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네트 73,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가 소네트집을 집필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여러 말들이 오가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전염병 때문에 급히 수락한 원고라는 것이다. 그 의뢰란 다름아닌 잘생기고 매력있는 청년귀족이 본인의 혼사를 미루자 어른들의 사정이 있던 친척들이 소네트로 그의 마음을 돌리고자 했던 시도이다. 그래서일까 소네트느 17까지 젊음이 영원하지 않음을 노래하고 그것을 물려주어야함을 설파한다. 하지만 기념비적인 18- 그대를 여름날에 비할 수 있을까?- 를 기점으로 위대한 작가는 그 귀족청년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로 역사에 불멸로 기억될 구절들이 탄생되었다. 동세대인들 역시 그의 아름다운 구절들이 동성연인을 위한 연가임은 잘은 몰랐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언어구사력을 가진 남자가 아내를 위해 남긴 시나 편지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묘함을 느끼며 나는 그의 소네트들을 본다.
그 중 73은 묘한 시다.계절,황혼,잉걸불의 이미지를 골자로 사라지는 것을 묘사하고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것들이 사라짐으로써 본인을 더 사랑하게 되리라는 암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인/화자가 말하는 ‘그대가 잃을 수밖에 없는 그것’이 무엇일까. 젊음, 사랑 무엇이든간에 시간 앞에 사라지는 것들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시인은 여기서 사라지기 때문에 이 순간을 더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표현으로 마지막 두 줄에 주제의 변형/확장을 하는 소네트의 양식을 지킨다. 여하튼 ‘순간’과 시간, 그리고 영원은 인류 불멸의 과제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는 12년의 성장과정을 쌓아나간다. 이 영화는 12년간 찍은 영화라는 점서 놀라움을 준다. 이 방법론을 언급해야만하는 이유는 영화가 시나브로 쌓이는 순간들이 어느새 시간이 되어있
는 마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배우들의 얼굴에 드러난다. 아들이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마음 아픈 독백- 나는 내 인생에 뭐가 더 있는 줄 알았어,- 와 영화의 마지막 대사- 순간이 우리를 붙잡는다- 는 묘하게 대구를 이루며 관객이 영화를 넘어 본인의 삶을 관람하게 만든다.
시간 앞에 영원이라는 말은 얼마나 무력하고 이 순간은 얼마나 짧은가. 그래서일까 셰익스피어의 걸작들 곳곳에는 시간 앞에 작아지는 인간들에 대한 통찰 가득한, 다층적인 이미지들이 있다.
그녀가 이 다음에 죽었어야 했는데.
그런 소식을 언젠가 한 번은 들었어야겠지.
내일, 그리고 내일, 그리고 내일도.
기록된 시간의 마지막 음절까지
하루하루 더딘 걸음으로 기어가는 거지.
우리의 어제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보여주지.
우리 모두가 죽어 먼지로 돌아감을.
꺼져라, 꺼져라, 덧없는 촛불이여!
인생은 그저 걸어다니는 그림자, 실력없는 연극배우!
무대에서 잠시 거들먹거리고 종종거리며 돌아다녀도
얼마 안 가 잊히고 마나니.
마치 백치가 떠드는 이야기와 같아서,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차 있지만,
결국 아무 의미도 없도다.
- 맥베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익고 또 익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썩고 또 썩게 되지.
그리고 끝을 맺지.’
‘그때는 지나갔어. 게다가 연인의 맹세는 급사의 말보다 힘이 없어. 양쪽 다 틀린 계산을 맞다고 하는 사람들이야’
- 좋으실 대로
이런 구절들에는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들에 대한 냉소와 거대한 삶을 마주한 인간의 슬픔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시간을 보내야하는가. 그래서 우울증에 걸린 한 왕자는 ‘사느냐 죽느냐’를 두고 고민한다. 하지만 다들 이 고뇌가 종국에는 어떻게 마무리되는지는 잘 모른다.
the intermin is mine
번역하자면 ‘순간은 나의 것’으로 가능한 이 구절은 시간과 세상이 당신에게 선물한 하나를 일깨운다. 그렇다. 순간은 그대의 것이다.
그런데 이 순간은 무엇인가. 하버마스는 이것을 ‘시간과 영원의 교차점’이라고 말한다. 시간은 물처럼 흘러가고 과거는 영원처럼 솟아있다. 이 수평과 수직의 교차점이 현재성이고 순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연스레 프루스트를 떠올린다. 홍차에 마들렌을 적셔먹는 순간, 마르셀은 과거를 되찾는 것을 넘어 순간을 재생산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가장 핵심적인 이미지이자 테마가 두 갈래의 길이라는 사실은 이 순간의 재창조를 더 빛낸다.
나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페인 앤 글로리를 떠올린다. 영화는 마약에 취한 노인의 회한 가득찬 과거가 결국 영화감독이 재창조해 현재로 되살아난 과거의 순간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되살리고 살아가는 순간은 과거의 반복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년이 뒤돌아보는 것, 그리고 영화 속 영화가 영화와 포개질 때 우리는 시간과 영원의 교차점을 목도한다. 시간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시간을 만드는 순간은 우리의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반복된다. 하지만 반복된다는 사실은 차이를 만들며 차이가 반복된다는 말이다. 영화 속 살바도르의 회상이 그가 만드는 영화와 동일하되 다른 것처럼 순간은 차이를 만들며 반복된다. 그러니까 순간은 재창조된 과거이며 차이를 발생시키는 반복이다. 그리고 이는 셰익스피어가 말한대로 그대의 것이다. 그 순간을 잡고 변주해가는 것. 그것이 삶이다.
영감님. 영광의 시대는 언제인가요? 난 지금입니다.
- 어느 풋내기가
제 부족한 어휘력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3번째 문단의 시간이 기산으로 잘못 적힌 것 같습니다
아니라면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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