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는 그의 대학졸업축사를 이런 일화로 시작했다.
어느 날 늙은 물고기가 젊은 물고기들에게 물었다. '얘들아 물은 괜찮니?' '네' 그러고 젊은 물고기들은 길을 갔다. 그러고 물었다. '대체 물이 뭐지?'
이 일화가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우리는 삶에 잠식되어 오히려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예술은 허구이다. 허구를 통해 진실로 나아가는 통로이다. 우리를 물 밖으로 내보내어 생각을 하게 한다. 하지만 모든 예술들이 그러는 것은 아니다. 매우 특별한 예술만이 이를 해낸다.
슬퍼보인다고요 어머니? 아니요 슬픕니다.(seems, madam? nay, it is)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이 대사는 보이는 것과 진실 사이의 간극을 표현한다. 아닌 게 아니라 햄릿이,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기표와 기의가 어긋난 시공간이다. 칸트는 우리는 물자체를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주체와 객체 사이의 간극을 인식하기 시작한 기점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를,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니체는 언어의 한계를, 푸코는 권력을 호명하며 우리가 물자체로 불리는 진실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맞다.
삶에는 기표와 기의의 차이가 존재한다. (기표란 사과, apple 같은 단어이고 기의는 사과 그 자체이다. 말하자면 기호와 기호가 말하고자 하는 바 정도로 될 것이다. 쉽게 말할 수 있는데 굳이 기의니 기표니 하는 난해한 단어들을 섞는 것은 그냥 쉬운 걸 어렵게 말하면 있어보이기 때문이다. 나도 소쉬르나 기표,기의 잘 모른다.) 연인의 기호를 읽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타인이기 때문이다. 타인은 고대 문명의 유적이다. 고대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볼 수 있다. 하지만 고대문명은 없다. 존재한다는 상태만 인식가능하지 본질을 깨달을 수는 없다. 하지만 예술은 그 본질을 자각하게 하려는 시도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많은 철학자들이 지적했듯 우리의 주관과 인식은 한계가 있고 우리는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주관과 기표의 인식은 왜곡되어 있다.
하지만 기표 없이 우리는 기의를 전달할 수 없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이 부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예술은 미묘하게 다르다. 수단이 목적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수단은 곧 형식이다. 언어를 단지 서사를 나르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작가의 언어는 못 미덥다.
시선의 윤리와 방법에 고민하지 않는 감독 역시 그렇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표와 형식의 한계를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표와 기의의 일치, 주제와 형식의 결합. 그것이 예술이 나아갈 수 있는 경지다.
예로 시민 케인을 보자.
노년의 케인이 분노를 표출한 뒤 거울들을 지나치는 장면이다. 노년의 케인이 분노를 표출한 뒤 거울들을 지나치는 장면이 있다.
시민 케인은 딥포커스 양식을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딥 포커스 양식은 화면의 전경,중경,후경을 비롯한 화면의 모든 이미지에 초점이 맞는 촬영방식이다. 지금 저 장면서 영화는 거울 속에 맺힌 수많은 케인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는 여러 사람들의 시점을 통해 케인의 삶을 구성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케인의 상들은 그들 모두가 각자 생각한 케인이다.
저 수많은 케인들 중 진짜 케인을 구별할 수 없다는 것.
저 모두가 케인이라는 것을 담아낸 연출이다. 그러니까 영화도 우리도 케인이라는 사람을 모른다. 시민 케인을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룬 영화라고 해석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이란 얼마나 깊고 복잡하며 모호한가를 표현한 영화다. 저 수많은 케인들에게 선명한 초점을 맞춘 이유는 그 모든 자아들 모두가 찰스 케인이며 동시에 그 어떤 모습도 케인이 아닌, 명확히 답을 제시할 수 없는 모호한 상태가 인간의 실존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제와 형식의 명확한 일치이다. 오슨 웰즈와 톨랜드는 시선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정확하게 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생각과 시선의 미약한 가능성을 알았기에 저런 장면이 가능했다. 그들은 무지를 알고 진실을 알기 위한 수단의 한계를 인지했다.
예술은 이것이다. 형식에 대한 고민을 가지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형식과 주제를 뛰어넘을 수 있다. 라캉은 말했다.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 이 말은 속는 자가 방황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알면서도 속아주는 사람이 방황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술이 허구임을 알면서 속아주고 받아들인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가고 삶을 인식한다.
힙합음악에서 예술성을 찾을 수는 있지만
예술성을 찾으려고 힙합음악을 접하면
음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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