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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총 맞았다가 살아돌아온 국힙 평균 리스너 1입니다. 맞은 곳이 이리저리 쑤셔서 아무런 글도 안 올리고 있었는데, 역시 관종은 관심을 먹고 살아야 하는 건지 엘이 글을 찬찬히 보다가 글 하나를 써보고 싶은 게 있어서 이리 왔습니다.
주제는 '장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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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락, 힙합, 디스코 같은 '큰 장르'들도 있지만, '익스페리멘틀 힙합', '얼터네이티브 힙합', '얼터네이티브 락' 같은 조금 더 '작은 장르들'도 있습니다. 여기서 더 내려가면, 마이크로장르라 불리는 더더 작은 장르들도 있죠.
여하튼, 그래서 '장르'가 뭐냐, 물으면 전 '이름표'라 부르고 싶습니다.
과일 가게 간다고 해봅시다. 뭔가 상큼한게 먹고 싶을 때, '레드 바나나'든 '필리핀 바나나'든 바나나라는 이름표/장르가 붙은 건 안 살 겁니다. 대신 '레드 오렌지'나 '캘리포니아 오렌지'나 그런 것들을 사겠죠. 오렌지가 없다? 그러면 비슷한 감귤류인 제주도 귤이나 한라봉 등을 사먹겠죠. 그러다가 자몽을 사먹으면, 상큼한 맛에 더해져있는 쓴 맛 때문에 기대가 산산조각 날 수도 있을 겁니다.
장르명도 대충 이런겁니다.
대중과 창작자 사이에서 서로 1 대 1 DM을 주고 받을 수는 없으니, "제 노래는 대충 이런 겁니다!"라는 이름표를 붙여놓는 것이죠. 그러면 대중들도 '오 그러고보니 저번에 먹은 캘리포니아 오렌지가 맛있었는데 이번에는 호주산 한 번 사먹어볼까?' 이리 생각해보는 거고, 창작자도 '오 오렌지가 잘 팔리는데, 나도 한 번 오렌지를 재배해볼까?' 이리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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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름표를 붙이는데 "모두가 합의한 일관되며 과학적인 법칙"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이 제가 말하고 싶은 점입니다. 토마토가 채소냐 과일이냐, 맨날 싸우잖아요? 이 다툼의 원인이 전 우리가 '채소'라 생각하는 뭉뚱그린 이름표와 '과일'이라 생각하는 뭉뜽그린 이름표가 딱딱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라 칼 같이 정해져있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봅니다.
장르명에서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게 "익스페리멘틀 힙합"과 "얼터네이티브 힙합"이라 생각합니다.
익스페리멘틀 힙합은 말 그대로 "실험적인 힙합"입니다. 일반적인 사운드/형식이 아닌 힙합은 모두 익스페리멘틀이라 불릴 수 있는 셈이죠. 과일 가게 비유로 돌아오자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먹는 과일이 아닌 "동남아 수입 과일" 코너라고 할 수 있겠죠. 다만 먹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심심한 포카리 맛이 나는 용과와 달콤하고 크리미한 망고의 맛은 천지 차이입니다.
익스페리멘틀 힙합도 이와 같습니다. 다 같이 익페라 불리지만, 생각보다 아티스트 간의 사운드 차이가 굉장히 큽니다.
https://youtu.be/87xS4cgTf68?si=HcytZPqjwKUekbNz
샘플들을 어지럽게 엮고, BPM이 빠르고 글리치와 노이즈가 사방에서 나오는 창녀 겁주기도 익스페리멘틀 힙합이라고 불리고
https://youtu.be/O0XtMGmSUDk?si=CSQ6sUlOxsP9574A
기타가 전면이 나오는 포스트 락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Injury Reserve도 익페라 불리고
https://youtu.be/ewRjZoRtu0Y?si=B31TNp6_RbD1abYu
EDM(빅룸 하우스)의 영향을 받은 자극적인 신스에 방그라/브라질/라틴 리듬을 얹은 MIA의 음악도 익페라 불립니다.
들어보시면 알겠지만, 우리가 통상 아는 힙합 사운드와 "거리가 멀다는 것" 말고는 이 세 가지 음악이 엄청난 공통점은 없습니다.
이러면 뭔 문제가 생기냐,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망고가 뭔 과일이죠?"라고 물을 때 "동남아 수입 과일이요."라고 대답을 들으면, 아 뭔가 좀 다른 맛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 의사소통에 별 문제가 없겠죠. 근데 "동남아 수입 과일"이 뭔 오렌지 같은 것인줄 알고, 동남아 수입 과일은 죄다 달콤하겠다 생각해서 용과를 사먹으면 대참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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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디스코, 하우스, 테크노, 힙합, 락, 하드락, 메탈처럼 "음악적 특징"에 따라 붙인 장르명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디/얼터네이티브/익스페리멘틀 힙합-락-팝 등등은 "동남아 수입 과일"처럼 "우리가 평상시 먹던 것과 다름"이라는 뜻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저 코너에 있는 것들은 맛이 제각기 다르겠죠.)
(얼터네이티브도 생각해보면, "대안적" 즉 그때 주류적 사운드와 다르다는 것이지 생각해보면 각 아티스트마다 사운드 차이가 꽤 크죠. 힙합만 해도, 팝적인 센스가 넘치는 브룩 햄튼과 재즈 힙합/붐뱀인 어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가 다 얼터네이티브도 묶이니깐요.)
그러니 장르명을 묻고 답할 때, 이런 걸 좀 생각해보면 좀 더 원하는 것을 잘 찾기 않을까 싶습니다.
망고 비슷한 걸 먹고 싶었는데 동남아 코너에서 용과 사오면 기분이 좀 슬프잖아요.
개인적으로 익스페리멘털, 얼터너티브보다 곤란하다고 느끼는 이름이 아트 팝 혹은 아트 록 ㅋㅋ 너무 무책임한 이름인데 이 명칭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는 경우가 있긴 해서 난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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