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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KA twigs - EUSEXUA를 듣고

TomBoy12시간 전조회 수 412추천수 19댓글 22

EUSEXUA.jpg

 

2025/01/24

 

 

 

 


<EUSEXUA>의 커버 아트는 꼭 미래에서 찍힌 사진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그 인상의 저변에는 FKA twigs, 즉 탈리아 바넷의 음악에는 우리가 아직 겪어보지 못한 미래의 양식이 담겨있을 거라는 작은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제 음악, 춤, 연기, 카메라 앞에서 몸을 움직이는 방식, 마이크를 통해 울려 퍼지는 목소리, 이 중 무엇 하나 우연이 아니기 때문에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20세기 말 음악팬들에게 비요크가 그랬듯 바넷 또한 미래의 집전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다가올 작품에서 테크노를 접목시킨 음악을 선보일 거라는 말에 나만 해도 자연스레 전자음악 버전의 <MAGDALENE>를 떠올렸다. 막상 뚜껑이 열리자 이 디스크는 천상의 풍미를 자랑하는 <MAGDALENE>라기보다는 한껏 농축된 <BRAT> 같은 맛을 냈다. 현재 이 앨범을 실망스럽게 여기는 이들도 앨범 자체보다는 자신의 상상과 다른 모습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이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어렵다. 포개어진 손바닥을 살며시 펼쳐서 보여줄 미래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상하던 미래와 다르기에 어렵다. 이 시대의 비요크, 마리아 막달레나의 현신, 기술 진보주의에 우려를 표하는 팝 스타 등, 그녀에게 덧입혀진 이미지들을 잠시만 내려놓도록 하자. 대신 제시 제이의 백댄서와 스트립 클럽의 호스트로 커리어를 시작한 뮤지션의 조금 색다른 댄스 앨범으로 바넷과 <EUSEXUA>를 바라보는 것이다.

 

바넷은 자신의 경력을 춤으로 시작했지만 이상하게도 댄스 플로어를 위한 음악을 만들진 않았다. 반면 <EUSEXUA>는 에이펙스 트윈에게 제를 올리는 듯한 트랜스 비트로 막을 열며, 이 심장 박동을 모방한 패턴이 클럽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Girl Feels Good은 충만한 생명력으로 살아 숨 쉬는 여성성에 대한 찬송가로서, 사운드와 내러티브 양쪽 면에서 마돈나의 What It Feels Like For A Girl을 업데이트한 것처럼 느껴진다. 한편 Perfect Stranger와 Drums of Death, 그러니까 제일 바넷스러운 곡과 제일 바넷스럽지 않은 곡이 열을 지은 모습은 다시금 큰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Perfect Stranger는 실험성보다는 복고풍 개러지 비트와 캐치한 코러스로 채워져 있으며 <CAPRISONGS>를 떠오르게 하는 활기찬 에너지가 접근성과 재미를 동시에 안겨 준다. Drums of Death의 무게감 있는 드럼 프로그래밍과 잘게 채 썰어진 튜닝 보컬은 그 어떤 대사 전달 없이 90초간 스스로 호흡하며 절경을 이룬다. 늘 나는 서로 상반된 성질이 이물감 없이 공존하는 모습을 '훌륭한 음반'의 덕목으로 손꼽아왔다. 한데 <EUSEXUA>에서는 상반된 성질을 공존시키거나 이물감을 감출 의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이런 자세에 대한 평가가 앨범의 첫인상을 결정지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어는 못하게 했어야지." vs "벌써 노스 파트를 다 외웠어." 당신은 어느 쪽인가?)

 

여러 대륙의 장르와 게스트를 융화시켰던 <CAPRISONGS>는 당시로서는 일탈로 간주됐지만, 지금 와서 보면 트위그스 음악의 제2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던 것 같다. <CAPRISONGS>가 프로토타입이라면 <EUSEXUA>는 그 자양분을 먹고 자란 완전식품이랄까. 아닌 게 아니라 <CAPRISONGS>의 활기 넘치는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가장 주요한 역할을 맡았던 프로듀서 콜리스가 이번 앨범의 러닝메이트로 바넷과 합을 맞췄다. 여느 완성도 높은 댄스 앨범들처럼 <EUSEXUA>에서는 몽환적인 코러스보다 그 너머의 비트를 더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케이트 부시를 연상시키는 신비로운 현악 연주와 장난기 가득한 신스가 어우러진 Keep It, Hold It은 확실히 80년대의 유산이라 할만하다. 중반부가 되면 난데없이 요란한 하우스 비트가 믹스를 채우는데, 이 드롭에서 어떤 개연성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사실 앨범 자체가 이런 식이다. Sticky의 인더스트리얼 드럼,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는 Childlike Things, 댄스 음악의 역사를 넘나들다가 베스퍼틴 풍의 다운템포 발라드가 흘러나오는 등, 앞의 시퀀스가 뒤이어질 전개를 보증하지 않으며 앞서 말했듯 개연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이런 특징이야말로 <EUSEXUA>와 이전 작품들을 구분하는 단서가 아닐까? 바넷은 불가사의하고 압도적인 분위기나 글로벌한 감성으로 청취자를 사로잡는 데 이전만큼 관심이 없는 듯하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그녀는 단지 당신이 춤추길 바라고 있을 것이다.

 

바넷이나 비요크의 음악을 들으며 따라 부른 적이 있는가? 나는 <MAGDALENE>와 <Vespertine>을 셀 수 없을 만큼 들었지만 그랬던 적은 없는 것 같다. 한두 번 흥얼거렸을 수는 있겠으나 Maureen을 부를 때의 감각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이건 타고난 음색이나 창법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샤데이는 자신의 목소리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과 자부심 아래 노래를 부를 것이다. 거의 모든 가수의 마음가짐일 테지만, 몇몇 소수는 그런 자부심조차 초월하는 텍스처를 얻기 위해서 다시 한번 녹음을 하는 대신 다시 한번 목소리를 변조한다. 바넷의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매혹적인 Room of Fools의 베이스라인이 우리의 의식을 세기 말 레이브파티로 이동시키는 동안 그녀의 톤과 음역 또한 그에 맞춰 쉴 새 없이 요동친다. Striptease의 트랩 비트는 bpm을 증폭시킨 드럼 앤 베이스로 이어지고, 바넷의 과잉된 교성은 고양잇과의 보폭으로 하이 햇 위를 누비다가 베이스가 숨을 고르면 섬세한 팔세토로 변신해 박진감을 유지한다. 디디는 마이클 잭슨이 춤추는 광경을 보고 "리듬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라고 표현했는데, 나 역시 <EUSEXUA>를 들으면 바넷이 춤추는 광경이 머릿속에서 펼쳐진다. 다만 그 연상 작용을 일으키는 건 그녀가 축조한 리듬이 아니라, 그녀가 축조한 목소리이다.

 

제시 웨어, 비욘세, 찰리 XCX 등 디바에서 클럽 호스트로의 전직은 많은 여성 뮤지션들에게 리스크가 적은 선택지 중 하나였다. 독자적으로든 시류에 편승했든 간에 이제 바넷 또한 이 루트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그 대상이 그녀이기 때문에 수단(댄스음악)보다 목적(왜 댄스일까?)에 더 이목이 쏠리는 듯하다. 내가 판단하기에 <EUSEXUA>에 새겨진 해답은 단순하다. 지금 즉시 레이브의 일원이 되라는 것이다. 바넷과 콜리스는 뉴욕과 LA, 런던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하여 땀에 젖고 살과 살이 맞닿는 감각을 받아들이도록 관중을 북돋았으며, "진정한 영적 체험은 육체의 결합 없이 달성할 수 없다."라고 천명했다. 이 발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물론 매트리스 위에서 매력 넘치는 이성의 나신을 마주 보는 것만큼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일은 없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섹스에 버금가는 도구가 이미 있지 않은가. 바넷은 오르가슴, 탈진, 테크노 정신, 댄스 플로어 위에서의 일체감과 에로티시즘, 즉 인생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최고의 순간을 묘사하기 위해 EUSEXUA라는 단어를 고안했다. 분명 더 많은 이야기와 함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스피커와 이어폰으로 사람을 미치게 하는 비트가 줄지어 쏟아지고 있는데 이야기와 함의에 전념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바보 같은 짓이다. 의미 부여도 좋고 섹스도 좋은데, 일단 우리 춤부터 추자. 다 같이 모여 이 세상이 고대하던 레이브가 되어보자. 아침해가 떠올라 이 신명나는 리듬이 멈추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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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직 연휴가 3일이나 남았네요. ㅎㅎ
남은 휴일 알차게 보내시길.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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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2
  • 12시간 전

    커버 무서워서 못듣겠어요

  • TomBoy글쓴이
    6시간 전
    @따흙

    뿌까 커버야 워낙 유명하니까요 ㅎㅎ

  • 12시간 전

    미루다가 아직 듣지를 않아버렸는데, TomBoy님 리뷰 낭낭하게 읽으면서 들어야겠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 TomBoy글쓴이
    6시간 전
    @Pushedash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12시간 전

    EUSEXUA가 CAPRISONGS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평에 참 공감이 많이 가네요. 별개로 Drums of Death를 처음 들었을 때 음악 자체가 주는 충격만큼이나 One Of A Kind의 작은 샘플 조각이 존재했다는 충격이 떠오르네요 ㅋㅋㅋ

  • TomBoy글쓴이
    6시간 전
    @온암

    그 비트를 공연장 가는 비행기 안에서 콜리스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Drums of Death (feat. G-Dragon) 이런 핏도 나쁘지 않아 보여요 ㅎㅎ

  • 12시간 전

    엘이에서 님이 제일리뷰잘씀

  • TomBoy글쓴이
    6시간 전
    @모든장르뉴비

    감사합니다! :)

  • 11시간 전

    크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말씀하신대로 스스로 만들어낸 EUSEXUA란 단어와 댄스플로어의 교집합이 이 앨범이 탄생한 까닭이 아닐까 해요.

  • TomBoy글쓴이
    6시간 전
    @끄응끄응끄응

    베를린에 거주하는 동안 테크노와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Room of Fools 같은 곡은 화장실 낙서하다가 만들었다네요. 두 번 낙서했다가는 아주 큰일 나겠어요 ㅎㅎ

  • 11시간 전

    제가 바라왔던 미래의 모습과 그녀가 구현한 게 일치하지 않아서 EUSEXUA가 호로 다가오지 않은 것 같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 ! ! !

  • TomBoy글쓴이
    6시간 전
    @공ZA

    감사합니다! 듣다 보면 좋아지실 거예요 :)

  • 11시간 전

    노스 트랙만 줄줄 듣는듯

  • TomBoy글쓴이
    6시간 전
    @GayGay

    이런 쪽에서는 확실히 아버지의 향기가...

  • 11시간 전

    글 진짜 잘 읽었습니드 감사합니다

  • TomBoy글쓴이
    6시간 전
    @미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 10시간 전

    개인적으로 저는 찰리의 CRASH -> BRAT과 뿌까의 CAPRISONGS -> EUSEXUA가 조금 겹쳐 보였는데, 완전히 노선을 튼 찰리의 경우와 다르게 EUSEXUA는 CAPRISONGS의 연장선으로도 볼 수 있겠네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TomBoy글쓴이
    1 6시간 전
    @Satang

    반응 보면 EUSEXUA = 뿌까s BRAT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더라고요. 저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편이고요. 무엇보다 음향 빵빵한 클럽에서 진가를 발휘할 듯합니다

  • 9시간 전

    진짜 춤추고 싶어지는 앨범

  • TomBoy글쓴이
    6시간 전
    @한겨울

    그게 바로 뿌까가 제일 원하는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 6시간 전

    노스 피처링 활용이,, 앨범 전 트랙 다 좋은데 이게 계속 맴도네요

    잘 읽었습니다

  • 4시간 전

    이번 앨범이 caprisongs의 자양분을 먹고 자란 완전식품이라고 표현하신게 너무 좋았어요 이것 말고도 너무 공감되고 새로 알게 되는 부분들도 많았네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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