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Digger's Choice ② - J Dilla
2006년 2월 11일, 거장 힙합 비트메이커 제이 딜라(J Dilla)가 쓰러졌다. 사인은 혈소판감소자반증과 전신홍반루푸스. 그의 생일로부터 3일이 지난 시점이어서 안타까움은 더욱 컸다. 그리고 그의 생일에 발표된 걸작 [Donuts]는 그가 생전에 발표한 마지막 앨범이 되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많은 독자의 기대와는 달리, 이번 글은 제이 딜라의 삶과 커리어를 다루지 않는다(그에 관한 이야기는 힙합엘이가 작성한 기사(링크)로 대신하도록 하겠다). 대신 그가 제작한 비트를 들어보고 그 비트에 쓰인 샘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샘플 원작자는 어떤 뮤지션이었고, 원곡의 어떤 느낌을 담으려 했었는지에 관한 이야기할 것이다. 기존의 소리를 활용하지만 완전히 다른 느낌을 자아내는 제이 딜라의 결과물을 들어보면 꽤 놀랄 거라 장담한다. 제이 딜라가 음악에 접근하는 신선한 방식과 그에 쓰인 샘플들을 탐구하는 재미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 믿는다.
흔히 샘플링이라 하면 소울과 훵크를 떠올릴 것이다. 실제로 많은 비트메이커가 소울과 훵크를 샘플링해왔다. 반면에 제이 딜라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활용했고, 여기에는 재즈도 포함됐다.그런 그에게 재즈 피아니스트 아마드 자말(Ahmad Jamal)의 음악은 좋은 재료가 되었을 것이다. 그의 음악은 흑인 특유의 스윙감이 충만하여 재즈의 질감을 가득 머금고 있으면서도, 연주에 공간감을 두어 창의적인 재창조에 용이했기 때문이다. 아마드 자말은 필요한 음만을 사용했고, 가볍고 통통 튀는 소리로 청자들의 진입장벽을 낮췄다. 흑인 피아니스트를 떠올리면 흔히 생각하는 스피드감 강한 비밥 스타일의 피아니즘과는 거리가 있었다.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는 아마드 자말의 여유로운 음악에서 힌트를 얻어, 쿨 재즈라는 새로운 장르를 도입하기도 했다.
60년대 말과 70년대 재즈는 다양한 장르와 결합하며 퓨전 장르로 발전했고, 아마드 자말도 그시류에 발을 얹었었다. 신디사이저를 도입하여 젊은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재즈 연주를 선보였던 것이다. 데 라 소울(De La Soul)의 노래 "Stakes Is High"의 샘플로 사용된 "Swahililand"가 대표적이다. 아마드 자말의 가볍고 통통 튀는 연주를 신디사이저로 연주하여 훵키한 그루브를 구현하는 동시에, 기존의 피아노 트리오(피아노-베이스-드럼) 편성에 콩카를 더해 쿠반 재즈의 질감을 구현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제이 딜라가 제작한 "Stakes Is High"도 원곡의 장르나 원작자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새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그는 무겁게 흐르는 서브베이스와 드럼 라인으로 기존의 퓨전 재즈가 가진 질감을 상당 부분 지워냈다. 여기에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의 보컬 샘플을 살짝 얹었다.
재즈 샘플은 파사이드(The Pharcyde)의 곡 “Runnin’”에서 더욱 흥미롭게 활용된다. 재즈 클라니네티스트 우디 허먼(Woody Herman)의 "Flying-Easy"의 도입부를 사용했고, 이어서는 재즈 색소포니스트 스탄 게츠(Stan Getz)와 기타리스트 루이스 본파(Luiz Bonfa)의 합작곡 "Saudade Vem Correndo"를 샘플링했다. 중요한 곡은 보사노바 넘버인 두 번째 샘플이다. 이 곡은 보사노바의 아이콘인 스탄 게츠가 미국 음악 씬에 보사노바를 최초로 소개했던 1962년도 앨범 [Jazz Samba]에 수록된 곡이다. [Jazz Samba]의 히트를 통해 보사노바의 가능성을 확인했던 스탄 게츠는 [Big Band Bossa Nova], [Jazz Samba Encore!]를 연달아 발표했고, 그 정점은 보사노바의 상징적인 앨범 [Getz/Giberto]로 찍었다. 파사이드의 "Runnin'"은 앞서 소개한 "Stakes Is High"와 마찬가지로 원곡을 파악하기 어렵다. 완성된 곡만 들어서는 메인 샘플이 보사노바라는 점을 추측하기 어렵다. 제이 딜라는 컷앤페이스트 같이 샘플을 재구성하는 기법을 사용하지 않고, 프레이즈 그대로를 사용했음에도 여러 샘플을 포개고, 새로운 리듬 패턴의 드럼과 베이스를 더해 원곡과는 다른 방향으로 만들어낸다. 이 곡에서도 보컬 샘플이 사용됐다. 런디엠씨(Run-D.M.C)가 "Rock Box"에서 자신들의 그룹명을 호명하는 부분에서 'Run'이라고 외치는 부분만 잘라 루핑했다.
제이 딜라는 자신이 속해있었던 힙합 그룹 슬럼 빌리지(Slum Village)의 "The Look Of Love"에서는 재즈 기타리스트 바니 케셀(Barney Kessel)의 "The Look Of Love"의 독주를 샘플링했다. 여백이 많은 기타 연주 사이사이에 드럼 라인을 얹었다. 제이 딜라 자신의 곡인 "Think Twice"는 도널드 버드(Donald Byrd)의 "Think Twice"를 샘플링했다. 정통 비밥 트럼페터였던 도널드 버드는 소울과 훵크의 영역까지 자유롭게 넘나들었고, 래퍼 구루(Guru)의 재즈랩 앨범인 [Jazzmatazz Vol.1]과 [Jazzmatazz Vol.2: The New Reality]에 참여할 정도로 흑인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뮤지션이다. "Think Twice"는 70년대에 유행했던 훵크를 재즈와 접목했던 곡이다. 흑인음악의 영역에 포개져 있는 곡인 만큼 샘플링하기에도 용이했다. 제이 딜라는 원곡의 빠른 템포를 늘어뜨려 기존의 경쾌한 분위기를 우울하게 바꾸어 놓았는데, 낮게 깔리는 서브베이스와 느릿하게 찍히는 베이스 드럼으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제이 딜라를 거론하면서 그가 포함됐던 여러 프로젝트를 빼놓을 수는 없다. 앞서 소개한 슬럼 빌리지를 포함하여, 흑인음악 뮤지션들의 집단인 소울콰리언스(Soulquarians), 어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A Tribe Called Quest) 소속의 큐팁(Q-Tip), 알리 샤히드 무하마드(Ali Shaheed Muhammad)와 결성한 프로듀서 집단 움마(The Ummah) 등이 있다. 샘플링의 귀재인 매드립(Madlib)과 합작한 제이립(Jaylib)도 빠뜨릴 수 없을 것이다. 이 프로젝트 그룹은 2002년에 결성되어 각종 리믹스와 싱글을 발표했다. 합작 앨범으론 [Champion Sound]가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앨범에서 이들은 비트메이킹을 합작한 건 아니고 각자의 곡을 엇갈리게 수록했다. 그중 제이 딜라가 작업한 "The Red"는 포크 뮤지션 크리스 윌리엄슨(Cris Wiliamson)의 "Shine Of Straight Arrow)의 보컬을 톤다운시켜 루핑한 곡이다.
여러 장르를 이야기했는데, 그렇다고 제이 딜라가 소울을 외면했던 것은 아니었다. 여타 비트메이커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소울 음악을 핵심 재료로 활용했다. 제이 딜라의 곡 "Thunder"는 마사 리브스(Martha Reeves)의 "Sweet Misery"를 샘플링한 곡이다. 모타운 레코즈(Motown Records) 소속으로 60년대에 상당한 인기를 누렸던 걸그룹 마사 앤 더 반델라스(Martha & The Vandellas)에서의 마사가 바로 마사 리브스다. 70년대에 들어서 그룹의 인기는 빠르게 하락했고, 그룹의 해체와 함께 그녀는 모타운 레코즈에서 나와 솔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Sweet Misery”은 그녀의 두 번째 앨범 [Martha Reeves]의 수록곡이다. 이 곡에는 70년대에 유행했던 전자 건반인 클라비넷이 사용됐는데, 제이 딜라는 클라비넷 연주를 샘플링해서 “Thunder”를 만들었다.
소개한 곡들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제이 딜라는 프레이즈 샘플링 기법을 사용하지만, 절대 원곡의 분위기에 의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소리만 사용했을 뿐,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이것이 샘플링의 묘미이다. 샘플링은 그저 원곡을 그대로 옮겨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재창조'다. 제이 딜라는 이런 방식의 재창조에 특히나 유능한 비트메이커였다. 많은 사람이 그의 음악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2월이다.
글│greenplaty
기획/영상 제작│시트레코드(http://seterecords.com)
제작 지원│힙합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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