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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6.

title: Revengeseekerz밀레이2026.08.24 21:39조회 수 2924추천수 12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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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말하지 못했던 것들


 이 앨범에 대해, 그리고 이 앨범이 내 인생에 얼마나 비대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일단 내가 항상 말하고 싶고 밖으로 꺼내고 싶었지만 끝내 말할 수 없던, 그런 것들을 먼저 적어보고 싶다.


​아직도 이런 내용들을 세상에 적어 내려가도 진짜 괜찮을지 잘 모르겠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흔한 어린 시절의 방황이나 철없는 소리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저하게 되고, 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치부와 감정들을 꺼내놓았을 때 밀려올 어색함이 여전히 나를 망설이게 만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만큼은 전부 적어보려고 한다. 더 이상 내 감정들을 스스로에게조차 숨기며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단순한 음악 감상문이나 흔한 앨범 리뷰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회고와 삶에 대해, 나와 음악, 그리고 그 길고 아득한 음악 속에서 비로소 발견한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솔직하게 풀어내려는 하나의 기록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내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감정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것 같다. 상처받기 싫어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고, 혼자 남겨지는 게 두려워서 차라리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 척 나 자신을 속여왔다. 사랑인지 우정인지도 모를 복잡한 마음을 자각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관계가 멀어져 있었고, 인정받고 싶어 던진 행동들은 오히려 나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내 안에는 서로 충돌하는 모순된 감정들이 가득했지만, 어린 나에게는 그 모순들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참았고, 감정을 숨겼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렇게 내 감정들은 이름을 잃은 채 내 안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

​하지만 음악을 만나고, 특히 이 앨범을 만나면서 내 안의 무언가가 조금씩 비틀리고 깨지기 시작했다. 말로 다 꺼내지 못해 가슴속에 고여있던 공허함과 외로움이, 그 긴 소리의 파동 안에서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그 길고 길었던 내 계절의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보려 한다. 내가 어디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는지, 무엇을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그리고 그 길을 잃었던 시절에 이 음악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었는지. 내 삶과 음악, 그리고 그 사이에서 찾아낸 나에 대한 이야기다.


 

1부 - 계절이 시작되기 전, 이름을 잃은 문장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까. 나는 어렸을때부터 다양한 분야에 재능이 있었다. 재능이 있는것처럼 보이고 싶어했다는게 더 정확할수도 있지만 아무튼. 실제로 또래 아이들보다 공부에도 소질이 있었고 예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난 홍대를 중퇴한 나의 엄마에게 유전되어 유치원때부터 그림에 재능과 재미를 보였다. 그림을 통해 나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도 잦았고, 그림을 그리는 활동으로 어린시절 깨달은것도 많았다. 예를 들면, "망친 그림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수는 예술에 또 다른 길을 터주는 장치이지 무조건적으로 피해야할것이 아니다.", "의도치 않은 우연적인 터치가 예술의 가치를 높여줄수도 있다." 와 같은, 지금 생각해보면 삶의 모티프가 될 중요한 가치들을 예술과 나의 엄마에게 아주 어린 나이때부터 배웠다. 또한 학습만화나 동화책같은, 그런류들의 쉬운 책들을 유치원때부터 초등학교 저학년때쯤 많이 접하고 재미를 붙여서 배운점도 상당히 많다. 일반적인 상식이나 글을 읽는 재미, 각종 정보들을 어린나이에 빠르게 습득한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러한 가르침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많이 달랐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고나서, 당장 초등학교 1학년때는 상당히 버티기 버거웠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나를 혐오에 가까이 싫어했던 담임 때문이다. 수업시간에도 억지로 딴지를 잡고 괴롭히는등 어린 나에겐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지금 생각해도 충격적인점은, 나는 그 선생에게 체벌또한 당했다. 그것도 꽤 반복적으로 자주 맞았다. 피가나고 멍이들정도로 강했던 폭력은 아니였지만 어린 나에겐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그 선생때메 전학을 넘어 자퇴까지 원했던 기억이 있지만 부모님의 조금만 더 버티라는말과 유치원때부터 친했던 남자아이인 친구 A덕분에 결국엔 버텨냈다. (이 친구 A도 그 담임에게 꽤나 괴롭힘을 받았었다. 또 나는 이 친구에게 꽤나 의지했었다. 이 이야기는 후에 다시 풀어내겠다.) 돌이켜보면 내가 어린 시절에 배운 것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들만이 아니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실수를 반드시 제거해야 할 결함으로 생각하지 않는 법을 배웠고, 책을 읽으면서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즐기는 법을 배웠으며,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누군가에게 상처받는 일과 동시에 누군가에게 기대는 일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런 것들을 나중에 음악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초등학교 저학년때 나는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학교의 '돌봄교실'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좋은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났다. 그시절 나는 솔직히 그 선생님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다. 속된 표현으로 "꼰대"같은 모습도 자주 느꼈고 뭐랄까, 어린 학생들에게 매우 친근하게 놀리기도하고 혼내기도하는 그런 부류의 선생님이여서 오히려 그 선생님을 좋아하지 못했다. 실제로 자주혼나기도 했지만 지금 떠올려보면 그때 그 선생님의 훈육으로 배운점도 아주 많았다. 지금 떠올려봐도 그 선생님만큼 내인생에서 중요했던 선생님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또 나는 이때부터 혼자있는걸 좋아하는 성격이 드러나기 시작했던거같다. 이전에는 몰랐지만 지금 떠올려보면 유치원때부터 그림그리고 독서하던 습관이 초등학교 시절까지 이어져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혼자 학습만화를 읽는걸 아주 편안하게 여겼었다. 물론 그 편안함에 외로움또한 같이 느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당시에 나는 외로움을 외로움이라 인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중학교때까지 난 내가 외로움을 잘느낀다 믿지 않았고, 스스로한테 마저 감정을 숨기는것에 익숙해져있었다. 그때의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것이 단순히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편안함과 외로움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훨씬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아 그리고 아까 말했던 친구 A또한 나와 같은 돌봄교실을 다녀서 같이 논적이 많았다. 이 이후에도 중학교때까지 나는 친구 A를 절친으로 삼고 서로의 집에서 잠도자고 파자마파티도 하는등 추억을 많이 쌓았다.


초등학교때 나는 사고도 많이 쳤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공부를 상당히 잘하는 아이였다. 혼자노는걸 좋아했지만 정작 외로운것도 싫어해 애들과 자주 놀때가 많았고 그러나 재밌게 놀고 혼자남았을땐 알수없는 공허함과 무기력함이 찾아온적이 매우 많았다. 때로는 선생님에게 잘보이려했고 때로는 반항적이였으며 초등학교에서 학년이 높아질수록 나는 진짜 나를 숨겼던거같다. 어린시절의 나는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감정을 표현하는 대신 감추게 된 것이니 참 역설적이다. 나의 삶은 거의 다 이런식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아이였던 것 같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혼자 남겨지는 것은 싫어했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으면서도 사람들 사이에 오래 있으면 다시 혼자 있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어하면서도 누군가 나를 이해하려고 다가오는 것은 부담스러워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린 나에게는 이런 모순을 모순이라고 부를 만한 언어가 없었다. 그냥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에 맞춰서 행동했을 뿐이다. 혼자 있고 싶으면 혼자 있었고, 외로우면 친구를 찾았고,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으면 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했으며, 누군가가 나를 불편하게 만들면 반항했다. 그 모든 행동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를 바라보면서야 비로소 하나의 사람 안에 서로 모순되는 감정들이 얼마든지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보다, 상황에 맞게 다루는 것에 더 익숙했던 것 같다. 슬프면 왜 슬픈지 생각하기보다 참았고, 화가 나면 왜 화가 났는지 생각하기보다 반항했고, 외로우면 그것을 외로움이라고 부르기보다 친구를 찾았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도 그 상처를 오래 들여다보기보다는 다른 무언가에 몰두했다.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거나, 친구들과 놀거나, 공부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들은 모두 나에게 일종의 피난처였던 것 같다. 물론 당시에는 그것들을 피난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사람은 조금 특별했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지만 완전히 혼자이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다. 누군가와 아주 가까워지고 싶었고, 동시에 너무 가까워지는 것은 두려웠다. 내 이야기를 알아주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누군가가 내 안쪽까지 들어오려고 하면 불편해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오랫동안 사람과의 거리를 조절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던 것 같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지는 식이었다. 당시에는 그것을 특별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A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유치원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 중 한 명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담임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부터 우리의 관계에는 조금 다른 성격이 생겼던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내가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힘들었던 시기에 A 역시 같은 선생님에게 괴롭힘을 받고 있었고, 우리는 서로에게 그 상황을 설명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어린아이였던 우리에게는, 적어도 나에겐 그것만으로도 꽤 큰 연결고리였을 것이다. 돌봄교실에서도 우리는 자주 같이 놀았다. 서로의 집에 가고, 같이 자고, 별것 아닌 일로 웃고,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를 몇 시간씩 나누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A가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제대로 알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 정확히는 중요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어떤 종류의 중요함인지는 몰랐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의 친밀함에는 이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관계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기억하기 어려운 것처럼, 그것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기억하기 어렵다. 아마 나는 아주 오랫동안 우리가 계속 친구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이상하게도,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순간부터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많은것은 변했다. 정확히 무엇이 변했는지는 지금도 단정하기 어렵다. 몸이 자라고, 학교가 달라지고, 주변의 사람들도 달라지고,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졌다. 어린 시절에는 별것 아니었던 말과 행동들이 어느 순간부터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누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신경 쓰기 시작했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도 의식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그냥 친구였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것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깨달은 것인지, 아주 오랫동안 쌓여 있던 감정에 어느 날 이름을 붙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어느 순간 나는 내가 A를 단순히 친구로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애를 사랑하고 있었을것이다. 아마도.


이 말을 지금 이렇게 적는 것도 이상한 기분이 든다. 솔직히 지금도 그아이에 대한 감정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확실한건 다른 친구들과 공통으로 갖는 우정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였다. 그리고 그걸 깨달았을때는 이미 그애와는 멀어지고 있었다. 자연스레 그 감정을 느껴 내가 멀어지려 했을수도 있지만, 그 애또한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A는 나를 절친으로 생각하지 않는듯했고 항상 먼저 말거는건 나였으며 나의 우선순위는 한참 뒤로 밀린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 느낌은 확신에 가까워졌다. 정확히 내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그리고 내가 그 감정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지금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결국 나는 그애와 멀어졌고, 지금은 서로 마주쳐도 아는척조차 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나에게 가장 오래된 친구 중 한 명이었고, 어린 시절 가장 많이 의지했던 사람이었으며, 내가 외롭다는 사실조차 모르던 시절에 함께 있어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나는 오히려 그 사람에게서 멀어졌다. 나는 이것을 오랫동안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그 이후에도 감정을 쉽게 믿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사람인 척하는 편이 쉬웠다. 감정을 인정하지 않으면 적어도 감정 때문에 무언가를 잃을 일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정은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름을 잃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이름 없는 감정들을 가지고 계속 자랐다. 그림을 그리던 아이는 그림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대신 감정을 숨기는 법을 배웠고, 혼자 책을 읽던 아이는 혼자 있는 것이 편하다고 믿으면서도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을 느꼈으며, 누군가에게 깊이 의지했던 아이는 그 의지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그 사람과 멀어졌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는 오랫동안 내가 무엇을 느끼는 사람인지보다, 무엇을 느끼지 않는 사람인지를 스스로에게 설명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중학교에 올라와서 나는, 미술의 꿈을 포기하고 학업에 집중하려 했다. 1년도 유지하지 못했지만. 난 내가 공부를 하는 이유조차 제대로 납득하지 못했고, 지금도 그렇다. 정확히는 대학에 가기위해 목매는 학업 시스템 자체에 강한 의문이 생긴게 시초였다. 그렇게 나는 학업에대한 엄청난 회의감에 휩싸였고, 여러가지 사건들이 겹쳐 학원도 끊고 수업시간엔 잠만 잤으며, 반항도 점차 심해져갔다. 그러면서 나의 공허함과 우울감또한 점차 깊어져갔다. 학교에선 잠만자니 친구들과의 교류는 점차 없어져갔고, 나의 행동들이 그저 단순한 반항으로 보였을 선생님들은 전부 나를 싫어했다. 또한 이 배경에 내가 친구들과 멀어진 한 사건이 있다. 나는 친구들에게 어떻게든 관심을 받기위해 웃긴, 친구들의 이목을 끌만한 행동을 자주했고 이와같은 행동들에서 선을 넘는것들도 꽤나 많았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에게 자주 혼났고 호감또한 사지 못했으며 애들은 나의 점차 선을 넘는 행동들때메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결국 또 친구들에게 잘보이려고 한 행동들이 날 친구들과 멀어지게 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많은 사건들로 인해 지친 나는 다른 도피 수단을 찾았는데 그게 바로 음악이였다.


2부 - 긴 소리의 파동 아래, 나를 파고든 계절


처음 음악을 제대로 접한건 2025년 초였다. 25년 1월 나는 Frank Ocean의 《Blonde》를 기점으로 음악의 매력에 점차 빠져들기 시작했다. 나는 인스타를 꽤 늦게시작했다. 24년말쯤 인스타를 처음 접하고 다른 인스타 매거진들의 《Blonde》소개 게시물을 보고 "정말 그정도로 좋나?"라는 마음으로 앨범을 재생했고 새벽에 그 앨범을 청취하던 도중 나는 눈물을 흘렸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Blonde》가 나에게 정말 완벽히 와닿았던건 아니다. 9번째트랙 "Nights"가 너무 난해하게 들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두번째 트랙 "Ivy"는 내 마음을 흔들어놓기에 너무 적합했다. 실제로 난 아직도 이 트랙을 정말 사랑한다. 그러나 현재 나는 "Ivy"를 들으면 그 시절의 공허함이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 자주 듣진 않는다. 어쨌든 《Blonde》도 나에게는 아주 뜻깊은 앨범이다.


25년 1월 《Blonde》를 처음 접하고 나는 한동안 음악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Blonde》가 너무 헤비해서 다른 작품들을 온전히 즐기지 못할거 같아서 다른 앨범을 듣기 무서웠던것이다. 나의 이런 일종의 완벽주의적 성격이 무언가를 망쳐놓은적이 상당히 많다. 아무튼 다시 음악 얘기로 돌아가자면 25년 4월쯤 새로운 음반을 듣고 "아, 음악을 제대로 찾아가며 들어봐야겠다."라는 다짐을 했었는데, 그 계기가 Beenzino의 《24:26》이다. 지금은 그리 좋아하는 앨범은 아니지만 그 당시엔 꽤 충격적이였고 이 앨범을 계기로 나는 한국 힙합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반년은 넘도록 한국 힙합만 들은거같다. 그 반년동안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음악들은 오도마의《밭》이나 XXX의 《Language》, 《Kyomi》, 와비사비룸의 《물질보다정신》등 이 있다. 내가 한국힙합에 그렇게 집착했던 이유는 "록"이라는 장르 자체가 너무 방대하고 큰벽으로 느껴져서 다가가기 조차 무서웠던거 같다. "제대로 준비하고 입문해야지."와 같은 생각으로 반년 넘게 미룬걸 Kanye West의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을 계기로 외국 힙합 음악들도 들어보다 자연스래 록으로 넘어가게 된거같다. 처음 들은 록 앨범은 실리카겔의 《Power Andre 99》였을것이다. 그 당시에도 완전히 좋은 경험은 아니였지만 "Tik Tak Tok"이나 "Realize"같은 트랙들은 좋게 들었었다. 여기까지가 나의 록 입문기이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Fishmans의 《Long Season》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다. 나는 2025년 9월 6일, 다른 누군가의 추천으로 《Long Season》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당시의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게 될지 전혀 몰랐다.사실 그때의 나에게는 그것이 내 삶을 바꿀 음악인지조차 알 필요가 없었다. 그냥 누군가가 추천해준 음악 하나를 재생했을 뿐이었다. 또 실제로 처음부터 이 음악을 사랑하진 않았다. 그 당시 나에게 이 음악은 그저 지나가는, 또다른 좋은 앨범 하나정도의 감상이였다. 이 앨범이 언제를 기점으로 내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음악이 됐는지는 나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저 내 생일인 2025년 10월 26일부터 일주일간, 난 이 작품이 없었으면 지금쯤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것만이 명확할뿐이다. 내가 이앨범에 다시 주목한건 25년 10월 25일이다. 그때 새벽 나는 98.12.28 男達の別れ를 아주 큰 반발심리를 가지며 재생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실제로 마지막곡 Long Season - Live에 다다를때까지 나는 이 작품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rym live차트 1위. 4.4점이라는 압도적으로 높은 평점은 "그정돈가?"라는 생각을 내 머리속에 굳게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이미 한 번 좋다고 생각했던 음악을 다시 들으며, 내가 그 음악을 좋아해야만 한다는 어떤 암묵적인 기대에 반발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당시의 나는 음악을 듣는 것마저도 일종의 평가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좋은 음악인지 아닌지를 끊임없이 판단하고, 내가 이것을 좋아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식으로. 어쨌든 그날의 나는 꽤나 적대적인 청자였다. 


처음에는 여전히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이미 한 번 들어본 곡이었고, 30분이 넘는 시간을 하나의 곡으로 이어가는 이 음악의 방식도 당시의 나에게는 여전히 낯설었다. 나는 아마도 이 곡이 언제 끝나는지를 의식하면서 듣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생각이 조금씩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라이브 버전의 다른 구조와 장장 41분에 달하는 길이와 그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멜로디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내가 음악을 듣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날까지 음악을 들으면서도 끊임없이 음악을 판단하고 있었다. 좋은 앨범인지, 나쁜 앨범인지. 내가 좋아하는 음악인지 아닌지. 사람들이 왜 이 음악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는지. 내가 이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마치 음악을 감상하는 것조차도 정답이 있는 시험처럼 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Long Season》을 듣는 동안만큼은 그런 판단을 조금씩 내려놓게 되었다. 이 음악은 나에게 무엇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에게 이것이 좋은 음악이라고 설득하지도 않았고, 내가 무엇인가를 느끼도록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계속 흘렀다. 같은 멜로디가 반복되고, 조금씩 형태가 달라지고, 다시 돌아오고, 어느새 전혀 다른 풍경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또한 이 작품을 분석하고 판단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그 계절이 만들어내는 순수와 염원을 그리워하며 한마디 말조차 없이 날 이해해주는 음악과 이 음악을 이해해주는 나를 발견 했을 뿐이다. 


이 작품이 끝난뒤에도 난 잠시의 여운을 즐긴뒤 LONG SEASON - Live를 다시 재생하고 눈물 흘렸다. 압도된것도 아니고 궁극적 아름다움앞에 무력함을 느낀것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조용한 감정이었다. 아마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누군가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나를 이해해주는 듯한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그 음악은 내게 왜 외로운지 묻지 않았다. 왜 사람들과 멀어졌는지, 왜 그렇게까지 인정받고 싶었는지, 왜 혼자 있고 싶으면서도 혼자 남겨지는 것은 두려워했는지 묻지 않았다. 내가 A에게 느꼈던 감정이 사랑이었는지 우정이었는지도 묻지 않았다. 내가 왜 학교를 싫어했고, 왜 그렇게 반항했고, 왜 내가 좋아했던 것들마저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저 흘렀다. 그리고 나는 그 흐름을 따라가며 처음으로 내 감정에 무언가를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때 내가 흘린 눈물은 슬퍼서 흘린 눈물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기뻐서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감동해서라고만 하기에도 부족했다. 오랫동안 내가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어떤 감정이 갑자기 형태를 얻었을 때 나오는 눈물에 가까웠다. 어쩌면 나는 그 음악을 들으며 처음으로 외롭지 않았던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외롭다는 사실을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게 내게는 굉장히 이상한 경험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원하면서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도망쳤다. 그때까지 나는 이런 것들을 하나의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왜 나는 혼자 있고 싶으면서 외로울까. 왜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사람에게서 도망칠까. 왜 인정받고 싶으면서 인정받는 순간 불편할까. 왜 누군가가 나에게 중요해질수록 그 사람에게 솔직해지기 어려울까.


그날의 《Long Season》은 이상할 정도로 나에게 '시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했다. 41분이라는 길이는 당시의 나에게 굉장히 길었지만, 음악은 그 시간을 억지로 채우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음악은 계속 흘렀고, 같은 것이 반복되는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지나온 시간과도 닮아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내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같은 학교에 다니고, 같은 친구를 만나고, 같은 그림을 그리고, 같은 책을 읽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쌓이면서 나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감정을 숨기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했으며, 어느 순간부터 내가 누구인지보다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를 더 신경 쓰게 되었다. 그 변화는 한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아주 천천히 진행되었다. 그래서 그 안에 있을 때는 그것이 변화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Long Season》도 그랬다. 처음에는 그저 하나의 곡이었다. 두 번째로 들었을 때도 그저 조금 특이하고 좋은 음악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내가 살아온 시간 전체를 바라보게 만드는 음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2025년 10월 25일 밤부터 26일, 그리고 그 이후의 일주일 동안 내가 이 음악을 대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내 생일이었던 2025년 10월 26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비참했던 생일이고 생일에 일주일 동안 나는 제주도로 여행을 갔었다. 그리고 나는 여행을 다니는 동안《Long Season》을 계속 들었다. 일주일간에 제주도 여행은 정말 괴로웠다. 난 그 당시 삶에 너무나도 지쳐있었고 몸을 조금 움직이는거조차 괴로웠고, 그저 존재한다는것에도 괴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가족과의 여행에서 나의 감정을 숨기며 활동하는것은 너무 끔찍했다. 그때 나를 버티게해준건 세상으로부터 나를 구분해주는 헤드셋에서 흘러나오는 《Long Season》의 반복적인 멜로디였다.


제주도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지금 사진을 보면 분명 아름다운 곳들이 많다. 바다는 넓었고, 하늘은 맑았으며, 어디를 가든 여행지 특유의 생생한 풍경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받아들일수 없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게 더 괴로웠다. 사람들은 여행을 즐기고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힘든가. 이렇게 좋은 곳에 와 있는데 왜 나는 아무것도 즐겁지 않은가. 내 생일인데 왜 나는 행복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들이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녔다.


제주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것은 해변가 바위에 앉아들은 《Long Season》이였다. 내 기억에 남는 유일하게 아름다웠던 순간은 그때 음악에 갇혀 발끝으로 파도를 느끼던 감각이다. 그 순간 난 정말 만화같게도 "이 순간을 절대 잊어서는 안되겠다." 라고 다짐했고 실제로 현재까지 나는 그때의 생생함을 간직하고 있다. 


3부 - 아무것도 묻지 않는 소리들의 정원


《Long Season》은 35분의 긴 한곡으로 총 5개의 파트로 나눠져 있다. 롱시즌은 기본적으로 극초반의 간소한 모티프를 점차 발전시켜나가는 방식으로 곡을 전개해내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Long Season》은 이런 전개를 통해 반복이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경험하게 한다.우리는 보통 음악의 시간을 사건의 연속으로 받아들인다. 도입부가 있고, 전개가 있고, 절정이 있으며, 마지막에는 종결이 있다. 음악은 앞으로 나아간다. 한 부분은 다음 부분을 향하고, 다음 부분은 또 다른 부분을 향한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 미래를 기다리는 일이기도 하다. 다음 코드가 무엇일지, 다음 후렴이 언제 나올지, 곡이 어디에서 폭발할지를 기다린다. 하지만 《Long Season》은 이러한 기대를 조금씩 무너뜨린다. 이 음악에서는 지금 들리고 있는 것이 반드시 다음 순간을 위한 준비일 필요가 없다. 하나의 멜로디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같은 리듬이 반복되며, 그 위에 아주 조금씩 새로운 소리가 쌓인다. 음악은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기보다 현재의 순간 안에 오래 머문다. 그래서 35분이라는 시간은 이상하게도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시간이 길다는 감각 자체가 희미해진다. 그래서 내가 제주도에서 이 음악을 들으며 느꼈던 것은 음악이 시간을 채워준다는 감각이 아닌, 오히려 음악이 시간을 없애버린다는 감각에 가까웠다.


《Long Season》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반복"이다. 그러나 이 반복은 정말 반복인가? 처음에는 같은 멜로디가 반복되고 청자는 이 반복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이 반복에서 악기 구성, 음색, 공간감, 다이내믹, 등이 조금씩 달라지는 구조를 통해 같은 구절 자체가 이전과 다르게 들리는 식으로, 결국 반복 자체가 변화가 된다. 《Long Season》의 반복은 내가 살아온 시간과 이상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같은 것이 계속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아무것도 같은 채로 남아 있지 않았다.


《Long Season》은 그냥 “미니멀리즘적인 반복 음악”이 아니다. 오히려 변화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변화로 인식되지 않는 음악이라고 볼 수 있다. 보통 음악의 변화는 구조가 명확히 드러나나 그런데 《Long Season》은 변화가 훨씬 유기적이다. 그래서 청자는 어느 순간

“언제 이렇게 여기까지 왔지?” 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는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는 짧은 음악적 패턴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미세하게 어긋나게 만드는 기법을 통해 청청가에게 깊은 몰입감과 황홀경을 선사하는 트랜스 효과와 닮아있다. 라이히는 짧은 음악적 패턴을 반복하고, 그 반복 속에서 아주 미세한 위상 변화와 어긋남을 발생시킴으로써 청자가 평소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소리의 움직임을 점차 의식하게 만든다. 반복은 더 이상 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행위가 아니라, 같은 것을 계속해서 바라봄으로써 그 안에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차이를 발견하는 행위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청자의 시간 감각을 일상적인 시간으로부터 분리시키며 일종의 트랜스에 가까운 몰입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Long Season》의 반복은 라이히의 미니멀리즘과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라이히의 음악이 반복되는 패턴 자체의 구조적 변화와 위상 관계에 상당한 관심을 둔다면, 《Long Season》은 보다 유기적이고 감각적인 방식으로 반복을 변화시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패턴이 정확히 어떻게 변했는지를 분석하는 것보다, 그 변화가 언제 일어났는지를 더 이상 특정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처음에는 분명히 하나의 멜로디가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계속 듣고 있으면 어느 순간부터 멜로디 자체보다 그 주변에 생겨나는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기타의 질감이 달라지고, 베이스가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드럼의 존재감이 변화하고, 보컬과 악기 사이의 공간이 달라진다. 처음에는 배경처럼 들리던 소리가 어느 순간 음악의 중심처럼 느껴지고, 이전에는 중심이었던 소리는 다시 배경으로 물러난다. 무언가가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주변의 풍경이 달라져 있다. 나는 이것이 《Long Season》을 단순한 반복 음악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음악은 청자에게 “지금부터 새로운 부분이 시작된다”고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전의 음악을 계속 들려주면서 그것을 조금씩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청자는 음악의 어느 지점에서 변화가 발생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기 어렵다. 다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처음 들었던 음악과 전혀 다른 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Long Season》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며 어느 순간 갑자기 감동한 것이 아니었다. 눈물을 흘리게 만든 특정한 코드나 멜로디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분명히 같은 음악이었다. 그런데 계속 듣고 있는 동안 내가 음악을 바라보는 방식이 조금씩 변했고, 음악을 바라보는 내가 조금씩 변했고, 결국에는 음악이 변한 것인지 내가 변한 것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아마 《Long Season》의 가장 특별한 점은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 음악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듣는 우리의 감각이 변화한다.


그리고 이 음악이 시간을 다루는 방식은 결국 공간을 다루는 방식과도 연결된다. 《Long Season》을 듣고 있으면 나는 이 음악을 단순히 하나의 선으로 느끼기보다 하나의 공간으로 느끼게 된다. 처음에는 비어 있던 공간에 하나의 소리가 놓이고, 그 주변으로 다른 소리들이 천천히 생겨난다. 기타와 베이스, 드럼, 신시사이저와 보컬은 단순히 서로 다른 악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거리와 깊이를 가진 채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어떤 소리는 바로 앞에서 들리는 것처럼 선명하고, 어떤 소리는 멀리서 희미하게 울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곡이 진행될수록 그 소리들의 위치와 역할이 조금씩 달라진다. 그래서 《Long Season》을 듣는 일은 하나의 멜로디를 따라가는 일인 동시에 그 멜로디가 만들어낸 공간 안을 천천히 걸어가는 일처럼 느껴진다. 처음에는 분명히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들리기 시작하고, 처음에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소리가 어느 순간 배경으로 물러난다. 음악이 새로운 것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것들을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Long Season》의 질감은 단순히 음색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소리 하나하나가 음악의 표면을 구성하고, 그 표면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같은 멜로디가 반복되더라도 그것이 놓여 있는 공간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음악처럼 들린다. 결국 반복되는 것은 멜로디이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매번 다른 풍경이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이 음악을 그렇게 오래 들을 수 있었던 이유인지도 모른다. 《Long Season》은 새로운 사건을 계속해서 던져주는 음악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계속해서 바라보게 하는 음악이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던 곳에서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처음에는 단순했던 멜로디 안에서 이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움직임이 생겨난다. 음악이 변하는 동시에 청자의 귀가 변한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보컬이 있다. 악기들만 놓고 보면 《Long Season》은 상당히 추상적인 음악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반복되는 리듬과 기타 프레이즈, 계속해서 변화하는 음향과 공간은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 안에 사토 신지의 목소리가 들어오면서 이 추상적인 공간에는 갑자기 사람이 존재하게 된다. 그의 목소리는 이 음악을 어디론가 끌고 가려고 하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강하게 주장하거나 청자에게 특정한 감정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미 흘러가고 있는 음악 속에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간다. 때로는 가사가 명확하게 들리지 않기도 하고, 의미보다 목소리 자체의 질감이 먼저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그의 목소리를 하나의 메시지라기보다 그 공간 안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생명처럼 느끼게 된다.


이것은 내가 이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느꼈던 감정과도 묘하게 닮아 있었다. 나는 그 음악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설명해주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편안했다.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증명할 필요도 없었고, 내가 왜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내 감정을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외롭다면 왜 외로운지 알아야 했고, 무언가가 싫다면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은 어딘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Long Season》은 설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게 나에게는 충분했다. 이 음악의 다이내믹 또한 이러한 감각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Long Season》은 처음부터 거대한 소리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아주 작은 모티프에서 시작해 조금씩 자신을 확장해간다. 새로운 악기가 등장하고, 음향의 밀도가 높아지고, 공간이 점점 가득 차면서 음악은 서서히 거대한 형태를 갖춰간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갑자기 문이 열리는 것처럼 새로운 세계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존재하던 것들이 계속해서 축적된 결과로 어느 순간 음악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져 있을 뿐이다.


그래서 《Long Season》의 클라이맥스는 일종의 폭발이라기보다 성장에 가깝다. 일반적인 음악에서 클라이맥스는 이전까지의 긴장을 해소하는 사건처럼 느껴진다. 조용한 부분이 있고, 긴장이 쌓이고, 결국 모든 것이 한꺼번에 터진다. 하지만《Long Season》에서 가장 거대한 순간은 이전의 모든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부터 계속 존재했던 것들이 그 순간에 가장 완전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아주 작았던 것이 끝에 가서는 거대한 것이 된다. 하지만 처음과 끝이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처음의 멜로디이고, 처음의 리듬이며, 처음부터 존재했던 그 음악이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듣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Long Season》의 클라이맥스를 들으며 단순히 "음악이 커졌다"고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부터 계속 들려오던 것이 마침내 내가 들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자라났다는 느낌에 가깝다.


그리고 이것은 다섯 개의 파트로 나뉘어 있는 이 곡 전체의 구조에서도 드러난다. 다섯 개의 파트는 서로 완전히 독립된 다섯 곡이라기보다 하나의 생명체가 성장하는 과정에 가깝다. 하나의 작은 모티프가 시작점이 되고, 그것이 반복되고 확장되면서 새로운 소리들이 생겨나고, 음악은 점점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하게 된다. 이후 가장 거대한 지점까지 도달한 뒤 다시 처음의 감각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Long Season》의 구조는 직선이라기보다 나선에 가깝다. 같은 곳을 다시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전과 정확히 같은 위치로 돌아오지는 않는다.《Long Season》은 그것을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저 처음의 작은 소리를 끝까지 놓지 않은 채, 그 위에 새로운 것들을 천천히 쌓아갔다.


그래서 나는 이 음악을 들으며 내 감정 역시 반드시 이해하거나 정의해야 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외로운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과거의 감정에 정확한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됐다. 그저 존재하는 감정을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아마 이것이 《Long Season》이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음악’으로 남은 이유일 것이다. 이 음악은 나에게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의 나에게는, 또 지금의 나에게도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4부 - 거울이 된 선율, 비로소 마주한 얼굴


《Long Season》의 반복되는 구조를 들으며 나는 내가 살아온 시간을 떠올렸고, 그 안의 미세한 변화들을 느끼며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조금씩 변해왔는지를 곱씹었다. 과거의 테마를 버리지 않고 그 위에 새로운 소리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음악처럼, 나 역시 과거의 나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지금의 내가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했다.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하필 《Long Season》이었을까. 세상에는 비슷한 음악이 많다. 반복 기법을 사용하는 음악도, 긴 호흡으로 전개되는 음악도, 들려오는 순간 시간 감각을 흐릿하게 만드는 음악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나에게 이 작품은 단순히 '좋은 음악'이라는 범주를 뛰어넘는 무언가였다.


아마 당시의 내가 가장 간절히 원했던 정서와 이 음악이 이상하리치만치 닮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에는 조급함이 없었다. 무엇인가를 빠르게 입증하거나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하나의 멜로디가 오랫동안 머물러 있어도 괜찮았고, 아주 작은 변화가 더디게 일어난대도 상관없었다. 이전의 소리가 사라지지 않은 채 새로운 소리와 겹쳐 존재하는 모습도 자연스러웠다. 나는 그 긴 소리의 흐름 안에서 비로소 나 자신에게 허락하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했다. 천천히 변해가도 괜찮다는 것, 모순된 감정들을 한가슴에 품고 있어도 괜찮다는 것, 그리고 명확한 이름을 붙이지 못한 채 무언가를 느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기분이었다. 조금은 멋쩍은 고백이지만, 나는 이 음악을 들으며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그런 너그러운 시간을 내어주었던 것 같다.


특히 나를 오래도록 괴롭혔던 건 '혼자 있고 싶어 하면서도 외로움을 타는 나'라는 모순이었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면 외롭지 않아야 마땅하다고 여겼고, 누군가가 좋아졌다면 마땅히 다가가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Long Season》을 들으며 그런 이분법적인 생각들이 조금씩 허물어졌다.


이 곡의 안쪽에서는 상반된 것들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공존했다. 반복과 변화가 동시에 일어났고, 고요함 속에서도 끊임없이 소리의 움직임이 일렁였다. 같은 멜로디가 지속되면서도 매 순간 새로운 풍경을 그려냈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으니 굳이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할 필요가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얼마든지 외로울 수 있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그 사람에게서 도망치고 싶을 수 있었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으면서도 나를 향한 시선이 부담스러울 수 있었다. 그것들은 결코 스스로를 괴롭혀야 할 모순이 아니라, 그저 내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결이 다른 감정들일 뿐이었다.


《Long Season》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음악은 나를 무작정 위로했다기보다,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어놓았다. 이전까지 나는 나라는 존재를 하나의 일관된 설명으로 정의하려 애썼다. 내가 왜 이러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명확하게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길고 아득한 곡을 통과하며 깨달았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결코 단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사람은 음악과 닮았다. 끊임없이 변할 수 있고, 같은 사람이면서도 매 순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과거의 자신을 버리지 않은 채로 새로운 계절을 맞아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제 《Long Season》을 재생할 때마다 단지 음의 배열만을 듣지 않는다. 그 안에는 내가 지나온 아득한 시간들이 누적되어 있다. 이름을 붙이지 못해 방황하던 감정들, 이미 잊었다고 믿었던 기억들, 그리고 당시에는 차마 이해해주지 못했던 어린 날의 내가 들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파편들을 억지로 하나의 의미로 정돈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있다.

이 곡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거나 완벽한 음악이어서가 아니다. 그저 긴 길을 잃었던 당시의 내가 그 소리의 숲에서 처음으로 진짜 나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Long Season》은 더 이상 내가 좋아하는 앨범 중 하나로 남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기 시작했던, 현실보다 훨씬 아늑한 나만의 장소가 되어주었다.


​5부 -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매번 새로워지는 계절


​제주도의 차가운 바닷가에서 발끝으로 파도를 느끼며 이 음악에 갇혀 있던 그날 이후로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렀다.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 세상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어 있지는 않았다. 여전히 내 안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문득 찾아왔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묘한 거리감이나 완벽해지고 싶은 조급함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2025년 10월의 그 비참했던 생일날 들었던 《Long Season》이 나를 현실로부터 격리시켜 주는 '차단막'이자 '피난처'였다면,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재생하는 《Long Season》은 지나온 시간들을 다정하게 다독여주는 '비포장도로'처럼 느껴졌다. 35분16초라는 트랙의 길이는 단 1초도 변하지 않았고, 그 안의 악기 구성이나 멜로디의 반복도 그대로였다. 변한 것은 오직 그 음악을 듣고 있는 나의 마음가짐뿐이었다. 음악이 변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더 선명하게 측정할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지만, 예전처럼 나 자신을 속이며 혼자이길 자처하지 않는다. 누군가와의 멀어진 관계에 아파하면서도, 그 아픔조차 내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마음속에 담았었다는 증거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계절은 매년 반복되지만 단 한 번도 똑같은 풍경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 음악 역시 그렇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멜로디 안에서 미세한 변주가 일어나듯, 나라는 사람도 지난날의 나를 안은 채 조금씩 다른 계절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음악이 흘러가는 동안 나 역시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Long Season》이 나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음악 하나를 듣고 사람이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의 공허함도, 외로움도, 관계에 대한 두려움도 음악을 들었다고 해서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들을 바라보는 방식은 조금 달라졌다. 예전의 나는 내 안에 있는 감정들을 없애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외롭다면 외롭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했고,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그 감정을 어떻게든 정리해야 했으며, 무언가에 실패했다면 그것을 실패로 남기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것을 만들어내야 했다.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하기보다 끊임없이 수정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Long Season》을 오래 듣고 난 뒤에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든 감정에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 어떤 감정은 그저 존재할 수 있고, 어떤 관계는 끝난 채로 남을 수 있으며, 어떤 기억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가지고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 어쩌면 그래서 나는 이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과거의 나를 조금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를 묻기보다, 그때의 나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왜 감정을 숨겼을까. 왜 사람에게 다가가면서 동시에 도망쳤을까. 왜 인정받고 싶어하면서도 정작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면 불편했을까. 아마 그때의 나는 그것을 설명할 언어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음악은 내가 가지고 있던 그 이름 없는 감정들에게 아주 천천히 언어가 되어주었다. 물론 《Long Season》이 내 감정을 대신 설명해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음악이 나에게 답을 준 것이 아니라, 답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준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Long Season》을 처음 들었던 날과 전혀 다른 사람이지만, 이상하게도 그 음악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어떤 날에는 여전히 그 음악이 피난처처럼 느껴지고, 어떤 날에는 지나간 시간을 바라보게 하는 거울처럼 느껴진다. 또 어떤 날에는 아무 의미 없이 그냥 좋은 음악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것조차 괜찮다고 생각한다. 음악의 의미는 언제나 같을 필요가 없으니까.


아마 이것이 내가 《Long Season》을 지금까지도 계속 듣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이 음악은 내가 변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에 따라 자신을 다른 모습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같은 음악을 다시 듣는 일은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다시 만나는 일에 가깝다.


어쩌면 《Long Season》은 처음부터 나를 구하려고 했던 음악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계속 흘렀을 뿐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든, 무엇을 잃었든, 무엇을 두려워하든,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그리고 나는 그 흐름 속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시간은 나를 버리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계절은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같은 계절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 나도 그럴 것이다.


​에필로그 - 길었던 계절 끝에서 나를 만나다


처음에는 이것을 쓰는 것조차 망설였다. 내가 느꼈던 것들이 정말 이렇게까지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그저 지나간 어린 시절의 감정들을 지나치게 의미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계속 의심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는 《Long Season》이 얼마나 위대한 음악인지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음악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그 음악을 통해 처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나 자신을, 이번에는 내가 직접 바라보고 싶었던 것 같다.


《Long Season》은 여전히 같은 음악이다. 35분 16초 동안 같은 멜로디가 반복되고, 같은 목소리가 흐르고, 같은 계절이 다시 찾아온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 음악을 처음 들었던 사람이 아니다.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을 만나고, 또 다른 것을 잃고,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을 언젠가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 다시 이 음악을 듣는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Long Season》을 듣게 될 것이다. 음악은 변하지 않았는데, 내가 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 음악을 나를 구해준 음악이라고만 부르고 싶지는 않다. 그 음악을 들으며 내가 나 자신을 조금씩 구해나갔다고 말하고 싶다. 《Long Season》은 내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주지 않았다. 공허함도, 외로움도, 관계에 대한 두려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것들을 없애야만 하는 결함으로 바라보지 않게 해주었다. 나는 여전히 많은 것을 두려워하고, 여전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여전히 혼자 있고 싶으면서도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모순을 가진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아직도 세상을 모르고, 나도 모르며, 음악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제는 그것이 예전만큼 두렵지 않다. 모든 것을 이해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반드시 이름을 붙여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나간 시간을 전부 이해하지 못해도 살아갈 수 있고, 과거의 나를 완전히 용서하거나 납득하지 못하더라도 그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나는 나 자신을 자주 오해할 것이다. 어떤 날에는 혼자 있고 싶을 것이고, 어떤 날에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수도 있다. 지금의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언젠가는 아무렇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고, 지금은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훗날 나에게 가장 소중한 기억이 될 수도 있다. 그것도 괜찮다.


어린 시절의 나는 감정을 숨기는 법을 배웠고, 음악을 만나고 나서야 그것을 바라보는 법을 조금 배웠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 감정들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대로 가지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어쩌면 이 글을 쓰는 일도 그 과정의 일부였을 것이다. 오랫동안 이름을 붙이지 못했던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어 바라보고, 그 안에 있던 어린 나를 지금의 내가 조금 늦게나마 만나보는 일.


아마 이 글도 언젠가는 지금의 나에게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몇 년 뒤 다시 읽는다면 지나치게 솔직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너무 어린 생각이었다고 웃을 수도 있다. 지금의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그때는 아무 의미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듯이, 지금의 나 역시 아직 만나지 못한 나를 만들어갈 테니까.


그리고 언젠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내가 다시 《Long Season》을 재생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의 나는 어떤 사람일까. 무엇을 잃었을까. 무엇을 사랑하고 있을까. 어떤 계절을 지나고 있을까. 나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그때도 음악은 똑같이 시작될 것이다. 작은 소리가 하나 흐르고, 멜로디가 반복되고, 그 위에 새로운 소리들이 하나씩 쌓이고, 시간이 천천히 흘러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음악을 들으며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내가 《Long Season》에서 가장 오래 사랑한 것은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끝없이 반복되면서도 결코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 같은 멜로디 위에 매번 다른 시간이 쌓이는 것. 계절처럼, 시간처럼, 그리고 나처럼.


긴 계절은 끝났다.


하지만 음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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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 8.24 23:02

    글 한 편으로 판단하긴 좀 그렇지만, 뭔가 저 어릴 때랑 타고난 성격이 비슷하신 것 같아서 엄청 재밌게 읽었습니다. 음악은 스스로의 감정과 마주볼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정말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롱시즌은 그러기에 특히나 좋은 음악인 것 같구요.

  • 8.24 23:54

    원래 음악 리뷰글에 음악 외적인 사족을 다는 걸 안좋아하는데 이 글에선 사족이 아니네 잘읽었음 개추드림

  • 8.25 21:03

    시간가는줄 모르고 읽었네요

    사람이 본인의 감정을 속이는 감정까지 느끼는 순간이 오면

    비로소 그때야 음악이라는 요소가 빛을 내는거 같아요

    저도 어렸을때 친구라는 개념이 제 인생에 잘 잡혀있지 않을때 음악을 찾으러다니고 그때부터 음악에 관심이 생겨서 지금 여기까지 온거같아요

    글 너무 잘읽었고 앞으로 힘내십쇼!!

  • 8.25 23:14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사람은 음악과 닮았다. 끊임없이 변할 수 있고, 같은 사람이면서도 매 순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과거의 자신을 버리지 않은 채로 새로운 계절을 맞아갈 수 있다

     

    이 구절 진짜 미쳤네요

    진심으로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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