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예 웨스트는 지금 시점에서 믿기지 않겠지만 모두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래퍼였던
시절이 있다. 하지만 그의 4번째 앨범 이후로 그는 다른 차원의 힙합아티스트가 되었고 역시 다른 차원의 멍청이가 되었다. 칸예 웨스트의 천재성이 그의 멍청함과 악랄함을 변호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떤 광기나 비이성적인 행동들에서 관습과 상식을 답습하지 않으려는 의지도 본다. 그리고 그런 의지가 없었으면 과연 칸예식 1906년이 가능했을까. 인과관계는 아니지만 상관관계는 있지 않을까. 진실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단언할 수 있다. 어느 시기부터 그의 자아는 분열되고 폭주하기 시작했다.
이 분열의 시작은 곰돌이가 사라지고 808 드럼이 그 자리를 채우는 순간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808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들 알 것이다. 롤랜드의 드럼을 대체하기 위한 시도가 어그러져서 실패로 귀결되었다가 남부힙합과 포스트 디스코에서 부활했다. 그 이유로는 드럼이 세팅이 오래 걸리는 것에 비해 808은 간단하게 드럼을 해결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롤랜드의 요상하고 정형화되어 있지 않은 사운드는 드럼을 찾는 이들으로부터 외면당했지만 오히려 그 자체 때문에 현대음악을 이끄는 명기가 되었다.
808의 변조된 음색과 사운드는 하나의 무기가 되었는데 이 기계는 마치 운명처럼 칸예 웨스트를 만났고 칸예는 이 기계의 가능성을 확장시켰다.
음울한 감성, 오토튠, 미니멀리즘, 습윤한 사운드 등등 이 앨범의 감각은 지금도 체감되는데 2008년에 만들어졌다고 믿을 수 없는 세련됨을 가지고 있다.
곡들의 구성, 뒤틀리고 변조된 음성은 칸예의 고통을 묘사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급격히 줄어든 샘플링과 사라진 랩이다. 예컨데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일상과 환상의 실선을 지운 것처럼 펩 과르디올라가 포지션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든 것처럼 칸예는 알앤비와 힙합 사이의 경계에 거대한 씨앗을 심었다. 그리고 그 씨앗은 발아되고 만개해 또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나는 칸예의 곡들을 듣는다. street lights, paranoid 등등 거기 담긴 멜로디와 신스음,808베이스를 들으며 나의 취향이 여기서 탄생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후 칸예는 명반 두 장을 더 발매하고 그 후로는 하향세를 급격하게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 겪는다.
그러나 808은 믿을 수 없는 가능성을 실현했다. 오토튠과 믹싱, 신스와 808의 사운드는 더없이 간결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칸예가 던진 것은 사운드만이 아니라 정서이다. 칸예에 의해서 힙합은 나약하다고 폄하되는 슬픔과 우울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808이 위대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이 앨범은 우리의 인식을 넓히고 사운드를 변혁시켰다. 무엇보다 새로운 감정을 힙합/알앤비에 선물했다.
이거지 추천 누릅니다
이거죠
크 개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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