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28
핑크 플로이드나 플레이밍 립스의 황금기가 그러했듯, 밀레니얼의 애니멀 컬렉티브 또한 인디 록이라는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 스스로가 규칙이 되어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앨범들을 발표해왔다. 무려 네 번씩이나. 이들은 흡사 투정 부리는 아이를 지켜보는 일처럼 보편적이면서 불편한 사이키델릭 음악을 만들었으며, 그에 어울리는 커버 아트를 직접 제작하고 한 발 더 나아가 그에 어울리는 가면을 뒤집어쓴 채 무대 위로 올라갔다. 당시 애니멀 컬렉티브를 다룬 리뷰들을 살펴보면, '(새 시대를 위한) 전래 동요', '숲속의 마법사', '피터팬' 같은 표현들로 이들의 독창성에 화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컨셉츄얼한 무대 연출과 키덜트 유행에서도 한 세대를 앞서나간 셈이다. 그렇다면 에비 테어와 함께 애니멀 컬렉티브를 공동으로 설립한 노아 레녹스는 어떨까. 첫 솔로 음반이었던 <Panda Bear>의 발매로부터 사반세기가 흘렀지만 그는 변함없이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애젊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바로 그 진지함과 엉성함이 공존하는 음색을 통해 다프트 펑크, 솔란지, 제이미 xx 같은 뮤지션들의 작품에 참여하며 사이키델릭 리바이벌을 대변하는 존재가 됐다. 26년에 달하는 노아의 솔로 커리어는 어쩌면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한평생 브라이언 윌슨을 동경하다가 마침내 브라이언 윌슨이 되어버린 남자."
새 앨범 <Sinister Grift>에는 사이키델리아, 선샤인 팝, 서핑 팝, 덥, 미니멀 앰비언트 등 페스티벌의 스테이지보다 자취방이나 차고에 더 걸맞을 듯한 판다 베어 사운드의 온갖 심벌들이 앨범 전체에 흩뿌려져 있다. 물론 그 심벌들은 브라이언 윌슨으로부터 온 것이다. 세인트빈센트, 웨인 코인, 브래드포드 콕스, 리버스 쿼모, 에즈라 코에닉과 제시카 프랫까지, 브라이언 윌슨의 12사도들이 맹활약하고 있는 시대에 그를 본받고 싶다는 자세에는 별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노아의 충성심에는 어딘가 맹목적인 구석이 있다. 18년 전ㅡ<Strawberry Jam>이 발매됐던 그 해!ㅡ그는 60년대의 질감과 향수를 독창적으로 복원한 <Person Pitch>를 선보임으로써 <Pet Sounds>의 재림을 꾀하며 윌슨 교의 시몬 베드로가 되었다. <Sinister Grift>의 후반부 Venom's In-Left in the Cold-Elegy for Noah Lou로 이어지는 구간에서는 노아의 맹목적인 충성심이 잘 드러난다. 신스, 오르간, 기타 이펙터, 희뿌옇게 메아리치는 비음 등이 겹겹이 쌓여 소리의 벽을 이루고, 역동성과 즉흥성이 제거된 순수한 멜로디가 정교하게 짜여져 만화경처럼 서로를 비추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비치 보이스 따라 하기'라는 매뉴얼을 읽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재현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처럼, 이 시퀀스에는 브라이언 윌슨을 향한 노아의 애정과 강박이 그대로 녹아 있는 것 같다.
애니멀 컬렉티브를 상징하는 전자 드럼과 전자 피아노, 트럼펫, 에비 테어의 보컬 튜닝과 노이즈, 디킨과 지올로지스트의 화려한 신스 컬렉션까지, 이로써 <Sinister Grift>는 애니멀 컬렉티브의 모든 멤버들이 뭉친 첫 번째 판다 베어 앨범이 됐다. 숙람할 만한 곡은 바로크 팝의 서정성에 덥의 리듬감을 가미한 산뜻한 팝 넘버 Ends Meet이다. 사실 곡 자체가 특별한 건 아니지만, 무려 20년 동안 가장 미스터리하고 예측 불가능한 음악을 들려주었던 사이키델릭의 총아들이 당장 <The Smile Sessions>에 수록돼도 좋을 만큼 브라이언 윌슨스러운 곡을 만들었다는 게 놀랍다. 이 밖에도 슈거 레이의 Fly를 떠오르게 하는 Ferry Lady의 감미로운 도입부나 잘게 분절된 샘플과 차분한 드론이 어우러져 쓸쓸한 정취를 풍기는 Elegy for Noah Lou가 눈에 띈다. 이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악적 순간이기도 하다. <White Light/White Heat>를 제작함으로써 소음도 음률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던 존 케일이 서정성 짙은 <Paris 1919> 같은 작품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했듯이, '우리 이런 것도 해보자.'가 아닌 '우리가 이런 걸 좋아했었지.'를 깨달음으로써 완성되는 순간들. 아마도 <Sinister Grift>는 그런 순간들이 응집되어 탄생한 앨범일 것이다.
Praise와 Defense는 노아의 최고작으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버거 번이다. 하지만 번이 아무리 훌륭하다 한들 패티와 야채 같은 속 재료가 뒷받침해 주지 못한다면 그저 그런 햄버거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50mg이나 Ends Meet 같은 곡들은 서로 위치를 바꾼다 해도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는 60년대의 질감과 향수도 모자라 모든 곡이 한 사람에 의해 더빙된 배경음악처럼 들리는 악습까지 복원하고 말았다. 이렇다 할 실체가 없는 굿 타임 뮤직. 이미 10년 전에 <Person Pitch>를 듣고 충성을 맹세한 팬들이 비치 보이스의 시대를 또 한 번 충실하게 재현했다는 사실에 큰 감흥을 느낄 것 같지는 않다. <Sinister Grift>가 지닌 매력과 유쾌함에 반감을 갖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노아는 자신의 우상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봐야 한다. 반세기에 걸쳐 수많은 밴드가 자신들만의 <Pet Sounds>를 만들려고 한 까닭이 단지 그 시대를 재현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브라이언 윌슨이 역동성과 즉흥성이 결여된 음악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음악이 통용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신생 밴드는 멍청한 20대들의 사운드트랙을 만들면서 그들의 추억으로 남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는 서로의 멍청했던 20대 시절을 추억하기 위한 교향곡을 만들고요."라고 마이클 스타이프는 말한다. 내가 아는 한 브라이언 윌슨은 언제까지나 멍청한 20대들의 사운드트랙을 만들 것이다.
클로징 Defense의 드럼 박자에 맞춰 울려 퍼지는 노아의 맥없는 보컬에는 묘한 전염성이 있으며 부족한 활력분을 패트릭 플레겔의 타이트한 기타 솔로가 보충해 준다. 판다 베어의 노아 레녹스 그리고 신디 리의 패트릭 플레겔, 자기만의 방식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는 일에 매혹된 두 사람이 이 사이키델릭 여정의 막을 내린다. <Diamond Jubilee>를 예로 들자면 패트릭의 과거는 고상한 야만인들의 세상, 즉 이상향이다. 우리는 이 세계를 서서히 망가뜨렸기 때문에 이제 과거는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낙원이 됐으며 그렇기에 그의 음악에는 짙은 애수가 내재돼 있다. 반면 노아의 과거는 영감의 원천, 그러니까 그의 현재는 비치 보이스나 반 다이크 파크스의 음악들이 무르익어 싹을 틔우는 토양이다. 그렇기에 그의 음악은 대부분 캘리포니아의 여름처럼 너그럽고 경쾌하다.
그런데 브라이언 윌슨을 존경한다 한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노아 레녹스는 올해로 46세이며, 배우자와는 별거 중이고, 어린 딸 나디아는 어느새 성인이 되어 수록곡 Anywhere but Here를 공동으로 작곡했다. 중년의 위기를 맞이한 남성에게 어릴 적 우상이 뭐 그리 대수라는 말인가. 그러나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집착이야말로 어떤 징표라는 생각이 든다. 15년 간의 은둔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조차 15년 전처럼 프린스와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에게 감사를 표한 디 안젤로, 백발의 데이비드 번과 콜라보 앨범을 발표한 애니 클라크, 나일 로저스와 폴 윌리엄스 같은 어렸을 적 영웅들을 스튜디오로 불러들인 다프트 펑크, 브라이언 윌슨을 동경하다가 브라이언 윌슨이 되어버린 노아 레녹스 등, 가능하다면 나는 이 집착을 '눈먼 애정'이라고 부르고 싶다. 적어도 팝의 역사에 관해서라면 짐 자무시가 옳다. 여기서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작년의 제시카 프랫과 신디 리, 올해의 판다 베어까지 60년대의 환상적인 멜로디를 복각해 만든 앨범들이 참 좋았던 것 같아요 마지막에 디안젤로랑 견주신 것도 흥미롭구요 잘 읽었습니다 ㅎㅎ
잘 읽었습니다 항상 잘 읽고있어요 옛날 글들도 종종 찾아읽어요
감사합니다
와 제가 느낀 감상이랑 상당히 비슷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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