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에 세상을 떠난 뮤지션들
한해도 거르지 않고 접하는 기라성 같은 뮤지션들의 부고에 자연스레 나오는 내 한숨을 볼 때마다 내 지인은"낙담하지마. 이제는 옛 뮤지션들이 갈 시기가 된 것 뿐이야."라는 위로 같지도 않은 말을 건네곤 한다. 딱히 틀린 구석이 있는 말은 아니지만, 납득이 간다고 해서 착잡한 마음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 더욱 안타까운 것은, '갈 때'가 되어서 간 아티스트만큼이나 자기관리에 소홀하여 스스로를 죽음으로 이끈 '파멸형 천재'들도 많다는 점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고, 팝 음악을 이끌었던 영웅들이 더 이상 자리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은 대단히 슬픈 일이지만,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었던 이들을 넋을 다시 한번 기리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Etta James
1938.1.25 ~ 2012.1.20
흔히 어떠한 장르 음악의 위대함을 따질 때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것은 '해당 장르 음악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존속될 수 있는가'이다. 그런 지점에서 거의 모든 대중음악의 뿌리가 되는 블루스라는 장르는 대단히 우월한 위치를 점한다. 블루스의 시작은 흑인음악이었지만, 결국에는 다양한 방향으로 퍼져나갔다. 블루스는 로큰롤 그리고 록으로 발전되며 백인음악으로 변하기도 했고, 다시 한번의 교배를 통해 블루스 록, 싸이키델릭 록으로 발전되기도 했다. 그런 동시에, 리듬앤블루스, 그리고 소울이라는 거듭된 진화를 통해 흑인음악 정체성 확립의 뿌리가 된 장르이기도 하다. 그런 지점에서 수많은 후대 흑인 음악가에게 귀감이 된, '블루스의 여왕'으로 불리는 에타 제임스(Etta James)는 완벽한 흑인음악 영역의 블루스 음악가였다. 때론 부드럽고 달콤하게 속삭이지만, 결국에는 그로울링과 샤우팅으로 마무리 짓는 창법은 블루스의 정체성을 명백하게 보여주며, 이와 더불어 허스키한 그녀 특유의 목소리로 내면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면화시키기도 한다. 그녀는 자신의 주종목이었던 블루스에서 최고의 정점을 찍었지만, 그외에도 리듬앤블루스, 가스펠, 재즈, 소울의 영역에서도 대단한 두각을 보인 위대한 뮤지션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너무 못생겨서 스캔들에 대한 걱정은 필요가 없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전해지기도 하지만, 그녀의 위대한 음성과 음악 앞에서 외모가 무슨 의미를 가질까?
* 에타 제임스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1993), 블루스 명예의 전당(2001), 그래미 명예의 전당(1999 & 2008)에 모두 헌정되었으며, 6개의 그래미상과 17개의 블루스 음악상을 수상했다.
* 에타 제임스, 척 베리(Chuck Berry),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등이 속해있던 블루스 레이블 체스 레코드(Chess Records)는 [캐딜락 레코드(Cadillac Records)]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에타 제임스의 역할은 비욘세(Beyonce)가, 그리고 척 베리 역은 모스 뎁(Mos Def aka Yasiin Bey)이 맡았다.
Whitney Houston
1963.8.9 ~ 2012.2.11
아마도 2012년에 세상을 떠난 뮤지션들 중 가장 큰 임팩트는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셀린 디온(Celine Dion),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 그리고 휘트니 휴스턴으로 이어지는 디바 트로이카 체제가 붕괴된 것이었다.
어머니가 가스펠 싱어였던 씨씨 휴스턴(Cissy Houston)이었고 사촌으로는 디온 워윅(Dionne Warwick)까지 있었으니 휘트니 휴스턴은 그야말로 선천적인 재능을 갖고 태어난 뮤지션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데뷔 초부터 이미 완성형 뮤지션이었다. 만으로 20세가 되기 전에 발표한 데뷔 앨범이자 셀프타이틀 앨범이었던[Whitney Houston]이라는 대단한 알앤비 앨범을 시작으로 그녀는 90년도까지 단 세 장의 앨범만으로 수천 만장에 달하는 판매량을 기록한 슈퍼스타로 등극했다. 이어서 주연으로 출연했고 또 사운드트랙을 담당했던[보디가드(The Bodyguard)]는 현재까지 4,500만 장이 팔리며 사운드트랙 앨범으로는 유례없는 앨범 세일즈를 세웠고, 이는 여전히 유효한 기록이다.
같은 해에 그녀는 알앤비 스타였던 바비 브라운(Bobby Brown)과 결혼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 생활은 썩 순탄치는 않았다. 그녀는 바비 브라운을 통해 마약을 접하게 되었고, 폭행도 당했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관계는 2006년에 끝나고야 말았다. 이혼도 이혼이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극도로 심한 스트레스와 마약 중독으로 인한 폐인 생활로 인해 망가진 그녀의 삶이었다. 휘트니 휴스턴의 성대와 몸은 이미 많은 손상을 입었음에도 음악가로 재기하겠다는 그녀의 의지는 강인했다. 그녀는 자신을 키워준 클라이브 데이비스(Clive Davis)와 함께 스위즈 비츠(Swizz Beatz), 앨리샤 키스(Alicia Keys), 데인자(Danja), 스타게이트(Stargate),알 켈리(R. Kelly) 등의 알앤비 슈퍼스타들을 등용하여 새로운 앨범 [I Look To You]를 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포함해 모든 것이 과거의 전성기 때와 같을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음악은 평단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휘트니는 2010년에 우리나라에 내한공연을 오기도 했을 정도로 재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2012년도 그래미 어워즈의 바로 전날, 휘트니 휴스턴은 베벌리 힐즈의 호텔 스위트룸 욕조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원인은 코카인 흡입과 심장질환으로 인한 익사였지만, 지금까지도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마약중독자였던 그녀가 마약상에게 빚을 져서 타살을 당했다는 것이 그 중 하나다. 그 누구도 아직까지 정확한 진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결국 마약이 그녀의 삶을 파탄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 휘트니 휴스턴은 그래미 어워즈에서 26 부문 노미네이트되어 7회 수상했다.
* 휘트니 휴스턴이 사망한 바로 다음날 진행된 '2012 그래미 어워즈'에선 급하게 그녀의 추모 행사가 편성되었고, 제니퍼 허드슨(Jennifer Hudson)이 휘트니 휴스턴의 히트 싱글 "I Will Always Love You"를 불렀다.
* 2012년 구글 최다 검색어는 "Whitney Houston"이었으며 2위는 "Gangnam Style"이었다.
Adam "MCA" Yauch
1964.8.5 ~ 2012.5.4
흑인들 특유의 삶의 애환과 고충의 이야기를 비트 위에 풀어냈던 힙합이었기에, 힙합은 타 인종들에게는 진입장벽이 제법 높은 편이었다. 꽤나 많은 인구수를 보유했음에도 인종차별과 낮은 사회 위치에 머물렀던 라틴계는 흑인들과의 공통분모를 찾아냈고, 그렇게 일부 히스패닉 랩 뮤지션들은 힙합 씬에 자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백인의 경우는 많이 달랐다. 그들이 삶이 순탄치 않고 흑인의 것과 닮아있다고 할 지라도 인종적인 의미에서 백인은 환영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가장 밑바닥의 삶을 경험한 에미넴(Eminem)은 백인임에도 힙합 씬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고, 덕분에 옐라울프(Yelawolf), 맥 밀러(Mac Miller)와 같은 후발주자들도 씬에 등장할 수 있었다.
이런 모든 현상은 백인 랩퍼 에미넴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가 백인 랩퍼로서의 성공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은 단연 비스티 보이즈(Beastie Boys) 덕분이었다. 에미넴과 차이점이 있다면, 비스티 보이즈는 흑인 영역에 뛰어든 뮤지션들이 아닌 힙합 문화의 개척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백인의 영역인 록 스타일을 접목시켰던 1986년 데뷔작 [Licensed To Ill]을 시작으로 2011년 작품 [Hot Sauce Committee Part Two]까지 이들은 시대와 함께 발전하면서도 다양한 음악을 힙합에 포괄하여 담아내는 일관된 스타일을 고수해왔다. 가장 최근작인 [Hot Sauce Committee Part Two]은 아담 요크(Adam Yauch)의 암 투병 때문에2년이나 지연된 후 발매된 끝에 공개된 작품이었다. 그러나 아담 요크는 앨범이 공개되고 만 1년이 차지 못한 상황에서 세상을 떠나버렸다.
* 비스티 보이즈는 2012년 8월에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는데, 힙합 그룹으로는 런 디엠씨(Run-D.M.C.)와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앤 더 퓨리어스 파이브(Grandmaster Flash & the Furious Five')에 이어 세 번째로 이름을 올린 기록이다.
* 비스티 보이즈는 그래미 어워즈와 MTV VMA에서 각각 3회, 그리고 4회 수상했다.
Donald "Duck" Dunn
1941.11.24 ~ 2012.5.13
남부 소울 음악의 채취를 유지하면서도 대중성까지 갖췄던 멤피스 소울이라는 장르가 대중음악이 되는 데에는 도널드 "덕" 던(Donald "Duck" Dunn)의 공이 컸다. 멤피스 소울 밴드 '부커 티 앤 더 엠지스'(Booker T. & the M.G.'s)의 베이스 연주자로 잘 알려진 그 도널드 던 말이다. 도널드 던은 65년도부터 밴드에 합류하게 되었고, 그는 이때부터 다양한 뮤지션들의 세션맨으로 왕성환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 그는 자신의 소속사 스택스(Stax Records)의 뮤지션들의 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오티스 레딩(Otis Redding)의 "Respect"와 "I Can't Turn You Loose", 샘 앤 데이브(Sam & Dave)의 "Hold On, I'm Comin'", 앨버트 킹(Albert King)의 "Born Under a Bad Sign"과 같은 곡에 자신의 베이스 기타 연주를 더하며 명곡의 탄생을 도왔다. 이후에도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와도 활동하며 블루스 계열의 음악에도 크게 공헌했다. 비비 킹(B.B. King)의 연주에 도취되어 음악을 시작한 한 아이는 어느새, 밥 딜런(Bob Dylan),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톰 페티(Tom Petty)와 같은 슈퍼스타들과 함께 무대에 설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이런 화려한 경력을 쌓았던 도날드 던도 운명을 피해갈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안타깝게도 그는, 과거 밴드 동료였던 스티브 크로퍼(Steve Cropper)와 소울 뮤지션 에디 플로이드(Eddie Floyd)와 함께하던 투어 도중, 도쿄에서 70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 도널드 "덕" 던의 밴드 '부커 티 앤 더 엠지스'는 1992년도에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으며 2007년에는 그래미 어워즈의 "Lifetime Achievement" 부문을 수상했다.
Chuck Brown
1936.8.22 ~ 2012.5.16
펑크(Funk)의 하위 장르인 고고(Go-Go)는 워싱턴 D.C.에서 발생된 장르로 비록 당대의 여타 흑인 사운드에 비해 대중성은 적었지만, 재즈의 싱코페이션을 빌려와 스윙감을 극대화한 사운드는 고고만의 개성이라 할만했다. '고고의 대부'로 불렸던 척 브라운(Chuck Brown)는 장르를 대표했던 인물임에 동시에 고고의 개척자로 자리했다. 그의 밴드 소울 서쳐스(The Soul Searchers)와 발표한 "Bustin' Loose"는 그가 발표한 곡들 중 가장 히트작이었는데, 알앤비 차트 4위 그리고 싱글 차트 34위에 랭크되었던 곡이었다. 고고의 장르 특성상 음악사에 큰 획을 긋지는 못했지만, 특유의 그루브와 비트감을 앞세운 고고는 디스코를 포함한 여러 흑인음악 장르와 함께 힙합 음악의 탄생에 자양분이 되었다. 비록 대형 슈퍼스타의 삶을 살진 못했지만 고고 역사에서 주요한 위치에 있었던 척 브라운은 폐렴을 앓다가 7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Donna Summer
1948.12.31 ~ 2012.5.17
해당 장르의 영역 내에서 큰 성과를 이뤄낸 아티스트에겐 '~의 왕', '~의 아버지' 등의 수식어가 붙기는 하지만 너무 빈번하게 사용되어 이제는 그것들에게서 예전만큼의 감흥을 찾아내긴 힘들다. 그럼에도 '디스코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의 주인공 도나 서머(Donna Summer)에게 이런 별칭은 그 어떠한 과장도 없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70년대의 디스코 시대에 히트 싱글을 발표한 뮤지션들은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은 원히트 원더(One-hit wonder)였을 뿐이었다. 이에 반해 도나 서머는 꾸준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70년대 중반부터 자리를 잡아가던 그녀는 디스코 문화의 정점이었던 79년에 들어서는 넘버원 싱글을 무려 3곡이나 배출하는 대성공을 이뤄낸다. 같은 해 발표한 두 개의 싱글도 각기 2위와 4위에 올랐으며, 해당 곡들이 수록된 앨범 [Bad Girl]과 히트곡들을 모은 베스트 앨범이 모두 앨범 차트 1위에 등극하는 놀라운 성공을 달성한다. 그러나 80년대가 시작되면서 빠르게 진행된 디스코의 몰락은 그녀에게도 치명적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유연하게 80년대의 주류였던 뉴 웨이브(New Wave)와 팝 록(Pop Rock) 흐름에 합류했고, 90년대에 들어서는 팝음악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흑인 음악의 흐름과 함께 음악 커리어를 이어갔다. 단순히 연명의 수준이 아니었다. 그녀의 음악은 싱글 차트와는 다소 괴리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댄스 싱글 차트에선 넘버원 기록을 이어가고 있어갔다.
2008년에는 팝이라는 이름 아래 흑인 음악을 포함한 다양한 대중음악 장르를 포괄한 [Crayons]를 발표했고,이것은 그녀의 마지막 정규 앨범이 되었다. 물론, 그녀가 음악 활동 자체를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앨범을 준비하고 있었고, 앨범에 실릴 예정이었던 싱글 "To Paris With Love"를 댄스 차트 넘버원에 올리는 등의 성과를 기록하고 있었다. 과거의 모습과 새로운 모습을 모두 보여주겠다던 도나 서머의 의지는 흡연으로 인한 폐암을 이겨내진 못했다.
* 도나 서머는 2013년에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정될 예정이다.
* 도나 서머는 그래미상을 5회 수상했다.
Robin Gibb
1949.12.22 ~ 2012.5.20
로빈 깁(Robin Gibb)이 속한 밴드 비지스(Bee Gees)에 대한 이야기는 록의 역사에서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백인의 영역인 록과 흑인의 영역인 소울의 교차점이 위치했던 70년대의 디스코 역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밴드였던만큼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듯하다. 록의 전성기였던 60년대부터 꾸준히 자리해온 비지스는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다양한 음악 장르를 수용하기 시작했고, 그 정점은 흑인음악을 전방에 앞세운7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70년대는 흑인들의 영역이었던 디스코가 빠르게 대중음악 시장의 중심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던 때였다. 비지스는 이를 빠르게 수용했고, 77년도에 들어서는 타바레스(Tavares), 쿨 앤 더 갱(Kool & the Gang), 트램스(The Trammps), 케이씨 앤 더 선샤인 밴드(K.C. & the Sunshine Band), M.F.S.B.와 같은 다양한 흑인 펑크/디스코 밴드와 함께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의 사운드트랙 앨범을 작업했다. 1979년도에는 밴드의 정체성이었던 록보다는 흑인 음악의 영역인 알앤비/소울, 펑크 사운드를 전면에 내세운 앨범인 [Spirits Having Flown]를 앞세워 영미 차트 모두 넘버원을 기록했다. 이 두 장의 앨범의 성과는 비지스, 그리고 로빈 깁이 솔로로 활동하면서 달성한 것들 중 가장 성공적인 것들이었으며, 특히 [토요일 밤의 열기] 사운드트랙 앨범은 미국에서만 1,500만장이 넘게 팔리는 대형 히트작이었다. 비지스와 로빈 깁은2000년대에 들어서까지 정규작을 꾸준히 발매하며 활동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결국 로빈 깁은 암 투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십여 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난 쌍둥이 형제이자 비지스의 멤버였던 모리스 깁(Maurice Gibb)을 따르고야 말았다.
* 비지스는 총 9개의 그래미상을 수상했는데, 그 중 6개는 [토요일 밤의 열기] 사운드트랙 앨범으로 받은 상이었고, 그리고 2개는 과거의 공로를 기리는 " Lifetime Achievement Award"와 전설들에게 전달되는"Legend Award"였다.
* 로빈 깁은 그의 가족에게 한화로 1,640억 원에 달하는 유산을 남겼다.
Ravi Shankar
1920.8.7 ~ 2012.12.11
인도의 전통 악기 시타르 연주에 있어 전설적인 위치에 있었던 라비 샹카(Ravi Shankar)는 자신의 장르 음악뿐만 아니라 팝 음악 전반에 걸친 다양한 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라비 샹카가 가장 잘 알려진 계기는 무엇보다도 비틀즈(The Beatles)의 조지 해리슨 덕분이었다. 인도의 문화에 심취해 있던 조지 해리슨은 라비 샹카를 만나면서 비틀즈 음반에도 시타르 소리를 삽입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자신의 솔로 앨범이자 사운드트랙 앨범이었던 [Wonderwall Music]엔 인도음악 록 퓨전 음악으로 채우기까지 이른다. 아쉽게도 라비 샹카와 흑인 음악과의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지만, 라비 샹카의 음악이 샘플링된 사례는 있으며, 대표적인 것으로는 이솝 락(Aesop Rock)의 "Basic Cable"가 있다. 라비 샹카는 92세의 일기로 세상을 달리했다.
* 라비 샹카는 3개의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 라비 샹카는 재즈/팝 뮤지션 노라 존스(Norah Jones)의 아버지로 잘 알려져 있으며, 전설적인 색소폰 연주자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은 그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라비 콜트레인(Ravi Coltrane)이라 지었다.
Fontella Bass
1940.7.3 ~ 2012.12.26
지금의 젊은 층에겐 비교적 덜 알려진 폰텔라 베이스(Fontella Bass)는 60년대의 소울 뮤지션으로, 앞서 에타 제임스를 소개하면서 언급했던 체스 레코드 소속이었다. 그녀의 커리어는 동료 소울 뮤지션 바비 맥클루어(Bobby McClure)와의 듀엣으로 시작되었다. 이 둘의 첫 작은 "Don't Mess Up a Good Thing"으로 알앤비 차트 5위에 오르는 성과를 이뤄냈다. 이어 발표한 "You'll Miss Me (When I'm Gone)"의 상업적인 성공은 앞섰던 곡에 비해 싱거웠지만, 여전히 흥미로웠다. 곡의 드럼은 어스 윈드 앤 파이어(Earth, Wind & Fire)의 리더 모리스 화이트(Maurice White)가 담당했으며, 백업 보컬리스트 중 한 명은, 어린 나이의 미니 리퍼톤(Minnie Riperton)이었다. 어쨌든 폰텔라 베이스의 성공을 감지한 체스 레코드는 곧바로 폰텔라 베이스를 솔로로 데뷔시켰다. 시작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데뷔 앨범 [The New Look]의 수록곡 "Rescue Me"는 알앤비 차트 넘버원에 등극했다. 이듬해 발표한 "Recovery"도 장르 차트 13위까지 오르는 성과를 내긴 했지만, 그 이후에는 별 다른 히트를 성공시키지 못하며 그녀의 이름은 알앤비 씬에서 빠르게 잊혀졌다. 그리고 우리가 그녀의 이름을 다시 접할 수 있었던 계기는 안타깝게도 그녀의 사망 소식이었다. 2005년도부터 수차례의 뇌졸중을 겪었던 그녀가 결국 크리스마스 바로 다음 날에 합병증으로 운명을 달리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사망을 더욱 안타깝게 만든 것은 이를 전한 국내의 메이저 매체가 두 군데 정도에 불과했다는 것이었다.
글 | greenplaty




Never Forget.. Especially Ma Another Heroine Whitney & Adam Of Beastie. Rest In Heaven..
최초의 랩메탈 밴드의 한 주축이였던 아담요크 슬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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