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www.youtube.com/watch?v=gQlv0Q9ANVQ
블러드 오렌지는 항상 예술이라는 행위에 있어 그 초점을 직접적인 서술이 아닌 특정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에 맞추어왔다. <Coastal Grooves>는 80년대 뉴 웨이브 사운드와 R&B 사운드가 뒤섞인 미니멀하고 섹슈얼한 작품이었고, 그의 지난 두 작품이자 최고작으로 손꼽히는 <Freetown Sound>와 <Negro Swan> 위에서 그는 흑인 대서양의 역사와 흑인 퀴어로서의 아픔을 스포큰 워드, 재즈 피아노, 복음성가 샘플, 도로의 소음을 엮어내 인류학적인 감정의 윤곽선을 그려내었다. 음악가보다 작가라는 수식어가 더욱 어울리는 그는 음향적인 부분에서보다 서사를 직조한다든지, 혹은 사운드를 재료로 사용하며 집단적인 기억과 개인적인 체험을 동시에 상기시키곤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공기와 빛, 그리고 소음과 침묵으로부터 탄생되는 질감 속에 파묻히며 그 일부로 기능하게 될 뿐이다.
즉, 블러드 오렌지의 음악은 굉장히 추상적이다. 그는 본인만의 특색인 모호한 감정을 교조적이거나 과잉된 모습으로 드러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앞선 문단에서 언급했듯이 그의 가장 큰 능력은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것 이전에 좋은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마지막 앨범 <Negro Swan> 이후 7년이 지나 발표된 <Essex Honey>는 어딘가 굉장히 이질적으로 보인다. 여전히 본작에서 대부분의 맥락은 과감히 생략되어 있고, 앨범의 제목이나 일부 트랙들의 이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지리적인 지표들만이 일부분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동시에 <Essex Honey>는 지금껏 그가 보여준 그 어떠한 작품들보다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음반이다.
2023년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한 뒤로부터 기록되기 시작한 <Essex Honey> 속에서 블러드 오렌지는 자신의 수많은 동료들, 손님들과 함께 부드럽고 광활한 사운드스케이프 속에서 조용하고 오랜 잠을 청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음악 속에서 흔히 사용되던 프로그래밍 드럼 비트 대신 느리게 흘러가는 피아노 사운드가 대부분의 트랙들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그가 본작에서 형성한 분위기 역시 안개가 낀 듯이 고요하고 또 고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고요는 단순히 차분하거나 평화로운 상태로 말하기보다는, 개인으로써 느끼는 무력감과 떠나보냄의 과정과 이에 관한 고찰로 표현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지 않을까. 여전히 블러드 오렌지의 손에 의해서 슬픔이라는 감정은 마치 블러드 오렌지 자신처럼 그 형상을 잃은 모습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그 음악 속에 파묻히며 그 일부로 기능하게 되니 말이다.
오프너 넘버 "Look At You"에서 리스너들은 흐릿하게 번져가는 피아노 사운드와 보컬에 이끌리다 어느 순간 갑작스러운 변화와 정적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는 곧바로 "Thinking Clean"으로 이어지며 당장에라도 터져 나오듯이 춤을 춰야 할 것 같은 리듬이 흘러나오지만, 정작 이 리듬은 그러한 쪽으로 힘을 발휘하지 않고 결국엔 무너져내리게 된다. 곡이 흘러갈수록 피아노 사운드는 추상적으로 해체되고, 즉흥적인 첼로 선율만이 남아 허공을 헤맬 뿐이다. 마치 살아있는 순간마다 불현듯 찾아오는 부재의 그림자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지 않는가? 이러한 <Essex Honey>만의 진행 방식은 블러드 오렌지가 이번 작품에서 선택한 감정의 언어가 직설이 아닌 우회와 중첩임을 보여준다. 트랙 사이사이에 삽입되는 짧은 피아노 라인, 불현듯 솟아올랐다 사라지는 신스의 파편, 혹은 피처링 아티스트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흩어져 버리는 순간들은 모두 공백과 단절의 체험, 그 일부인 것이다.
그러나 본작은 어두움으로만 잠식되지는 않는다. "Countryside"에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면 어쩌면 어머니를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라며 희망찬 상상을 하고, "The Field"에서는 The Durutti Column의 샘플 위로 파도 소리와 정글 비트를 융합시키며 잠깐의 위로의 시간을 낸다. 본작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전작과 달리 앨범의 모든 요소가 일정한 톤과 장소로 묶여있다는 것인데, 영국적인 늦여름에서 초가을의 시간을 담아낸 <Essex Honey>는 이에 걸맞게 햇살이 비치며 소심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아지랑이 같은 따스함이 깃들어 있다. 신디사이저 사운드와 화음으로 완성되는 보컬 퍼포먼스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아름답고, 그 어떠한 왜곡도 없는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에서는 선명함과 순백함이 느껴지며, 앨범의 모든 멜로디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슬픔이 깃들어있다. 이는 블러드 오렌지의 애도의 과정이 반드시 직선적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의 애도는 순간의 위안과 다시 찾아오는 슬픔이 교차하며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순환인 듯 하다.
그의 앨범은 항상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피처링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으나, 본작의 피처링 아티스트는 눈에 띄게 더욱 다채롭다. 본작에는 캐롤라인 폴라첵, 밴드 턴스타일의 브렌던 예이츠, 수단계 캐나다 싱어송라이터 무스타파, 과테말라 출신의 첼리스트 마베 프라티, 로드 등 내로라하는 인디 씬의 슈퍼스타들이 참여하였으나, 이들은 앨범에서 단 한순간도 본인에게 리스너들의 시선이 집중되게 만들지 않는다. 그들은 앨범의 일부가 되어 블러드 오렌지가 탁월하게 구축해낸 고요한 사운드 스케이프 속에 스며들어, 감정의 결을 함께 형성하고 보조할 뿐이다. 아티스트 저만의 개성 있는 음색들과 수많은 악기 사운드들이 어우러져 불필요한 여백을 식하고, <Essex Honey>에 밀도와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리고 이를 완성한다.
<Essex Honey>는 블러드 오렌지가 프로듀서로써 가진 역량을 가장 완전히 보여준 작품이자 그간 그가 구축해온 자신만의 음악을 한층 더 개인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린 음반이다. 여전히 이는 화려한 변수나 선명한 메시지의 전달로 이루어지지 않으나, 그렇기에 본작은 더욱더 진실하고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지난 7년의 시간을 모두 녹여내고 융합해낸 본작은 한 편의 내밀한 기록이자 공간적인 경험이라 단언할 수 있다. <Essex Honey>의 블러드 오렌지는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성숙한 모습을 하고 있다. 때로는 주의를 갈구하지 않고, 억지로 붙잡지 않는 것들이 더욱 소중하다 느껴지는 때가 있다. 블러드 오렌지와 그의 음악이 바로 그러한 존재들이다. 그러한 점에서 블러드 오렌지는 여전히 독보적이고 특별하다.
https://hausofmatters.com/magazine/w-hom/#27




첫 문장이랑 전체적으로 되게 공감되네요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