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양연화[花樣年華, 2000]
감상은 시간을 거꾸로 거스른다. 기억으로는 1955년 Buddy Rich & Harry Edison의 작품 [Buddy and Sweets]가 역행의 끝이었는데, 당대에 흔하다면 흔한 즉흥의 밀집을 단출한 차림새로 쏟아내는 광경이었다. 시대가 그랬고 지금은 아니다. 이제 와서 재즈 하드밥 에라의 광기 어린 작품들을 보면 머나먼 미래의 누군가가 이 정열적인 연주에 닿으리라고 믿지 않았을까 싶다. LP의 시대를 방에 누워 에어팟으로 감상할 때면 영상과 음반으로 남는 흔적이 종종 인샙션의 꿈결 같은 비현실이라 자각한다. 그러면 오늘과 끝 사이에 놓인 짐짓 70년이란 시간을 간과하기에 충분하다. 체감할 수도 셀 수도 없는 그 멀고 먼 시간 말이다. 종종 간과한다. 70년의 역사를 반의 반도 안 되는 시간으로 들여다보려던 노력의 산물은 구멍 숭숭 뚫린 치즈처럼 허전했다. 그러니 계속한다. 빈 곳 채워넣기는 언제나 현재 진행 중이다.
종종 예술이 예술 너머에 가진 힘을 동경한다. 첫째로는 보고 듣고 만져지는 모든 감각을 표현으로 구설하며 주무르는 힘. 둘째로는 존재 이상의 무언가를 상상하고 번뜩이게 하는 세상 바깥의 힘. 예술도 예술 너머가 움켜쥐니 그럴만하다. 문화엔 시대가 얽혀 있고. 또 정치와 경제가 얽혀 있고. 같은 예술 안에서도 취향과 추구의 차이로 갈라진 파벌이 존재한다. 문화와 사회가 서로를 만드는 무한한 굴레를 돌고 돌면, 굴레에 속박된 이들이 왜 매료되었는가 역시 읽을 수 있다. 이 조화는 주로 감정에 침범하기 때문에 감상은 늘 희로애락으로 들썩거린다. 누구에게나 세계를 눈먼 자들의 도시로 만드는 걸작이 하나씩 있다. 재료는 재료 밖으로 벗어나며 비로소 해방되는 순간이다. 종이와 펜도, 붓과 이젤도, 렌즈와 필름도, 어떤 일상도.

Cocteau Twins - [Heaven or Las Vegas]
화양연화[花樣年華, 2000]. 화양연화는 말처럼 25년만큼 멀지 않았다. 화양연화의 감독 왕가위. 왕가위 감독의 영화 2046에 출현한 왕페이. 그 왕페이에게 곡을 선물한 콕토 트윈즈. 콕토 트윈즈의 첫 감상이던 [Heaven or Las Vegas]. 연쇄 작용이 화양연화에 닿기까지 대략 3년이 걸렸다. 모르던 영화에서 아는 음악을 파헤친 순간 깨달았다. 나는 형태만 다른 화양연화를 이미 감상해봤구나. 콕토 트윈즈의 [Heaven or Las Vegas]. 본래 라스 베가스도 내게 없던 땅이지만, 짐짓 90년대의 라스 베가스를 37분짜리 음반 한 장으로 대신할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 프레이저가 새벽녘을 노래할 때. 로빈 거스리와 사이먼 레이먼드가 이펙터를 뭉게며 흐려진 밤하늘을 연주할 때. 어떤 가사 한줄도 또렷이 이해하지 못했으나 - 더욱이 이해하려 들지 않았으나 - 섬세하고 신비로운 몽환감만을 느꼈으니 그 생경한 기시감은 화양연화를 감상하고 다시금 열병의 징후처럼 끓어올랐다.
나는 이제 60년대의 홍콩이 어땠는지 상상할 수 있다. 노랗고 푸르게 얼룩진 조명빛. 꽃과 잎을 덧바른 무늬 원피스. 기름칠로 굽은 머리칼. 처마 아래 빗길과 골목을 지나 계단을 적시는 빗물의 흙내음. 기울어진 서랍. 때묻은 탁상전화. 낡은 재떨이. 흐릿한 고풍. 그리고 Nat “King” Cole의 스페인어, 아니 에스파냐어. 눈으로 쫓기 어려운 환상이 가득할 때 피사체들은 한 번씩 느릿하게 움직인다. 평화로운 자비다. 그런데도 여유가 부족함을 느낄 때면 나풀나풀 날개를 벗는 땅이 녹슨 정신을 겨눈다. 나는 이제 60년대의 홍콩을 말할 수 있다. 시대가 없어도, 정치나 경제가 없어도 표현할 수 있다. 왕가위 감독이 60년대를 추억했듯 나는 60년대를 추억한 00년대를 문득 추억해도 될 것만 같다. 그런 기분이다. 화양연화[花樣年華, 2000]. 그리고 [Heaven or Las Vegas]. 말이 없어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운다. 이제 우린 비통한 눈물이나 절규 없이도 마음껏 슬퍼할 수 있다. 웃어보일 때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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