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마이크에 빠져서
지난달부터 앱스트랙 힙합을 디깅했습니다.
원래 엘피나 둠 같은 거물 앨범만 들어봤는데
근래에도 좋은 작품이 정말 많더라고요.
오히려 제법 듣고 나니까
많은 래퍼와 팬들이 매드빌런을 연호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겠더라고요.
그 특유의 괴이한 분위기에 사람을 잡아끄는 마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데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성기를 맞은 두 뮤지션이
하필이면 또 해당 장르의 황금기에
하나의 앨범을 만들기 위해서 뭉치는 일이 어디 흔한 일일까요?
훌륭한 음반에는 저마다 남다른 인장이 있다지만,
'Madvillainy'는 가장 재현하기 힘든 질감을 가진 앨범이 아닐까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Madvillainy>의 몇몇 수록곡은 <Doomsday>의 데모라고 해도 될 정도로 둠의 입맛에 맞춰져 있다. 둠은 가면을 쓴 이후부터 거추장스러운 훅을 떼내고 보컬 샘플을 피처링 게스트처럼 활용하는 기법에 몰두해왔다. Strange Ways, Fancy Clown 같은 곡에서는 보컬 샘플이 처음으로 합을 맞춰보는 것처럼 서투르거나, 둠의 랩에 더블링을 해주거나, 악당이 동료에게 계획을 설명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이는 매드립이 둠의 테크닉을 빌려와 한 단계 발전시킨 것이다. 이 밖에도 인도 영화음악에서 가져온 피리 소리를 자신의 우상 선 라에게 바치는 헌정곡으로 탈바꿈시킨 Shadows of Tomorrow, 매혹적이지만 구취가 나는 여성에게 은근슬쩍 박하사탕을 건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촌극을 그린 Operation Lifesaver Aka Mint Test, 반세기 전 방영됐던 TV 시리즈의 배경음악을 조화시켜 빚어낸 근사한 재즈 훵크 All Caps 등, 매드립은 어딘가 시대에 뒤떨어진 듯하면서 동시에 초현실적인 프로덕션을 통해 둠 자신보다 더 둠스러운 세계를 이룩했다. <Madvillainy>에서 내가 선호하는 곡은 Figaro로서, 아마도 앨범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드럼 프로그래밍과 로니 스미스의 습윤하고 들릴 듯 말 듯 한 베이스가 한 폭의 정경을 이룬다.
둠의 라임은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있는 광범위한 레퍼런스와 닥터 둠과 만화 캐릭터에 대한 불가사의한 애착으로 가득 차 있으며, 앵커가 무성의하게 헤드라인을 읽는 듯한 그의 래핑은 예리함과 아득함을 함께 불러왔다. 이 시기 둠은 16마디로 구성된 전통 라임 구조에서 벗어나 한 개 또는 두 개의 긴 구절을 썼고 수록곡 대부분의 러닝타임이 2분을 넘지 않는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다. 또한 '함축'과 '생략'으로 대표되는 골든 에라의 작사법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 소절 내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가감 없이 내뱉었다. <Madvillainy>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훅이 거의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당시가 넵튠스와 팀발랜드가 지배하던 후크송 시대였다는 걸 떠올려 보면 이런 결정에서마저 그들스러운 삐딱선이 묻어나는 것 같다. 어떻게 20년 뒤에도 흉내 내고 싶어 할 만큼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자아낸 걸까. 흔히 이런 과정은 의사소통으로부터 출발하지만 <Madvillainy>의 경우 말수가 적은 둘의 성격이 앨범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매드립의 회상에 따르면, 둘은 냉전 중인 부부처럼 같은 공간에서 하나의 앨범을 만들면서도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작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매드립이 50개의 비트가 담긴 CD를 둠에게 건네면 마음에 드는 비트를 골라 라임을 입힌 뒤 다시 매드립에게 건넨다. 이거야말로 천하제일의 악당스러운 방식 아닌가.
총괄 프로듀서였던 피넛 버터 울프에서부터 디자인을 담당했던 제프 잰크까지, 제작 과정에 참여한 이 증인들은 완성을 앞두고 앨범에 제대로 된 엔딩 신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둠은 브라질 세션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비트에 라임을 얹어 그 자체로 역사가 될 앨범 제작에 마침표를 찍는다. 날카롭게 치솟는 현악기 위로 메탈 가면을 쓴 악당이 전체 구절을 소화하는 Rhinestone Cowboy는 둠이 감개무량에 젖은 팬들을 향해 폐막을 선포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구멍 난 양말보다 더 많은 영혼을 가지고 있지." 작위적인 박수 소리와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그리고 닥터 둠을 연상시키는 장광설 랩에도 불구하고 이 곡은 희한하리만치 클로징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Madvillainy>를 높이 사는 이들도 The Illest Villains과 Rhinestone Cowboy를 자신의 사운드트랙으로 꼽진 않을 것이다. 마치 서커스를 관람하는 것 같은 샘플링 짜깁기에서는 묘한 과시욕이 일렁이고, 무기력하고 건조한 래핑은 어떠한 조짐도 없이 뚝 끊겨버리고, 동시대 유행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셀 수 없는 아류가 나타난 이후에도 여전히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발산한다. 어쩌면 이 '답지 않은' 감각이야말로 <Madvillainy>의 정체성이자 둠이 가면을 뒤집어쓴 이유일 것이다. "기껏 가면을 쓰고 나왔는데 남들처럼 하는 건 재미가 없잖아요." 대니얼 두밀레의 말이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블레즈 파스칼은 유고집 '팡세'에서 "대다수 사람들이 반대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실제로 곡선의 같은 위도상에 위치할 때가 많다."라는 말을 남겼다. 음악의 언어로 말하자면, 매드립과 둠은 <Madvillainy>를 통해서 파스칼의 전제를 증명했다. 이들의 콘셉트는 괴상할지언정 팬들이 수용할 수 있는 마지노선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시대착오를 범하거나 감성과 노스탤지어에 의존하지도 않고 잡음과 불협화음에서마저 균형감각이 묻어 나왔다. 무엇보다 나를 매료시킨 것은 두 괴짜의 시선이 깃든 루프였다. 이미 오래전에 희극화되거나 도외시되던 장르들, 즉 와와 기타 페달과 베이스가 쨍하고 울려 퍼지는 블랙스플로테이션, 스파게티 웨스턴, 블루 노트 재즈, 브라질 대중음악, 일요일 아침에나 들어봤을 법한 애니메이션 주제곡 등이 빈틈없는 군무를 선보이며 샘플 문화의 예술성을 입증한다. 특히 America's Most Blunted는 <Madvillainy>를 미니어처화한 듯한 곡으로서, 맥락 없이 무작위로 배치된 것 같은 20여 개 샘플ㅡ환각적인 기타 리프, 스티브 라이히의 음성 샘플, 천둥소리 등ㅡ이 긴장과 이완을 거듭하면서 꼭 자아가 있는 것처럼 스스로 질서를 갖춘다. 이 간악무도한 두 악당이 입증하는 바, 클리셰를 깨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에서 멀어지는 게 아니라, 클리셰의 풀 속으로 들어가 덱을 마구 뒤섞는 것이다.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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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감사합니다!
👍👍
둠만큼 멋있는 캐릭터를 가진 래퍼도 드문거 같네요
물론 콰지모토도 있지만
가끔 아저씨 둘이 앉아서 가면이 어떻니 캐릭터 색깔이 어떻니 하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항상 필력에 감탄하고 갑니다
이런 양질의 리뷰를 보면 앨범이 더 좋게 들리네요
감사합니다! 이 앨범이 딱 들을 때마다 더 좋게 들리는 것 같아요
😳
곧 20주년이 되는 앨범이죠!
그 기념으로 매거진에 기고할 리뷰를 기획하고 있었는데, 이 리뷰의 존재가 저에겐 영감이 될지 부담이 될지... ㅎㅎ 읽어보니 부담인 것 같네요 ㅠㅠㅠ
그래도 제가 떠올린 내용들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고, 또 저만이 짚은 부분이 있어서 저는 제 방식대로 다시 해석해봐야겠습니다 ㅋㅋㅠㅠ
(자료 조사 더 해야겠다...)
리뷰는 자기만의 방식이 제일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정진하시길! 제 글보다 멋진 글이 나올 듯합니다.
일매틱 30주년, 매드빌런 20주년, 피냐타 10주년. 기념할 거 천지로군요. 그렇다면 올해는..?
매드빌러니와 피냐타를 묶어서 리뷰해보려는데 공통점과 차이점을 짚는 게 흥미롭네요 😃 둘 다 작업 방식이 은근 비슷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올해 또 다른 대작이 탄생할 수 있을지...??
최고의 앨범은 리뷰조차 최고가 나온다... 너무 잘 읽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양질의 글엔 추천과 스크랩을
감사합니다!
와 진짜 잘읽었어요🔥
감사합니다 🔥🔥
너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와 어쩜 이렇게 리뷰를 잘 쓰시는지요...ㅋㅋㅋ
잘 읽고 갑니다!
혹시 블로그나 따로 글 모아놓은 사이트 같은게 있으실까요..? 님 리뷰글 정독해보거 싶어요 ㅋㅋ
https://m.blog.naver.com/burnaz3
저도 가서 읽어볼게요!!
필력에 감탄했습니다! 양질의 글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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