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ost Interview - Guitar World : Kurt Cobain
지금부터 읽게 될 인터뷰는 1993년 7월 22일 목요일 밤 늦은 시간에 진행되었다. 해당 인터뷰는 너바나의 세 번째 앨범 <In Utero>의 영국 홍보 캠페인의 일환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당시 너바나는 미국 언론에서는 거의 침묵하고 있었지만, 뉴욕에 머무는 짧은 기간 동안 다섯 번의 영국 매체 인터뷰와 사진 촬영 일정을 소화하며, 23일 저녁 로즈랜드에서 쇼케이스 콘서트를 마무리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는 가장 흔들림 없는 밴드라고 하더라도 상당히 고된 일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바나에게 "평범한" 것은 거의 없었다.
크리스 노보셀릭과 데이브 그롤의 친근하고 직설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당시 너바나를 둘러싼 분위기는 1977년 섹스 피스톨즈와 함께했던 느낌과 놀랍도록 유사했다. 이들은 단순히 음악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상징하는, 가장 뜨거운 밴드였으며, 기존의 관행을 거부하고 있었다. 1년간의 침묵 끝에 그들의 복귀를 맞이한 팬들의 열광적인 반응으로 볼 때, 너바나는 모든 이들의 두려움, 희망, 사랑, 증오를 집중시키는 심리적 피뢰침 같은 존재였다.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아는 이는 거의 없었고, 그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 아는 이는 전혀 없었다.
이 모든 압박감은 커트 코베인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매력적이면서도 거만하고, 모호하면서도 예측 불가능한 인물로, 인터뷰에 응하게 만드는 것조차 어려웠다. 우리는 그를 우리가 함께 관람했던 멜빈스의 놀라운 공연이 끝난 뒤, 무대 뒤에서 간신히 붙잡았다. "지금 꼭 해야 해요?" 그가 물었다. 내가 "네." 라고 간단히 대답하자, 그렇게 인터뷰가 성사되었다. 이후 우리는 뉴욕 펠리스 호텔 우리들의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편안한 상태에서의 커트는 지적이고 논리적이었으며, 당시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가능한 한 솔직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 인터뷰는 광란의 중심에서 커트에게 평온의 오아시스를 제공한 듯 보였다. 나는 그에게 호감을 느꼈으며, 그가 하는 말을 믿고 싶었다. 다음 날 로즈랜드 공연을 보고 느낀 나의 결론은, 그는 대단히 긍정적인 힘과 자기 파괴 사이의 칼날 위에 서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그 결정적 순간을 기록한 인터뷰 내용이 있다.
Guitar World: 본인 배경에 대해 말해주세요.
Kurt Cobain: 저는 2067년 워싱턴주의 애버딘에서 태어났고, 애버딘과 20마일 떨어진 몬테사노를 오가며 살았어요. 제 어린 시절 내내 친척 집들을 오가며 지냈습니다.
GW: 부모님이 어릴 때 이혼하셨나요?
KC: 네. 제가 7살 때요.
GW: 그때를 기억하나요?
KC: 왜인진 모르겠지만, 부끄러웠던 기억이 나요. 부모님이 부끄러웠어요. 학교 친구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니까요. 전형적이고 전통적인 가정, 그니까 엄마와 아빠가 함께 있는 가정을 간절히 원했죠. 그런 안정감을 원했기 때문에 몇 년 동안 (부모님을) 원망했어요.
GW: 그럼 지금은 화해한 건가요?
KC: 엄마와는 항상 관계를 유지해왔어요. 어머니가 더 애정 표현을 잘하셨거든요. 하지만 아버지와는 작년까지 약 10년간 연락을 안 했어요. 작년에 우리가 시애틀에서 공연할 때 아버지가 백스테이지로 찾아왔어요. 기뻤죠. 제가 아버지를 이제 더 이상 미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거든요. 근데 그렇다고 해서 관계를 다시 이어가고 싶지는 않아요. 아버지는 애정 표현을 잘 못하시고 대화를 이어가는 것도 어려워하세요. 단지 혈연 관계라는 이유만으로 관계를 유지하고 싶진 않았어요. 저한텐 지루했거든요.
그래서 그날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만났을 때 제가 그런 감정을 솔직히 털어놨고, 더 이상 관계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전했어요. 우리 둘 다 안도감을 느꼈어요. 몇 년 동안 아버지는 제가 정말로 아버지를 미워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GW: 피하지 않을 수는 없잖아요.
KC: 전 평생 그런 방식으로 살아왔어요. 직장을 그만둘 때도 사직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냥 회사를 나갔어요. 고등학교 졸업도 두 달을 남기고 결국 그만뒀어요. 항상 도망치며 살았죠. 그래서 이번에 아버지와 마주한 건 큰 안도감이었어요. 물론 아버지가 먼저 절 찾아오셨지만요.
GW: 이런 내용을 곡에 쓴 적 있어요? <Serve The Servant>의 가사는 자전적인 내용처럼 들리는데요.
KC: 네. 그게 부모님과의 문제를 다룬 첫 번째 곡이에요. 제가 이렇게 명백히 개인적인 내용을 쓴 건 거의 처음이죠.
GW: 어릴 때는 어땠나요?
KC: 저는 완전 고립된 상태였어요. 부모님이 이혼하기 전까지는 정말 좋은 어린 시절을 보냈죠... 하지만 이혼 후에 제 세상이 180도 바뀌었어요. 사회성이 없어졌죠. 주변 환경의 현실을 깨닫게 됐는데, 제게 많은 것들을 제공해주는 그런 환경이 아니었어요. 애버딘은 너무 작은 마을이었고, 저와 맞는 친구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일을 같이 하거나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도 없었더라니까요. 전 뭔가 예술적인 일을 하거나 음악을 듣는 걸 좋아했어요.
GW: 그땐 어떤 음악을 들었어요?
KC: 구할 수 있었던 건 뭐든 들었어요. 이모들이 비틀즈 앨범을 주곤 했어요. 그래서 비틀즈를 주로 들었고, 가끔 운이 좋으면 싱글 앨범도 몇 장 사곤 했죠.
GW: 비틀즈를 좋아했나요?
KC: 아, 그럼요. 어머니는 항상 우리 가족에게 영국 문화를 좀 심어주려고 노력하셨어요. 우린 항상 차를 마셨거든요! ㅋㅋ, 제가 우리 조상에 대해 알게 된 건 올해 들어서였어요. 코베인(Cobain)이라는 이름이 아일랜드 계열이라는 걸 알았죠. 부모님은 그런 걸 찾아보진 않으셨더라구요. 전 미국 전역의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저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봤어요. 코베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찾을 수가 없어서 전 코번(Coburn)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찾아봤어요.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한 여자를 찾았는데, 그 여자가 몇 년간 우리 가문의 역사를 연구해왔다고 하더라구요.
GW: 그러면 원래 이름은 코번이었어요?
KC: 아뇨, 원랜 코베인이었어요. 근데 코번 가족이 이민을 오면서 이름을 잘못 표기했죠. 저희 조상들은 카운티 콜크(County Cork) 출신인데, 정말 이상한 우연이에요. 우리가 아일랜드를 투어했을 때 콜크에서 공연했는데, 그날 하루 종일 혼란스러운 기분이었어요. 평생 느껴본 적이 없는 영적인 느낌을 받았어요. 진짜 뭔가 묘한 기분이었는데 하루 종일 거의 울 것 같았거든요. 제 친구가 증명할 수 있어요. 대충 2년 전쯤이었던 그 투어 이후로 제가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느낌을 받게 되었어요.
GW: 고등학교 시절에 대해서도 말해주세요. 애들이 막 못되게 굴고 그랬어요?
KC: 저는 희생양 같은 존재였어요. 그렇다고 애들이 항상 절 괴롭히거나 때린 건 아니었구요. 제가 너무 내향적이었어서 오히려 절 건드리질 않았죠. 그때 저는 완전 비사교적인 데다가 제정신이 아니었거든요. 제가 남들과 너무 다르고 미쳤다는 기분이 들어서 애들은 저를 그냥 내버려뒀어요. 걔네가 절 "고등학교 댄스에서 모두를 죽여버릴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으로 뽑아도 별로 놀라지 않았을 겁니다.
GW: 사람들의 정신 상태가 얼마나 악화되면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나요?
KC: 네. 충분히 이해 가능해요. 사람의 정신 상태가 나빠져서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게요. 저도 그런 환상을 품었던 적이 있어요. 하지만 분명히 먼저 자살을 선택했을 거에요. 그래도 저는 항상 캐리(Carrie) 같은 고등학교 댄스 복수 영화들을 좋아했어요.
GW: 언제 처음으로 펑크 락을 접했나요?
KC: 아마도 1984년쯤일 거에요. 이 이야기를 연대기적으로 제대로 정리하려고 해봤는데.. 아직도 헷갈려요. 처음으로 펑크 락에 노출된 건 Creem 잡지가 섹스 피스톨즈의 미국 투어를 다루기 시작했을 때에요.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그 밴드 안에 들어가 있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일지 상상하곤 했어요. 하지만 그때 전 겨우 11살이었고, 그 투어를 따라다니는 건 불가능했어요. 그때는 시애틀에 가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이였죠. 시애틀은 단지 200마일 떨어져 있었는데도요. 제가 기억하기로 우리 부모님은 평생 저를 시애틀에 딱 세 번 데려가셨는데, 그것도 가족 여행이었어요.
그 뒤로 저는 펑크 락을 찾으려고 항상 노력했어요. 하지만 당연하게도 애버딘의 음반 가게에는 그런 음악이 없었죠. 제가 처음으로 살 수 있었던 펑크 락 앨범은 아마도 데보(Devo)와 오잉고 보잉고(Oingo Boingo) 같은 거였어요. 그런 음악들이 결국 몇 년 뒤에 애버딘에도 들어왔죠.
그리고 드디어 1984년에 제 친구 버즈 오스본(Buzz Osborne, Melvins의 보컬이자 기타리스트)이 블랙 플래그(Black Flag)와 플리퍼(Flipper) 같은 유명한 펑크 락 밴드들의 곡이 담긴 컴필 테잎 몇 개를 만들어줬어요. 저는 완전 충격을 받았죠. 드디어 제 소명을 찾은 거에요. 그날 바로 머리를 짧게 잘랐어요. 매일 그 테이프를 틀고 립싱크를 했을 정도라니까요. 그게 제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어요.
그때 이미 저는 몇 년간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고, 제 상상 속의 펑크 락 스타일을 연주하려고 했어요. 펑크 락은 빠르고 디스토션이 많다는 걸 알았거든요.
펑크 락은 제가 사회적, 정치적으로 느끼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해줬어요. 한 번에 너무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죠. 분노와 소외감도 표현되었구요. 그러면서 에어로스미스(Aerosmith)와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같은 메탈 밴드들이 왜 싫어졌는지도 깨달았어요. 그 밴드들이 작곡한 멜로디 중 몇몇은 지금도 좋아하지만 그들의 성차별적인 태도, 그니까 노래에서 자기 성기나 섹스를 주제로 삼는 방식은 싫었어요. 그런 건 지루했죠.
GW: 성차별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건 언제였나요? 펑크 락에 관심을 가지면서 생긴 생각이에요?
KC: 아뇨, 그 이전부터였어요. 저는 좋은 남자 친구를 찾을 수가 없어서 여자애들과 어울릴 때가 많았어요. 여자들이 공정하게 대우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죠. 애버딘에서 여성들이 대우받는 방식은 정말 끔찍했어요. "bitch(썅년/암캐)"나 "cunt(질 나쁜 년)" 같은 말들을 아주 흔하게 들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것들이 저를 괴롭혔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꽤 오래 걸렸어요. 저를 그렇게 화나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마지막 몇 년 동안 펑크 락을 발견했을 때였어요. 모든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더라구요. 그제야 제가 단순히 이상하거나 바보가 아니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GW: 사람들이 당신을 게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나요?
KC: 네. 심지어 저조차도 제가 게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실험해본 적은 없지만.. 그게 제 문제의 해결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제가 게이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친구와 어울렸던 유일한 때가 바로 제가 정말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대립을 겼었던 때에요. 제가 말했듯이 오랫동안 애들은 절 괴롭히고 때리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제 어머니가 저에게 그 친구와 어울리지 말라고 했어요. 어머니는 동성애를 혐오하셨거든요.
GW: 그래서 절교했어요?
KC: 네.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드디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고 애정을 나눌 수 있는 남자 친구를 찾았는데, 그 친구와 어울리지 말라는 말을 들었으니까요. 그때쯤 저는 퍼즐의 모든 조각을 맞춰가고 있었어요. 그 친구는 그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죠.
본문: The Lost Interview – Guitar World | Kurt Cobain (Guitar World, 1993년 7월 22일)
잘 읽었습니다
좋은 해석글 감사합니다
선추후감
좋은글 감사합니다
중간에 자살 언급은 묘하네....
그러게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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