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예가 논란을 일으킬 때마다 쓰던 리뷰가
어느새 그의 초기작까지 다다랐군요.
이제 쓰고 싶어도 다룰 앨범이 없습니다.
"지금이 칸예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다
라는 말만 10년 동안 10번은 넘게 본 것 같습니다.
원래 그 위기는 그의 앨범에 의해 종식되곤 했는데
이제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 같네요.
칸예가 모든 논란을 잠재울만한 앨범을 만들어주길
그 누구보다 고대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도 합니다.
한때는 세상의 모든 것이었으나 이제는 원치 않게 소원해져버린,
그리고 나의 우상이자 친구였던 이에게.
2000년대 중반, 대학 문화에 대한 비판과 포용 그리고 흑인이 겪는 이런저런 처우를 다룬 3장의 기념비적 앨범이 발매됐다. 이 작품들은 현대의 교육 체계와 음악 산업이 어떻게 예술가의 창의성을 규제할 수 있는지 날카롭게 고찰했다는 점에서 '칼리지 힙합'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 앨범들은 제작 방식이 상이한 음악에 대한 통찰을 주었으며, 한 개인이 시스템에 맞설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은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것이라는 경험 법칙을 몸소 증명했다. 오늘날 이 앨범들은 곰돌이(또는 졸업) 3부작이라고 불린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매료시킨 것은 바로 "샘플링"일 것이다. 완성도가 더 높거나 혀를 내두를만한 기법을 선보인 팀은 많았지만, 칸예만큼 큰 재미를 선사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칸예의 음악에는 아무리 과묵한 사람일지라도 그에 대해 한마디하고 싶게 만드는 묘한 견인력이 있다. 그러나 이런 면모의 칸예 웨스트는 죽었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온갖 망상과 혐오의 산실이 됐으며 이로 인해 불거진 논란을 오로지 자신의 이윤을 위해서 활용한다. "논란이에요. 그게 그의 캐릭터입니다." 작고한 버질 아블로의 말이다. '논란'은 칸예가 자신의 제품을 팔기 위해 동원하는 가장 요긴한 수단이다. 이 모든 일의 도화선이라고 할 수 있는 테일러 스위프트와의 사건부터, 항공 점퍼에 부착된 남부연합기, 트럼프와 MAGA 모자, "노예제도는 선택이었다.", 킴과 커디 등 타인을 겨냥한 소셜 미디어 트롤링, 작금의 반유대주의 발언까지. 몇몇 팬들은 이런 논란의 규모가 앨범의 완성도에 비례한다고 여기는 듯하지만 도리어 이것은 가장 큰 말썽거리다. 현재 테일러의 마이크를 빼앗은 행동이 아이들 장난으로 보이는 반면에, 안타깝게도 칸예의 음악은 점점 초라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칸예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를 때마다 그의 과거 앨범들을 찾아 듣곤 한다. 어쩌다 이런 인간을 추앙하게 됐는지 기억해내기 위해서.
칸예의 2번째 정규 앨범 <Late Registration>은 Wake Up Mr. West라는 제목의 촌극으로 막을 연다. 수많은 팬들이 현재의 칸예에게 이 곡을 들려주고 싶어 할 것 같다. 그리고는 곧장 Heard'em Say가 이어진다. 중독성 강한 베이스라인과 우아한 피아노 루프, 가치 있던 시절의 애덤 리바인, 경쾌한 타입의 곡이지만 저변에서는 슬픔이 묻어 나온다. 칸예가 찍은 최고의 비트가 어디에 있냐고? 여기에 있다. Devil In A New Dress(빙크)와 Murder on Excellence(스위즈 비츠, S1) 등 아이러니하게도 칸예의 경력에서 제일 칸예 다운 곡들은 칸예의 손을 거치지 않은 곡들이었다. 이런 현상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것이 Touch the Sky다. 커티스 메이필드의 Move On Up을 샘플링한 능수능란한 템포의 비트는 사실 저스트 블레이즈가 빚어냈다. 이 곡의 마지막 절에서는 곧 데뷔를 앞둔 루페 피아스코가 등장하는데, 당시의 팬들은 그게 힙합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줄 알았을까. 한편 Gold Digger에서는 레이 찰스를 샘플링한 것도 모자라 거의 레이에 빙의했던 제이미 폭스를 섭외했다. <The College Dropout>의 성공 공식을 그대로 뒤따른 듯한 이 곡은 칸예의 바람대로 전무후무한 성공을 거두며 그를 히트메이커로 각인시켰다. 2006년 플레이보이와의 인터뷰에서 칸예는 Gold Digger를 "우리 생애 가장 대단한 곡"이라고 말했지만, 7년 뒤 제인 로와의 인터뷰에서는 "좋아한 적이 없지만 돈이 뒤따라올 것을 알았기 때문에 녹음했다"라고 밝혔다. 나는 어떤 물건을 구입해야 할 때 전체를 꼼꼼하게 확인하는 대신 마감의 1/3을 살펴본다. 만약 1/3이 훌륭하다면 나머지도 응당 그럴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음악에서도 마찬가지다. 첫ㅡ어디든지 연달아ㅡ3곡이 훌륭하다면 그 앨범은 명반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내 취향을 저격했다. 내게 이런 기준을 세워준 것이 바로 <Late Registration>이다.
앨범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이름은 전설적인 프로듀서 존 브리온이다. 그는 이 앨범 전까지 힙합과의 접점이 없었지만 바이올린과 콘트라베이스를 위시한 라이브 오케스트레이션을 도입해 칸예의 소울풀한 발상에 날개를 달아준다. 듣기만 해도 느껴지겠지만 Bring Me Down, Celebration, Gone 같은 곡들은 실제 관현악단의 합주로 이루어졌고 존이 주요 편곡을 담당했다. 그중에서도 두 귀재의 시너지가 잘 나타나는 곡은 Roses다. 박자, 스토리텔링, 연출 등 모든 요소가 월등한 곡으로서, 특히 심장 합병증으로 병상에 누워있는 할머니에 대한 칸예와 가족들의 심정을 그린 가사는 어떤 임상 기록보다 실감 나게 다가온다. "할머니가 NBA에서 활약했더라면 지금 아프지 않았겠네.", "꽃을 보내지 말자, 우리가 꽃이니까." 칸예의 랩이 끝나고 빌 위더스, 패티 라벨, 토니 윌리엄스의 보컬이 어우러지는 즉흥 세션은 마치 존의 사운드트랙이 그랬던 것처럼 짙은 서정적 여운을 드리운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로 비추어봤을 때, 이 아름답고 정연한 가사를 칸예가 직접 썼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칸예가 썼든 대필을 받았든 간에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Still D.R.E.의 감동을 느끼기 위해서 <illmatic>을 재생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데미안을 동경하는 싱클레어의 마음을 헤아리듯이, '캐롤'이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같은 영화들의 울림이 성적 지향에 좌우되지 않듯이, <Blonde>라는 미궁에 망설임 없이 자신의 사랑을 대입하듯이, 위대한 예술은 개인적인 것을 보편적으로 보이게 한다. 그렇다고 시카고의 모든 아이들이 마이클 조던이나 칸예 웨스트가 되는 것을 꿈꾸면서 잠들지는 않겠지만, 누구든 사회의 경직된 가치관 앞에서 억압받는 약자가 된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Late Registration>을 포함한 칸예의 초기작을 들으면서 사운드의 완숙함은 물론이거니와 가사의 범위에 놀라곤 한다. 이 시절의 칸예가 의형제인 커먼, 탈립 콸리, 라임페스트에 가까웠다면 현재는 그냥 Lil Ye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곰돌이 3부작을 통해 자신만의 '팝 랩' 스타일을 완성시켰다. 오늘날 팝 랩은 팬들 사이에서 거의 경멸의 용어로 사용되지만, 칸예와 드레이크의 팝 랩 앨범들이 힙합 입문자의 필독서라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이 앨범은 생동감과 감성이 풍부하고 높은 예술적 완성도를 자랑하지만 동시에 라디오 친화적이기에 파티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Late Registration>은 정말 위대한 힙합 레코드면서 모든 음악팬들을 위한 앨범인 것이다.
칸예 웨스트는 알베르 카뮈가 묘사했던 "자신의 실존적 위기만을 걱정하는 도시 출신의 중산층"의 모형과 다름없었다. 래퍼 트위스타는 "칸예가 거리에서 '스웨그'를 앗아갔다."라는 표현으로 그의 음악 스타일을 정의했다. '8마일'의 마지막 랩 배틀에서 에미넴이 '클라렌스'라며 디스했던 파파 독이 바로 칸예였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래퍼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을까. 비기와 투팍이, 제이지와 나스가, 에미넴과 50이 서 있던 거리 위에서.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는 힙합이 거리 문화에 집착하는 행태를 적나라하게 비판했는데 칸예는 그보다 10년을 선행했다. 칸예 웨스트 가라사대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다면, 당신이 어디서 나고 자랐든, 살면서 어떤 풍파를 겪었든, 직업이 마약상이든 대학생이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트위스타의 말대로 칸예가 거리에서 스웨그를 앗아갔을지 모르나 그는 힙합의 수명을 그 누구보다 길게 연장하며, (내 생각에) 은퇴하거나 죽기 전에 노 아이디, 제이 딜라, 나인스 원더, 피트 록, 프리모, 드레 등 자신의 우상들을 모두 뛰어넘었다. 존 브리온, 제이지, 많은 게스트들, 그리고 어떤 영향력이 이 앨범에 보탬이 됐는지를 가늠하는 것은 너무나 매력적인 일일 것이다. 하지만 결국 핵심은 칸예의 집요한 비전이다. 대체로 그는 생각하기 전에 행동했고 하나의 곡을 위해 수십 번의 믹싱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Gold Digger 같은 히트 싱글을 만드는 일이든, 타임이나 소스의 커버를 장식하는 일이든, 래퍼로서 노래하는 앨범을 제작하는 일이든, 팬들의 사랑이든 미움이든 간에, 한 번 맛본 결실을 두 번 다시 답습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데 거리낌 없는 스피커가 있어야 한다면 칸예보다 적임자는 없을 것이다. 굳이 그가 아니더라도 의식과 사고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생방송 중에 대통령을 비판하거나, PC 운동의 모순을 지적하거나, 터부시 되는 유대인 발언을 하거나, 트위터를 켜고 맺음이 없는 지리멸렬한 장광설을 늘어놓을 수 있다. 하지만 칸예의 입에 도의적인 조절 장치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나는 그가 자신의 발언에 책임지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오해를 낳고 있는 자신의 저의를 설득력 있게 풀어놓은 적도 없고 사과의 유효 기간은 언제나 다음 논란과 함께 종료됐다. 그러니까 지금 그의 양형 사유에는 괘씸죄가 덧붙여져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The College Dropout>부터 7장의 정규 앨범을 발매하는 동안 칸예의 음악은 적어도 품질 면에서는 아무런 흠이 없었다. '더 나은', '더 기상천외한', '더 과감한' 같은 평가가 쌓이는 동안 '더 나쁜'은 없었다는 말이다. 대중음악의 역사를 통틀어 봐도 칸예처럼 꾸준히 활약했던 아티스트는 보기 드물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칸예나 다른 셀럽들이 하는 사회적 발언에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럴 자격은 물론이거니와 깜냥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칸예에 관해 유일하게 신경 쓰는 것은 바로 그의 음악이며, 아닌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현상황에 대한 돌파구로 그가 들려줄 음악을 지목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칸예는 돌파구가 될만한 음악을 만들 여력이 없을뿐더러 더 이상 음악을 돌파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아닐까. "음악"과 "논란", 바야흐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왔는데, 어떤 것이 자신을 지금의 위치로 인도했는지 오직 단 한 사람, 칸예만이 그것을 모르는 것 같다.
찬탄과 한탄이 함께 묻어나는 듯한 글이네요ㅠㅠ 잘 읽었습니다!!
과거의 칸예에 대한 찬사와 현재의 칸예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나오네요
솔직히 개인적으로 정말 원하던 메시지였고 칸예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이가 목소리를 내줬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그래서인지 더 아쉽습니다. 원하던 일이 일어났음에도 반가워하질 못하겠네요. 별개로 지금까지의 발언을 보면 저 성격에 활동 내내 답답함을 어떻게 참아왔을까 내심 안타깝기도 합니다. 지금의 난관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만 이젠 좀 느닷없이 폭탄만 날리지 말고 도화선에 불부터 댕겼으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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