑 논다는 거 진짜냐며 현실과 픽션 사이에서 혼동하게 만들어 버렸지요.
이 방식은 너무나도 잘 먹혀들어서 현재의 씬에서 대기믹시대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습니다.
이와중에 줄타기가 아닌, 대놓고 땅에 서서 줄을 잡고 휘적휘적대는 분도 있습니다..
"만약 나가더라도 심사위원으로 가겠단 거나
내 친구랑 내 회사를 곧 만들겠단 거나
제대로 마무리 못한 [녹색이념]을 또 내겠단 거나
넌 전부 현실감 없는 어린애의 얘기로만 받아들여" / 가좌 - TakeOne (2021)
"이제 날 고소해, 그저 음악 안의 가사 아니게 현실로 꺼내" / 자유 - TakeOne (2021)
그리고 앨범 단위로서, 1시간동안 집중적으로 그 줄타기를 즐기는 경우도 나타나곤 합니다.
이전에도 산이, 팻두 등이 풀랭쓰를 다 활용하는 컨셉 앨범을 내놓기도 했으나 이건 말 그대로 가상의 설정이 확고한 컨셉 앨범이고, 테이크원은 그와 달리 앨범 내내 현실인 척 픽션인 척 모호한 방향성을 만들어 냅니다.
앨범 설명란에 대놓고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라고 박아놓고 막상 픽션이라는 말이 전혀 없었던 [녹색이념]의 스토리를 그대로 이어간다는 점이나, 앨범 밖에서도 'FIVE' 등의 참여곡에서 [상업예술] 속 스토리와 완전히 동일한 내용의 가족 및 전 여친에 대한 벌스들을 쓰면서 청자들을 헷갈리게 만들고, "실화인데 안전장치 만드려고 허구라 한 거 아냐?"나 "픽션인데 몰입도 높이려고 현실감 있게 설계한 거겠지"라는 등의 반응을 이끌어 냅니다. 앨범 단위로 현실과 픽션 사이 줄타기를 가장 재밌게 한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현대에 이르러 스토리텔링 기법의 확실한 정착과 예술 작품에선 실화에 그렇게 목숨 걸지 않는 쪽으로 사람들의 의식이 변한 것도 있고 해서 과거만큼 실화 여부로서 그렇게 큰 논란이 된 작품은 아닙니다. 오히려 논란이 된 것은 스토리 그 자체의 퀄리티 문제였으니까요.
그와중에 [상업예술] 속 여성의 정체가 이 사람 아니냐고 캐묻는 시도도 있었으나.. 테이크원이 허구라고 못 박은 만큼 굳이 과몰입을 할 필요는 없다고들 여겼는지 큰 이슈로 번지진 않았지요. 물론 저도 실화와 픽션을 교묘하게 섞어 놓은 작품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힙합은 기본적으로 자전적인 이야기와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 장르였고, 그걸 비틀어서 완전한 각본을 만들어 그게 실제 이야기인 듯 혼동을 주는 재미를 쏠쏠히 만들어 내곤 하였습니다.
그 사이에서 온전한 각본임에도 그 래퍼의 실제 인성 의혹을 받는 기현상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힙합 속 스토리텔링 및 기믹은 기본적으로 각본을 토대로 하는 소설이나 영화와는 다른 변주의 재미가 분명 존재하는 장르입니다. 사람들이 힙합을 좋아하는 첫 번째 이유까진 아니어도, 알게 모르게 즐기고 있는 한 부분일 겁니다.
가사에 본인의 이야기임을 암시해서 해석에 재미를 준 검정치마의 thirsty가 생각나네요
고스트라이터는 진짜 스토리를 그 당시 너무 현실성 있게 풀어놔서.. 대부분이 대체 K가 누구야 하면서 K를 유추 하기 시작했고.. 힙플쇼였었나..키비가 그분에 대해서 몇곡 더 쓸거라고 얘기 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요.. 실제로 후속작으로 그림자라는 트랙(K의 입장)도 나왔었고.. 나중에 픽션이었다는 얘기 듣고 멘탈이 와장창...
우성인자처럼 실화여부 궁금한거 또하나... 엠씨스나이퍼 - 데이빗
우성인자는 픽션이라고 qm이 밝힘 qm 학교다닐때는 카톡이 없었음
사랑해 누나는 중간에 버벌이랑 사륜 까는 구간이 있는데도
화자를 김진태로 착각하게 된 경위를 모르겠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제가 평소에 하던 생각들 글로 써주셨네요 ㅋㅋㅋ
아직도 혼란스럽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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