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재즈사를 다뤘던 The Roots of Korean Jazz는 두편으로 끝을 내려고했으나
2편 내용중 일제강점기 재즈 댄스홀에 대하여 설명을 드렸던 부분이 보충설명을 드려야할듯해서 이렇게 번외편으로 준비를 하였습니다
일단 1919년 4월 13일 해방이후 당연히 우리 정부가 법적 정통성을 계승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대한민국 건국)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1919년 3월 1일 3.1운동 이후
자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론을 엔진으로 삼아
언론사인 NEW YORK TIMES를 비롯하여 국제사회가 일본을 압박해오고
3.1운동 이라는 거대한 이름을 왜놈들이 피로 더럽히는것을 지켜본 우리 민초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자
위협을 감지한 왜왕은 전임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처럼 군인 출신이긴 하지만
스스로 섬숭이임을 인증하듯 단순 무식하게 무단통치를 하기보다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여우마저도 울고갈 정도의 교활함을 가진 사이토 마코토를 조선 총독으로 보냅니다
사이토 마코토는 조선의 통치수단을 문화통치라고 규정을 하였는데요
쉽게 설명을 드리자면 나치의 괴벨스가 여론을 활용하여 대중을 선동하였다면
일제의 사이코 마코토는 문화를 활용하여 대중을 선동하였다고 생각하시면 이해하시기 쉬우실겁니다
음.. 이젠 그로부터 20년후 프랑스 상황을 설명 드리려고 합니다
1942년 11월 북불(北佛) 지역을 점령중이던 나치 독일이 남불(南佛) 지역까지 점령을 하고
군조직의 리더와 국가의 리더는 다르다는것을 증명 하듯
프랑스인들에게 제 1차 세계대전 영웅이었던 Philippe Pétain을 원수로 프랑스 나치 괴뢰정부가 탄생합니다
문화를 통치수단으로 활용하였던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기점으로 우리나라는 재즈 댄스홀이 법으로 금지된 상황임에도 본보기식 단속을 제외해놓고는 암묵적으로 허용을 하였지만
하세가와 요시미치처럼 단순 무식 군바리였던 나치 괴뢰 Vichy 정권의 원수 Philippe Pétain은 당시 유행하던 미국에서 건너온 스윙재즈를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일체 금지를 시켜버립니다
이 때문에 비밀리에 음지로 숨어들어가 불법 댄스홀에서 스윙 재즈 음악에 맞춰 춤을 추게 되었고(discotheques의 시작) 아무리 음지에서 운영한다해도 밴드 편성으로 시끄럽게하게 되면 단무지 Vichy 정권의 고막안으로 들어갈것이 불보듯 뻔하였기에 disque-jockey들이 턴테이블로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었고
이게 프랑스에서 계속 유지가 되다가 1960년대 이르러서 Rock N Roll과 R&B가 만나 Disco를 탄생시키게 되었고요
1977년 John Badham 감독의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 (Saturday Night Fever)' 대히트를 하면서 Disco 열풍은 미국을 전초기지로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키게 됩니다.
아! ↑↑ 위에있는 1933년 2월 18일자 조선일보 자료를 보시면 일제강점기에도 우리나라도 턴테이블을 틀어놓고 춤을추는 모습을 알수있는데요 말씀드렸다시피 재즈 댄스홀을 총독부가 암묵적으로 허용을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건 일종의 친일 재력가 및 고위층들의 같잖은 허세라고 정리하는게 맞는것 같습니다
글 두편을 완성시켜놓고도 찝찝한 마음을 달랠길이 없었는데 뭔가 후련해지네요!
올해 국외 게시판에 게시하려고 하였던 쿠바 재즈에 관한 글 [The Jazz of Passion] - 제 1편 - Cuban Jazz, 영원한 자유를 꿈꾸노라와
스페인 재즈에 관한 글 [The Jazz of Passion] - 제 2편 - Flamenco Jazz, 정열의 검은 불꽃은 일 때문에 내년을 기약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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