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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음반 10개

title: Mach-Hommy온암2023.08.12 13:45조회 수 4575추천수 15댓글 18

Original: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음반 15개(https://hiphople.com/fboard/25828180) by 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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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방탄소년단 - LOVE YOURSELF 結 'Answer'

 

 저는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차트의 아이돌 음악만 듣던 소년이었습니다. 멋지게 군무를 추는 아이돌의 모습에 매료되어 학예회 때는 춤 연습에 가장 열정적으로 참여하기도 했죠. 문득 중학교 친구들에게 춤 좀 춘다는 소리를 들었던 게 생각나네요... 얼굴만 잘생겼어도 아이돌 하는 거였는데

 그러던 도중 저는 방탄소년단이라는 그룹에 유독 강하게 매료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으로 진출하던 그들의 유명세 탓도 분명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활동하는 아이돌을 통틀어서도 가장 수준 높은 퍼포먼스 수준과 진실된 가사, 세련된 팝 사운드가 제 감각을 온통 사로잡았거든요. 그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꿈을 꿔가고, 생각이란 걸 하고,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격변 속 태풍의 눈에 이 앨범이 있었습니다. 비록 리패키지 앨범이긴 하지만, 'Euphoria'에서 'Answer: Love Myself'로 이어지는 자기애의 서사는 단편 수필을 연상케 할 정도로 깔끔하고 위력적이었습니다. 멤버 개개인의 매력을 백분 살려내는 프로덕션은 물론이고, [Wonder - Her - Tear - Answer]의 기승전결은 아무 생각 없이 살던 저에게 자기애의 필요성이란 걸 느끼게 했네요. 지금은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어 과거의 저와 방탄소년단 분들께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2018년에 제가 이 앨범을 듣지 않았다면 제가 어떤 모습으로 성장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저는 음악이란 예술을 방탄소년단으로 처음 접했기에 아이돌 음악이나 메인스트림 음악에 대한 편견이 적을 지도 모릅니다. 정말 다행인 일이죠, 아직도 한 장르에만 집착하며 별 같잖은 선민의식을 관철하는 이들을 보면요.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음악을 많이 듣고 있기에 방탄소년단에 대한 애정은 비교적 식은 상태이지만, 항상 신곡이나 새 소식이 들려오면 달려가 확인하는 버릇은 여전합니다. 어쩌면 저는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그 추억을 가슴 한켠에 고이 접어둔 것일지도요.

 


 

2. Kanye West -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

 

 다들 아시거나 인정하지겠지만, 이 앨범은 역사상 최고의 앨범입니다. 저는 이 말을 할 때마다 그 어떤 후회나 부끄러움을 느낀 적이 없습니다. 한 치의 과장 없이 저는 이 앨범이 대중음악이란 개념이 성립된 후 주후죽순 등장한 역작들 중에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차고 넘친다고 봅니다. 그만큼이나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는 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제가 2Pac, Biggie, Eminem, Nas 등의 올드스쿨로 막 원조 힙합에 입문하고 있을 때쯤, Kanye West라는 이름은 저들 사이에서 꽤나 이질적이었죠. 힙합 특유의 남성미나 그루브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적어도 Kanye의 음악이 가장 세련되고도 특별했음은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Stronger는 힙합이 이토록 세련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저에게 깊이 각인시켰고, Runaway는 길거리의 음악이었던 힙합이 예술로 승화될 수 있음을 몸소 체감시켜주었습니다.

 그래서 Kanye의 정수라고 하는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를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들었습니다. 그것은 뭐랄까, 좀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청각적 충격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들어본 그 어떤 음악도 이 앨범의 장엄함과 위대해려지는 욕구에 비할 수 없었죠. Dark Fantasy에서 Gorgeous로, POWER에서 All Of The Lights로, 앨범의 전반부는 완전한 충격이었습니다. 반면에 Devil In A New Dress와 Runaway는 저를 그 뒤틀린 음악 세계에 동화시켰고 Blame Game과 Lost In The World는 한 인간이 내면적 파멸과 묵시록적 종말 전에 대응하는 이미지를 연상시켰습니다. 그야말로 아름답고, 어둡고, 뒤틀린 환상 그 자체였죠. 저는 그 환상에 너무나도 깊게 심취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이 앨범을 들은 후 일주일 동안 다른 음악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마터면 제가 그토록 싫어하는 음악 선민의식을 가질 뻔했죠. 그 모든 반향은 결국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가 이성조차 아득히 초월하는 강대한 감흥을 선사했다는 방증일 겁니다. 사실 평론적으로 보거나, 음악사적 영향력, 자체 완성도로 따졌을 때 이 앨범에 대적하거나 우세에 있는 앨범을 수십 개 정도는 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저에게만큼은 이 앨범을 능가하는 앨범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의 첫 연애 상대는 세상에서 제일 가는 미인이었거든요.

 


 

3. The Notorious B.I.G. - Ready to Die

 

 제가 Juicy를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을 감히 상상조차 하실 수 없을 겁니다. 발성이 좋은 래퍼라고 하면 개코나 사이먼 도미닉을 떠올리고 했던 저에게 작고한 두 전설의 목소리는 신세계를 경험시켜줬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The Notorious B.I.G.라는 남자의 목소리는 노력으로만은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줬죠.

 흔히 음성 기록으로 남아있는 최고의 목소리를 꼽으라고 할 때 저는 Whitney Houston과 Biggie를 선택합니다. Whitney를 선택한 것이야 모두들 다 납득하시겠지만, 수 백의 재능 있는 보컬리스트를 제치고 Biggie를 꼽다니. 꽤나 논란이 될 만한 선택이죠? 그러나 저는 그 선택을 결코 무를 생각이 없습니다. 호흡을 갈고 닦아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던 가창계의 전설들과 달리, Biggie는 별 다른 노력 없이 가장 위압적인 바리톤 음성을 구사했습니다. 제가 어떤 일을 해도 결코 저 짐승 같은 목소리를 가질 수 없었던 걸 알았기에 저는 오히려 그 목소리를 너무나 선망했습니다. 출발선부터 다른 저 괴수의 포효를요. 분명 저 커다란 몸뚱아리도 한몫했을 거야

 하지만 목소리만 훌륭하다면 The Notorious B.I.G.가 역사상 최고의 래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Biggie의 랩은 그다지 현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세 가지를 가지고 있었죠. 목소리, 라임, 플로우. 그것도 극의 경지에 다다른 채로 말입니다. 최고의 역량을 갖춘 비정형적 연주, Biggie는 그것에 가장 생생한 게토 서사를 덧붙였고 그대로 전설이 되었습니다. 제가 Illmatic보다 Ready to Die를 더 좋아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습니다. Illmatic에 Nas가 없었다면 평가가 떨어질지언정 세기의 명반 취급은 받았겠지만, Ready to Die에 The Notorious B.I.G.가 없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저는 힙합 음악에서 비트의 중요성이 랩의 그것보다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만, 흔치 않게 비트의 존재감을 완전히 압도하며 랩 자체만으로 가장 강렬한 연주를 선보이는 인재들이 몇몇 존재하긴 합니다. The Notorious B.I.G.가 그 중 한 사람이죠. Eminem, Andre 3000, Big Pun, Inspectah Deck, Black Thought, Mos Def 등 벌스 하나의 존재감으로 제가 기억하는 Biggie의 래핑을 능가한다고 생각하게 하는 위대한 래퍼들의 이름이 몇 존재하긴 한다만, 그럴 때마다 Ready to Die를 한번씩 들어주면 그 의심은 제 머릿속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고정관념을 경계하고 있으나 The Notorious B.I.G.가 역사상 최고의 래퍼라는 고정관념만큼은 앞으로 쭉 견지할 생각입니다.

 


 

4. JAY-Z - The Blueprint

 

 Nas에게 Illmatic이 있었고, JAY-Z에겐 The Blueprint가 있었죠. 둘 모두 힙합 역사상 최고의 명반을 꼽으라하면 결코 제외될 수 없는 역작들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Illmatic이 Nas에게 과거에 머물러 있는 찬란한 영광만을 선사했다면, The Blueprint는 JAY-Z에게 현재진행형의 제국을 선물해주었다는 것. JAY-Z는 분명 부정할 수 없는 뉴욕의 왕이고 The Blueprint는 최고의 대관식이었습니다.

 제가 JAY-Z를 유독 좋아하는 이유는 역시 그의 목소리 때문입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동년배들에 비해 다소 경박하게 들렸던 그 목소리가 이제는 매우 신사적으로만 느껴집니다. 마치 자신이 이룩한 위업의 정점 위에 자기 외에는 그 누구도 설 수 없다는, 그 오만함과 자신감이 목소리에서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2Pac이나 Biggie와는 다른 맥락에서 제가 힙합 내에서 최고로 치는 목소리였습니다. 비욘세가 콩깍지 씌인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ㄴ 무엇보다 모든 종류의 비트에서 그의 목소리가 빛을 발한다는 통용 가능성, 그 능력이야말로 제이지가 The Blueprint를 포함해 다양한 앨범에서 최고의 기량을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 편 The Blueprint의 프로덕션은 그 이름 그대로 청사진이었죠. 당시 2000년대 힙합에게도, 저에게도 말입니다. 투박한 붐뱁과 다소 천박하기까지 한 클럽튠을 벗어나 과거의 흑인 음악 유산을 재해석한 칩멍크 소울 비트들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겼습니다. 아마 저에게 "어떤 시대의 힙합 스타일이 다시 유행했으면 좋겠냐"고 물으면, 저는 2000년대 초반 라카펠라 스타일이라 답할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철저히 2000년대 초반에 나올 법한 음악의 Stillmatic과 달리 The Blueprint는 현재에 통용될 수 있는 클래식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죠.

 굳이 따로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Kanye West와 Just Blaze의 공이 지대한 것은 사실이나, 저는 Bink!의 이름도 결코 제외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The Ruler's Back은 이 명반에서 떠올릴 수 있는 최고의 인트로였고, All I Need는 앞뒤로 Song Cry와 Renegade라는 걸출한 명곡들에 결코 밀리지 않았죠. 그가 이 앨범으로부터 9년 후 힙합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비트를 주조한 것을 감안한다면 그의 스타일을 망각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일 겁니다.

 Nas는 과거에 머무른 찬란한 영광을 벗어나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찬사를 받아 마땅한 도전적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반면 JAY-Z는 [Reasonable Doubt - The Blueprint - The Black Album - 4:44]의 빅네임과 그 사이의 자잘한 평작~수작들, 음악 내외적인 상업적 성과, 그리고 소수의 피쳐링만으로 6년의 공백을 채우고 있죠. 그런데 그것만으로 충분해보이는 것은 왜일까요.

 


 

5. Kendrick Lamar - To Pimp A Butterfly

 

 음악 또한 사람이 제작하는 예술인 만큼, 연출과 연기를 포함하기도 합니다. 여기, 최고의 연기력과 최고의 각본을 가진 배우 겸 감독이 있습니다. 이 수식어를 영화계에 대입한다면 정말 말도 안되는 천재가 등장한 셈이니, 그 존재에 모두들 찬사를 보내겠죠. 그 말도 안되는 천재가 힙합에서는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good kid, m.A.A.d city는 21세기의 Illmatic이라는 찬사를 받은 역사상 최고의 컨셉 앨범 중 하나였고, Kendrick Lamar의 진솔한 스토리텔링과 TDE의 기획력이 합쳐진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누구도 Kendrick이 자신이 쌓아올린 벽을 넘을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겠죠. 그런데 그는 그것을 해내고 맙니다. 제가 만약 To Pimp A Butterfly에 앞서 good kid, m.A.A.d city를 먼저 들었다면 이 앨범에 대한 첫인상은 훨씬 대단했을 겁니다. 네, 저는 가사 지참 한정 To Pimp A Butterfly를 good kid, m.A.A.d city보다 먼저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는 good kid, m.A.A.d city가 지루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네요. 그만큼이나 To Pimp A Butterfly는 사운드적으로나 가사적으로나 위대한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To Pimp A Butterfly를 둘러싼 2가지의 의견을 정말 싫어합니다. "가사 빨이다", 그리고 "흑인이 아니면 가사를 이해할 수 없다". 실제로 이들이 사실이 아닐 뿐더러 저는 본작을 처음 경험할 때 완전한 정반대의 경험을 했기에 제 감상이 부정되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흑인 음악의 집대성과도 같은 앨범의 프로덕션은 그 안에 쓰인 악기의 수를 다 셀 수 없다고 해도 그 원초적 그루브만큼은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하고, Kendrick의 서사는 흑인 사회에 대한 비판이 아닌 자아탐색과 성찰의 과정이었습니다. 설령 현지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레퍼런스가 존재한다고 한들 These Walls의 반전, u의 열연, The Blacker The Berry의 분노와 Mortal Man의 감동은 그 문화적 간격을 완전히 좁혀놓을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죠.

 저는 To Pimp A Butterfly를 향한 수많은 찬사가 결코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앨범의 진가를 알아보길 원합니다. Marvin Gaye와 Bob Dylan 이래로 그 누구도 이만큼이나 명징한 서사시를 써내린 적 없습니다. 이 앨범은 역사상 최고의 앨범 중 하나이며 동시에 인류 역사상 최고의 기록물입니다. 아직까지도 전 제 사상 중 적지 않은 부분이 이 앨범의 영향을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6. Kanye West - Yeezus

 

 저는 Yeezus를 난해하다고 평가하는 이들의 의견에 아마 영원히 공감하지 못할 겁니다. 이토록 말초적인 자극을 주는 작품이 어떻게 난해할 수 있죠? 물론, 처음 본작을 들었을 때 전 그저 Yeezus를 힙합판 일렉트로닉 음악, 힙합 버전의 EDM이라고 여겼을 정도이니 음악적 무지에서 비롯된 공감 불능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듣고 또 들어도 Yeezus는 제게 여전한 자극을 선사합니다.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로 힙합 앨범을 통채로 듣는 첫 경험을 한 후, 저는 다음 앨범으로 Yeezus를 택했습니다. 궁금했거든요.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가 궁극적 맥시멀리즘이라면 Yeezus는 궁극적 미니멀리즘이란 말에 저는 정반대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득차 Yeezus를 도전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40분에 육박하는 시간 동안 전 단 한 차례의 지루함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금속질의 전자음과 사나운 기류, 단순한 분노 이상으로 뒤틀린 감정선은 제 본능에 그대로 닿으며 절 흥분시켰습니다. 오히려 앨범 끝무리에 등장하는 Bound 2가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정도였죠.

 On Sight의 충격, New Slaves의 카타르시스, Blood On The Leaves의 파멸적인 드랍은 심상으로서 아직도 제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영상 사업의 독점권이라 생각했던 연출이 음악에도 존재한다는 걸 깨닫게 해준 경험이었습니다. 어쩌면 Yeezus를 힙합에 입문할 가장 초기 시점에 청취했기에 저는 수많은 아방가르드, 익스페리멘탈, 앱스트랙 앨범들을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축복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네요.

추후 더 많은 앨범들을 듣고 이 앨범에 다시 돌아와 세세히 분석을 시도해보니 그제서야 Yeezus가 난해하다는 의견들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 모든 사운드 소스들의 배열이나 편집증적인 Kanye의 가사는 제 어휘로 명료히 서술하기란 너무 어려운 것들이었죠. 그러나 듣는다는 행위 자체에 한정해, Yeezus는 난해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음파보다도 앞서 고막에 침투하는 참칭자의 천 줄기 비명은 거시적으로 결국 한 줄기이기 때문입니다.

 


 

7. Lana Del Rey - Norman Fucking Rockwell!

 

 성차별적인 의도는 아닙니다만, 저는 남자보다 여자가 노래할 때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전문적인 음악적 지식이 전무하기에 정확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냥 제 사견으로는 여성의 가창이 남성의 가창보다 아름답습니다. 그것이 이성에게 필연적으로 매료되는 본능일 수도 있겠으나, Lana의 노래는 적어도 본능 따위는 아득히 초월해 저를 단 순간에 매료시켰습니다.

 저는 브랜드화된 아티스트들을 좋아합니다. 앞서간 음악과 패션으로 스스로를 신으로 주장하는 행위의 당위성을 부여했던 Kanye, 거대한 콧구멍과 입술의 180 후반의 비율 좋은 몸과 사업가로서 천부적으로 지닌 멋을 풍기는 JAY-Z, 우리의 Lord Pretty Flacko Jodye Rocky까지, 저는 아티스트의 음악만큼이나 그 아티스트의 외적인 이미지도 중요하게 여기는 편입니다. 그리고 Lana 또한 그들 중 일부입니다. 고전적인 얼굴선의 미모와 고혹적인 팜므파탈적 무드, 싱어송라이터로서의 걸출한 능력 등 제가 Lana에게 끌릴 만한 이유는 차고 넘쳤죠.

 그 중 제가 앨범 단위로 Lana를 처음 들은 Norman Fucking Rockwell!은 그녀의 최고작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가 단숨에 이해갈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딱히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네요. 그냥... 아름다웠습니다. 그리 풍성하지 않은 소리의 겹과 여인의 목소리만으로 Lana는 저의 손을 잡고 제일의 황홀경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녀는 그녀의 세상인 미국에 대한 회의감을 토로하고 있었는데, 저는 그런 불완전한 세상에 대한 강한 동경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Lana가 추억하는 옛 사랑과 미국에 반한 것인지, 혹은 그것들에 대한 연서를 아련히 읊던 Lana 본인에게 반한 것인지.

 Venice Bitch의 변주와 Love Song의 절절한 가창, The greatest의 기타 솔로 등 음악적으로만 논해도 몇 천자는 족히 넘길 수 있겠으나, 저는 그 대신 이 앨범에 대한 순수한 감정 한 쪽만 하나만 남겨놓고 싶습니다. 에로스도, 필리아도, 아가페도 아닌 어떠한 초월적 사랑을.

 


 

8. JAY-Z - Reasonable Doubt

 

 마피오소 랩. 1990년 중반 뉴욕 힙합 씬에서 창조되어 코크 랩과 함께 현재까지 언더그라운드 씬을 중심으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유래 깊은 서브 장르죠. 당장 떠오르는 앨범만 Live and Let Die, Only Built 4 Cuban Linx..., Life After Death, Doe Or Die 등등... 주옥같은 앨범들이 많이 떠오르지만 저는 마피오소의 최고봉으로 Jay의 Reasonable Doubt을 꼽고 싶습니다.

 중절모와 정장을 곁들인 커버 속 JAY-Z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가 이 앨범에 제시한 모습은 제가 동경하는 마피아의 이미지 그 자체에 가까웠습니다. 정확히는 그들의 범죄 사실을 제외한, 중후한 멋과 처연한 생존의 이야기를 동경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결코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되는 그들의 삶. JAY-Z는 그가 마약상으로서 겪은 실화에 가상을 일부 가미해 가장 현실적이고도 매력적인 마피아의 이야기를 완성했지만, 제가 주목한 것은 그 너머에 Shawn Carter가 말하고자 한 삶의 지혜였습니다.

 물론 컨셉과 메시지만 훌륭했다면 제가 이 앨범을 인생 앨범으로 선정하지도 않았겠죠. Politics As Usual과 Dead Presidents II는 당시 동부에서 가장 고급진 비트들이었고, Brooklyn's Finest에서 Biggie를 압도한 JAY-Z의 랩 스킬은 과연 그가 커리어 초창기부터 완성형 래퍼였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강력한 증거였습니다. D'Evils와 Bring It On에서 빼놓을 수 없는 DJ Premier의 활약은 덤이고요.

 흔히 저는 90년대 동부 힙합 3대 명반을 꼽으라고 한다면 Enter The Wu-Tang (36 Chambers), Illmatic, Ready to Die를 꼽습니다. 하지만 그 바로 후에 들어갈 앨범을 꼽으라고 한다면 The Low End Theory, The Infamous, Liquid Swords 등 강력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Reasonable Doubt를 개인적으로 선호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시의 JAY-Z가 가장 세련되었기 때문입니다.

 


 

9. Run The Jewels - Run The Jewels 2

 

 Run The Jewels 같은 걸출한 폴리티컬 힙합 듀오를 방탄소년단을 통해 알게 되었다면 믿을 수 있으시겠나요? RM의 첫 믹스테입 수록곡 중 '농담'이라는 트랙이 있는데, Oh My Darling Don't Cry의 비트를 사용한 곡입니다. 그 믹스테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이었기에 저는 원곡을 찾아나섰고, Run The Jewels의 폭풍 같은 랩에 곧장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베테랑으로서 힙합 매니아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조금 후의 일입니다.

 RTJ의 앨범 무료 배포가 얼마나 반갑던지요. 불편하게 유튜브를 통해 듣거나 스트리밍하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든 그들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물론 그들의 음악이 평범한 수준에 그친다면 절대 이 앨범을 매일 듣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 어떤 랩 음악보다도 육중하고 파괴적이며 민첩한 Run The Jewels 2는 2010년 이후 힙합에 대한 제 기준치를 한참 올려놓았습니다. 이들만큼, 혹은 이들보다 잘하지 못한다면 찬사받을 생각도 꺼내지 말라고. 그리고 그 오만함은 그들이 이 역작을 그저 무료 공개했다는 사실에 힘입어 더욱 더 견고해져만 갔습니다.

 Jeopardy에서 Angel Duster에 이르기까지 이 듀오의 정신없는 호흡은 힙합에서 듀오의 존재가 어째서 필수적이었는지 저에게 되새기게끔 했습니다. 프로듀싱 전반을 El-P가 책임지지만, Killer Mike의 랩이 El-P보다 더 강렬하니 둘의 균형이 꽤나 잘 맞아떨어지는 셈입니다. Killer Mike가 없다면 El-P의 음악은 Run The Jewels가 아닌 그저 El-P겠고, El-P가 없다면 Killer Mike는 그저 남부 베테랑 래퍼겠죠. 11곡에 39분 동안 그 어떤 곡도 청각적 쾌감을 중시하는 저의 취향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가끔 Love Again (Akinyele Back)이 드물게 비판받긴 하지만, 이 곡의 베이스와 괴상한 성평등적 관점 또한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이후 들은 Run The Jewels, Run The Jewels 3, RTJ4까지 그들의 음악은 저의 수요를 완벽히 충족시켜주었습니다. 그 중 RTJ4가 Run The Jewels 2의 충격을 거의 능가할 뻔했으나,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2가 우위에 있는 것 같네요. 그것이 첫인상 효과인지, 아니면 Run The Jewels 2가 정말 그들의 최고작이라서 그런 것인지 저는 영원히 알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10. Pusha T - DAYTONA

 

 아마 횟수로만 치면 제 인생에서 가장 많이 들은 앨범일 것이라 자신합니다. 제 고등학교 적 기숙사 생활 때, 조식을 먹으러 급식실로 내려갈 때마다 항상 이 앨범을 청취하면 시간이 알맞게 맞아떨어졌거든요. 물론 와이오밍 프로젝트 앨범들을 포함해 10~20분 대의 앨범은 많지만 굳이 DAYTONA인 이유는, DAYTONA야말로 "Simple is the best"라는 문구에 가장 부합하는 앨범이었기 때문입니다.

 Yeezus가 미니멀리즘의 예술적 한계라면, DAYTONA는 극단적인 미니멀리즘에 가깝습니다. 길이부터 사운드 구성까지 전부요. 고작 21분이란 시간에 Pusha T와 Kanye West의 커리어를 통틀어서도 가장 강렬한 음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If You Know You Know는 항상 최고의 시작만을 고집했던 Pusha의 인트로를 통틀어서도 단연 최고봉이었고, The Games We Play와 Come Back Baby는 게으르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간단하게 샘플링을 했음에도 오히려 그 어떤 사운드층보다도 직관적인 쾌감을 선사했습니다. 저는 미니멀리즘의 가치를 이 앨범을 통해 새로이 찾게 되었습니다.

 물론 Pusha T의 가공할 랩이 아니었다면 이 비트들이 제 가치를 인정받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고작 샘플 한 겹에서 이 정도의 플로우를 이끌어낼 수 있다뇨, Nas조차 난해해했던 Kanye의 비트 위에서 Pusha는 현존하는 최고의 래퍼로서의 정체성을 가감없이 드러냅니다. 비록 실력 차이는 있지만 제가 Pusha의 랩에 매료되었던 이유는 Biggie의 랩에 매료되었던 이유와 일치합니다. 신들린 것만 같은 Pusha의 탄력적인 플로우는 Kanye의 비트와 더불어 DAYTONA에서 가장 강력한 악기였습니다. Infrared와 같은 나태한 비트에서도 Pusha는 그의 날카로움을 여과 없이 드러내죠.

 오직 Kanye만이 가능한 경지이고, Pusha만이 가능한 경지입니다. 하다못해 저는 It's Almost Dry에서도 Pharrell의 비중이 좀 더 작아지길 바라고 있었으니... 4~50분 길이의 DAYTONA 스타일 King Push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만 그 앨범조차 DAYTONA만큼 자주 듣진 않을 것 같네요. 어쩌면 정규 앨범치고 유난히 짧은 DAYTONA의 플레이타임은 청자들이 이 앨범을 몇 번이고 듣게 될 것이라는 Kanye의 근거 있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요.

 


 

간단하게 쓰려고 했는데 분량 무엇... 내 장문병을 저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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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8
  • title: MF DOOM (2)칸이야웨스트Best베스트
    5 8.12 14:17

    올드스쿨은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의 음악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냥 "옛날 힙합음악"을 지칭하는데에도 사용되고 있어 저렇게 작성하신 것 같아용

  • title: Mach-Hommy온암Best글쓴이베스트
    3 8.12 14:00

    그렇게 따지면 사실 뉴스쿨도 아니죠 ㅋㅋㅋ 그냥 옛날 래퍼들을 지칭하는 일반명사 정도로 생각해주세요

  • title: Guy-Manuel de Homem-Christo (2)프랭크자파Best베스트
    3 8.12 13:59

    별건 아니지만 2Pac, Biggie, Eminem, Nas 는 올드스쿨이 아닙니다.. 오히려 뉴스쿨이 맞아요

  • 8.12 13:53
  • 8.12 13:58
  • 3 8.12 13:59

    별건 아니지만 2Pac, Biggie, Eminem, Nas 는 올드스쿨이 아닙니다.. 오히려 뉴스쿨이 맞아요

  • title: Mach-Hommy온암글쓴이
    3 8.12 14:00
    @프랭크자파

    그렇게 따지면 사실 뉴스쿨도 아니죠 ㅋㅋㅋ 그냥 옛날 래퍼들을 지칭하는 일반명사 정도로 생각해주세요

  • 1 8.12 14:19
    @온암

    그렇다고 하기엔 90년대에 버스타 라임즈가 속한 Leaders of the New School이라는 그룹도 있었을 만큼 당시의 래퍼들이 자신들을 뉴스쿨이라고 칭하고 다녔는데, 이제 와서 좀 오래됐다고 그들을 올드스쿨이라고 부르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아니, "뉴스쿨의 리더들"이라는 이름의 랩 그룹을 올드스쿨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물론 고작 사소한 단어 하나일 뿐이긴 하지만, 약간 이상한 부분이 있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었습니다.

    그 외에는 정말 잘 쓰신 글이었어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 5 8.12 14:17
    @프랭크자파

    올드스쿨은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의 음악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냥 "옛날 힙합음악"을 지칭하는데에도 사용되고 있어 저렇게 작성하신 것 같아용

  • 8.12 14:20
    @칸이야웨스트

    저는 그 풍조가 애초에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 8.12 15:57
    @프랭크자파

    골든 에라 정도로 얘기하면 되지 않을까요

  • 8.12 18:14
    @mayfield

    그쵸 이게 딱 맞죠

  • 8.12 14:00

    김봉현님 맞으시져 ?

  • 1 8.12 14:04

    "여기, 최고의 연기력과 최고의 각본을 가진 배우 겸 감독이 있습니다. 이 수식어를 영화계에 대입한다면 정말 말도 안되는 천재가 등장한 셈이니, 그 존재에 모두들 찬사를 보내겠죠. 그 말도 안되는 천재가 힙합에서는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켄드릭 라마를 설명하는 최고의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너무 멋진 말이에요.

    저는 클래시컬한 앨범들을 몇몇 제외하곤 그리 선호하지 않는데, 온암님 글을 보니 이미 들어본 앨범들도, 들어보지 않은 앨범들도 너무 궁금해지네요. 더불어 방탄 앨범도 호평받던데 들어본 적이 없어서, 더 궁금해집니다. 꼭 들어봐야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 8.12 14:47
  • 8.12 15:21

    방탄 앨범 특히 저때 저도 진짜 방탄만 하루종일 들었는데 비교적 뭔가 최근 노래는 좋긴 한데 어딘가 모르게 아쉽단 생각이 드네요

  • 8.12 15:34

    줌터뷰 인생앨범 확장판이네요 잘 보고 갑니다!!!

  • title: Mach-Hommy온암글쓴이
    8.12 15:46
    @공ZA
  • 8.12 16:12

    글 정말 잘쓰시네요!

  • 8.12 19:01

    제 목록과는 딱 하나 겹치지만 이유가 너무 비슷하고 합리적이네요 줌터뷰에서 봤던 내용 더 자세히 재밌게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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