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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대로 올해를 정리하며: 2025 AWARDS

title: Mach-Hommy온암6시간 전조회 수 610추천수 18댓글 32

* 본격적으로 제 2025년 시상식(?)을 정리하기에 앞서, 올 한 해도 각자만의 투쟁을 겪으며 열심히 살아낸 모든 분들께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모두가 동일한 능력을 갖추고 태어난 것이 아니듯, 모두의 경험이 다르듯, 모두에게 동일한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죠.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커리어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내는 것이 도전이었을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저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이 도전이었을 수 있는 것처럼요. 마지막에도 언급하겠지만, 저는 그 중간지대에 위치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잠깐 이야기가 샜네요. 이 글은 저 개인의 한 해를 정리하기보다, 저라는 한 인간의 관점과 관심사로 정리한 2025년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문화예술 위주의 글이 될 것이고... 엄청난 전문성이 돋보이기보다 그저 저 개인의 생각과 분석을 담았다고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실 부문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부문 선정에 딱히 어떤 기준이 보이진 않습니다. 그냥 올해에 대해 제가 떠들어대고 싶은 것들에 대해 마음껏 떠들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어요. 저는 저 하고 싶은 거 못하면 병나는 사람이라... 근데 또 극심한 관심종자라 사람들이 반응은 해줬으면 좋겠고... ㅎㅎ... 그럼에도, 재밌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그냥 제 취향과 사견에 솔직하면 되는 일인데, 어느 정도의 권위는 갖춰야 의견을 내주시거나 반응하실 것 같았어요. 때문에 괜히 혼자 끙끙대며 신경 좀 썼습니다. 아래는 제 2025년 개인 시상식이 전개될 순서입니다. 보시는 분에 따라 관심 있는 주제와 관심 없는 주제가 나뉠텐데, 관심 없으시면 과감하게 넘겨주셔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뭔 소리인지도 모르실테고, 그렇다고 해서 제 글만으로 없는 관심이 갑자기 생겨날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아서요 ㅋㅋㅋㅋㅋㅋ 일단 최악의 경우에는 문화예술은 아무래도 관심없고, 그냥 제 개인사에만 관심있으실 경우일 텐데... 그러면 너무 제 추잡한(?) 면만 비춰질 것 같잖아요... ㅋㅋㅠㅠㅠ 적어도 제가 좋아하는 분야에서만큼은 이 정도 알고, 이 정도 깊은 생각을 하는구나 알아만 주시면 안될까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방금 전 관심없으면 과감하게 넘기라고 했다 아무튼, 올해를 정리하는 저만의 방식이었습니다. 처음 해보는 시상식 형태의 연말결산이고, 다음 해에 다시 할 지조차 모르겠습니다. 그만큼이나 2025년 버전의 제가 고스란히 담겨있겠죠. 이 순간만의 저를 기어이 목도해주시는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목차 보시고 본문으로 넘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올해 최고의 힙합 앨범 TOP 10
2. 올해 최고의 앨범
3. 가장 좋아했던 올해의 뮤직비디오들
4. 올해 최고의 영화들 TOP 3
5. 올해의 내한 공연들 5개
6. 올해를 정리하며, 나의 소회

 



올해 최고의 힙합 앨범 TOP 10

 

10. Mac Miller - Ballooner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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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 밀러(Mac Miller)는 이미 7년 전 비극적인 죽음으로 우리 곁에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후 작업물이 웬만한 현역 아티스트들의 앨범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을 보면, 예술의 품격만큼은 영원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운이 정말 좋았죠, 맥의 유족들은 그의 유산을 돈벌이가 아닌 예술 그 자체로 보며 예우를 갖출 줄 아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Balloonerism] 또한 그런 예우로 다뤄진 훌륭한 사후 앨범입니다. [Watching Movies with the Sound Off]와 [Faces] 사이 작업된 곡들을 담은 앨범이고, 사실상 완성작이었으나 발매되지 않다가 2025년에 비로소 정식 발매되게 된 것이죠. 그러다보니 엄밀히 따지면 2014년 음악일텐데, 2025년 음악이라고 해도 결코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무척이나 수준이 높습니다. 힙합 앨범이라기보다도 네오 사이키델리아나 아방가르드 재즈, 네오 소울을 맥의 스타일로 엮어낸 것 같아요. 모든 요소들이 위태롭고 혼돈스럽게 느껴지면서도 특정 지점에서 명료한 형태로 수렴하는 세심한 연주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세심한 연주가 앨범 전반을 지배하는 맥 밀러의 우울감과 무기력함이라는 정서에 청자를 완벽히 몰입시켜요. 덕분에 "Funny Papers"처럼 기성 힙합 트랙에 가까운 곡의 감정적 설득력이 더 극대화되고요. 악기들이 어떤 방식으로 화합하다가 분리되는지 괜히 집중하게 되고, 그 표면에 느껴지는 맥의 감정선마저 자연스레 수용하게 돼요. 위태롭고 불안정한 마약중독자의 정서, 그 사이에 침잠한 무기력함과 염세적 사고도 인상적이지만 본래 그 나잇대 젊은이가 응당 그래야 할 활기찬 모습의 편린을 마주하다보면 괜스레 울컥합니다. 11분의 대곡인 "Tomorrow Will Never Know"에서는 그 모든 시간과 감정, 아련한 향수가 무질서하게 부양하며 희망마저 집어삼켜지는 공간적 경험이 제공되고요. 어쩌면 맥 밀러 최고의 앨범 중 하나로 평가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만큼 훌륭한 프로젝트였습니다. 맥 밀러의 커리어를 돌아보다면 참 서글퍼지는 것이... 마치 '죽음'이라는 필연적 결말을 두고 운명을 따라 걸어가는 한 사람의 여정 같달까요. [Balloonerism]의 뒤늦은 발표는 그 안타까운 서사의 개연성을 보충하는 하나의 프리퀄이자 비하인드 스토리였습니다. 예술과 개인사의 상대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네요.

 

9. Preservation & Gabe 'Nandez - Sortilè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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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발표된 모든 힙합 프로젝트 중에서도 단순 프로덕션의 완성도만 따졌을 때, 이 앨범을 확실히 능가한다고 단언할 수 있는 음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이나 프리저베이션(Preservation)의 설계 능력은 압도적이었어요. 제가 앱스트랙 힙합 역사상 최고의 앨범 중 하나로 여기는 [Aethiopes] 때도 체감했던 것이지만, 프리저베이션이 이국적인 음악을 힙합으로 다루는 역량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동양적인 사운드를 다룰 때 그 능력이 빛을 발하는데, 이는 [The Ecstatic]부터 [Eastern Illness, Western Illness] 같은 앨범에서까지 이미 증명된 바 있죠. [Aethiopes]가 아프리카적인 프리저베이션 프로덕션의 정점이라면, [Sortilège]는 동양적인 프리저베이션 프로덕션의 정점입니다. 여타 앱스트랙 힙합 프로듀서들과 프리저베이션 간의 격차를 느낄 수 있었어요. 대부분이 그럴 듯한 블루스나 소울 샘플을 차핑해 그대로 루프로 만드는 진부한 드럼리스에 그친다면, 프리저베이션은 그의 비트에 사용된 모든 요소를 모두 철저히 조율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분명 그 역시 샘플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시점에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달까요. 퍼커션은 비정형적이고, 동양악 샘플은 이형성을 더하며 특유의 음험함마저 진부하게 느껴질 때쯤 신스가 짜릿하게 그 진부함을 갈라버립니다. 어떤 면에서는 프로그레시브 락이나 포스트락의 압도적인 연출력마저 연상시키는데, 본작 역시 앱스트랙 힙합을 넘어 프로그레시브 힙합으로 분류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게이브 난데즈(Gabe 'Nandez)의 랩도 준수했죠. 피쳐링으로 두 차례 등장하는 빌리 우즈의 랩을 듣고 있자면 더 강력한 랩 퍼포머가 앨범의 주인공이 됐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긴 하지만, 힘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의 플로우나 작사력마저 평가절하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토록 난해한 비트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능숙하게 라이밍하면서도 하드코어/마피오소 힙합적인 기조로 날카로운 비유들을 수놓는 게이브의 랩은 적어도 기술적으로는 흠잡을 데가 없었어요. 별개로 전 본작을 듣고 프리저베이션이 영화 OST를 담당하게 되면 정말 훌륭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했던 적이 있더라고요.

 

8. Freddie Gibbs & The Alchemist - Alfredo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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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이 있는 의견일 수 있겠으나, 전 알케미스트(The Alchemist)가 엄청난 작업량과 일정 수준까지는 보장된 비트 퀄리티 탓에 다소 과대평가된 프로듀서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샘플을 채택하는 능력과 그 샘플을 기반으로 톤을 조성하는 능력만큼은 훌륭하지만, 너무 유사한 스타일에만 안주해 대부분의 작업물들이 과한 유사성을 띄는 경향이 있어요. 물론 그가 힙합 역사상 가장 위대한 비트들을 여럿 만들었으며 2020년대의 드럼리스 유행을 책임지고 있는 거물급 프로듀서라는 것만은 부정하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올해는 꽤나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한 티가 나더라고요. 그 중 가장 두드러지는 작업물을 고르자면 당연히도 프레디 깁스(Freddie Gibbs)와의 합작인 [Alfredo 2]일 것입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전작에 비해 많이 아쉽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듣다보니 마냥 부족한 것도 아니더라고요. 물론 가히 폭력적인 [Alfredo]의 카리스마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분명 [Alfredo 2]만의 방향성이 존재해요. 전작에 비해 재즈 랩의 색채가 강해졌고, 어떤 비트들은 네오 소울의 프로덕션을 연상케하기까지 합니다. "Ensalada"는 앨범 최고의 곡을 넘어 알케미스트와 깁스 모두의 커리어에 있어 최고의 곡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Shangri La" 등에서 두드러지는 림샷의 질감도 환상적이었어요. 일본 야쿠자의 이미지를 컨셉으로 일부 차용하는 만큼 일본 음악 샘플들의 사용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처음 들었을 때 '이 곡 샘플 일본 거 아닌가' 싶은 곡들은 역시나 원곡이 일본 아티스트의 것이더라고요. 비트들이 대부분 루프의 완성도가 높으며 드럼셋도 개성적이고, 유기성이 무척이나 훌륭합니다. 곡 하나하나의 위력은 전작보다 약할 순 있어도, 앨범으로서의 통일성만큼은 전작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도 [Alfredo 2]의 변화가 약점이 아닌 개성으로 수용될 수 있었던 데에는 역시나 깁스의 훌륭한 래핑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알케미스트가 부진할 순 있어도, 깁스가 부진할 일은 없죠. 여전히 갱스터 랩을 중심축으로 두면서도 비트에 따라 속도감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범죄 경력과 래퍼 경력을 대조하는 그의 스토리텔링은 음악적인 톤앤매너와도 부합하며, 피로감 섞인 회고마저도 진부하게 느껴지는 일 없이 자연스럽게 녹여냈습니다.

 

7. MIKE - Showb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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앱스트랙 힙합처럼 깊은 문화 이해도와 수준급의 작사력이 보장되어야 하는 장르에선 평균 연령대가 자연스레 높아질 수밖에 없는 노릇인 것 같습니다. 그런 씬에서 마이크(MIKE) 같은 래퍼의 존재는 기적과도 같죠. 심지어 그가 래퍼로서도, 프로듀서로서도 재능이 넘친다는 사실은 그를 더욱 독보적으로 만듭니다. 마이크는 슬럼스 멤버들이 공유하고 있는 장점을 가장 좋은 버전으로 지니고 있는데, 그 장점을 지니고 한 스타일에만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도를 하며 20대 초중반이라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도 짧은 시간 안에 왠만한 중견 래퍼 못지 않은 커리어를 만들어갔죠. [Showbiz!]는 전작이었던 [Disco!]를 기반으로 [Burning Desire]나 [Pinball] 등에서 보여주었던 장점들까지 흡수한, 그의 또 다른 역작입니다. 이 시점에서 그의 재능은 엠에프 둠, 매들립, 얼 스웻셔트 등과 비교되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아요. dj blackpower로서 그는 베이퍼웨이브에 유사할 정도로 로파이한 힙합 비트들을 만들어왔는데, 본작에서는 주로 디스코와 올드 팝을 샘플링하고 속도와 질감을 조절해 본작만의 특징적인 프로덕션을 구축합니다. "man in the mirror"와 "Artist of the Century"의 트랜지션은 어떤 측면에서 봐도 마이크의 커리어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 중 하나이고, 인상적인 색소폰 샘플을 사용한 "The Weight (2k20)"과 원본 샘플의 속도를 늦춰 빈티지한 톤을 자아내는 "Strange Feelings"까지 비트들은 유사한 질감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개성을 보장합니다. 칩멍크 소울부터 플러그, 심지어 서프 갱과의 협업까지도 아우르는 본작의 확장성은 가히 경이로운데, 24개라는 많은 곡들이 지나가는 동안 일정 수준의 다양성을 보장하면서도 하나의 음반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이 프로듀서로서 그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 같아요. 물론 래퍼로서도 정말 훌륭합니다. 마이크의 굵고 나른한 바리톤은 랩 보컬리스트로 큰 이점을 차지하는데, 그 이점을 확실히 누리면서도 이전보다도 훨씬 발전한 랩 플로우의 불규칙성을 자신의 비트 안에 끼워맞추며 매우 편안하고 능청스럽게 음반을 이끌어갑니다. 그의 가사 역시 불필요하게 복잡하거나 감정적으로 과잉되지 않고, 그저 소탈하고 일상적인 단위에서 청자들과 함께 개인적인 성찰을 공유해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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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De La Soul - Cabin In The 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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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 앨범을 들으며 이처럼 행복했던 게 또 얼마만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데 라 소울(De La Soul)에게서 이런 음반을 얻을 것이라 상상도 못했는데, 그 주체가 또 하필 데 라 소울이라서 더 감동이었네요. 그동안 제시한 본인들의 스타일을 모두 총합한 것은 물론이고, 데 라 소울이 [3 Feet High And Rising]을 발매한 이래로 영향을 받은 후배 아티스트들의 음악색마저 역으로 흡수한 하나의 궁극체처럼 느껴졌어요. 그럼에도 압도적인 느낌보다는 소탈하고 반갑다는 인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옛날부터 데 라 소울은 항상 그래왔죠. 이들은 모두가 위협적이고 경쟁적이려고 할 때 자연스러운 그들 자신을 보여주면서 이런 힙합도 존재할 수 있다고 제시했어요. 그것이 얼터너티브 힙합이라는 이름으로 현대 힙합의 한 축이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요? 나레이션과 스킷, 한 시간이 족히 넘어가는 볼륨, 약간 낡아버린 믹싱까지 사랑으로 껴안을 수밖에 없는 앨범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사랑했던 힙합이니까요. 마치 달관의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샘플과 악기, 드럼 브레이크와 스크래치의 조합이 무척이나 편안하고 조화롭게 들립니다. 고전적인 턴테이블리즘의 미학이죠. 그리고 그 위를 장식하는 랩과 보컬 또한 고전적이고요. 내로라하는 참여진들은 사실 최근에도 다른 작품에서 접했던 이들이지만 유독 반갑게 느껴지는데, 아마 [Cabin In The Sky]에서만큼은 그들이 우리가 그리워하던 모습으로 나타나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네요. 사랑과 행복, 문화에 대한 존중이 가득해요. 더 놀라운 사실은, 그 모든 감정이 작고한 트루고이 더 도브의 부재를 딛고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부재를 인정하되, 지나치게 비애에 잠식되지 않죠. 오히려 포스누오스는 떠난 친구의 유산을 기리고 삶과 힙합 문화에 대해 너무 깊지 않은 수준으로 고찰하며 원로로서의 지혜와 통찰력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도 가끔 등장하는 트루고이의 생전 녹음된 벌스와도 무리없이 화합하고요. 여러모로 어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의 6집를 떠올리게 하는데, 야망이나 음악성 측면에서는 미치지 못하지만 순수한 감동만큼은 [Cabin In The Sky] 쪽이 더 짙었습니다. 이 앨범은 사람과 문화의 모습을 비추고, 사랑하는 동료와의 영원한 작별을 죽음이 아닌 삶으로 기억하는 성숙함을 담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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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Clipse - Let God Sort Em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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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도 과대평가와 과소평가의 의견이 대립하고 있지만, 그만큼이나 클립스(Clipse)의 컴백이 올해 힙합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방증이 아니었나 싶네요. 16년이라는 시간만큼 많은 것이 바뀌었죠. 퍼렐 윌리엄스는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중요한 프로듀서가 됨과 동시에 루이비통 디렉터가 되었고, 푸샤 티는 본인만의 커리어를 성공적으로 일궈나가며 명실상부 최고의 래퍼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Let God Sort Em Out]이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 공백기를 종교인으로서 지낸 말리스의 활약이 나머지 두 명을 제친다는 것입니다. 그는 명백히 동생 이상의 작사가로서 앨범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들을 담당해요. 랩을 정말 오랜만에 다시 하는 50대의 실력이 이 정도일 수 있나 싶습니다. 특히 "The Birds Don't Sing"의 벌스는 힙합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벌스 중 하나였어요. 물론 푸샤 티도 마냥 형에게 밀리지만은 않죠. 오히려 어떤 순간에서는 말리스를 능가하는 실력을 과시합니다. 더 나은 테크니션은 푸샤 티, 더 나은 리릭시스트는 말리스라고 생각해요. 이처럼 본작이 랩 음반으로서 가진 최고의 장점은 랩이 압도적이라는 겁니다. 올해 발표된 어떤 힙합 앨범도 랩의 측면에서는 클립스를 능가할 수 없어요. 모든 구절은 가사 없이도 선명하게 들림과 동시에 해석되어야 마땅할 다중 의미를 지니고 있고, 이들의 과거와 현재를 대조하며 코크 랩 세계관을 놀라운 수준으로 구체화시킵니다. 단순한 미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닌, 그들의 현 위치에 대한 자부심임과 동시에 그들이 살아온 역사에 대한 담담한 선언이죠. 한창 때에 비해 창의력을 잃어버린 퍼렐 윌리엄스의 비트메이킹과 믹싱이 살짝 아쉽긴 하나, 역시나 클립스를 프로듀싱할 때는 평소보다 더 많은 정성을 기울이며 위협적이고 묵시록적인 톤을 자아냅니다. 그것이 피부로 느껴지기보단 다소 기업적이긴 하고, 가스펠이 부각되는 일부 파트는 끔찍하기까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압도적인 장점이 단점을 능가하는 작품이었습니다. "Chains & Whips", "So Be It", "M.T.B.T.T.F.", "F.I.C.O." 같이 3박을 갖춘 훌륭한 트랙들도 많고요. 새로운 힙합 엘리트주의의 표상이자 2026년 그래미의 가장 강력한 후보가 된 이 앨범이 과연 향후 랩 클래식으로 기억될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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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arl Sweatshirt - Live Laugh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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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 스웻셔트(Earl Sweatshirt)가 오드 퓨처가 아닌 슬럼스와 어울리며 로파이한 드럼리스 기반 앱스트랙 힙합으로 음악 스타일을 바꾼 이래로, 그의 영혼은 언제나 침울한 형태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심지어 [I Don't Like Shit, I Don't Go Outside]와 [Solace]에 비해 [SICK!]과 [VOIR DIRE]는 훨씬 편안하게 들리는 데 말이죠. 그 이유는 아마 [Some Rap Songs]라는 역작의 강력한 존재감 때문일 것입니다. 제한되고 반복되는 낡은 소리들 사이에 침잠한 비애의 정서는 너무 깊었던 나머지, 의도치 않게 그를 대표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Live Laugh Love]가 얼의 커리어에서 이토록 중요하게 여겨질 이유야말로 바로 그 침잠한 비애의 정서가 말끔하게 사라졌다는 데에 있죠. 정말 신기한 것은 본작이 [Some Rap Songs]와 유사한 공식을 따라감에도 불구하고 그 인상은 180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빌드업에 해당하는 [SICK!]의 존재로 의아함이 해결되지만, 다소 산만했던 [SICK!]에 비해 [Live Laugh Love]는 음악적 순도조차 높습니다. 오랜 협력자들과 아주 편안하게 연주함에도 진부하다기보단 사뭇 새롭다는 인상이죠. 이러한 작법이 특색 없이 너무 오랫동안 반복되어 쓰인다는 지적에는, 이 장르에 대해 잘 모른다고 반박하고 싶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비애의 정서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대부분의 비트들은 저음역대가 이전에 비해 상당히 절제되었고 일부 장음계의 구성을 차용하기도 합니다. 앱스트랙의 총아들이 무릇 그러하듯이, 얼의 변화 또한 미세한 척도에서 진행되나 실질적인 진보는 어마어마한 수준인 것이죠. 소폭의 변화로도 많은 것들이 바뀌게 됩니다. 얼의 삶도 같았습니다. 지난 삶에 필요 이상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소심한 영혼이 결혼을 하고, 아버지가 되었죠. 그 지점에서부터 출발한 그의 음악과 가사는 부채꼴입니다. 간단한 사건을 끊임없이 사유하고 확장함으로써 의미를 이룹니다. 이번만큼은 그 원동력이 긍정적인 마음이죠. 그의 목소리는 무력함이 아닌 느긋함으로 느껴지고, 세상을 보는 눈은 눈물이 아닌 햇살에 의해 흐려집니다. 결국 [Live Laugh Love]는 성장의 결과가 아닌 성장의 과정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며 얼이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참으로 인간적이고 따스한 이야기이죠.

 

3. Jane Remover - Revengeseeke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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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 이래로 이토록 감각적인 혼돈을 조율한 트랜스젠더가 있었나요? [Revengeseekerz]가 막 나왔을 때 누군가 이 앨범을 일컬어 '이쪽 장르의 [To Pimp A Butterfly]'라고 표현했었는데, 그 표현에 무척이나 동의하는 바입니다. 제인 리무버(Jane Remover)는 이 앨범을 통해 디지코어 음악가 중에서도 완전히 다른 위치로 부상해버렸어요. 사실 순수 힙합이라기보다 전자음악 앨범에 가까울 정도로 본작은 수많은 장르들을 동원해 격렬한 실험을 벌입니다. 디지코어, 다리아코어, 하우스, 테크노, 글리치, 트랩, 하이퍼팝, 레이지, 저크, 하드스타일 등 차마 셀 수 없이 많은 장르들이 트랙별로, 또 한 트랙 안에 섞이며 한껏 시끄러워지고 과잉됩니다. 마치 트랙 간 경쟁을 펼치는 것처럼 날카로운 일렉트로닉 사운드 소스들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찢어지며 디지털 소음을 내죠. 그런데, 그 충돌이 결코 무작위하지 않아요. 제인 리무버는 소리의 충돌을 그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철저히 관리감독하며 원하는 만큼 과잉시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과 비디오 게임의 효과음, 808 베이스, 아날로그 신스, 격렬한 덥스텝 드럼이 각자의 소리를 끊임없이 주장하며 파열음을 내는 데도 정작 그 소리의 근원은 명료하죠. 도대체 어떤 감각과 정성을 들여야만 이룰 수 있는 경지의 프로그래밍인지 감이 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 모든 프로덕션이 슈게이즈로의 외도 이후 다시 디지코어로 돌아온 첫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전 올해의 프로듀서가 제인 리무버였다고 평가하고 싶네요. 더 놀라운 점은 순수 청각적 쾌감의 측면에서도 올해 최고 수준인데, 그 소리가 제인이 서사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와 분명히 맞닿아있다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매체와 맞닿으며 성장한 세대의 감정 표출 방식을 과잉과 혼돈으로 해석하고 있고, 트랜스젠더이기도 한 그 자신의 분노와 복수심을 비트와 보컬에 여과없이 투영하며 몇 차례 끝내주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하죠. 특히 "Professional Vengeance"의 브릿지에서는 그야말로 세상에 대한 날 것의 원한이 느껴져 온몸에 소름이 돋았네요. 소음을 주 무기로 다루는 젊은이들의 음악이니만큼 분명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때로 호불호조차 뛰어넘을 만큼 위대한 작품이 있죠. [Revengeseekerz]는 바로 그런 작품입니다.

 

2. McKinley Dixon - Magic, 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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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힙합은 30년이 넘어가는 세월 동안 여러 모습으로 존재했습니다. 때로는 힙합에 가까워지며, 때로는 재즈 본연에 가까워지며 말이죠. 그리고 오늘날, 맥킨리 딕슨(McKinley Dixon)의 [Magic, Alive]만큼이나 양쪽 모두의 자기주장이 강한 앨범은 없던 것 같습니다. 그의 인스트러멘탈을 일컬어 순수히 '재즈'라고 정의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재즈의 우수성을 충실히 반영하려 했음은 부정할 수 없겠죠. 정확히는 재즈 특유의 사운드와 스윙 리듬을 차용하면서도 그것을 힙합의 틀 안에 녹여내며 기성 재즈 힙합보다 더 풍성하고 복잡한 사운드스케이프를 만들어냅니다. 심지어 "Recitatif" 같은 곡에서는 랩 락과 하드코어 힙합으로 변주하기까지 하면서요. 단순 연주의 측면만 따지면 전작보다도 훨씬 뛰어나죠. 그 공은 분명 The Roots나 [To Pimp A Butterfly] 수준의 생동감을 살려낸 라이브 밴드 세션에게 있을 것입니다. 한 치의 과장 없이, 본작은 힙합 역사상 최고 수준의 라이브 연주 프로덕션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즈를 중심으로 네오 소울과 펑크의 경계까지 넘나들며 뮤지컬이나 오페라를 방불케 하는 몰입감을 선사하죠. 맥킨리 딕슨 본인의 랩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마치 이 앨범의 연주 중 발생하는 모든 리듬을 파악하기라도 하는 듯, 그는 마치 펑크 가수처럼 톤의 고저를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거센 드럼 연주를 전부 따라가며 라이밍합니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문학적인 가사와 스토리텔링으로 심상을 또렷히 그려내며 청자의 이입을 돕죠. 특히 "Run, Run, Run Pt. II"는 그런 장점이 최고조에 달하며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하는 트랙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결정적으로, 이 모든 강점은 훌륭한 컨셉을 만나며 진가를 발휘합니다. 세 명의 친구가 죽은 친구를 부활시키기 위해 마법이란 수단을 동원하고, 그 마법은 유년기의 추억과 게토의 삶, 폭력성 속 서정성과 소중한 것들을 지켜내려는 마음으로 해체되죠. 이토록 영화적인 프로덕션에 개인적인 서사를 시적으로 펼쳐나갈 수 있는 능력 자체도 아름답지만, '기억하고 되새김'으로써 지나간 것들을 계속 살아가게 한다는 엔딩과 포스터 속 영웅으로 분해 성숙한 조언을 건낸 블루의 벌스는 눈물나도록 아름다웠습니다. 단언컨데 올해 가장 극적이고, 역동적이며, 감동적인 힙합 음반입니다.

 

1. billy woods - GOLLIW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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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듣다보면, 종종 좋은 수준을 넘어 체급이 다르다는 느낌을 주는 음악이 있습니다. 마치 아예 다른 차원의 음악을 경험하는 것처럼요. 그리고 빌리 우즈(billy woods)는 지난 몇 년 간 정말 차원이 다른 음악들을 만들어왔습니다. 물론 그는 20년이 넘어가는 경력의 중견 음악가이긴 하지만, 2020년대의 성과만을 본다 하더라도 이미 앱스트랙 힙합 역사상 최고의 래퍼로 평가받을 수 있을 만한 커리어를 축적했죠. 그리고 [GOLLIWOG]은 그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피부로 체감케 하는 또 하나의 역작입니다. 특히 [Maps]의 도시적인 소탈함 이후 [Aethiopes]에 이어 오랜만에 보여주는 초자연적인 강렬함이기에 더욱 인상적이었죠. 하지만 그 결은 분명히 다릅니다. [Aethiopes]가 프리저베이션이라는 단일한 프로듀서의 장인정신으로 창조된 앨범이라면, [GOLLIWOG]은 장르 최고의 프로듀서들이 각자의 특장점으로 조력해 완성된 올스타 앨범과도 같죠. 그동안 빌리 우즈와 한번씩 협업해봤거나 앱스트랙 힙합 명반을 제작한 이들이니만큼 프로덕션의 완성도는 단연 최고 수준일 뿐더러, 유기성이 부족하긴 커녕 최소한의 일관성만은 유지한 채 장르적으로 다채롭게 발화합니다. 드럼리스와 뉴욕 하드코어 붐뱁, 아방가르드 재즈와 호러코어, 익스플로이테이션 필름의 요소가 혼탁하게 뒤섞이고 절규하며 거대한 추상화 속 작은 디테일로 환원되죠. 그러면서 형성하는 총체적 에너지는 무척이나 전율적이고 공포스럽고요. 그리고 빌리 우즈의 랩이야말로 그 모든 디테일들을 한 데 묶는 거대한 중력과도 같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렇듯 중후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는데, 다양한 스타일의 비트에서 특유의 괴력적인 플로우를 절묘하게 구사하죠. 그의 랩은 박자를 무시하기보다, 애당초 애초에 박자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 딱히 구애받지 않는 인상입니다. 그런 힘은 분명 작가이자 역사학자로서의 정체성에 기인하죠. 그는 브루클린이라는 공간의 시간대를 연표처럼 늘여놓고 개인적인 드라마와 사회 현상을 매개로 삼아 아프로페시미즘적으로 현실적인 차원의 공포를 조명합니다. 그의 비유에선 원관념이 누락되었고, 수많은 레퍼런스들만이 미로처럼 남아 무형의 웅대한 의미를 이룹니다. 인지할 순 있음에도 완전히 이해할 순 없고, 그것이야말로 위대함의 단서입니다.

 

리뷰 링크(엘이 링크)


Outro: 2025년의 힙합에 대하여...

 

올해 빌보드 HOT 100 차트 중 상위 40위에 힙합 곡이 하나도 없는 일이 있었을 만큼 힙합 위기론도 크게 대두된 해였는데, 단순히 발표된 작업물들만 보면 오히려 2022년과 함께 힙합이 가장 융성한 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올해도 좋은 앨범이 상당히 많이 나왔어요. 애초에 힙합 자체가 장르성이 짙고 커뮤니티에 기반한 음악 장르였는데, 매니아들의 농도가 가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건 되려 장기 생존에 유리한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뚜렷한 질적 하락도 없었고요. 조이 배드애스와 서부 래퍼들의 디스전 등 씬의 자생을 위한 흥미로운 사건들도 많이 일어나며 재미를 더한 것 같습니다. 다만 장르의 한계를 초월할 돌파구는 여전히 쉬이 보이지 않는 형국이라 그건 좀 걱정입니다. 당분간 여러 플랫폼에서 매니아층의 적극적인 지지가 필요하긴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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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위를 정하는데 안타깝게 빠진 앨범은 리틀 심즈의 [Lotus]였습니다. 사실 원래 10위였는데, [Cabin In The Sky]의 발표로 인해 10위 안에서는 빠지게 되었어요. 그럼에도 순위권에 있는 앨범에 결코 밀리지 않을 만큼 훌륭한 앨범입니다. 영국 힙합 내에서는 이제 리틀 심즈를 이길 래퍼가 없는 것 같아요. 인플로와의 불화로 결별했음에도, 그것을 오히려 예술성의 씨앗으로 삼아 회복과 성장의 서사로 승화한 것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어요. 본래의 재즈 랩적인 사운드에 아프로비츠나 포스트 펑크적인 색채까지 부분적으로 흡수했던 만큼 인플로의 부재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요. 최고작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전작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작품이었습니다. 클리핑의 [Dead Channel Sky]도 굉장했습니다. 클리핑 특유의 글리치 가득한 사운드는 오래 듣기에 부담스러운데, 글리치는 적어지면서도 추진력은 유지되어서 마음에 들었어요. 초반부의 마구 밀어붙이는 기세에 비해 중반부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세계관을 구체화시키느라 에너지가 떨어진 것이 아쉽긴 했는데, 완성도만큼은 인정할 만한 것 같다고 생각해요. 별개로 백워시의 [Only Dust Remains]는 그의 다른 앨범들과 마찬가지로 도통 좋아하질 못하겠습니다. 주술적인 프로덕션 면에서는 참 잘 만들었는데, 랩이 일관적으로 제가 싫어하는 타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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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스트림 기대작들은 다소 아쉬웠네요. 아마 [I AM MUSIC] 프로젝트의 발매를 악착 같이 기다리던 오피움 팬들이 넘쳐났을 텐데, 정작 발매된 [MUSIC]은 뭔가 애매한 앨범이었죠. 개인적으로 그렇게까지 나쁜 앨범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메인스트림 랩 아티스트 간 유행하는 듯한 '플레이리스트형' 앨범으로 본다면, 건질 곡들이 꽤 많은 준수한 앨범이었죠. 과거 남부 힙합 음악들을 본인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한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그러나 이전 앨범들처럼 트랩 음악의 척도를 바꿨다 평가받을 만한 정도는 결코 아니었고, 기대치에도 부응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보면 실패한 앨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체의 [REST IN BASS]나 오사마손의 [psykotic]이 장르적으로는 더 낫고 도전적인 레이지 음반이었네요. 애초에 [MUSIC]을 레이지 앨범으로 보기엔 애매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나름 좋아합니다. 타일러의 [DON'T TAP THE GLASS]도 지난 앨범들에 비하면 다소 아쉽긴 했지만, 애초에 기습 발매인 데다가 지향성부터 대놓고 댄스 앨범이기에 전 되려 즐겼네요. 게다가 이 앨범, 제 전역일에 나왔거든요 ㅋㅋㅋ 넵튠스 음악과 80년대 디스코 음악, 신스 펑크, 그리고 과거 자신의 스타일을 종합해 신나게 엮어낸 인상이라 타일러치곤 완성도 면에선 아쉬웠으나 그다지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Dopamine]도 선공개곡들이 끌어올린 하입에는 부응하지 못했으나, 현상유지 정도에는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Dark Thoughts"와 "OWA OWA"가 너무 좋은 곡이라서요.

 

반면 최정상급 아티스트들의 앨범인데도 실망하다 못해 절망해버린 앨범들도 있죠. 드레이크와 파티넥스트도어의 [$ome $exy $ongs 4 U]는... 사실 아티스트로서 드레이크의 역량이 맛이 가버린지 오래라고 생각해 딱히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켄드릭 라마에게 처참히 패배한 후 공식적으로 처음 내놓는 앨범 단위 작업물이니만큼 이 앨범에서 드레이크가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고 성공적으로 항변할 수 있는가 궁금했는데, 역시나 그저 얼버무릴 뿐입니다. 계속해서 이 수준의 결과물이 나온다면, 스트리밍만큼은 건재하다는 핑계는 잠시 미뤄둔 채 이제 OVO 사운드를 다시 재정비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그나마 잘하는 보컬마저 이 모양이라면... 그나마 "GIMME A HUG", "NOKIA", "DIE TRYING" 정도는 괜찮았습니다. 또 다른 실패작이라면 [JACKBOYS 2]를 빼놓을 수 없죠. 저는 트래비스 스캇의 [UTOPIA]를 커리어 정규작 2위로 평가할 만큼이나 무척 긍정적으로 들었는데, 만약 스캇이 그 실험성을 다시 정돈하고 자신만의 공간적인 사운드를 정립한다면 아티스트로서의 수명이 훨씬 확장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JACKBOYS 2]는 [UTOPIA]의 차기작이라기보다 [JACKBOYS]의 차기작에 가까웠는데, 그것마저 질적으로 더 하락했습니다. 심지어 멤버들의 활약이 골고루 분배된 것도 아니에요. 이 정도면 Cactus Jack이 추구하는 소리가 무엇인지 본인들도 모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JACKBOYS]에는 확실한 뱅어라도 있었죠. 그나마 뽑을 만한 곡이 "CHAMPAIN & VACAY", "DUMBO", "WHERE WAS YOU" 정도였는데, 얼마 전 푸샤 티의 디스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이 앨범의 평가를 더 낮추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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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준수한 랩 음반들은 올해 많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각 아티스트의 최고작까진 아니더라도, 분명히 반등의 기미를 보이거나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도 완성도를 놓치지 않았던 앨범들이 많았죠. 특히 어르신들의 활약이 상당히 돋보였던 올해였어요. [Life Is Beautiful]은 연초를 장식하기에 적절한 휴가 랩 앨범이었습니다. 비트들도 대부분 좋았고, 특히 투 체인즈의 참여가 진부해질 수 있는 부분을 잘 보강한 것 같습니다. 매스 어필의 Legend Has It 시리즈도 빼놓으면 안되죠. 초반에는 다소 실망스러웠으나, 맙 딥의 [Infinite]이나 Big L의 새로운 사후 앨범은 꽤나 만족스러웠습니다. [Infinite]는 [The Infamous]와 [Hell On Earth]를 제외하면 맙 딥 앨범 중에서도 가장 순도 높은 웰메이드 앨범이었고, [Harlem's Finest: Return Of The King]에선 빅 엘이 어째서 역사상 최고의 래퍼 중 한 명인지 다시금 제대로 느낄 수 있었죠. 물론 나스와 디제이 프리미어의 [Light-Years]는 이름값에 비해 많이 아쉬운 앨범이긴 했어요. 과거의 광영을 기념하는 가장 안 좋은 방법이었달까요. 특히 디제이 프리미어의 비트가 많이 아쉬웠어요. 그걸 그대로 괜찮다고 승인해버린 나스가 더 문제이긴 하다만... 그럼에도 올해 나스가 특히 여러모로 힙합을 위해 많이 공헌했음을 부정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장르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고려해본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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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가 많았던 아티스트들의 차기작도 꽤나 흥미롭게 나왔었죠. JID의 [God Does Like Ugly]는 하필 그 [The Forever Story] 다음의 정규작인지라 기대치도 높았고 그만큼 실망도 컸던 것 같습니다. 물론 랩은 역시나 현역 최고 수준인지라 만족스러운 순간들이 많았지만, 앨범 전반의 균형을 잡는 측면에서는 실패했다고 느꼈네요. 중용을 해야 하는데, 자신의 능력에 취하고 과도한 증명욕구 탓에 과잉해버린 순간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랩 엔터테인먼트 측면에선 훌륭했고, 분명 전작들의 명곡에 뒤지지 않는 좋은 곡들이 많았어요. 이번에는 그래미를 하나라도 받아갈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웨스트사이드 건은 계속해서 연작하고 있는데, 그 중 [HEELS HAVE EYES 2]가 정말 훌륭하다고 느꼈습니다. 이 앨범에서만큼은 전성기 시절 폼이 느껴졌달까요? [FLYGOD], [Supreme Blientele], [Hitler Wears Hermes 8: Side B] 등 작업물들의 잔상이 스쳐지나갔어요. 비트들도 하나 같이 훌륭했고, 웨스트사이드 건 본인의 래핑 또한 제대로 물 오른 모습이었습니다. 피쳐링들도 다 적절하게 배치되어 좋은 벌스를 선사하고 갔고요. 조이 발렌스 & 브래의 [HYPERYOUTH]도 매우 좋게 들었습니다. 전작보다는 못하다는 평이 지배적이긴 한데, 전 어떤 면에선 전작보다도 진일보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에너지가 덜 응축되긴 했지만 전작들 이상으로 과거 댄스 음악과 클럽튠에 대한 참조가 풍부해졌고, 20대만의 서정성을 음악과 가사 양면에서 잘 표현해냈어요. 순간적인 고점만큼은 커리어 하이급인 앨범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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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많은 래퍼들이 괜찮은 앨범을 냈죠. 특히 재즈 랩 쪽의 성과가 두드러졌던 것 같습니다. 사바와 노아이디의 [From the Private Collections of Saba and No ID]는 두 아티스트가 주는 이름값에 비해 아쉽긴 했어도 기획 의도가 의도이니 만큼 적당히 들을 만했고, 레드베일의 [Sankofa]도 [learn 2 swim]의 아성에는 미치진 못했지만 여러 면에서 더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줬던 것 같네요. 마븨나 오버캐스트도 나름 준수한 프로젝트들을 냈고요. 특히 올해 마븨가 상당히 넓은 랩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는데, "MAVKAST!"는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 트랙이었습니다. 대니 브라운의 [Stardust]도 빼놓을 수 없는 앨범이었죠. "Copycats" 같은 선공개 싱글들이 너무 좋은 나머지 기대를 많이 하고 있었는데, 막상 앨범 자체는 장르 이해도에서나 협업의 균형에서나 아쉬운 결과물로 남았던 것 같아요. 특히 콰데카나 프로스트 칠드런과 함께 한 트랙은 재앙 수준이었습니다. 다만 시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대니 브라운이라는 거물이 대놓고 하이퍼팝과 디지코어 씬에 관심을 보인 만큼, 향후 씬에서 여러모로 더 많은 시도가 이뤄지지 않을까 싶어요. 다만 [Stardust] 자체도 더 잘 완성했다면 좋았겠죠. 앨범에서 총괄의 유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체감됐습니다.

 

아만드 해머와 알케미스트의 두번째 합작인 [Mercy]도 저에겐 다소 아쉬웠습니다. 전작인 [Haram]이나 [We Buy Diabetic Test Strips]이 너무 훌륭했기 때문일까요? 알케미스트의 비트가 빌리 우즈와 엘루시드의 맹위에 부응하지 못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추상성을 실현하기에 이제 그의 프로덕션이 너무나 진부해졌다는 인상이었네요. 못 만든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강점이 있는 앨범도 아니었습니다. 이솝 락이 올해 낸 두 앨범도 다소 진부하긴 했지만, 이 경우에는 기대치 자체가 엄청나게 높진 않았기에 오히려 이 정도면 나름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며 들었네요. 애초에 원래 잘하는 것을 하면서 아주 조금의 변주를 주었기에 완성도 면에서는 실망스럽지 않았습니다. 네이비 블루의 [The Sword & The Soaring]이나 시티즈 아비브의 [The Revolving Star : Archive & Practice 002]도 훌륭했습니다. 둘의 음악 스타일은 엄연히 제 취향에선 좀 빗겨나가있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본인들만의 예술성을 발전시켜나가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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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역시 신예들의 등장이 인상적인 해였죠. 티모시 샬라메가 아니냐는 의혹으로 주목을 받은 에스디키드의 [Rebel]은 훌륭한 앨범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크 아티스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등장이었는데, 어떤 면에서는 한창 때의 퓨처가 생각났습니다. 미니멀한 구성에 묵직한 808을 뚫고 들어오는 에스디키드의 강한 영국 악센트 래핑이 너무나 잘 어울렸습니다. 음악의 에너지를 퍼포머가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는 인상이랄까요. 평소 트랩 계열의 음악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저조차 좋게 들었을 정도이니, 아마 올해 가장 주목받아 마땅할 데뷔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최근 slayr의 "Love Blur"가 유행하길래 [Half Blood]를 들어봤는데, 이것도 괜찮더라고요. 레이지와 디지코어에 팝적인 감각을 녹여냄과 동시에 압도적인 유기성을 창출해냈더군요. 존 미첼과 안토니 제임스의 [Egotrip]은 아마 올해 최고작 논쟁에 올라갔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정통파적인 관점에서 훌륭한 앨범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다른 곡들에서 사용된 샘플을 찹 구간의 변화 없이 다시 사용한 것이나 랩메이킹이 조금 투박한 것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무척 인상적인 음반이에요. 칩멍크 소울 기반의 빈티지한 재즈 랩에서 이만한 에너지가 나오기 쉽지 않은데, 그걸 매우 강렬하게 해냈습니다.

 

짐 레거시의 [black british music (2025)]도 빼놓을 수 없죠. 칩멍크 소울부터 저크, 아프로비츠, 심지어 팝 락까지 아우렀는데 산만하기보다는 오히려 이 모든 장르를 소화하는 짐 레거시의 역량만이 느껴진 프로젝트였습니다. 랩과 알앤비 양면에서 재능이 충만했고, 믹스테입만이 가질 수 있는 자율성을 최대한으로 사용한 인상이었어요. 특히 "New David Bowie"나 "'06 wayne rooney"는 올해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곡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전 개인적으로 데이브의 신보보다도 좋았네요. LAUSSE THE CAT의 [The Mocking Stars]도 좋았습니다. 이전에는 알지 못한 아티스트였지만 지인의 소개로 처음 듣게 되었는데, 재즈 본연의 향을 충실하게 살려냈어요. 랩의 쾌감은 비교적 적다 해도 매우 섬세하고 건전하게 만들어진 음반입니다. 익스페리멘탈 힙합 중에서는 Stickerbush와 heavensouls의 [Darkskin Niggas with Lightskin Problems]가 주목해볼 만한 등장이었습니다. 글리치 합의 성격이 강한 익스페리멘탈 힙합 음반인데, 한참 난해하던 시절의 제이펙마피아나 인저리 리저브를 떠올리게 할 만큼 혼돈스러운 사운드 콜라주가 IDM의 장르 문법과 결합하며 흥미로운 프로덕션을 구축했어요. 취향은 아니었다만, 나름 괜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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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힙합도 주류 미디어의 주목은 적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앨범이 많이 나와 씬의 자생성을 어느 정도 확보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들은 앨범이 그렇게 많지 않은데, 대부분 좋았습니다. 특히 [K-FLIP]는 한국 힙합 역사상 가장 중요한 앨범 중 하나로 남을 것 같습니다. 이 정도로 수준 높은 사운드스케이프의 레이지 프로덕션에 한국적인 색을 순도 높게 녹여냈다는 점에서 어엿한 하나의 오리지널로 평가받을 만해요. 저는 식케이의 랩 퍼포먼스도 고평가합니다. 또, 에피의 두 EP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고요. 하이퍼팝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이처럼 스타일리시하면서 본인만의 독특한 취향이 가미된 음악이 참 좋더라고요. 게다가 전 20세기 출생이 아니거든요. 저스디스의 [LIT]은 전개 방식에서나 전달 방식에서나 확실히 호불호가 갈릴 만한 앨범이었는데, 표현이 하나 같이 암호화되어 해석의 여지가 매우 많은, 말 그대로 미로 같은 앨범이었기에 힙합의 문학성을 높이 치시는 분들께선 마음에 드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일단 이런 앨범을 지금 이 시점에 낸 것만으로도 전 고평가해주고 싶어요.

 



올해 최고의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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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SALÍA - LUX

 

'좋은 음악을 듣는 데에 사실 가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로살리아(ROSALÍA)의 음악을 [MOTOMAMI]로 처음 들으며 한 생각이었습니다. 애초에 해석이 없다면 알아듣지도 못하고, 실제로도 말이 안되는 내용 투성이였으니까요. 그런데, 로살리아는 그녀의 음악 언어를 한번 더 말이 안되게 뒤집어 되려 청자들이 그녀의 가사를 중대히 여기게 했습니다. [LUX]가 훌륭한 점, 무려 14개의 언어를 사용하며 진정으로 보편성 속의 초월성을 탐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앨범은 종교적이지만 동시에 종교인의 작품이 아닙니다. 세계 각지에서 고통을 겪고 성녀로 거듭난 인물들의 개인사를 자신과 대조하며 깨달음을 얻으려는 한 인간의 인문학적 여정이죠. 로살리아가 바라보는 대상들은 분명 종교적인 사람들이나, 그녀는 그들의 인간성에 집중합니다. 섹스와 폭력, 이별과 방황으로 점철된 그들의 삶을 그들의 언어로 각각 읊어보며 유사한 역경을 겪고 있는 자신 또한 신을 찾고 구원받을 수 있을지 고뇌하고 연약함을 드러내죠. 희생정신과 헌신, 동시에 지극히 인간적인 연약함과 욕망의 이미지가 교차되며 입체적인 감정선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그 주제의식이 이처럼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연히 훌륭한 음악이 자리하고 있죠. 로살리아 음악의 근간은 플라멩코입니다. 그녀는 지난 커리어 동안 이것을 다양하게 변용하며 라틴 팝의 미래를 주도했으나, [LUX]에서는 차원이 다른 음악적 야망을 보여줍니다. 캐롤라인 쇼와 노아 골드스타인,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동원하여 웅대한 오페라 팝, 클래식 크로스오버 음악을 구축한 것이죠. 이 정도 규모는 칸예 웨스트의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 이후 메인스트림에서 처음 접한 맥시멀리즘이었어요. 무엇보다 그러면서도 결코 과잉되지 않습니다. [LUX]의 진정한 강점은 인상이 아닌 전개라고 느껴질 정도로, 앨범 내내 루프형 제작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4악장 동안 계속 연주하기만 함으로써 예상할 수 없으면서도 철저히 이해선상 위에 존재하는 고전미를 설계한 것이죠. 그녀의 창법 또한 성악과 접목되면서 더 청아하고 위력적으로 변모하며 뛰어난 몰입감을 제공하고 감정의 근간 자체를 뒤흔들어버립니다. 그러면서도 [LUX]를 이루는 음악의 근간, 플라멩코가 오페라에 완전히 잠식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직 로살리아만이 해낼 수 있는 고차원적인 라틴 팝을 제시했다고 생각하네요. 물론 이 같은 규모의 앨범이 근래에는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 독보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겠죠.

 

전자음악과 아트 팝적인 접근이 돋보였던 초~중반부의 음악적 역동성에 비해 단순히 오케스트라 연주에만 치중한 엔딩 이전까지의 구간이 다소 아쉽긴 하나, 앨범의 서사와 감정선을 따라가다보면 아쉬움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죠. 여성 영성을 탐구하며 구원을 꿈꿨으나 결국 그녀는 성녀가 되기보다 용서와 포용을 택한 한 여인으로서 상징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결국 [LUX]가 도달한 곳이 실패일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앨범이 독보적인 만큼이나 로살리아는 그녀의 여정을 진행하는 데에 그 누구보다 적극적이었고, 세속과 신성을 연결하려는 과정들을 고스란히 음악으로 승화함으로써 성녀가 아닌 예술가가 되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렇기에 "Magnolias"의 죽음은 상징적으로 해석됩니다. 극복을 결과론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과정으로서 해석했기에 깨달음은 또 다른 이들의 입에서 다시 읊어지는 결말이죠.


Outro: 그럼에도 좋았던 다른 앨범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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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최고작으로 자주 언급되는 앨범은 아마 다음 세 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데프헤븐의 [Lonely Power With People], 스완스의 [Birthing], 기스의 [Getting Killed]. 그런데 잘 만든 것과는 별개로 세 앨범 모두 제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Lonely Power With People]은 바로 이것이 블랙게이즈구나, 할 만큼 장르적으로 완성도가 정말 높은 앨범이긴 했습니다. 사운드의 통일성이 높으면서도 충분한 선에서의 변화구가 많기도 했고요. 근데 바로 그 사운드가 제 취향이 아니었습니다. 슈게이즈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시끄러운 걸 별로 선호하진 않거든요. [Birthing]은 여타 스완스 앨범들처럼 저절로 압도당할 만큼 경이로운 규모와 전개가 놀라웠습니다. 근데 문제는 제가 스완스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 이유는... 앨범이 너무 길기 때문에... 심지어 곡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냥 순수하게 곡 길이가 길어서... 포스트락 감수성은 아직 제겐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Getting Killed]는 셋 중 가장 흥미로운 앨범이었습니다. 케니 비츠를 프로듀서로 기용한 만큼 보다 락앤롤 본연에 가까운 에너지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상당히 해체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예측할 수 없이 질주하다가 간헐적으로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방식으로 표출되어서 신기했어요. 크라우트 락의 영향을 받은 것 같기도 하면서도, 어느 때에는 한없이 차분해지다가 갑자기 또 폭주하고. 다만 케머론 윈터의 보컬이 제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보니 그 강렬한 경험에 완전히 이입될 순 없었던 것 같네요.

 

올해 여러모로 가장 화제가 되었던 앨범인 디존의 [Baby]도 제외할 수 없죠. [Getting Killed]가 그랬던 것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장르의 정수에 접근하면서도 단순 융합의 방식이 아니라 장르의 문법 자체를 붕괴하는 방식의 해체주의를 선보였는데, 이 점이 많은 이들에게 흥미롭게 받아들여진 것 같습니다. 마치 디안젤로의 네오 소울처럼 박자를 미는 방식의 그루브를 선사하는데, 이 방식이 자연적이기보다 인위적으로 느껴집니다. 콜라주화된 알앤비와 소울, 힙합 사운드 소스들이 불규칙적으로 발생했다가 꺼지는데, 이것이 디존의 보컬과 독특하게 화학 반응을 일으키며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적 없는 독창성으로 완성됩니다. '해체주의의 완성'이란 역설을 담고 있어요. 만약 이 실험이 후대에 더 중요하게 여겨지면 디존은 프린스 같은 존재가 될 것이고, 그냥 그때의 흥미로운 시도 정도로 넘겨진다면 한 시대의 중요한 알앤비 음악가 중 하나로 남을 것인데... 일단 전 후자 쪽의 손을 들고 싶습니다. 프랭크 오션 정도의 파급력이나 감정적 설득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장르는 다르지만 원오트릭스 포인트 네버의 [Transquilizer]가 순수 완성도 면에서는 정말 압도적이었다고 생각하네요. [LUX]가 없었다면, 전 이 앨범의 손을 들어줬을 것 같습니다. 앰비언트 음악인 데도 한 순간 집중력을 잃을 수 없게 매우 섬세한 척도에서 사건들이 일어나고 압도적인 공간감을 선사합니다. OPN 본인이 직접 '과정지향적인 음악'이라 표현한 만큼 음악 앨범이라기보다도 하나의 경험처럼 느껴졌어요. 서서히 고조되는 신스 라인에서는 반젤리스의 <블레이드 러너> 사운드트랙 앨범 생각도 났고, 후반부로 치닫을 수록 격정성을 더해가는 전개는 어떠한 한계마저 초월한 듯한 인상이었습니다. 올해 내한해 [Transquilizer] 전곡을 공연한다는데, 꼭 가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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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메인스트림도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위켄드는 [Hurry Up Tomorrow]로 위켄드 커리어의 종막을 알렸는데, 개인적으로 7~8할 정도 만족스러운 엔딩이었습니다. 그 어떤 아티스트도 쉽게 대체할 수 없는 강렬하고 장대한 음악적 체험이었으나, 트랜지션의 쾌감과 큰 볼륨에 집중한 탓에 앨범의 완성도 자체는 오히려 나이트메어 삼부작 중 가장 떨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포기할 곡들은 조금 과감하게 포기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럼에도 오직 위켄드 정도의 위치에 있는 팝스타만이 자본력과 음악적 비전을 총동원해 구축할 수 있는 유일무이의 영화적 프로덕션이라는 점에선, 호평을 해주고 싶네요. 그런데도 그래미에게 거부당하다니, 한편으로는 딱하기도 합니다. 반면 그래미에게 발탁된 앨범들 중에서도 괜찮은 앨범들이 있었죠. 레이디 가가의 [MAYHEM]은 순수 완성도로는 가가의 최고작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초반부의 다크 팝 트랙들이 너무 강렬한지라 디스코 팝으로 전향해버린 중후반부의 선택이 너무나도 아쉽긴 했으나, 가가 본인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비해 앨범은 지극히 평범해지는 고질적인 문제이니만큼 오히려 일부 곡을 제외하고 퀄리티에서라도 신경을 써주니 나름 즐겼습니다. "Shadow of a Man"에선 마이클 잭슨 생각도 났고요. [DeBÍ TiRAR MáS FOToS]는 배드 버니를 그저 라틴계 빨이라고 생각하던 제게 조금 다른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래도 배드 버니가 자신의 지역 음악에 대해 나름대로 진중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고 완성도도 아주 특출나진 않지만, 그럼에도 마냥 요행은 아니었다는 느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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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T SUMMER'로 대표되는 작년의 댄스 음악 유행에 이어 올해도 여러 음악가들이 댄스 음악과 전자 음악에 대해 자신만의 열혈한 러브레터를 써냈던 것 같습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행보였다면 역시 FKA 트윅스의 [EUSEXUA] 프로젝트를 뽑을 수밖에 없겠네요. 아트 팝 음악가 중에서도 가장 앞서나가있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보컬의 역량만큼은 현 세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EUSEXUA]에서는 레이브 파티에서나 느낄 수 있는, 육체를 통한 정신의 해방감을 환상적으로 표현해냈어요. 비요크나 케이트 부시 같은 과거의 아방가르드 팝 아티스트들을 오마주하는 한편, 자신의 독보적인 역량으로 '유섹슈아'라는 새로운 차원의 경험과 개념을 음악적으로 구현하는 데 성공하지 않았나 싶네요. [EUSEUXA Afterglow]는 임팩트 면에선 전작보단 덜하긴 해도, 보다 균형잡히고 통일성이 강하다는 점에서 역시나 긍정적으로 들었고요. 핑크팬서리스의 [Fancy That] 역시 훌륭한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녀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해요. 믹스테입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트랙 하나하나의 임팩트가 가장 지대했고, 그녀만의 상큼한 개러지 & 클럽 사운드가 완성된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어요. 싱글 단위로 본다면 올해 가장 강력했던 "Illegal", "Tonight", "Stateside" 등이 한 앨범 안에 수록되었다는 사실부터 이 프로젝트가 얼마나 훌륭한지 방증하고 있죠.

 

니나지라치의 [I Love My Computer]도 정말 좋아했습니다. 사실 댄스음악으로선 올해 최고가 아닌가 싶어요. 작년의 [BRAT] 포지션을 올해는 누가 차지할까 궁금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신인이 치고 올라올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것도 쟁쟁한 경쟁자들을 오직 순수 음악적인 완성도만으로 제치고서요. 일렉트로팝/하우스 사운드에 버블검 베이스나 트랜스적인 접근을 더했는데, 그게 너무나 취향에 맞았습니다. 음악적인 쾌감 자체로는 올해 최고였어요. 특히 "iPod Touch"를 좋아했습니다. 포터 로빈슨과 비교하는 평들이 많은데, 전 포터 로빈슨보다도 더 좋았어요. 물론 정통적인 방식으로 댄스음악의 우수함을 계승하는 아티스트들도 많았죠. 조던 미셸의 [Through The Wall]은 올해 가장 호평을 많이 받은 댄스 음악 앨범이 아니었나 싶어요. 특히 블랙뮤직 리스너들로부터의 지지가 굉장했죠. [Through The Wall]의 가장 큰 장점은 철저한 절제와 지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튀는 부분 없이 댄스음악의 본질에 집중해 하우스 클럽이나 댄스 플로어에서 쭉 틀어놓아도 손색이 없는 웰메이드 말이죠. 물론 그 중에서도 "Close 2 Me" 같이 특히 마음에 드는 트랙도 있긴 했습니다. 수단 아카이브의 [The BPM]도 좋은 시도였습니다. 특히 <공각기동대>를 오마주한 앨범 커버처럼 사이버펑크적인 색채가 앨범 전반에 도는 것이 마음에 들었고, 그녀의 바이올린 연주가 테크노, 하우스와 결합되며 내뿜는 아프로퓨처리즘적 시너지가 인상적이었어요. 스크릴렉스의 [F*CK U SKRILLEX YOU THINK UR ANDY WARHOL BUT UR NOT!! <3]도 빼놓을 수 없네요. 46분 동안의 라이브 공연을 앨범으로 그대로 담아놓은 듯한 압도적인 에너지의 브로스텝 앨범이었는데, 덥스텝이 구려질 일은 있어도 스크릴렉스가 구려질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체급이란 게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 작품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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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아쉬운 앨범들도 있었네요. 테임 임팔라의 [Deadbeat]은 진짜 제목처럼 감이 다 뒤졌나 싶은 앨범이었습니다. [Currents]를 만들던 케빈 파커가 이렇게 진부하고 지루한 댄스 팝 음반을 만들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스타일만 존재하는 장르 차용이 남아있을 뿐, 들으면서 한번도 흥분하지 못했습니다. 로드의 [Virgin]은 [BRAT]에게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치곤 로드 본인의 음악색과 하이퍼팝적인 에너지가 잘 맞지 않는다는 인상이었네요. 사실 음악 자체도 하이퍼팝이라기보단 신스팝에 가까울 정도로 소극적이긴 했어요. 아직까지도 [Melodrama]의 로드를 기억하고 있는 저로선 여러모로 기준치에는 미치지 못하는 앨범이었습니다. 오케이루의 [Choke Enough] 역시 개인적인 청취 감상은 앨범에 대한 하입에는 미치지 못했어요. 사운드 디자인은 정말 세심하고 정교하다고 느꼈지만, 다소 미니멀하게 공간감을 창출하는 베드룸 팝으로서의 성격 때문인지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았네요. 특히 인상적인 훅과 코러스의 부재가 팝 앨범으로선 아쉬웠어요. 그 단점마저 후반부로 가면 오히려 장점의 빌드업으로 남긴 했지만... 오히려 전 예상치 못하게 애디슨 레이의 [Addison]이 올해 최고의 팝 앨범 중 하나였다고 생각해요. 틱톡커에서 팝스타로서의 변신, 모두 여성들로 구성된 프로듀서 팀, 실제적인 결과물까지 내외연이 모두 견고한 훌륭한 작품이었습니다. 앨범 수록곡 중 선공개 싱글을 뛰어넘는 곡이 없었던 것만 제외하면, 과거 여성 팝스타들의 잔상이 스쳐가면서도 분명 본인만의 매력을 부각하는 데 성공한 훌륭한 앨범이라고 느꼈네요. "Diet Pepsi", "Aquamarine", 'Fame is a Gun" 같은 곡은 특히 정말 많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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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앤비 씬도 정말 좋은 앨범이 많이 나왔던 것 같아요. 사실 알앤비는 꾸준히 좋은 앨범이 나오긴 했지만, 올해는 [Baby]의 등장 때문에 알앤비에 한층 더 주목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나 할까요? 아마 노리시드 바이 타임의 [The Passionate Ones]가 [Baby] 다음으로 호평을 많이 받은 앨범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수공업적인 작업 방식을 통해 노리시드 바이 타임 본인의 취향이 프로덕션 전반에 많이 가미되었는데, [Baby]와는 정반대로 과거 90년대 알앤비의 향수를 충실히 이어받으면서도 아날로그적인 신스와 포스트 펑크적인 사운드를 추가해 자신만의 방법론을 다시금 개척하지 않았나 싶어요. 개인적으로 올해 알앤비 앨범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칼리 우치스의 [Sincerely,]였습니다. 원래도 칼리 우치스의 관능적이고 달콤한 알앤비 음악을 좋아하는데, 이번 앨범은 드립 팝적이고 몽환적인 사운드가 더 짙어져서 취향에 잘 맞았습니다. 특히 출산이라는 큰 이벤트를 겪고 만들어서 그런지 초보 애엄마로서의 무한한 사랑이 앨범에 너무나 잘 반영된 것 같아요. 부모가 되는 일은 너무 아름답니까요. 그 외에도 블러드 오렌지의 [Essex Honey]와 다니엘 시저의 [Sons Of Spergy] 역시 각자만의 방식으로 돌파구를 찾으며 알앤비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을 더 공고히 했죠. 블러드 오렌지는 게스트들을 영화 조연들처럼 분배하고 사운드를 즉흥적으로 해체하며 특유의 추상성을 부각했고, 다니엘 시저는 본 이베어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지 아예 포크와 가스펠을 작품의 중추로 설정하며 개인적인 담론을 더 성숙한 차원으로 옮겨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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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앨범은 진짜 죽어라 안 듣긴 했는데... ㅎㅎ... 파란노을의 '부캐'인 Humeric의 [Seeking Darkness]는 정말 세계구급으로 좋은 앨범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프로덕션의 완성도만 따지면 이전 파란노을 프로젝트들보다 더 우수하고, 한국 대중음악 역사를 통틀어 손에 꼽힐 정도였다고 생각해요. 사실 제가 파란노을 음악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데, [Seeking Darkness]는 어느 정도 흑인음악적인 그루브가 녹아있어서 더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포스트락의 문법에 퓨전 국악의 사운드를 섞어버리다니요. 올해 가장 실험적이고 경악스러운 청각적 경험이었습니다. 또 엔믹스의 첫 정규 앨범이었던 [Blue Valentine]도 정말 좋았습니다. 올해 국내 팝 앨범 중 압도적으로 최고였어요. 전작 [Fe304: FORWARD]도 좋게 들었는데, 이번 앨범은 전작에서 완성도 높게 보여준 음악적 전위성에 대중적인 감각까지 섞어내 정규작다운 체급의 음악을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특히 "SPINNIN' ON IT"과 "Reality Hurts"를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이제야 엔믹스라는 브랜드가 지닌 '믹스팝'이란 정체성을 음악적으로 성숙하게 다루는 방법을 알아낸 것 같아요. 훗날 케이팝 명반 중 하나로 당당히 기억되지 않을까 싶네요.

 


 

가장 좋아했던 올해의 뮤직비디오들

 

* 순위가 없는 목록이며, 올해 마음에 들었던 뮤직비디오 20개를 나열했습니다.

 

https://youtu.be/URlPXepBZdo?si=sjkrEBxJpQCcOeRt

모든 장르 중에서도 힙합을 압도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입장으로서, 올해 힙합에서 클립스의 컴백만큼 중대했던 사건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 하입과 환상에 걸맞는 규모의 귀환이었어요. 특히 "So Be It"만큼은 정말 훌륭했다고 모두가 동의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탈랄 마다의 "Maza Akoulo"를 샘플링하고 위력적인 역재생 드럼셋을 가미한 충격적인 비트와 함께 공개된 뮤직 비디오는 [Let God Sort Em Out]이 추구하는 코크 랩의 브랜드화를 완벽하게 이뤄낸 것 같습니다. 흑백임에도 모든 컷들이 질감이나 원근감 면에서 무척이나 풍부하게 세공되었죠. 특히 흑인 피부의 질감을 담아내는 데에는 업계 최고 수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최상급의 비주얼에 힘입어 위력적인 몽타주들이 연속적으로 배치되며 위협적인 고급 범죄의 느와르적 테마를 완벽하게 구현해냈어요. 특히 푸샤 티와 말리스 중 한 명을 화면의 왼쪽에 배치하고 오른쪽 공간에 벽에 비친 나머지 형제의 그림자를 배치한 미장센은 여러모로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당연히 클립스 형제가 랩을 너무 잘하니 그것만으로도 좋았고요. 그냥 봐도 굉장히 멋있었지만, 그 함의까지 완벽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올해 최고의 뮤직 비디오가 아닐까 싶습니다.

 

https://youtu.be/vBynw9Isr28

나오자마자 그야말로 압도당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가가 본인이 워낙 재능의 집합체이다보니 어떤 활동을 하던 간에 좋아했지만, "Abracadabra"가 처음 나왔을 때는 드디어 내가 기억하던 가가의 모습이 나오는 건가 하며 엄청 기대를 많이 했어요. 사실, 엄밀히 따지면 역대 가가의 커리어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The Fame Monster]나 [Born This Way]의 아성조차 뛰어넘는 작품이 나오는가 했어요. 물론 [MAYHEM]이 기대와는 살짝 다른 앨범이라 실망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 곡만은 훌륭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올해 최고의 곡 중 하나라고 해도 무방하죠. 댄스 팝 디바가 얼마 남지 않은 시대에 그 경이로운 가창력과 에너지, 안무로 모든 감각을 사로잡는 가가의 모습을 보니 매우 반가웠어요. 연기하는 레이디 가가도 좋지만, 이런 게 바로 진짜 레이디 가가죠. 특히 두번째 포스트 코러스에서 180도 돌아가는 카메라에 맞춰 춤추는 가가와 댄서들의 에너지는 화면 밖까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이러는데 어떻게 악마 숭배자로 오해 안 하냐고...

 

https://youtu.be/F0cdbR5ognY?si=9QBCCyM7vFUknZ42

바이럴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욕을 많이 먹고 있긴 해도, 저는 여전히 도이치가 넥스트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너무 과하게 하입받은 건 사실이긴 하지만... 정통파적인 역량과 팝적인 감각까지 두루두루 갖춘 여성 래퍼는 흔하지 않거든요. 다음 행보만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도이치가 이 시대의 미시 엘리엇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DENIAL IS A RIVER"가 아무리 틱톡에서 바이럴된다고 해도 훌륭한 랩 트랙임을 부정할 수 없죠. 사실 곡 자체가 둠 타입 비트를 편곡한 미니멀한 비트 위 상당히 친절한 스토리텔링 랩의 구성인지라, 뮤직 비디오가 어떻게 나올까 궁금했는데 기대 이상의 결과물이 나와버렸습니다. 원곡의 랩에서 느꼈던 쾌감을 영상에서 그대로 느낄 수 있었어요. 대니 브라운이 "Ain't It Funny" 뮤직 비디오에서 조나 힐과 함께 시도한 90년대 시트콤 컨셉을 능청스럽게 살려낸 것만으로도 호평받아 마땅한데, 진가는 카메라가 현대적인 화질로 전환될 때부터 시작됩니다. 스파이크 리의 더블 돌리 샷으로 시트콤 세트를 벗어나다가 세트가 폭발해버리는 결말까지 근래의 모든 뮤직 비디오 중 비주얼과 기승전결 모두 가장 완성도 높았다고 생각해요. TDE 출신답게 비주얼 측면에서도 좋은 성과를 보이는 래퍼라고 생각하는데, 이 뮤직 비디오에서 정점을 찍은 것 같아요.

 

https://youtu.be/-V4jiPcNUjg?si=tVLqdz74jp_hWx4F

사실 JID 때문은 아닙니다. 클립스 빠질의 연장선에 가까운데, 애초에 JID 본인부터 그럴 의도로 만든 뮤직 비디오처럼 느껴져요 ㅋㅋㅋ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클립스 형제가 JID를 완전히 씹어먹었다고 생각했으니... 애틀란타 지역사회의 다양한 풍경을 교차해 보여주는 몽타주는 [Let God Sort Em Out] 뮤직 비디오에서도 사용된 문법이었고, 중앙에 카메라를 두고 래퍼들이 주위를 도는 모습을 360도로 촬영한 건 투팍의 "Made Niggaz" 뮤직 비디오를 연상시키기도 했네요. 일단 올해 최고의 랩 퍼포먼스를 보여준 래퍼 세 명이 모인 뮤직 비디오다보니 그 점도 마음에 들었고, 도색이 벗겨진 빈 공동주택을 참 무정하면서도 위협적인 장소처럼 촬영한 것 같아요. 로케이션 선정이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말리스가 등장할 때 히치콕 현기증 기법으로 쫙 빼주다가, 벽에 기댄 채 무심하게 위아래로 훑어보는 장면은 정말 제대로 취향 저격이었습니다. 말리스가 올해의 래퍼임을 확신하게 된 순간인 것 같아요.

 

https://youtu.be/IrEFKJnl1H8?si=3DWWK_seTIAtsL-I

여러모로 신기한 뮤직 비디오에요. 위에서 밝혔듯 [Fancy That]을 핑크팬서리스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녀의 색이 가장 짙어진 프로젝트랄까요. 어떤 면에서는 찰리 XCX의 [Pop 2] 생각도 났고요. "Tonight"이 가장 먼저 선공개된 곡이었는데, 좋은 의미로 충격받았습니다. 음악부터 비주얼까지 발전을 멈추지 않는다는 게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어요. 이렇게 발랄한 댄스 팝에, 클럽에서 울려퍼질 법한 외설적인 가사인데 정작 비주얼 컨셉은 영국 상류사회라뇨. 다인종들이 고증 따윈 무시하고 예복을 차려입은 근본 없는 컨셉은 <브리저튼> 생각이 났고, 마돈나의 1990년 MTV "Vogue" 공연도 떠올랐습니다. 의상도 그렇고, 댄서 구성도 그렇고, 분명 영향을 받았으리라 확신해요. 비주얼과 음악의 상이함이 가사의 섹시함을 몇 배는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주었고, 특히 후반부에서 단체로 춤추는 씬과 레이브 파티에 가까워지는 광경은 허울 따윈 집어던지고 본능에 충실해지라는 댄스뮤직의 본질에 색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것만 같았어요. 원래도 그랬지만 핑크팬서리스는 가면 갈수록 스타일리시해지는데, 다음 앨범이 더 기대됩니다.

 

https://youtu.be/htQBS2Ikz6c?si=MkDiJPIQQYuz5s92

처음에는 뮤직 비디오보다도 음악 자체에 경도되었습니다. 분명 제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로살리아는 [MOTOMAMI]의 팝스타스러운 모습이었는데, 갑자기 격정적인 오케스트라 연주를 동원하더니 성악을 조져버리는 충격적인 시도는 저로 하여금 "도대체 로살리아는 얼마나 더 발전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절로 들게 했었죠. 사실 "Oral" 때부터 슬슬 다시 제대로 아방가르드해지나, 라는 생각을 하긴 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때 피쳐링도 비요크였네요. 아무튼 오케스트라를 동원한 아방가르드 팝이라, 과연 얼마나 대단한 앨범을 낼 것인가 기대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뮤직 비디오 자체도 비주얼적으로 상징들이 넘쳐나더라고요. 생사의 경계, 사랑과 욕망, 성(性)과 성(聖)의 이미지들이 병치되며 해석의 여지가 많은, 예술 작품 같은 뮤직 비디오가 탄생한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도 모든 내용을 다 정확히 해석하진 못하겠어요. 다리미로 빨간 옷을 펴는 행위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러모로 [LUX]라는 대작의 예술성을 대변하기에 안성맞춤이었던 뮤직 비디오였네요.

 

https://youtu.be/k3OTpuNep_o?si=TSx-K38leL4o1199

그냥 와패니즈 감성을 숨길 생각을 안 하고 대놓고 내비쳐서 오히려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설프게 따라하려고 하는 것보단 그냥 본인들의 환상과 허황된 이미지를 뻔뻔하게 밀고 나가는 게 보기 좋은 법이죠. 전 오리엔탈리즘이란 것,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히 창작물에선 잘만 쓰이면 오히려 마음에 든달까요. 그런 면에서 [Alfredo 2] 역시 아쿠자 컨셉으로 치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야쿠자 범죄에 대해서는 일절 다루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어차피 모를 텐데, 왜 굳이 논하나요. 이미지만 차용하면 됐지. 어찌 되었건, 이 뮤직 비디오도 제대로 와패니즈스러워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디 일본 시골 아무 데나 가서 사무라이 수련을 한다는 컨셉 자체가 제대로 B급 영화 같았어요. 어떤 장면들은 <킬 빌> 생각도 나더라니까요. 마치 블랙스플로이테이션과 찬바라 필름의 만남 같달까... 화면 질감도 뭔가 최근 일본 영화 같았고, 수련하면서 가끔씩 이상한 소리 내는 것도 개웃기고, 플루트 샘플 사용했다고 가사에 안드레 3000 언급하는 것도 웃긴데 어디에서 진짜 피리 부는 노인 한 분을 주워와서 스승 역할을 맡긴 것도 웃겼어요. 뮤직 비디오의 톤 자체는 매우 진중한데 사무라이 놀이하는 흑인, 백인, 동양인의 합이 어이 없어서 배로 재미있달까요. 사무라이 흉내를 내면서 몸자랑하는 깁스도 멋지면서 웃겼습니다.

 

https://youtu.be/F7h3PTMioAU?si=VI1PXbk-fuc6FJBL

이 영상에 있는 댓글은 아닌데, 'Danny XCX'라는 댓글이 너무 웃겼습니다. 진짜 대니 브라운은 무슨 바람이 들어서 갑자기 하이퍼팝 위에 랩을 할 생각을 했을까요? 근데 심지어 그게 왜 잘 어울릴까요? 요즘 하이퍼팝과 디지코어에 관심있다고 팟캐스트에서도 밝혔고, 제인 리무버나 8485 피쳐링으로 들어갈 때도 상상 이상으로 잘하긴 했었는데... 사실 2010년대부터 혼자 EDM 위에 랩하던 양반인 걸 감안해보면, 하이퍼팝의 과잉을 별 힘들이지 않고 따라가며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건 당연지사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 중 "Copycats"는 앨범에 대한 제 기대를 대폭 올린 곡이었죠. 이때까지만 해도 [Stardust]가 [Big Fish Theory]를 계승한 하이퍼-랩의 게임 체인저가 될 줄 알았다니까요? 심지어 뮤직 비디오는 더욱 마음에 들었는데, 리무진 안에서 카메라가 360도 롱테이크로 촬영하며 다른 컷으로 교차되기도 하고 한 인물이 동시에 두 번 등장하는 특이한 기법은 마치 "Mercy" 뮤직 비디오를 연상시키기도 했어요. 도플라밍고처럼 차려입고 팝스타 코스프레를 하는 대니 브라운도 좋았지만, 푸른색 조명을 받으며 유난히 예쁘게 촬영된 언더스코어즈의 스웨거를 살린 게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모로 신의 한 수였어요.

 

https://youtu.be/wZ2njttY3BA?si=_jWNFQA_-txfh_B5

FKA 트윅스의 뮤직 비디오는 순수한 육체미와 괴이할 정도로 아방가르드한 이미지를 교차시킴으로써 독창적인 미학을 발현하게 되는데, [EUSEXUA] 수록곡 중 "Striptease"의 뮤직 비디오가 그것을 가장 잘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댄서 출신이어서 그런지 몸 근육을 참 잘 쓰는데, 곡 자체가 스트립 댄스에 대해 노래하고 있음에도 섹슈얼한 느낌보다는 순수하게 아름답다는 인상이 강했던 것 같아요. 앨범이 추구하는 테크노적인 유포리아, 육체적 활동을 통한 정신적 해방의 이미지를 환상적으로 표현한 뮤직 비디오라고 생각합니다. 뮤직 비디오의 배경이 터널인 것도 의미심장하죠. 다음 단계, 차원으로 건너가기 위한 교두로에 위치해있음을 은유하니까요. 엔딩에서 트윅스가 연약함을 극복하고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는 팝스터적인 존재가 되는 전개를 고려하면 모든 상징과 구조들이 절묘하게 짜맞춰지는 느낌입니다. 첫번째 코러스에서 마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동작을 취하는데, 브릿지부터 기괴한 데칼코마니 같은 형상이 등장하는 연출도 역시 인상적이고요.

 

https://youtu.be/nBJRaflBDBg?si=piUum8fbFn3uP5GC

도자 캣의 앨범이나 음악 자체는 참 평범한 수준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비주얼적으로, 특히 퍼포머로서 도자의 재능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현 세대 최고 수준이에요. 랩과 노래, 안무까지 소화하는 준수한 재능을 보이면서 탄탄한 라이브를 선보이는 아티스트는 분명 흔하지 않죠. 얼마 전 내한을 왔었는데, 안 갔던 게 살짝 후회됐습니다. 아무튼 이번 [Vie]는 도자 캣이 낸 앨범 중에 가장 괜찮은 축이었던 것 같습니다. 원래는 들을 생각도 안 했었는데, 이 뮤직 비디오를 보고 볼 생각을 할 정도였어요. 80년대 화장품 광고를 전격적으로 레퍼런스한 게 매우 마음에 들었습니다. 조명이나 보정, 포즈, 글자 폰트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하고 스타일리시하게 고증되었어요. 이리나 샤크, 아녹 야이, 알렉스 콘사니 등 말 그대로 다양한 매력과 정체성을 가진 모델들을 아름답게 조명하며 곡의 정체성에 완벽히 부합하는 멋진 뮤직 비디오를 만들었달까요? 명품 브랜드나 명품 향수 광고를 보는 것만 같은 만족스러운 영상이었습니다.

 

https://youtu.be/JAe2faaZ3sY?si=3YXrfcts8q_WSNnf

전 언제나 막달레나 베이의 음악과 비주얼을 좋아했어요. "Killshot"과 "Secrets (Your Fire)"를 처음 접했을 때부터, 이들의 베이퍼웨이브적인 DIY 뮤직 비디오가 굉장히 취향에 잘 맞았습니다. [Mercurial World]도 그들의 스타일을 가장 훌륭한 버전으로 정제해 앨범 단위로 구성한 작품이라서 무척이나 좋아하고요. 근데 [Imaginal Disk] 때부터 확실히 변화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근간은 댄스 & 전자음악이었는데, 신스 팝에서 네오 사이키델리아와 얼터너티브 락의 성격이 강해지며 더 실험적이고 진보적인 음악이 되었달까요? 비디오 스타일도 초자연적이고 연극적인 성격이 강해졌고요. "Second Sleep"은 그런 변화를 반영하는 또 하나의 훌륭한 싱글이었습니다. 제목처럼 지친 현대인의 모습과 꿈 속의 풍경을 교차해 보여주는데, 다리 위를 걷는 미카를 찍은 방식은 마치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 톰 크루즈가 걸어가는 모습을 오마주한 것 같아요. 또 꿈 파트에서는 마치 팀 버튼적인 비주얼들이 지나가고요. 그러고 보니 이 뮤직 비디오에서 미카가 왠지 웬즈데이를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ㅋㅋㅋ 촬영방식이 촬영방식이다보니 꿈 속의 비주얼이 더 입체감과 생동감이 넘치는데, 그런 면에서 주제의식 또한 잘 전달한 뮤직 비디오라고 생각합니다.

 

https://youtu.be/cXmYNmQ4BuM?si=6fCl5NCpePhFOuqN

상업적으로는 로제가 가장 성공했지만, 음악적으로는 제니가 블랙핑크 멤버들 중 가장 성공적인 솔로 앨범을 냈다고 생각합니다. 북미 팝과 흑인 음악 트렌드의 영향이 많이 느껴지긴 해도 어쨌든 음악적인 비전이 보이는 작품이었어요. 특히 "ZEN"은 아트 팝이라고 분류해도 될 정도로 제니 본인의 자신감과 예술성이 많이 녹아있는 싱글이었는데, CG가 조금 어색한 것 빼고 뮤직 비디오가 정말 훌륭했습니다. 비요크나 FKA 트윅스의 한국적인 버전을 보는 것 같기도 했어요. 신라 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을 아름답게 녹여낸 패션부터 인상적이었는데, 단순히 블랙핑크 시절부터 시도해오던 한국 전통의 현대적 재해석으로만 봐도 무척이나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이는 곡이 이야기하는 선(禪)의 정신과도 맞닿아있는 부분이기도 했죠. 삼국시대에 불교가 가장 발전했던 국가가 신라였죠. 게다가 깨달음을 상징하는 연꽃이나 지혜를 상징하는 부엉이의 상징적 활용, 무엇보다 'Shake me'라는 가사가 'Shape me'로도 들리며 제니를 감싸는 환경과 패션은 달라져도 중앙에는 굳건히 제니 본인이 존재하는 장면은 정말 훌륭했습니다. 아티스트로서 그녀의 자의식이 얼마나 강한지 예술적으로 증명하는 인상적인 뮤직 비디오였네요.

 

https://youtu.be/QgyW9qjgIf4?si=n_CVOorvXq-FejGP

전 클럽에 아직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가보고는 싶은데, 솔직히 엄두가 안 나요. 그래서 클럽 안 가는 사람들을 위해 클럽 음악을 만들 법한 아티스트들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제인 리무버는 그런 부류의 아티스트 중 요즘 가장 하입받는 아티스트죠. 올해의 힙합 앨범 3위로 [Revengeseekerz]를 꼽았을 만큼 순수 힙합과 거리가 먼 데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중 "Dancing with your eyes closed"는 가장 먼저 느낌이 올 만큼 leroy 시절을 연상케 하는 대중적인 싱글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Y2K 미학과도 맞닿아있는 느낌이 났어요. 동시에 하이퍼팝과 디지코어가 추구하는 과잉의 미학이 청각적으로나 시각적으로나 너무 잘 느껴졌달까요. 인터넷과 SNS가 태어날 때부터 존재했던 아이들이 성인으로 자라나며 맞이한 불안한 형국을, 귀가 찢어지는 사운드와 춤, 쾌락으로 해소하는 모습을 너무나 잘 표현해냈어요. 어쩌면 2020년대 들어 댄스음악이 다시 유행하기 시작한 이유와도 맞닿아있달까요. 제인의 락스타적인 면모는 덤이고요.

 

https://youtu.be/tIvAQR9Zj8M?si=V-8ITkM69Hltzx6e

올해 국내 힙합 씬을 넘어 여러모로 가장 주목받은 아티스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국내에서도 하이퍼팝을 전격적으로 시도하는 아티스트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제가 [E]를 나온지 4개월 만에 듣긴 했지만 그래도 [pullup to busan 4 morE hypEr summEr it's goonna bE a fuckin moviE]로 제대로 뜨기 전에 들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원유니버스 페스티벌에 가기 전에 대비용으로 열심히 듣기 시작했는데, 정작 늦게 도착해서 멀찍이에서 듣기만 하고 이브 보러갔다는 후일담이... ㅎㅎㅠㅠ... 아무튼 에피가 킴제이와 협업한 후부터 아티스트로서 본인만의 색을 갖추게 된 것 같아요. 특히 "Down"은 음악적으로나 시각적으로나 에피가 분명 독창적인 아티스트라는 것을 잘 보여준 싱글이었죠. 영상 편집까지 본인이 직접 하는 DIY다 보니 그런 면이 더 부각되는 것 같아요. 맥북으로 찍은 영상에서 본인이 매력적으로 나옴은 물론이고, 여러 효과가 꽤 특징적이다보니 이걸 '카카오스토리 코어' 정도로 부르시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어찌 되었건 2010년대 초반의 노스탤지어를 비주얼적으로 잘 담아낸 깜찍한 뮤직 비디오였습니다.

 

https://youtu.be/Zd0j0xnhWFw?si=XDI9PD024IyGdoK6

언더스코어즈는 하이퍼팝 계열 아티스트 중에서도 가장 팝의 속성에 근접한 음악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이나 한 번 제대로 하입을 받으면 상업적으로 성공할 가능성도 높다고 느껴요. 특히 최근 발표한 싱글 2개나 너무 좋았는데, 뮤직 비디오까지 훌륭했습니다. 오브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비주얼이나 편집의 측면에서는 "Music"이 더 잘 만들었던 것 같은데, 전 "Do It" 쪽이 좀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 케이팝의 영향이 재미있는 방식으로 느껴진달까요? 흔치 않게 안무가 존재하는 것도 그렇고, 템포가 느려지는 브릿지가 존재하는 것도 그렇고. 전 얼마 전에 언더스코어즈가 옛날에 2세대 케이팝 아이돌 팬채널을 운영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어요. 저 학창 시절에 한창 유행하던 코레오그래피 영상들의 영향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2000년도 중후반 팝 음악과 동아시아권 인터넷 문화가 절묘하게 합성된 것 같습니다. 특히 풋스텝 안무가 코러스의 중독성을 배로 올려줘서, 저 혼자 방에서 따라해보고 그랬어요 ㅋㅋㅋ 그나저나 트랜스젠더들이 정말 멋지고 예쁘게 나오는 방법을 슬슬 알아내는 것 같아 큰일(?)난 것 같습니다...

 

https://youtu.be/TkwZ2uQu2hE?si=imQ1nXcWsqQkffei

틱톡 스타에서 팝스타로서의 변신을 정말 성공적으로 마친 올해의 애디슨 레이였습니다. 사실 전 틱톡커 시절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해요. 굉장히 훌륭하고 매력적인 팝 앨범이라고 생각합니다. "Diet Pepsi" 뮤직 비디오는 초창기 라나 델 레이의 향수가 묻어나왔는데, "Fame is a gun" 뮤직 비디오는 옛날 레이디 가가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에디슨 래이가 얼굴이 살짝 귀염상이다보니 외적인 카리스마 면에서는 좀 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선글라스 하나를 끼니까 포스가 확 살더라고요. 엉덩이를 자꾸 보여주는 것도 성적인 면에서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엉덩이가 보통 어떤 상징으로 사용되는지 떠올려본다면 애디슨 레이가 팝스타로서 어떤 종류의 자존감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영상 자체도 흥미로웠는데, MTV와 데이비드 린치의 만남 같달까요? B급 호러 영화나 아방가르드 예술영화 느낌도 나고, 상징적이고 괴상한 이미지들로 가득 찼는데 팝 에너지로 가득찬 뮤직 비디오라 보는 내내 재밌었습니다. 고전적인 뮤직 비디오 미학을 잘 반영한 영상이었어요.

 

https://youtu.be/p2ZdeIKJA8c?si=STJdnUFRarKOK0UR

올해 가장 마음에 든 댄스음악 앨범이라면, 전 주저없이 니나지라치의 [I Love My Computer]를 꼽을 겁니다. 특유의 MZ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분들도 계셨는데, 전 마음에 들었어요. 내가 MZ인 걸 어떡해... 그 중에서도 "Infohazard" 뮤직 비디오는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인터넷 세대의 활동과 정보 과잉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영상이었습니다. 비슷한 양식의 뮤직 비디오를 찾자면 찾을 수는 있는데, 소위 말해 이 정도로 '찐'의 느낌이 드는 뮤직 비디오는 처음이었달까요? 아련한 트랜스 신스가 부각되는 하이퍼팝 프로덕션 위에 14살 때 처음으로 스너프 필름을 봤다는 가사도 어이가 없는데, 니나지라치 본인의 인터넷 기록을 고스란히 담아내 고속 편집한 영상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진지하게 제 비루한 어휘력으로는 이걸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어서 다른 표현들을 빌려오자면, "인터넷이 음악이라면 이런 모습이었을 것 같아요." 얼마 전 [I Love My Computer]에 대해 흥미로운 단평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ADHD가 병력이 아닌 이력이 되는 유일한 세계가 하이퍼팝이라고요.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이게 우리 세대의 모습이라는 하나의 선언이었어요.

 

https://youtu.be/tG1HKY6Jwas?si=e0vIzokeTLS9j2IM

찰리가 진성 시네필인 건 찰리의 팬이라면 모두 잘 아는 사실이죠. [BRAT] 에라의 종식을 선언하고 최근 영화계 활동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찰리인데, 다음 앨범은 기존 스타일과 정반대의 음악이 될 것이라는 말처럼 <폭풍의 언덕> 사운드트랙 앨범 선공개곡들은 하나하나가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요즘 벨벳 언더그라운드 많이 듣는다더니 진짜 존 케일을 데려와서 피쳐링시킨 "House"가 너무 파격적이었던지라, 후에 나온 "Chains of Love"를 무난하게 잘 들은 것 같습니다. [True Romance] 시절도 생각나고, 뮤직 비디오도 이쪽이 더 마음에 들었어요. 확실히 영화를 많이 보다보니 영상 감각도 있는 것 같습니다. 도입부에서 창살 위로 테이블 위에 누워있는 찰리를 보여주며 그녀가 사랑에 갇힌 존재라는 것을 암시하고, 알 수 없는 사슬에 무력하게 끌려다니면서도 그걸 막을 수 없는 연출을 통해 곡과 영화가 묘사하는 사랑이 폭력적이면서도 자기통제력을 잃었다는 걸 보여주죠. 훌륭해요. 테이블이라는 하나의 축을 통해 첫 코러스에서는 X축으로 이동하다가 두 번째 벌스에선 테이블을 들어올림으로써 Y축 이동을 보여주는데, 다음 코러스에서는 그 축에서 벗어남으로써 Z축 이동까지 하는 공간의 활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폴라로이드로 찍은 것 같은 스텝 프린팅 기법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면서도 결국 다시 테이블로 돌아가는 관계의 불가변성을 은유하기도 하고요. 물론 찰리 본인이 몸을 잘 쓰다보니 다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https://youtu.be/OgEwJ8a1OoY?si=BJfqjkaqIjcZskpc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잘' 만든 뮤직 비디오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냥 이 뮤직 비디오의 시각적 이미지가 마음에 들었어요. 제가 올데이 프로젝트에 대해 나름 긍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요. 원유니버스 페스티벌에서 라이브하는 걸 봤는데, 신인치고도 무대를 정말 잘했습니다. 사실 발표한 곡이 얼마 없긴 하지만, 그럼에도 기존 곡들과는 좀 다른 스타일이어서 나름 괜찮았어요. 이후 발매한 EP가 워낙 실망이었다보니 상대적으로 이 곡만 돋보이는 것도 있었고요. 2세대적인 노스탤지어가 흐르는 키보드를 기반으로 DnB와 트랩 등이 조합된 모양새인데, 후반부 하이퍼팝을 표방한 EDM 아웃트로는 참 장르 이해도가 떨어지지 않았나 싶네요. 원유니버스 페스티벌 같은 날에 찰리 XCX가 있었는데, 그걸 따라하고 싶었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전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팀이 가지고 있는 여러 이미지 중 청춘의 이미지가 부각된 뮤직 비디오였기도 하고, 저랑 대부분 비슷한 나잇대다보니 저렇게 밝게 빛나는 게 부럽기도 하고 참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서울 밤 냄새 난다는 표현이 딱인 것 같아요. 특히 영서가 팀의 색깔을 결정적으로 완성시켜주는 멤버라고 생각하는데, 영서가 참 예쁘게 나와서 좋았습니다.

 

https://youtu.be/ax54oYnkjjc?si=1dgrGq0jPT3RBL_c

트윅스는 2개의 뮤직 비디오나 제 마음에 드는 성과를 거두었네요. 자랑으로 여겨도 되겠네요, FKA 트윅스. 영광인 줄 아ㅅ... 어찌 되었건, 앞선 뮤직 비디오들이 압도적인 비주얼을 앞세웠다면, "Childlike Things"는 곡의 컨셉에 걸맞게 연극적이고 유치한 면이 돋보이는 단편 영화 같은 뮤직 비디오였습니다. 호불호가 갈릴 만한 시도였는데, 그 시도가 저에겐 좋게 느껴졌네요. 아티스트가 자신의 예술성을 업계에 증명받고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받기 위해 취급받는 부조리를 풍자적으로 녹여냈고, 트윅스의 연기도 좋았는데 그걸 받아주는 케빈 스미스의 연기도 맛깔났습니다. 특히 "That's what this is about. The thrill of it. The ecstasy that takes over when you open the door on something you didn't even know was shut within you." 같이 [EUSEXUA] 프로젝트의 본질을 꿰뚫는 대사나 "My fans think I'm a deity, so they don't like it when I put rappers on my songs." 같이 해학적인 대사도 있었고요 ㅋㅋㅋ 노스 웨스트도 귀엽게 치장하고 나와서 좋았습니다.

 

+ 이외에도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의 "Darling, I", 테임 임팔라의 "Dracula", 율의 "Evengelic Girl Is a Gun", PARTYOF2의 "JUST DANCE", 파리스 텍사스의 "They Left Me With A Gun" 뮤직 비디오 등이 마음에 들었네요. 트윅스의 "HARD"도 좋았는데, 너무 편애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냥 말래요.

 



올해 최고의 영화 TOP 3
 

Intro: 순위에 대한 나름대로의 변명...

 

왜 1위부터 3위까지밖에 안 매기냐고 물으신다면, 일단 첫번째로... 올해 본 영화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사실 본 영화가 얼마 되지 않는 것보다도, 관람한 신작이 얼마 되지 않죠. 1년의 절반을 군대에 있었다보니 영화관에 많이 갈 수가 없었거든요. 음악 앨범처럼 나오자마자 어디에서든 접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과 관람 시간을 고려해보면 작품 하나를 봐도 여러모로 자원이 많이 소모되다보니 많이 볼 수가 없는 노릇이죠. 또 요즘 고전 명작들을 많이 재개봉해주다보니 옛날 영화들을 좀 많이 보러다녔죠. 어중간한 신작을 볼 바에 같은 가격으로 <대부>나 <반지의 제왕>을 극장에서 보는 경험을 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잖아요? <포제션> 같은 영화를 극장에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어쨌든 3위 이상의 순위를 정할 만큼 올해의 저에게 좋은 영화의 표본이 쌓이지 않았고, 기준 또한 애매해진다고 생각했어요. 만약 국내 개봉을 기준으로 2025년 영화의 순위를 매겼다면 5위 정도까진 뽑아볼 수 있었겠네요. 만약 <브루탈리스트>를 올해 영화로 쳤다면, 1위 내지 2위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대단한 영화였어요. 그런데 어찌 되었건 영화가 본래 개봉한 연도를 기준으로 삼았고, 그렇기에 뽑을 만한 후보도 확 줄었네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올해 훌륭한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니, 뽑은 영화들에 대한 감상만이라도 즐겁게 봐주셨으면 하는 간단한 소망입니다.

 

3. 라이언 쿠글러 - 씨너스: 죄인들 | Ryan Coogler - SINN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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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아주 짜임새가 좋은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교함 면에서 더 나은 영화들은 분명 존재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씨너스: 죄인들>의 장점은 정교함이 아니죠. 방대함을 무손실로 압축해놓은 구조입니다. 프랜차이즈물이 아닌 올해 영화 중 가장 독창적인 영화로서 본작이 호평받아야 할 요소는 수도 없이 넘칩니다. 이야기 전체가 미국 내 흑인 커뮤니티의 역사와 인종차별, 블루스에 대한 거대한 은유이자 동시에 헌사에요. 단순히 남부 지방 흑인들의 삶뿐만 아니라 흑인 혼혈 문제와 흑인 커뮤니티 내 동양인들의 삶, 시카고 갱과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역사, 심지어 고대 아프리카 신앙마저도 포함하고 있죠. 그리고 그 거대한 뿌리에서 출발한 나무에 블루스라는 열매가 맺힌 역사, 그 블루스를 흑인의 문화로 지켜낸 투쟁의 역사를 다룹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본질적으로 음악 영화인데, 뱀파이어 호러와 밀실 스릴러의 DNA가 혼합되며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도약하게 되죠. 이처럼 거대한 함의를 지닌 영화가 장르물적인 오락성까지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음악과 오컬트가 결합된 성격에 시놉시스까지 여러모로 <케이팝 데몬 헌터스>와도 비슷한데,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면 본작은 비평적으로 강세를 보입니다.

 

MCU에서의 경험으로 다양한 캐릭터들을 입체적으로 다루는 법을 알게 된 라이언 쿠글러의 로드무비적 빌드업은 하이라이트까지 집중도를 잃지 않게 하고, 그 중앙에는 분명 완벽한 1인 2역 연기를 선보인 마이클 B. 조던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있었죠. 인물들의 관계성과 대사를 통해 풍부한 서브 텍스트를, 빛을 제한해 삽화적인 입체성을 띄는 최고 수준의 색감을 획득하면서요. 그렇게 인물들이 주점에 한 데 모이고 새미의 "I Lied To You"를 중심으로 블루스, 락, 힙합(바운스), 고대 아프리카 주술 음악, 경극이 시공간을 초월하며 화합하는 시퀀스는 과연 올해 최고의 장면이었습니다. 아이디어만 보면 말도 안되는데, 그것을 부자연스러움 하나 없이 시청각적으로 너무나 매끄럽게 연출해냈죠. 흑인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싫어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그리고 뱀파이어인 레믹이 등장하면서 장르가 180도 바뀜과 동시에 구도 또한 확장되죠. 레믹은 <장화 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에 등장하는 늑대에 영향을 받은 캐릭터라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 그는 악의를 가진 빌런이라기보다 자신만의 신념을 가진 입체적인 대적자로 묘사되죠. 물론 생각지 못한 시점에 나타나 긴장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요.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찬탈과 억압의 역사를 겪은 아일랜드인이 또 다시 그 역사를 반복하는 역설부터 잠재력이 있는 문화들을 하나로 귀속시키려는 주류 문화의 탐욕까지 많은 것을 은유하는 대목입니다. 물론 단순히 뱀파이어 영화로 봐도 <황혼에서 새벽까지>의 문법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하며 한 순간도 긴장을 놓칠 수 없게 만들었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블루스의 본질을 서사적으로 짚어낸 구조가 가장 탁월했네요. 갱 범죄, 반종교적 행위, 불륜과 정욕이 역사의 뒷길로 사라진 채 유일하게 남긴 자식이 블루스라는 음악이고, 그것이 죄악에서 탄생했음에도 사람들을 여전히 화합케 하는 힘이자 흑인 사회의 자부심, 그리고 자유로 남았다는 점에서 음악 장르의 가치를 다층적으로 해석해냈어요. "죄악 속에서도 우리는 소중한 음악을 피워냈고, 우리의 뿌리에 죄악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이런 게 영화의 힘이죠. 약간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방대한 역사를 구조적으로 완벽하게 재정렬하느라 장르물로서의, 그리고 액션의 쾌감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특히 진정한 악인 KKK단을 쓸어버릴 때에는 최소 2배 이상의 쾌감이 필요했다고 생각해요. KKK단이 극의 중심에서 오랫동안 떨어져있었다보니 이 극악한 존재들을 더 시원시원하게 쓸어버려야 효과가 부각되는데, 아쉬웠습니다. 이런 면에서는 <장고: 분노의 추적자>를 따라올 영화가 없었네요. 또한 각 캐릭터에 감정적으로 이입할 시간도 적어지다보니 에필로그의 여운도 상대적으로 적어졌고요. 오히려 새미가 이후 블루스 아티스트 경력을 좀 더 길게 몽타주로 보여줬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장르적으로 올해 가장 흥미로운 영화이며, 구조적으로 곱씹을 만한 맛이 있는 작품입니다.

 

2. 기예르모 델 토로 - 프랑켄슈타인 | Guillermo Del Toro - Franken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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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기로 한 제 선택은 아마 올해 가장 잘한 일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네요. 바로 이런 영화야말로 극장에서 볼 가치가 있는 영화라는 생각과, 이제는 넷플릭스 같은 대형 OTT의 투자를 받아야만 이 정도 되는 영화를 만들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스쳤습니다. 어찌 되었건, <프랑켄슈타인>은 여러 면에서 올해 제가 가장 마음에 드는 영화였어요. 사실 원작부터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소설입니다. 저는 자타공인 괴물과 괴수의 엄청난 팬이고, 소설의 내용도 어릴 때부터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거든요. 가끔씩 19살의 여성이 이런 내용을 어떻게 썼을까 경이롭긴 해요. 그리고 제가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에 대해 마음에 드는 점도, 지금껏 수없이 영화화되며 쌓여온 단순무식한 괴물의 이미지와는 달리 원작에 가장 근접한 여성성을 살려냈다는 겁니다. 1931년작이 너무 막강한 문화적 영향력을 지녔다보니 이후에 등장한 괴물의 모습은 대부분 그 공식을 따르는데, 본작은 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여성적이고 연민 어린 관점에 뒤틀린 부자(父子) 관계를 더하며 하나의 잔혹동화로서 완벽한 재해석을 해냈어요.

 

주제적으로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나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와 결을 같이 하는데, 고전의 무게를 등에 업은 만큼 <프랑켄슈타인> 쪽이 더 위력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만큼, 작품을 짚기 전에 본작의 비주얼에 대한 이야기를 꼭 하고 싶어요. 올해 시각적으로 <프랑켄슈타인>을 능가할 영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크림슨 피크>에서 선보였던 고딕 비주얼을 완성형으로 제시해 유럽 중세 미술과 19세기 영국의 모습을 아름답게 구현했어요. <노스페라투>의 고딕도 숨 막히게 훌륭했지만, 가히 천의무봉인 기예르모의 미감은 차원이 달랐습니다. 조명과 색보정을 완벽하게 마친 동화적 풍광은 매 순간 눈을 사로잡으며 장면의 위력을 증폭했고, 괴물을 기워내는 시퀀스에는 왈츠를 곁들여 갈바니즘이 불경한 신성모독이 아니라 애정이 담긴 아름다운 공예라는 인상까지 줬죠. 동시에 붉은색/녹색/검은색/흰색 등의 색에 생명, 모성, 인위성, 이형성, 죽음, 타락, 순수, 정화라는 상징을 부여하며 영상 언어를 유려하게 활용하기까지 했습니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조각되었지만, 동시에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친절한 상징들이죠. 미술에 한해서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 있는 영화에요.

 

그런 환경 속에서 고전의 서사를 충실히 다루면서도 원작과는 다른 주제의식을 전달하기 위해 가한 수정사항들도 흥미롭습니다. 이야기를 두 개로 분할했죠. 1장인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에서는 원작에서 나오지 않은 빅터의 가정사와 성장을 다루며 이 인물이 어떠한 결핍과 집착을 가지고 있으며, 어째서 인공적으로 생명을 창조하는 끔찍한 선택을 저질렀는지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게 다룹니다. 크리스토퍼 발츠의 조력을 받는 오스카 아이작은 리딩 롤로서 압도적인 연기력을 마음껏 뽐내며 극을 이끌고, 괴물의 창조는 마치 <오펜하이머>에서 묘사된 맨하탄 프로젝트처럼 흥미진진하게 묘사됩니다. 폭주하는 지성이 불가항력처럼 감당 범위를 넘어선 창조물을 만든다는 점에서 공통점도 있네요. 더 흥미로운 대목은 빅터가 괴물을 만든 후부터 시작됩니다. 아버지의 학대와 어머니의 부재가 애정결핍과 엘리자베스에 대한 근원적 집착으로 이어지고, 결국 강압적인 아버지의 면모를 닮아가며 자신의 창조물에게 학대와 질투를 물려주게 되죠. 아버지 컴플렉스와 폭력의 유전을 가슴 아프면서도 복합적으로 그려냈어요.

 

괴물이 선장실에 들어오는 시점만큼이나 빅터의 이야기에서 괴물의 이야기로 전환되는 시점도 절묘합니다. 괴물이 탄생한 시점이 아닌, 괴물이 창조자인 빅터의 영향에서 벗어난 시점이죠. 인격체로서의 주체성은 그 근원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관계와 환경에서 비롯되죠. 개인적으로 원작 중 괴물이 노인 일가에서 인격을 형성하는 과정이 묘사되는 대목을 정말 좋아하는데, 그것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며 따스함을 안겨주어 너무나 좋았습니다. 동화적이고, 휴머니즘으로 가득 차있으면서도 동시에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를 경계하는 자연의 무정함마저 담아냈죠. 제이콥 옐로디는 어떤 면에서는 오스카 아이작보다도 훌륭한 연기를 해냈는데, 그가 괴물로 분하며 몸을 다루는 방식은 무척이나 표현주의적이어서 괴물의 정서를 신체언어로 완벽하게 소화해낸 듯했습니다. 몸을 다룬다는 것은 배우로서 상상 이상으로 중요한 역량인데, 괴생명체를 연출하는 데에는 이미 업계 최고인 기예르모 델 토로의 디렉팅에 힘입어 매 순간 아름답고 신비로운 순간들이 탄생한 것 같아요. 언어를 배우고, 사랑을 배우고, 지식을 배우는 모든 과정이 다 뿌듯했습니다. 괴물이 자기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괴물임을 선언하는 대사는 그 무게감이 결코 가볍지 않았으나, 노인이 그런 괴물에게 좋은 사람이자 자신의 친구라고 선언하는 대사는 그 무게감을 역전시키고 자기혐오적 규정을 허무는 아름다운 순간이었어요. 빅터와 괴물을 잇는 유일한 존재인 미아 고스의 엘리자베스가 둘 모두에게 상징적인 어머니 위치가 되고, 해골과 벌레를 만지며 등장한 이 인물과 그들 간에 어떤 교류가 발생하는지 지켜보는 것 역시 재미가 있었죠.

 

이 아름다운 영화를 감상하는 동안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아마 제작비 탓에 북극까지 괴물을 추격한 빅터의 이야기가 간소화되었다는 것일 텐데... 오프닝을 제외하고 액션씬이 전무했던 본작에서 스릴러와 감정적 갈등을 극대화할 수 있었음을 떠올린다면 분명 아쉽긴 하지만, 빅터와 괴물이 화해하기까지 정서적 간극을 좁히려면 오히려 간소화된 최종본이 더 나았다고 봅니다. 둘의 해후와 화해가 너무 갑작스럽다는 의견도 있으나,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표면에 위치한 빅터의 이야기와 괴물의 이야기에만 집중할 때, 사실 이 영화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더 전개하죠.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며 뒤틀린 인간성을 반성하는, 그리고 괴물의 이야기를 들으며 괴물이 진정 어떤 존재였는지 깨닫고 이해하게 되는 빅터의 이야기. 영화의 서사 자체가 창조주이자 아버지로서 빅터가 창조물이자 아들인 괴물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는 빌드업이었던 셈입니다. 각자의 근원에게서 소외되고 버림받아 탄생한 두 존재의 분노와 원망이 피 튀기며 강렬하게 분출하지만, 그런 만큼이나 순수히 이해와 용서를 구하는 결말이 아름다운 법이죠. 그러니까 이 영화는, 세상의 모든 상처받은 아들들이 그들의 상처받은 아들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길 희망하는 응원인 셈입니다.

 

더불어, 저는 괴물이 일종의 예수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괴물을 이루는 신체 부위들은 크림 전쟁 전사자들의 것이고, 괴물이 생명을 부여받을 때 그는 십자가에 걸려있었죠. 무엇보다 분명 피뢰침의 이상으로 소생에 실패했었는데, 빅터가 붉은 천사의 꿈을 꾼 후 생명을 얻는 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인간의 기술로 되살아난 존재가 아닌, 원죄를 짊어진 존재입니다. 생사를 인위적으로 결정한다는 개인의 교만보다 더 거대한 존재죠. 그렇기에 불사라는 저주에 걸려 끊임없이 고통받고, 배척받고, 고독하게 살아갈 운명인 것입니다. 그런 괴물에게, 영화는 햇빛을 선사합니다. 막연하지만, 그럼에도 절망적이지만은 않죠. 게다가 작중에서 해(Sun)가 아들(Son)과도 연결된다는 것을 고려해본다면, 괴물을 일종의 '성자'로도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은 부서질 것이나, 부서진 채로 살아가리라." <프랑켄슈타인>은 궁극적으로 인간성의 형태와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 이보다 더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아름답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고딕 호러보단 고딕 로맨스에 가깝달까요. 영화를 관람하며 세 번 정도 눈물 흘렸습니다. 많이 공감했어요. 제 생각에는, 원작의 팬이었던 기예르모 델 토로가 괴물에게 연민하며 한 줄기 희망을 안겨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1. 폴 토마스 앤더슨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 Paul Thomas Anderson - One Battle After An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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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관객과 평론지를 막론하고, 종합적으로 올해 최고의 영화로 가장 많이 선정된 작품입니다. 사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공식적인 2025년 최고의 영화로 선정해도 딱히 무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 영화는 너무나 시의적절하게 위대했거든요. 폴 토마스 앤더슨 특유의 작가주의가 마침내 미국 인종주의와 정치 문제를 비추었고, 그것을 액션 영화의 형태로 제시했죠. 덕분에 상업적 성과와는 크게 상관없이, 이 영화는 접근성과 예술성 면에서 동시대의 영화들을 모두 제치는 성과를 달성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부류의 영화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흔하지 않은 질감의 스릴러와 확실한 장점을 보장하는 오락적 성격을 띄고 있는데, 인물이나 서사를 직조하는 기술 또한 흠잡을 데 없이 너무 훌륭해서 구조적으로 참으로 광활하고 위력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영화, 첫 장면부터 엔딩까지 단 한 번도 감각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요. 그리고 그런 영화가 폴 토마스 앤더슨이라는 뛰어난 감독의 손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감독에 집중하는 관점에서, 사실 이 영화가 가장 중요한 지점은 바로 폴 토마스 앤더슨이 현대극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입니다. <펀치 드렁크 러브>를 마지막으로 계속해서 시대극만 연출하던 그였는데, 23년 만에 현대극을 연출하는 만큼 과연 현실을 잘 반영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죠. 그런데, 이 영화의 방향성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영화의 스토리텔러로서 서로의 이해관계와 이기심이 얽히고 섥힌 답답한 현실 속에서 인간의 탐욕과 극단적인 감정을 표현해내는 데에 정말 도가 튼 감독이잖아요. 이것을 국가적인 단위로 확장해 미국의 이념대립과 인종주의, 복잡한 인간군상, 사상가들의 위선을 고스란히 포착하고 또 조명하죠. 그리고 그 이상 나아가지 않습니다. 물론 영화의 구도에서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 중 어디가 더 능동적인 악인지는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의 극단적인 보수주의와 퍼피디아의 위선적인 진보주의 중 차마 어떤 것이 더 추악하다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양 진영을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날카롭게 찌르고 있죠. 그는 특정 사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지지하는 것 같은 유일한 이념은, 모든 인간이 불완전하고 욕망하며 비합리적이라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정치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 합격 수준을 아득히 능가한 태도입니다.

 

심지어 이것을 영화 전반에 녹여내기 전에 전반부에서 확실히 전제하고 가죠. 프렌치 75의 활약상은 표면적으로는 부패한 이민 정책에 반대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불가피하게 취한 폭력임을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저 히피적이고 반골적인 인물들의 자아 표출에 더 가깝죠. 그 리더인 퍼피디아가 얼마나 위선적이고 미완된 인간상임은 말할 필요도 없고요. 그래서 이 영화는 과거의 혁명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 전제하고, 현재의 혁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다룹니다. 상대적으로 긴박하고 더 큰 사건들이 일어났던 과거 시점에 비해 현재 시점은 블랙 코미디의 성격이 강하기까지 합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할리우드 최고의 주연답게 강력한 에너지로 관객의 집중을 유도하는 역할을 훌륭히 해냈어요. 특히 암구호를 까먹은 나머지 세 번이나 전화로 물으며 온갖 변명과 욕지거리를 해대는 장면은 본작 코미디의 핵심인데, 디카프리오가 참 잘 늙고 잘 망가지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네치오 델 토로와 체이스 인피니티 역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어요. 특히 체이스 인피니티는 이 영화가 데뷔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준수하게 연기했는데, 사실 케이팝 팬이라는 사실이 저를 그녀의 팬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진정한 MVP는 록조를 연기한 숀 펜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동안 숀 펜이 얼마나 위대한 배우인지 잊고 살았는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 그가 얼마나 훌륭한 배우인지 다시 보여줬어요. 과잉 하나 없이 목소리와 억량, 몸짓과 시선 처리만으로 그가 어떤 인물인지 완벽히 묘사했고, 대본이 그를 또 다른 주인공으로 밀어주는 탓에 여러모로 수혜를 얻은 것 같아요. 록조 또한 표면적으로는 보수 진영을 대표하면서도 사실 남성성에 대한 열등감과 성적인 컴플렉스가 존재하고, 은연 중에 해방을 원하며 종국에는 그가 그토록 동경했던 상류층에게 배신당하는 결말까지 본작의 다면성을 훌륭히 대표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활약상은 사실 거의 없는 디카프리오의 밥 퍼거슨에 비해 실질적으로 갈등을 주도하며 극을 이끌어가기도 하고요.

 

연기자들 외에 또 호평할 만한 참여진은 단연 조니 그린우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인물이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라고 누가 믿을 수 있을까요? 영화의 압도적인 긴장감을 유지한 데에는 조니 그린우드의 스코어 지분율이 절반 정도는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건반과 퍼커션을 이용해 불안한 리듬을 조성하는 기법은 완벽했어요. 이처럼 모든 요소가 완벽한 탓에,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고전적이고 대담한 연출과 헛웃음 나는 코미디, 후반부로 달려갈수록 하나 같이 예상을 빗나가는 전개로 압도적인 흡인력을 선사합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본작을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 빗대었는데, 사실 그 이상으로 스필버그 본인의 DNA가 많이 포함된 영화라는 생각을 했어요. 영화를 보며 브라이언 드 팔마나 마이클 만 등 이전 세대 거장들의 그림자가 많이 스쳐지나가긴 했지만, 역시나 스필버그가 가장 많이 떠올랐죠. 약간 이야기를 새자면, 제가 좋아하는 영화인 <고지라 마이너스 원>에서는 고지라라는 거대한 문화적 상징에 <쥬라기 공원>이나 <죠스>의 강점을 접목해 훌륭한 장면들을 연출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이제 스필버그의 영화들도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진정한 의미의 고전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폴 토마스 앤더슨도 그 고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 명장면을 연출했죠.

 

후반부의 자동차 추격전은 만인이 인정할 만한 위대한 시퀀스였어요. 올해의 장면임은 물론, 영화 역사상 최고의 추격전으로 평가받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듀얼> 이래 가장 스릴 넘치고 창의적인 장면이었는데,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전개는 물론이고,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의 정확한 의중은 몰라도 살의가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기에 단 한 순간도 눈을 땔 수 없었습니다. 보통의 자동차 추격전은 극단적인 코너와 벽을 사용해 긴장감을 부여하는데, 맙소사, 폴 토마스 앤더슨이 어디에서 이런 완벽한 도로를 찾았는지. 구불구불한 도로에서 추격전을 진행하며 좌-우 구도의 추격전이 아닌 상-하 구도의 독특한 추격전이 전개되죠. 자동차의 시점과 운전자의 시점을 교차해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1인칭에서 보는 도로의 굴곡은 롤러코스터에 탑승한 듯한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수평선을 이용해 시야를 제한하다가 이내 다시 보여주며 악역이 어디까지 쫓아왔는지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하는 편집과 <죠스>를 연상케 하는 조니 그린우드의 OST는 덤이고요.

 

심지어 구도는 사뭇 서부극적이기까지 합니다. 거대한 정치 구도와 혁명을 다루었던 초반부에 비해 중반부부터는 딸을 구출한다는, 상대적으로 개인적인 동기로 진행되는 영화는 후반부로 치닫을 수록 인물들을 극의 중심에서 대거 이탈시킴으로써 구도를 축소시키죠. 결국 종국에 와서는 도로 위에 세 명만 남을 뿐입니다. 죄없는 혁명의 미래, 무자비한 권력의 하수인, 그리고 아버지. 차가 쉬지 않고 달리고 상하관계가 계속해서 반전되며 미국 인종관계 역사를 은유하고 있는 가운데, 이 삼각구도는 마치 <석양의 무법자>의 공동묘지 결투를 떠올리게 합니다. 물론 이 추격전이 끝나는 방식과 영화의 엔딩까지도 완벽하죠. 가족과 혁명을 배신한 퍼피디아는 혼자가 되고, 성공을 위해 혈육까지 부정하려던 록조는 비참하게 제거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중 가장 무능하며 한심한 인간이었던 밥은 오직 딸인 윌라를 향한 부성애만을 지켰고, 그 결과 해피엔딩을 맞이했죠. 장대했던 구도가 점진적으로 축소되며 결국 가족애라는 가장 본질적인 가치로 수렴한 것입니다. 편집과 함의, 모든 면에서 영화의 힘을 보여준 명장면이었습니다. <F1 더 무비>가 자본과 기술의 힘으로 올해 압도적인 레이스 연출을 보여줬지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카 체이스는 진정 시네마만의 힘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네요.

 

이 영화만의 재미있는 점이 있다면, 현대극임에도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개연성을 작품 내에서 마련하죠. 그런데, 결말부에서야 부녀가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됩니다. 저는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가족 관계의 회복, 이전 세대와 현 세대의 연결 등을 상징하면서도 스마트폰이 있는 세계를 어떻게 찍어야 할 지 모르겠다고 한 폴 토마스 앤더슨이 마침내 스마트폰이 있는 세계를 찍는 순간이죠. 과거나 지금이나 본질은 바뀐 것이 없습니다. 겉모습만 바뀌었을 뿐 갈등은 여전하죠. 우리는 여전히 싸워야 하고, 혁명은 존재해야 합니다. 본작은 혁명이 실패한 이유를 보여주고, 지금의 혁명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질문합니다. 하지만 답까지 내리지 않죠. 밥이 결국 윌라가 성장했음을 인정하고 신뢰하는 결정을 내린 것처럼, 영화는 다음 세대에게 결정권을 맡깁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방임주의가 있을까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분명 올해 가장 정교하고 시의적절하며, 무엇보다 시네마의 고전적인 힘을 재확인할 수 있었던 폴 토마스 앤더슨의 또 다른 걸작입니다.


Outro: 순위에 올리지 않은 영화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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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가 부상하고 극장의 권력이 축소되며 유의미한 흥행작마저 적어지는 요즘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극장에서 봐야하는 훌륭한 영화들은 꾸준히 나오고 있죠. <F1 더 무비>는 아마 많은 분들께서 올해 가장 재밌게 본 영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실제로 오락영화로서는 분명 올해 가장 훌륭한 수준이었어요. 서사는 약간 진부할 정도로 정석적으로 만들었고, 로맨스는 뜬금없으며, 현실 F1과는 분명 거리를 두어야 할 지점이 존재하죠. 그럼에도, 조셉 코신스키 특유의 압도적인 블록버스터 연출력이 <탑건: 매버릭> 후 또 한 번 빛을 발했습니다. 비록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두 영화의 드라마는 큰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지만, 블록버스터적인 몰입감은 여전히 최고 수준이었죠. 단순히 레이싱 연출의 완성도로는 <F1 더 무비>를 뛰어넘을 영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압도적이었어요. <미션 임파시블: 파이널 레코닝>은 그에 비하면 다소 아쉽긴 했어도, <미션 임파시블>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시리즈의 엔딩으로서 해내야 할 기능을 아슬아슬하게 충족한 듯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많이 선호하지 않는 시리즈이기도 하고 완성도 자체는 결코 높은 수준이라고 하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뒷심을 잃어버리는 요즘 할리우드치고 깔끔하게 끝냈습니다. 박수가 잦기 전에 적절하게 떠났달까요.

 

단순히 작품성만 보아도 훌륭한 영화들이 많았습니다. <콘클라베>는 시국이 시국이었던 만큼 의외의 흥행을 할 수 있었죠. 영화의 톤이 정적임에도 일정 수준의 긴장감이 유지되며, 특정 사건이 발생했을 때의 파장은 상대적으로 더 크게 느껴집니다. 정치극, 밀실 스릴러의 속성까지 가지고 있으면서도 배우들의 호연 탓에 어떤 장면에서는 정반대 소재인 갱스터 영화의 향취까지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결말의 반전도 시사하는 바가 많았네요. <페니키안 스킴>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예술병적인 경향이 강해지는 것 같은데, 그 정도 되는 감독이면 예술병 좀 걸려도 된다고 생각해요. 이 정도로 독창적인 화면과 감정톤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또 어딨나요? 게다가 섬세하고 난해한 구조에 비해 메시지 자체는 꽤 명료한 편이기도 하고요. 내로라하는 할리우드 배우들이 다 출연하는 가운데, 미아 프리플턴의 연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후반부 베네치오 델 토로와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개싸움은 올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전투씬 중 하나고요. <부고니아>는 원작인 <지구를 지켜라!>에 비하면 장르적인 특색과 특유의 기괴한 감성이 거세되어 지루했지만, 엔딩만 본다면 원작보다도 훨씬 아름답다는 평가를 내리고 싶네요. <웨폰>은 관람하지 않았는데, 제가 공포 영화를 많이 무서워해서 잘 못 봅니다... 영화관에서 본다면 자칫하다가 죽을 수도 있어요... <그저 사고였을 뿐>도 스케줄이 맞지 않아 보지 못했네요. 사실 해외에서 올해 최고작들로 거론되는 영화들이 국내에서 개봉하지 않아 참 아쉬웠습니다. <누벨바그>는 12월 31일에 개봉한다니 꼭 관람할 생각입니다. 그런데 <햄넷>이나 <센티멘탈 밸류>는 국내 개봉 여부조차 불확실한 탓에 그 진가를 확인할 수도 없어 참 안타깝네요. <사운드 오브 폴링>은 일정이 맞는다면 보러갈 생각입니다. 서울 거주자가 아니라면 문화생활을 높은 수준으로 영위하기에 참 힘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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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흥행은 거의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담당했죠. 전 개인적으로 요즘 애니메를 안 좋아하는데, 흥행작들을 보면 저런 게 왜 저렇게까지 흥행하나 의아합니다.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은 아예 안 봤는데, 액션 장면만 따로 보니 그래도 시각적으로는 경지에 올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은 하도 호평이 많아 원작 내용을 어느 정도 알아보고 관람하러 갔습니다. 역시나 이 정도로 사람들이 좋아할 영화인가 의아했습니다. 되새길 수록 잘 만든 영화이긴 했는데, 몇몇 연출이 취향에 안 맞았어요. 장르적 변주는 흥미롭긴 했으나, 각각 장르의 농도가 엄청나게 높지 않았다는 인상도 있었고요. 수영장 씬에서의 카메라는 종종 왜 저 따위로 연출했나 싶었는데, 덴지와 레제의 전투는 제가 애니메를 좀만 더 좋아했어도 기립박수를 쳤을 것 같습니다. 근데 여운이 그렇게 짙은 영화인가 싶습니다. 원작에서는 중간에 지나가는 이야기 정도라 그런 경향도 있는 것 같고요. 아, 근데 레제가 귀엽긴 합니다. 오히려 영화를 보고 와서 릴스를 내리고 팬만화들을 보다보니까 후유증이 더 심하게 왔어요.

 

오히려 올해 가장 훌륭한 일본 영화는 실사영화인 <국보>였습니다. 교포인 이상일 감독이 연출했고 일본에서는 역대급 흥행 성적을 거두어 화제였는데, 한국에서는 부진해 안타까웠습니다. 극장에서 보고 나오며 이토록 훌륭한 영화야말로 많은 사람들이 더 보아야 할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가부키극이라는 생소한 소재를 한 인물의 삶 전체와 엮어내며 그 삶을 정성어리게 조명하고, 끝내 삶을 초월해버린 예술의 도착지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소름끼치게 보여줬어요. 러닝타임이 거의 3시간에 달했는데, 오히려 할 얘기가 아직도 넘쳐난다는 인상이었습니다. 시각적으로나 호흡에서나 가부키 공연을 담아낸 시퀀스들은 숨을 앗아갈 만큼 시종일관 훌륭했고, 인물들의 동기와 감정선을 표현하는 방식 또한 문제라곤 찾아볼 수 없었어요. 결국 보편적인 차원에서 예술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도달한 위치는 정말 위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은경 배우가 출연한 <여행과 나날>도 보고 싶었는데, 주변 영화관에서 너무 빨리 내려간 바람에 결국 보지 못했습니다.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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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과 애니메이션 실사화 영화는 작년에 비해 많이 보지 못했는데, 그래도 즐길 수 있는 수준의 영화들이었습니다. <주토피아 2>는 명작이었던 전작에 비해 아쉽고 구조도 다소 단순했음에도, 분명 시리즈 특유의 재미만은 존재했고 무엇보다 주디-닉 커플의 관계성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네요. 없던 연애세포가 다 깨어나는 느낌이랄까... <드래곤 길들이기>도 원작이 워낙 명작이었다보니 원작을 가져다가 그대로 실사화만 한 영화가 좀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 실패하는 디즈니 실사영화들에 비해 딱 고스란히 실사화시켰다는 사실만으로 우위를 차지했습니다. 특히 레드 데스의 거대함은 원작을 아득히 넘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죠. 다만 비행 시퀀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장면은 원작 애니메이션이 나았던 것 같습니다. 올해를 돌이켜보니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영화들도 많이 나왔는데, 막상 기억에 남는 건 거의 없네요. 레드헐크와 센트리가 멋지게 나왔다 그 정도...? 오히려 제임스 건의 <슈퍼맨>이 나름 좋았습니다. 연출 스타일이 너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와 유사하긴 했어도, 코믹스 특유의 색채감부터 여러 독창적인 액션 시퀀스들까지 히어로 영화로서 충분한 오락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슈퍼맨의 영웅성 본질에 다시금 제대로 접근하며 지금 이 세상에 가장 필요한 '선함'의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네요. 조금 미숙하고 매끄럽진 않긴 했어도, 가슴 따스해지는 휴머니즘을 히어로 영화로 표현하는 데에는 제임스 건만한 감독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른 오락영화들도 마음에 드는 영화들이 있었고, 정말 별로인 영화들이 있었습니다. 일단 <발레리나>는 <존 윅 4> 같은 총기 액션 마스터피스의 경지에 도달하진 못해도 스핀오프로서 충분히 매력적인 캐릭터와 액션을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액션에 있어서는 여전히 이 시리즈가 도전할 수 있는 영역이 무궁무진하다는 인상을 받으며 재밌게 관람했었네요. 스케이트 날과 화염방사기를 이용한 액션이 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프레데터: 죽음의 땅>는 기존 시리즈의 방향성을 거의 부정하다시피 하면서 새롭게 도전했는데, 저는 그 정도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레이>도 컨셉부터 액션까지 다 마음에 들었는데, 이번 영화는 액션의 측면에서는 시리즈 단연 최고였어요. 엘르 패닝이 맡은 티아 캐릭터도 무척이나 매력적이었고, 후반부 겐나의 동식물들을 활용해 새롭게 무장해 신스들을 제거해가는 액션씬에서는 감탄을 했습니다. 디즈니 블록버스터 특유의 감성이 전반적으로 느껴져 약간 거북하기도 했고, 후반부의 가족주의와 급전개가 아쉽긴 했어도 여전히 잘 만든 오락영화라고 생각해요. 새롭게 만들 <에이리언 vs 프레데터> 영화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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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은 스토리부터 액션까지 명백히 테마파크 어트랙션 수준에 머무르며 더 이상 이 시리즈에 희망은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들게 했어요. 작중에서 또 "사람들은 이제 공룡에 관심이 없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영화를 이 따위로 만들 거면 정작 공룡에 진정으로 관심이 없는 것은 바로 제작진들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선사시대: 공룡이 지배하던 지구> 같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공룡은 여전히 신선하고 멋질 수 있는데 말이죠. 그래도 딱 하나, 티렉스만은 멋지게 나와서 좋았습니다. 그런데 <트론: 아레스>는 건질 장면조차 없었습니다. 영상미는 훌륭하긴 했지만, 사실 액션이 좋다고 말할 수도 없는 수준입니다. 연기나 스토리는 정말 처참했고요. 근데 이것보다도 별로였던 영화가 <위키드: 포 굿>이었습니다. 사실 1편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데, 그래도 1편은 라이벌 구도를 이루는 뮤지컬 영화로서 나름의 장점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위키드: 포 굿>은 영화의 절반 지점에서 이미 저를 어이없게 만들었어요. 영화를 만들자고 하는 거 맞나 하는 의심까지 들었습니다.

 

<아바타: 불과 재>와 <더 러닝 맨>은 저 개인적으로도 아직 확실한 평가를 내리지 못한 영화들입니다. 특히 <아바타: 불의 재>는 장점과 단점이 너무나 극명한 영화였죠. 시각적으로는 여전히 압도적인 최고 수준이지만, 꼭 화면을 구현하는 기술력이 좋다고 해서 그것이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죠. 사람은 흐릿함과 실루엣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하잖아요. 제임스 카메론이 이 판도라라는 세계에 대해 보여주고 싶은 것은 너무 많은데,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이야기를 너무 못 만든다고 느꼈습니다. 심지어 대부분은 2편의 동어반복이기도 했고요. 80년대에 카메론이 만들던 영화들은 선구적이었는데, 정작 2025년에 나온 이 영화는 각본이 8~90년대의 범부 수준으로 회귀해버렸습니다. 그래도 툴쿤의 대규모 전투나 토루크의 귀환은 마음에 들었는데, 그 전율에 비해 액션의 지속성이 짧아 실망도 컸네요. 전편에서도 느겼지만, 툴쿤이란 생물은 참 장대하고 멋집니다. 그나저나 카메론이 본격적으로 나비족 이상성욕을 꺼내드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더 러닝 맨>은 에드가 라이트의 신작이니만큼 나름 기대하고 갔는데, 결과적으로 에드가 라이트의 스타일이 사회풍자물에는 맞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클리셰를 거부하고 마구 폭주하는 것이 오락영화 감독으로서 그의 장점이긴 한데, 본작에서는 오히려 스타일이 과다하고 초반의 룰이 무용해지며 메시지를 휘발시키는 결과를 낳았어요. 결말은 확실한 사족이었고요. <불릿 트레인> 같은 영화나 본인의 전작인 <베이비 드라이버>와 비교해봐도 확실히 뒤떨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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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국 영화는 흥행에서나 대중의 인식에서나 많이 부진했죠. 가끔은 필요 이상으로 비판받기도 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독립영화계에서의 성취는 매니아층을 제외하면 부각되지 않으니, 흥행작 위주로 관객의 평가가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올해 흥행작들이 죄다 작품성이라곤 집어던졌다보니 유독 혹독한 평가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좋은 영화들은 많이 나왔어요. 저는 <어쩔수가없다>에 대한 평가 중 혹평이 많았던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구조와 층위의 측면에서, 세계적으로 봐도 올해 이토록 잘 만든 영화는 드물어요. 상징들은 하나하나 명료하나 매우 다층적으로 배치되어 있고, 그것들이 종국에 이루는 의미 또한 단순 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거대하게 수면 위로 상승하며 기묘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AI와 경제난의 시대에서 참 적절하게 나온 영화라고 생각해요. 이 영화의 문제는 바로 대중적인 블랙코미디 영화라고 홍보한 박찬욱 감독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취업하겠다고 경쟁자들을 다 죽이고 다니는 것이 블랙코미디일 수는 있어도, 결코 대중적이진 않죠. 연극적인 톤도 호불호가 충분히 갈릴 만하다고 생각해요. 결과적으로 구조는 참 잘 만든 영화인데, 스타일이 너무 과시적이고 이야기로서는 그냥 재미가 없었다는 평을 내리고 싶습니다.

 

봉준호의 <미키 17>은 정반대의 경우였습니다. 영화의 구조는 이것이 과연 봉준호의 영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간단하고 노골적인데, 복제인간과 외계 생명체라는 소재를 할리우드의 기술력으로 보는 재미는 나름 있었어요. 다만 그 좋은 소재를 예술적인 한계까지 밀고 나가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쉽고, 빌런의 묘사 면에서는 정말 유치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싶네요. 나름 괜찮은 영화이지만, 봉준호의 SF 작품 중에서 <옥자>와 함께 어떤 영화가 저점인지 촌각을 다투는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올해 한국 영화계 최고의 성과는 넷플릭스와 독립영화계에서 나왔죠. <굿뉴스>는 정말 제대로 잘 만든 블랙 코미디였습니다. 장르의 특성을 간단하지만 확실한 방식으로 이용해 직관성을 보장했고, 사건에 살이 붙으며 점점 종잡을 수 없이 굴러가는 특유의 느낌을 시종일관 높은 밀도로 구현해냈죠. 류승범과 일본 배우들의 연기는 정말 끝내줬습니다. 호불호가 갈리는 결말 또한 제겐 마음에 들었네요. <세계의 주인>은 제가 정말 오랜만에 극장에서 보기까지 한 독립영화였는데, 그 가치가 있었습니다. 성폭행 피해자의 이야기를 이토록 성숙하게 다룬 영화는 도통 접하질 못했는데, 감정적 과잉 없이도 담담하게 그려냈어요. 윤가은 감독의 일상에 대한 조망과 성폭행 피해자에 대한 시선은 무척이나 사려깊었고, 감정의 교환은 직관적이었으며 대본 또한 무척이나 원숙했습니다. 결말의 확장성은 다소 무리하게 느껴지긴 해도, 모든 면에서 견고하고 섬세하게 쌓여진 영화였어요. 삶의 존엄성에 대해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한국의 소프트파워를 증명한 영화는 전혀 생뚱맞게 소니 픽쳐스에서 나온 애니메이션이었죠. 사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라는 제목과 표면적인 비주얼만 본다면 좋은 작품으로 여기기가 힘들 것입니다. 근데, 생각 이상으로 좋은 영화였어요. 케이팝에 생소한 사람에게 조금 오글거린다 싶은 정도이지, 영화의 톤에 적응하고나면 장점들이 상상 이상으로 많이 보입니다. 소니 스파이더맨 애니메이션의 기조를 이어받은 애니메이팅과 액션, 오컬트와 케이팝의 접목, 고전 애니메이션의 과장된 연출, 케이팝과 한국 역사에 대한 높은 이해도, 디테일에서 묻어나는 한국적 고증, 정체성에 대한 주제의식까지 각각 놓고 봤을 때는 생소하고 하찮아 보이는 요소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훌륭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특히 뮤지컬 영화로서의 힘이 근 몇 년 간 최고 수준이라고 생각해요. 곡으로만 봐도 "Your Idol" 제외 하나 같이 준수한 케이팝 트랙인데, 서사와 장면의 완성도에 힘입어 감정적으로 인상적인 순간들을 선사합니다. 단, 후반부의 급전개는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생각해요. 이처럼 기록적인 흥행을 거둘 줄 알았다면 제작비를 좀 더 투자했다면 좋았을 걸요. 극성 팬들의 주장대로 세기의 명작까진 아니더라도, 확실한 강점이 존재하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영화 제작적인 측면에서 저는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보다도 고평가해주고 싶네요.

 



올해의 내한 공연들 5개

 

공연 영상을 올릴 수 없는 관계로 블로그에서 확인해주세요!

링크: https://blog.naver.com/oras8384/224123629901

 



올해를 정리하며, 나의 소회

 

이렇게만 보면 제가 올해를 참 풍성하게 보낸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해로 기억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심적으로는 고등학교 3학년 때보다 힘들었습니다. 올해 7월에 전역을 했습니다. 길다면 길었고, 돌아보니 짧은 것 같기도 한 군생활이었어요. 무척 잘했다고 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잘 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시간이 가지 않는 것을 어떻게든 버티고 나름대로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며 나가기만을 기다렸어요. 전역하면 분명 무언가는 달라져있을 것이라고, 그래도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억지로 희망을 부여잡으면서요. 바뀐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1년 반이라는 시간은 보장되지 않고 그대로 소실되었고, 절 진정으로 반가워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요.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보려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찾아보고, 전역 전에 예매했던 공연들을 다니고, 옷도 사봤지만 그 기쁨이 오래 가지 않았던 것 같네요. 오히려 공허함이 더 세게 밀려왔어요. "이러면 뭐해, 결국 난 혼자인데." 밤늦게 홀로 집에 들어갈 때마다 세상에서 제가 가장 초라하게 느껴졌어요. 행복한 사람은 외부에서 무언가를 계속해서 채울 필요가 없어요. 이미 마음이 행복으로 차있으니까요. 오직 마음이 텅 빈 사람만이 그 공허함을 극복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소비하고 획득하려 할 뿐이죠. 그런데 마음의 구멍이란 파인 모양이 아니라 뚫린 모양이어서 내부에서부터 채워지지 않으면 결국 다시 흘러나갈 뿐이더라고요. 군대에서 번 돈도 제 마음대로 함부로 쓰지 못하고, 그 어느 사람에게서도 안정을 찾을 수 없고, 다시 혼자가 되어버린 저는 그냥 지식과 재능 외에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빈 껍데기가 되어버린 거에요. 그 와중에 가족과의 불화도 잦았고, 몇 번 집을 나가버리는 일도 있었죠.

 

저는 제가 가장 잘하는 일을 했습니다. 생각하고, 곱씹고, 자기비판과 자기검열을 했어요. 제 지난 삶을 다시 쭉 돌아보며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던 건지 떠올려봤습니다. 제 내부의 상호작용은 인과 자체는 무척이나 명료한데, 너무 복잡하게 꼬인 탓에 그 근원을 탐색하고 해결하기가 너무 난해하거든요. 그래도 끊임없이 생각해봤어요. 내가 또래 아이들과는 달리 운동이 아닌 책을 좋아했던 것이 문제였을까?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있어서 다른 애들과 자연스레 멀어졌던 것? 오, 좀만 잘못해도 야구방망이, 쇠막대기, 냄비 같은 걸로 맞았던 건 아무것도 아니었죠. 손톱을 물어뜯자 식칼을 가져오라며 손가락을 잘라버린다는 협박도 받았는데, 결국 안 잘렸으니 됐잖아요? 진짜 아픈 기억이라 하면 제가 살면서 처음으로 애착을 가졌던 동물이었던 작은 사막쥐들을 말도 없이 하천에 방생해버린 거랑 동생과도 같이 여기는 반려견 꼬리를 잡고 거꾸로 들어 후드려팼던 것, 그런 게 정말 아픈 기억이죠.

 

하지만 정서적 학대 같은 건 핑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진짜 문제는 저라는 사람이 외부 작용에 어떻게 반응하는 사람이냐는 거죠. 결국 제가 별종이고, 무능하고, 현실감각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는 생각까지 도달했습니다. 딱히 매력도 없고 사람을 이끄는 능력이나 동정 받을 자격조차 없는 현대 사회의 또 다른 탈락자일 뿐이었죠. 돌이켜보면 목표 없이 도망치고 수그리기만 했었죠, 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 용기있게 사과하기보다는 아예 인간관계를 단절했고, 대학이나 군대라는 삶의 중요한 단계도 우울증이라는 핑계를 대며 되는 대로 되라 하며 아무 데나 갔었습니다. 성인이면 책임감을 가질 줄 알아야 하는데, 책임조차 껍데기만 남은 채 여전히 아파하고만 하는 한심한 인간이에요. 스스로를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 비클에 빗대어보기도 했어요. 닮은 점이 많더라고요. 누군가는 그 정도는 아니라고 했지만.

 

최근 <석류의 빛깔>을 영화관에서 보고 이런 생각을 해보았어요. 인간에겐 두 가지 층위가 존재하는데, 동물로서의 인간과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존재한다고요. 저는 전자 쪽이 충족되지 않은 채 후자 쪽이 너무 커버린 것 같아요. 의식의 불균형이 발생한 거죠. 그 불균형을 바로 잡기 위해 누군가와 간절히 연결되길 바라지만, 정작 그럴 용기도 부족하고 이전의 수많은 실패로 인해 스스로 더 위축되기만 한다고요. 가장 잔인한 사실은, 그런 욕구가 간절할 수록 실제로 그런 관계를 건강하게 이루게 될 가능성은 적어진다는 거에요. 무언가 도전은 해야 했다만, 제 정보 범위 외에 있는 것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 알고 있는 탓에 미래를 점치기도 너무 쉬웠어요. 도전할 용기나 힘도 없었고요. 전 너무나 지쳐있었습니다. 새벽에 혼자 깨어서 가슴을 부여잡은 채 눈물 흘리는 일도 너무 많았고, 살면서 진심으로 죽어볼까 하는 충동도 가장 많이 들었어요. 진지하게 삶의 애착이 사라졌어요. 사는 것에 의미도 없었고요. 그저 하루하루 정보만 흡수하며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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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쯤은 제대로 인정받고 사랑받아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인정이야, 제 능력에 대해 하나도 증명한 것이 없으니 과한 요구라고 치죠. 실제로 전 그나마 관심을 가지는 어느 분야에서든 다 어중간한 수준이니까요. 그렇지만 사랑 정도는 바래도 되지 않나 하는 발칙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끔 조금 괜찮을 때 자신을 돌아보면 그렇게 부족한 것 같지도 않고, 나름 다 견뎌내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저도 이제 사랑받아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자기검열과 곧은 신념, 그리고 방어기제가 스스로를 그 기회로부터 차단했죠. 무엇보다 제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그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잖아요. 당장 가족한테도 인정받는 일이 극히 적었던 저인데, 다른 사람에게 그런 대단한 일을 어떻게 바래요. 저만 힘든 것도 아니고, 더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도 세상에 많은데요.

 

근데 제 상처난 마음은 가소롭게도 관심과 애착을 원했어요. 넌 생각보다 잘해낼 거라고, 충성하고 헌신할 수 있지 않냐며. 그런 자격이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는데 말이죠. 제 개인적인 문제와 컴플렉스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이뤄야 할 성과를 얼마 이룬 것도 없는 주제에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사랑을 주고 싶은 마음은 계속 커져만 가는데, 그걸 어디에 둘 지 모르겠어요. 마치 <매그놀리아>의 한 대사처럼요. 그걸 저한테 두기엔 전 이미 제가 얼마나 추악하고 망가진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알거든요. 길을 잃었습니다. 무력하고 절망적이에요. 남들은 조금이나마 무언가를 시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저는 곧 23살이 되면서 지나쳐보낸 것들이 너무나 많았어요. 남들은 나름대로의 행복과 경험을 찾고있는데, 제 불행만 여전히 크게 느껴졌습니다. 그 모든 감정과 생각을 혼자만 껴안다보니 운동이나 작문으로 스스로를 가다듬으려고 해도 결국 감당을 못하고 폭발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심지어 반려견도 절 피해서 도망가더라고요. 그걸 보고 제가 정말 미쳐간다는 걸 깨달았어요.

 

정신과에 갔습니다. 사실 군 시절에도 전역하면 가보라는 얘기를 종종 들었는데, 정말 가기 싫었어요. 왜냐하면 정신과에 가면 정말 제가 문제 있는 인간이라는 걸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 같아서요. 근데 이젠 가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약을 처방받고 신경안정은 되찾긴 했지만, 생각은 멈추지 않고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여전히 간헐적으로 심한 우울감이 찾아왔어요. 무엇보다 저한테 그다지 관심이 있는 것 같지 않았어요. 오히려 '수능도 보고 군대까지 전역한 사람'이라는 표현만이 깊이 맴돌았죠. 부모님이 자주 하는 말이거든요. 전역까지 했으면서 왜 그러냐고. 그래서 5주차에 안 갔습니다. 본질적으로 바뀌는 것이나 나아지는 건 하나도 없고, 임시방편 따위에 매번 제 돈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오히려 최근에 일어난 한 사건이 절 더 크게 바꿔놓은 것 같아요. 한심하고 위험한 생각이라는 평을 듣긴 했어도, 이제 죽고 싶은 생각까진 들지 않습니다.

 

전역하기 하루 전 생활관에서 오랜만에 <쇼생크 탈출>을 보았습니다. 봐야할 것 같았어요. 가석방된 레드의 모습을 저와 비춰보았죠. 어쩌면 브룩스까지도 비춰보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관성이란 개념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자유로운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기쁨, 희망을 가진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을 상상해보았고요. 하지만 제 앞에는 바다가 없었던 것 같네요. 요즘 이센스의 "비행" 중 "괴로웠던 군대가 지금 되려 그립다니, 빨리 뛰쳐나가고 싶어했던 건 너잖니"라는 가사를 많이 곱씹어요. 절대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가끔 그때를 돌아보게 되거든요. 동기나 후임 애들은 나름대로 잘 살고 있나 떠올려보고. 생각해보면 나름 재미도 있었던 것 같고, 마음이 공허할 틈이 없었죠. 자유란 건 참 무서운 것 같아요. 어쩌면 삶이 원래 이런 건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사실 다들 이 정도로 아프고 지치는데, 잠깐의 행복한 기억들로 어떻게든 버텨나가는 거요. 그렇다면 역시 이 정도 시련도 견디지 못하는 제가 문제인 거겠죠?

 

이렇게 다 써보니 무언가 두서가 없네요. 한 해를 억지로 돌아보려니 그때의 부정적인 감정에 매몰된 느낌도 들고요. 하지만 한 해를 끝마치는 와중에 있는 제 정서는 그렇게 연약하거나 불안정하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혼자인 이들에게는 뼈아플 크리스마스를 여전히 방구석에서 썩히고 있는데도 별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자그마한 목표란 게 생겨서 그런 걸까요? 혹은 이 글을 쓰며 제가 얼마나 커다란 생각을 가진 존재인지 다시금 체감할 수 있어서 그런 걸까요? 제가 사실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플 때는 그것마저 다시 건방진 생각으로 치부하겠지만요. 이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잔인한 세상에서도 전 여전히 소중한 가치들을 지켜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큰 문제들을 해결하기엔 인간이란 종이 너무 멀리 와버렸다고 생각하지만, 선함과 친절함이 세상을 좀 더 낫게 만들 수 있다고 믿어요. 서로 미워하기보단 이해하려 애쓰고, 예술로 삶을 윤택하게 하며 각자의 존재를 더 절실히 확인하다보면 훗날 우리의 역사가 그렇게 나쁘게만 적히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모든 이야기가 아름답게 남진 않겠지만, 적어도 어떤 이야기들만큼은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겠죠.

 

저도 여전히 스스로의 존재를 합리화시키고 싶습니다. 제가 이 글에서 제 1년과 성격에 대해 모든 걸 밝히진 않았어요. 분명 제 과거엔 스스로의 실책도 많이 존재할 테고, 불완전함을 담당하는 결점들이 남아있을 거에요. 하지만 조금씩 무언가를 이뤄가다보면 더 나아지다가, 혹시 모르죠. 기회를 잘 만나서, 제 마음이 굶주리고 야망이 원하는 만큼이나 커질 수 있을지도요. 천장과 인형술사의 존재도 어렴풋이 의식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성공을 이룬다면 분명 지금보단 낫겠죠. 19살에서 20살이 되는 날은 참 절망적이었고, 20살에서 21살이 되는 날은 아팠지만 그래도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21살에서 22살이 되는 날은 군대 생활관 안에서 어떻게든 더 나은 미래만을 상상하고 있었고요. 22살에서 23살이 되는 날은 어떨까요? 3년 전에는 성인이 되는 새해 카운트에 "Nights"의 비트 체인지를 맞추는 도전을 해봤는데, 올해 한 번 다시 해볼 생각입니다. 프랭크 오션을 정말 좋아한다고 하더라고요. 여기까지 와서 듣는 [Blonde]는 무언가 다르겠죠.

 

2025.12.26

신고
댓글 32
  • 1 5시간 전

    선 추천 후 감상.

  • title: Mach-Hommy온암글쓴이
    2시간 전
    @서울예고민지노

    초장문의 운명.

  • title: Santa Beartls
    1 5시간 전

    잘 읽었습니다!

  • title: Mach-Hommy온암글쓴이
    2시간 전
    @tls

    감사합니다~

  • 1 5시간 전
    이 글 보고 자극받게 되네요

    이정도로 풍성한 결산은 아니지만 저도 하나 말아오겠습니다

  • title: Mach-Hommy온암글쓴이
    2시간 전
    @다스시디어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취향이 잘 드러나실 것 같아요

  • 1 5시간 전

    체인소맨을 만든 후지모토 타츠키 본인이 영화광이라서 만화 자체도 굉장히 영화적으로 연출이 되도록 그리는 편이기에 이는 다른 일본만화나 애니와는 차별적인, 체인소맨 만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애니화가 잘 이루어지나 했지만 그게 그렇지 못했습니다. 1기를 감독인 나카야마 류가 대차게 말아먹었거든요. 영화적 연출은 개뿔 무슨 저퀼리티 애니제작사만도 못한 퀼리티가 나와버려서 원작팬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감독이 짤리고, 레제편에서 새롭게 감독을 맡은 요시하라 타츠야는 그 원작만화의 영화적 연출을 제대로 살리는 휼륭한 레제편을 만들어 내어서 그렇게 체인소맨의 팬들이 열광했던겁니다. 체인소맨 특유의 영화적연출을 싫어하시면 싫어하실수 있지만 왜 씹덕들이 이 영화에 그렇게 열광하는가를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체인소맨이 만화 인기에 비해 다른 만화에 비해 애니가 망했어서 팬들이 많이 쌓여있었거든요.

  • title: Mach-Hommy온암글쓴이
    2시간 전
    @椎名林檎

    영화를 처음 보고 나왔을 때는 오프닝이 최고 명장면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네요... 딱 영화만 봤을 때는 덴지와 레제의 사랑이 잘 와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 27분 전
    @椎名林檎

    1기는 만화작가랑 애니감독이 추구하는 작품의 방향성이 어긋나서 불호의견이 잇엇던거지 일부 어색한 장면빼면 작화나 음악이나 퀄리티만큼은 최상이었는데

  • 1 4시간 전

    혹시 글쓰는데 며칠걸리셨나요

  • title: Mach-Hommy온암글쓴이
    2시간 전
    @귀염뽀짝앤디모린

    2주 정도 잡고 천천히 썼던 것 같은데 글의 절반 정도는 3일 만에 쓴 것 같네요 ㅋㅋㅋ 써야지 써야지 하다가 뒹굴면서 옛날 무한도전 영상들이나 보고 있었어요...

  • 2 4시간 전

    글에 공감가는 부분들이 많아서 술술 읽혔네요.. 특히 Stardust 부분 ㅋㅋㅋㅋ

    저는 이번 대니 앨범을 듣고 하이퍼팝이 아니라 Lift You Up 같은 곡에서 가능성이 보이더라고요. 각 잡고 개러지/하우스 힙합 앨범 하나 내면 정말 잘 녹아들 것 같은 느낌? 그리고 하이퍼팝도 좋지만 Joey Valence & Brae랑 합작 앨범을 내면 정말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작년 No Hands에서 보여준 것도 있으니..

  • title: Mach-Hommy온암글쓴이
    1 2시간 전
    @Satang

    저도 Lift You Up을 상당히 좋게 들었습니다! 앨범 내에서 튀긴 해도 대니의 랩이 하우스와 무척 잘 어울리더라고요. 생각날 때마다 듣는 것 같아요...

  • 1 4시간 전

    넘넘 잘봤습니다

  • title: Mach-Hommy온암글쓴이
    2시간 전
    @슈프림

    감사합니다~

  • 1 3시간 전

    정말 글 쓰고 싶어지는 글.. 필력 진짜 좋으시네요. 잘 보고 갑니다~ 오랜만에 놨던 블로그를 다시 켜야겟군.

  • title: Mach-Hommy온암글쓴이
    1 2시간 전
    @민니

    역시 그냥 편하게 제 생각을 써내리는 글을 가장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ㅋㅋㅋ 블로그까지 찾아와주신다니 감사합니다...

  • 1 3시간 전

    정말 잘 읽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문화생활을 하시나요 ㄹㅇ친해지고싶음

  • title: Mach-Hommy온암글쓴이
    2시간 전
    @Iamugro

    본문에도 나와있듯이 현생이 피폐해지면...

  • 1 3시간 전

    글 존나긴데 잘읽히네요 공감못하는부분들 좀 있긴해도 전체적으로 고개끄덕이면서 읽것서용

    역시 힙합에 있어선 굉장한 조예를 가지고 계신듯 합니다 추천

  • title: Mach-Hommy온암글쓴이
    2시간 전
    @모든장르뉴비

    = 비힙합은 허접이다

    어흐흐흑

  • 1 3시간 전

    개추 포인트 엄청 많네요

    근데 진짜 님 혼자서 엘평 원래의 10%는 더 끌어올릴 듯 ㅋㅋ

  • title: Mach-Hommy온암글쓴이
    2시간 전
    @릴랩스베이비

    저는그정도로대단하지않습니다하하

    공감 가는 부분이 많으셨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

  • 1 2시간 전

    감사합니다 !!

  • title: Mach-Hommy온암글쓴이
    2시간 전
    @적극마인드갖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1 2시간 전

    너무 좋은글 감사합니다

  • title: Mach-Hommy온암글쓴이
    2시간 전
    @osama

    저도 읽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 어떠한 좋은 글도 읽히지 않으면 가치가 없을 거에요

  • 2시간 전

    잘 읽었습니다

  • 1시간 전

    좋은 글 입니다 잘 읽었어요

  • 1시간 전

    생각을 정리하게 되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1시간 전

    엘이의 인재

  • 25분 전

    글읽으면서 먼가 올한해를 되돌아보는 느낌이라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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