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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oots of Korean Jazz] - 제 2편 - 1세대 재즈 뮤지션.. 그들의 열정, 의무 , 인생

title: Wiz Khalifadecadent2015.06.26 17:07조회 수 6476추천수 7댓글 1

prologue

 

본문을 작성하며 정말 우여곡절이 많았는데요ㅠ 

 

URL : http://hiphople.com/kboard/3803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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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에 The Roots of Korean Jazz 주제를 정하고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던 1편 1930년대 한반도에 상륙했던 재즈를 4월에 게시를 하였고 


그 다음편을 쓰려고 자료를 모으고 작성하던 도중 

국외게시판에도 옛날 재즈 글 두편 정도는 올리는게 공평한거 같아서 The Jazz of Passion으로 주제를 정하고 자료를 모으고 작성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개인적인 일로 시간이 촉박하였기에 밀어붙여서 세 편의 글을 5월 말에 완성을 하였으나 


너무 급하게 완성시킨게 화근이었던것인지 여러번 읽어본 결과 세 편 다 헛점 투성이였고 


이대로 게시한다면 제 성격에 1편처럼 게시하고 난 후 다시 자료를 헤집고 수정하는 귀찮은 사태가 6배 이상으로 벌어질것이 불보듯 뻔하였기에 


시간도 없고ㅠ 올려야하나 말아야하나 깊은 고민에 빠졌었습니다 


그러던도중 웃어야 할지 ㅋㅋ 울어야할지ㅠ 제 상황이 안좋아지는 관계로 시간이 아~주 넉넉하게 생겨서 세 편의 글에겐 다행이고 저에겐 멘붕인 사태가 발생하여 


세 편의 글을 싹 다 지우고 처음부터 천천히 차근차근 다시 검토하고 작성하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본문은 1편처럼 큰 그림을 그려놓고 핵심적인 역할을 하셨던분들에 관한 자료로 중심을 잡는 기본 틀은 유지를 하였고요 


설명은 1편보다 훨씬 더 디테일하게 풀어놓았으나 시기를 나누어 놓았기에 


엘이 회원분들께서 읽으실때 지저분하다고 느끼시지는 않으실거라고 판단됩니다. 

 

Le premier chapitre : 건국 이후 국내 대중음악사의 첫 패전 

 

일단 1960~1970년대 우리나라 재즈에 관한 이야기로 들어가기전에 해방직후의 우리나라 음악계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것같습니다 

 

보다 쉬운 이해를 위하여 비유에 있어서는 포괄적인 표현들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재즈 밴드인 Korean Jazz Band 출신으로 스윙 재즈를 기반으로 하는 최초의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최초의 레코드사 레코드사 오케 레코드를 설립하셨고 5대 레코드사의 경쟁에서 태평레코드사와 1~2위를 다투던 

 

오케레코드의 사장 이철 선생은 1944년 만주에서 돌아가시고 

 

우리나라는 1945년 해방이되었고 

 

그 다음해인 1946년 스윙 재즈의 시대는 막을 내리기 시작하였으며 

 

같은 시기 국내에는 탱고나 룸바, 차차차 같은 라틴 계열의 음악이 들어오고있었고 

 

지금 트롯의 원형이라고 볼수있는 엔카에서 기원한 트롯이 해학적이고 풍자적 가사로 일제 치하 우리 민초들의 간지러운 부분들을 긁어주던 "조선 쨔스" 만요(漫謠)의 자리를 밀어내고있었고 

 

해방직후 조선 쨔스 만요(漫謠)의 귀재 김해송 선생님은 오페라와 성악과 뮤지컬에 심취하셔서 KPK악극단을 조직하여 활동을 하셨으며 

 

6.25 전쟁 도중(1950년 6월 25일 ~ 1953년 7월 27일) 실종되시고(나중에 사망하신것으로 확인이되었지만 6.25전쟁 직후 기록에는 전쟁도중 실종되신것으로 기록이 되었다고합니다.) 

 

↑↑ 이 시기의 우리나라 음악계의 상황을.. 전시 상황에 비유를 하자면 

 

일제강점기 말부터 우리나라 음악계의 전방에는 만요(漫謠) 세력이 있었고 

 

후방에는 속칭 밤무대 밴드 세력이 있었는데

 

TIP! 

 

밤무대 밴드.JPG
1편 댓글들중 긴기님 댓글에 답글로 약간 설명드렸던 내용인데 

 

원래 1편에 1930~1940년대 밤무대에서 활동하던 재즈 연주자들에 관한 내용도 포함시키려고하였으나 

 

사진자료도 없고 녹음자료도 없고 전부 구전으로 전해져온 자료들이었고 

 

크로스 체크를 하던 도중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자료들이었고 

 

결정적으로 1편의 자료 배치도 안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내용이라서 포함시키지 않게되었습니다 

 

2편에서 해방직후의 대중음악계의 상황을 설명드리기 위해서는 그분들에대해 꼭 설명을 해야할것같은데 자료들에 문제가 많고 고민에 고민을한 끝에 

 

그분들의 활동 무대였던 재즈 댄스홀에 관한 자료들은 여러번 크로스 체크를 해본 결과 상당히 어그리먼트하다고 판단하였기에 일제강점기 재즈 댄스홀에 대한 설명을 드리려고합니다 

 

 

일각에서는 일제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다는 명목으로 댄스홀을 금지시킨것과 1937년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는 탄원서와 당시 전시체제였던것을 근거로 


asasdsd.JPG


일제말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재즈 댄스홀들은 사실상 허구이고 해방 이후에 생겨났다는 주장을 하곤하는데요 

 

시대적인 상황을 보자면 

 

 

1931년 만주사변 직후부터 이미 일제에게 강점되어있던 우리나라는 전시체제로 들어가게되었고 

 

현재의 북한지역에 대한 공업화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중일전쟁.JPG


총독부 경무국에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는 탄원서가 날아온 해인 1937년 중일전쟁부터는 아예 그냥 불도저처럼 밀어붙입니다 

 

↑↑ 이게 60년대까지도 우리나라가 북한에게 경제적으로 뒤쳐져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이고요

 

(자유신문 1945년 10월 07일자 2면) 

"한 집 건너 술집, 두 집 건너 「딴스홀」 「짜스」 소리에 귀가 압흘 지경" 

 

↑↑ 위 자료는 1945년 10월 7일자 자유신문의 내용인데요 당시 서울에 재즈 댄스홀들이 굉장히 많았던것을 알수가있습니다 

 

재즈 댄스홀들이 해방이후 생겨났다라고하는 주장하시는분들의 말이 맞다면 60년대까지도 우리나라가 북한보다 경제적으로 뒤쳐있었는데 1945년 8월 15일 해방을했는데 10월 07일 무수히 많은 재즈 댄스홀들이 존재했던것이 가능할까요? 일제로부터 해방이되자 사람들이 신이나서 막 흥이 넘쳐서 뚝딱 뚝딱 재즈 댄스홀들을 짓고 연주를하고 그에 맞춰 춤을 춘것일까요?;;;

 

아무리 서울이라고해도 해방이된지 두달도 안되었는데 무수히 많은 재즈 댄스홀들이 존재하였다는것은 특히나 남한지역 상황에서는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이전부터 존재해왔다고 봐야합니다 

 

"카페 '바론'의 하룻밤. 축음기에서 재즈가 황소 소리같이 흘러나온다. 웨이트리스의 어깨가 씰룩씰룩, 엉덩이가 꿈틀꿈틀. 전기 장치해 놓은 인형과 같이 보기 싫은 육혼(肉魂)의 율동이 이곳 저곳에서 벌어진다" 

(「모던 복덕방」, 『별건곤』, 1930.1) 

 

"술 취한 '재즈'가 '카페' 유리창의 자줏빛 휘장을 헤치고 거리로 향하여 범람했다." 『김기림전집6』

「도시풍경1·2」(조선일보 1931.2.21) 


 "재즈 댄스. 이것의 원산지는 '양키-국'이다.(……) 그들의 댄싱 제스처를 보라. 가급적이면 상체(흉부)를 뒤로 젖히고 하체(복부)를 앞으로 내밀지 않는가. 그렇지 않으면 상하체의 밀착이다. 이 얼마나 공연한 음란스런 자태냐, 이것이 에로의 백퍼센트적 발산이란다. 그러한 자세로 막 틀고 함부로 뛴다. 그런 나머지에는…? 그들은 헤매다가 거닐다가 취하다가 춤추다가 그리고는 몽롱호텔로! 사라진다. 스피드, 기차, 자동차, 비행기. 이것은 에로 그로의 발산장소를 이동하며 변환하는 기관이다. 타서 시작하고 내려서 마친다." 

오석천「모더니즘희론」(67 ?, 1931 年 6 月) 


 

(조선일보 1933년 2월 18일자)


제가 가지고있는 1930년대 재즈 댄스홀에 관한 자료중 독자가 글을 읽을때 이미지화 시킬수있는 기사들과 기록으로 고른것이고요 직접 찾아보시면 아시겠지만 일제강점기에 재즈 댄스홀에대한 자료들은 훨씬 더 방대합니다 

 

1880_2220_1511.jpg

결정적으로 재즈 댄스홀들은 일제와 동맹이었던 나치 치하의 독일에도 존재했었고요 ㅋㅋㅋ 


극혐(極嫌).JPG


따라서 일제가 댄스홀을 금지 시킨것은 사실이긴하지만 총독부 경무국애들이 지들 눈에 띠껍게 보이는곳이나 본보기로 가~~~~~~~~~끔 한번씩 단속터는 정도였.. 그러니까 쉽게 얘기해서 그냥 오늘날의 집창촌처럼 법으로 금지된 상태로 경성에서 운영이 되고있었다고 생각하시면 이해하시기 쉬우실겁니다.

 

만요(漫謠) 뮤지션들과 밤무대 밴드 뮤지션들이 무기로 사용하던 스윙 재즈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있었고 

 

라틴 계열의 음악과 엔카를 기반으로한 트롯이 밀고들어오는 상황에 

 

전방의 총 지휘를 맡고 계셨던 이철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전방의 선봉부대를 이끌던 김해송 선생님은 자신의 손에 가장 익숙한 무기인 스윙 재즈를 내려놓고 오페라와 성악 뮤지컬 음악을 손에 쥐고 자신의 병사들에게도 자신과 같은 무기로 무장을 시킵니다 

 

그러고는 외부 상황때문에 김해송 선생님마저 돌아가시게되고 

 

전방의 지휘 시스템이 붕괴되었고 만요(漫謠) 세력은 궤멸이 됩니다 

 

만약에 후방이 튼튼하였다면 전방이 궤멸되었더라도 밀고들어오던 유행과 맞서 싸우거나 스윙 재즈가 유행하던 시절 우리의 민요(民謠)와 결합시켜 만요(漫謠)를 탄생시켰던것던것처럼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낼수있었을텐데 아무래도 후방에있던 세력이 속칭 밤무대 밴드들이다보니 목적 자체가 유흥이었기때문에 음악적 고집을 내세운다거나 새로운것을 창출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라틴 계열의 음악과 엔카를 기반으로한 트롯은 전방의 만요(漫謠) 세력을 궤멸시킨것보다 훨씬 더 손쉽게 후방의 밤무대 밴드 세력을 무너뜨렸고(어쩌면 이것이 오늘날의 음악인들에게 언더그라운드가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 알려주는 교훈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일제강점기말부터 검은 가락을 연주하던 악사들은..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개박살이 나게 되었고(개박살이라는 표현을 쓸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 분들이 2장부터 설명드릴 그 다음 세대의 재즈 뮤지션들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근거 자료가 없고 근거로 추정할만한 자료 조차도 없고 음악 스타일도 달랐습니다 전자는 집시 민요와 재즈를 결합시킨 집시 재즈처럼 재즈를 우리 민요(民謠)와 결합시키려는 경향이 굉장히 강헀는데요 후자는 더 오리지널 했습니다.) 

 

라틴계열의 음악과 트롯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심성락 선생.JPG


↑↑ 그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세대의 뮤지션중에 대표적인분이 올해 80세이신 아코디언 연주자 심성락 선생님이십니다. 

 

Le deuxieme chapitre : 미8군쇼, 다시 살아난 검은 불씨 

 

 

1950년대 초 

 

스카라 극장.JPG


1953년 봄 충무로 스카라 극장 재즈 콘서트 

 

Benny Goodman의 Sing Sing Sing이 극장안에 울려퍼지고 

 

 

스물 셋의 드러머가 드럼을 치며 노래를 부릅니다 

 

이후 1959년부터 1961년까지 동남아 순회공연을 시작하시고 이후 홍콩에서 '프로페셔널스'라는 이름의 재즈밴드의 밴드 마스터로 계시다가 말레이시아와 태국을 거쳐 1976년 영구 귀국하셔서 국내 활동을 이어가신 

 

 

故최세진 선생님 Sing Sing Sing 연주 및 인터뷰

 

07'04 / FLY TO THE MOON - Vocal - 故최세진 선생

 

최세진 드럼 1967년 모델 돌아가실때까지 연주.JPG
(사진속 드럼은 1967년 모델로 故최세진 선생님께서 마지막 공연때까지도 연주를하셨다는 드럼입니다.) 

 

故최세진 선생님이셨습니다 

 

1062296517.jpg


같은해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이 되고 

 

1950년대 중반 


2년후인 1955년 한국 대중음악의 진보하는데 있어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던 미8군이 용산에 자리를 잡았고 


용산을 비롯해 의정부,동두천,춘천,원주,마산 등 미군부대가 있는 지역에서는 부대마다 클럽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하루 먹고살기 힘들었다던 그 시절 

 

 

 

미8군쇼단에 용인에서 올라온 19살의 한 소년이 밴드 보이로 쇼단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습니다

 

Miles Davis & John Coltrane - Straight, No Chaser (1958) 

 

중학생때 밴드부 활동을하다가 즐겨듣던 라디오 방송인 AFKN을 통해 Miles Davis과 John Coltrane의 Straight, No Chaser를 듣고난 후 무작정 악기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아 집을 떠났다는 이 당찬 소년은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밤마다 혼자 사과 궤짝에 탁구 채를 달아서 자신만의 드럼을 만들어 밤마다 혼자 드럼을 연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소년에게 너무나 큰 기회가 찾아옵니다 

 

평소 성실히 연습하던 그를 눈여겨보던 쇼단의 단장이 밴드의 드러머로 오지않겠냐며 소년에게 스카웃 제의를 합니다 

 

제대로된 드럼세트하나 없던 소년은 한 달치 월급을 미리 가불받아서 당시 조약했던 국내 드럼세트를 겨우 마련하게 됩니다 

 

19살의 소년에게 너무 큰 기회가 주어졌던것일까요? 

 

악보가 귀했던 시절이라 연습할 수 있는 곡에 한계가 있었던 19살의 가난한 소년 드러머에겐 미8군쇼의 경쟁은 너무 가혹했고 

 

이틀만에 소년은 밴드에서 해고를 당합니다 

 

다만 소년의 노력을 알고있던 쇼단의 단장은 가불했던 월급도 돌려받지않았고 미리준 월급으로 산 드럼으로 연습을 많이 하여 훌륭한 연주자가 되라며 조언을해줬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년후 그는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뒷편 당시 꽤나 인기 있던 무대 위에 드럼 두 세트를 놓고 두 명의 드러머가 번갈아 서로의 실력을 겨루는 크라운 장 전국 드럼 경연 대회에 구경을 하러갑니다 


국내 5대 드러머라 불리던 최준석, 박철, 양철, 양인환, 조상국을 비롯하여 내로라하는 드러머들이 모두 참가하였는데요 


의도치 않게 그도 대회에 참가하게 됩니다 


국내 5대 드러머중 최준석씨는 그가 처음 집을 나와 밴드 보이로 처음 취직한 쇼단의 단장으로 그에게는 첫 드럼 스승이 되는 분이셨습니다 


무대위에서 그와 그의 스승이 대결을 하게 되었고 

 

스승은 그에게 첫수를 양보를 합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게 됩니다 

 

스승의 드럼 스킬을 어깨너머로 훔쳐보며 부단한 연습을 해왔던 그는 스승의 대표적인 스킬을 먼저 연주하며 치고 나갔고 


자신이 연주할 것을 그에게 빼앗긴 스승은 차마 같은 연주를 하지는 못하고 대한민국 5대 드러머라는 명성에 걸맞지 못한 연주를 할 수밖에 없었으며 

 

상대적으로 신예 드러머 그의 연주가 빛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관객의 박수를 한몸에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오던 그에게 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자신의 밴드와 함께 해볼 생각 없냐며 묻습니다 

 

바로 당대 최고의 색소포니스트이자 재즈를 기반으로하던 작곡가셨던 故이봉조 선생님이셨습니다 

 

이봉조 악단.JPG

이후 그는 이봉조 악단과 

 

길옥윤.JPG


길옥윤 ‘재즈 올스타’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수사반장 오프닝 영상 

 

70~80년대 인기 드라마였던 수사반장의 테마곡을 만들고 

 

 

1978년에는 트리오로 라틴 팝과 재즈를 결합시킨 [혼자 걷는 명동길]을 발매하는데요 

 

 

류복성 - 수사반장, EBS 스페이스 공감 800회 특집 

 

위에 앨범 커버 사진에 적혀 있다시피ㅋ 한국 라틴재즈의 거장 류복성 선생님이셨습니다.(우회적으로 표현하자면 굉장히 유쾌하신 분이시고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괴짜스러운 분이십니다) 

 

1950년대 후반

 

몇년후 어느 미군부대 재즈 공연 무대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재학중이던 알토 색소포니스트가 등장하는데요 

 

어린시절에는 일본에서 귀국하신 후에는 바다 건너 들어온 일본방송을 통해 재즈를 접하셨고 중고등학생시절에는 재즈음악을 채보하고 편곡하는 과정을 거쳐 자신의 음악을 담금질 해오시다가 1950년대 중후반 미군부대 무대에 오르셨으며 

 

1960년대 중후반부터 1970년대 국내 대중음악계에 소울/훵크 음악과 락 음악 포크 음악이 3강 체제로 자리를 잡는 바람에 동년배의 재즈맨들이 해외로 떠나거나 방송국을 기웃거리던 시기에도 한국 재즈의 명맥을 지키셨고

 

 

이판근과 Korean Jazz Quintet - 아리랑 (1978) 

 

1978년 한국 최초의 비밥 앨범인 [Jazz : 째즈로 듣는 우리 민요, 가요, 팝송] 발매하셨으며 

 

80년대 중반에는 연주를 접으시고 곡 작업과 은평구 기자촌에서 후배 양성에 몰두하셨으며 

 

 

1989년에는 한국의 빌리 할리데이라 불리시던 박성연 선생님의 [박성연과 JAZZ AT THE JANUS VOL.1] 앨범의 편곡을 맡으셨던 

 

 

한국 재즈의 거목(巨木) 이판근 선생님이셨습니다

 

TIP! 

 

01.류복성 선생님이나 

 

군복무 시절 군악대에서 트럼펫을 본격적으로 배우시고 1964년에 미8군 공연을 시작하셨고 

 

1997년 일본에서 [FREEDOM]을 발매하셨고 

 

 

4년전에 [A TRUMPT IN THE NIGHT SKY]를 발매하셨던 

 

 

최선배 - I Remember Clifford

최선배 - Over The Rainbow 

 

1세대 재즈 트럼페터 최선배 선생님의 인터뷰를 보면 알수있듯이 

(최선배 선생님 2014년 국민일보 인터뷰 내용中..) 

 

원로 재즈 뮤지션들 열분중에 아홉분은 재즈를 접하게된 매체가 


 

주한 미군 방송 AFKN(American Forces Network Korea)이었습니다

 

신중현과 The Men - 아름다운 강산 (1972년) 

 

1972년 신중현과 The Men의 아름다운 강산에서 들리는 중저음의 목소리의 주인공이자

 

피타입 - 수컷 (THE VINTAGE, 2008년 발매) 

 

2008년 피타입 2집 [THE VINTAGE] 수록곡 수컷에 피쳐링을 하셨던 

(왼쪽에 계신분이십니다.)

 

원로 R&B 뮤지션 박광수 선생님께서도

 

박광수 2007년 음악취향 Y 인터뷰 내용中...JPG
(박광수 선생님 2007년 음악취향 Y 인터뷰 내용中..) 

 

AFKN을 통해 블루스 음악을 접했다고 하셨고요 

 

그냥 AFKN은 미국에서 유행하는 음악을 가장 빨리 접할수있는 유일한 매체였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심지어는

 

쏠스캡 2007년  힙플 인터뷰 내용中...JPG
(쏠스캡 2007년 힙플 인터뷰 내용中..) 

 

DJ Soulscape 


 


D.O도 힙합을 접했던 매체가 AFKN이라고 할정도니까요 

 

일본에서 사실때는 그렇다고 쳐도 귀국하신후에도 사시던곳에 미군부대가 있었음에도 일본을 통해서 재즈음악을 접하신 이판근 선생님은 굉장히 독특한 케이스라고 볼수있습니다. 

 

02. 

 

 

5년전에 이판근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왼쪽부터 

 

손성제 - 색소폰 

 

오정수 - 기타 

 

남경윤 - 건반 

 

김인영 - 더블 베이스 

 

이도헌 - 드럼 

 

↑↑↑ 이 구성으로 


A RHAPSODY IN COLD AGE.JPG

[A RHAPSODY IN COLD AGE]라는 이판근 선생님 오마쥬 앨범이 발매되기도 했었습니다

 

 

 

 

03.본문 작성을 위해 자료들을 모으고 검토하던 도중 이판근 선생님께 사사를 받은 뮤지션들 이름중에 

 

사랑과 평화 이철,봄여름가을겨울 이름이 있는건 좌측은 훵크이고 우측은 퓨전 재즈이니 그다지 뭐 놀랄만한 일은 아니였는데 

 

포크 뮤지션 박학기,영화음악가 조성우,심수봉,인순이,윤수일 등의 이름이있어 되게 의외였습니다. 

 

04.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라서 쓸까말까 고민하다가 쓰는건데요 

60~70년대가 일제강점기 만요(漫謠)부터 따져도 재즈라는 음악이 영향력 측면도 그렇고 사운드적으로도 한국 재즈의 완성이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성장이된 시기이기도 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재즈를 단순히 미국 음악이 아닌 독자적인 연주 양식을 가진 구체적인 음악이라는 인식을 갖기 시작한 시기이기도해서 많은분들이 60~70년대를 원로 재즈 뮤지션들의 전성기였다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원로 재즈 뮤지션들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60년대 중후반 위에서 설명드렸듯이 국내 대중음악계에 소울/훵크 음악과 락 음악 포크 음악이 3강 체제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기던 시기이기에 재즈 음악이 끼어들 자리고 없었고 

 

운영진에 문의해보니 국내 정치 관련 게시물의 작성을 일체금지하고 있고 국내 정치 내용이 들어간 게시글이 올라올 경우 이유를 불문하고 무통보 삭제 및 회원 경고 조치가 가해진다고해서 무섭긴하지만 ㄷㄷ; 70년대는 많은분들이 아실만한 어떤것 때문에 무분별한 외래문화를 금지한다는 명분으로 누군가가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에 철퇴를 휘둘러대던 시기였기 떄문에 한국 재즈는 음지에서 움직일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원로 재즈 뮤지션들의 전성기를 그분들의 젊은시절 국내 대중음악계의 상황을 놓고 판단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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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1일 배우 박근형 선생님 스포츠 조선 인터뷰 내용中..) 

 

1950년대부터 

 

 

Louis Armstrong이 내한을 하고 

 

 

Nat King Cole이 현재 세종문화회관의 전신인 서울문화회관에서 공연을하고

 

Nat King Cole의 아리랑 

 

아리랑을 불렀던 1960년대 중반까지라고 보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Nat King Cole이 공연이후 구슬프고 섬세한 매력의 아리랑에 반해 아리랑의 앨범 취입을 기획하였는데 귀국 후 폐암 진단을 받고 입원하고 70일 만에 사망하게되어서 녹음 자료로만 남게되었는데 남궁연이 아리랑을 주제로한 영상 공연을 준비하던중에 Nat King Cole이 부른 아리랑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고 수소문 끝에 한겨레 아리랑 연구소 김연갑 상임이사가 소장중인 LP를 전달 받아서 디지털로 복원하였고 이 음원이 작년에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최초로 공개되었으며 그 다음에 남궁연의 공연에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1960년대 초중반 

 

1960년대 초반 미8군에 괴짜 드러머가 한 명 더 등장합니다 

 

1946년 중학생때 재즈 밴드를 만들어서 트럼펫을 불었고 

 

1952~1956년 공군 군악대를 거쳐 

 

1961년에 미8군 무대에 오르게 된것인데요 

 



년 후 신중현 선생님과 당시 색소폰 주자셨던 신지철 선생님을 주축으로 

그 외 베이스주자 두 분 이렇게 5인조 재즈 밴드 클럽 데이트를 결성하고 

1968년 신지철 선생님이 베이스로

 

 

ADD 4(애드 훠 당시 발음^^) - 빗속의 여인 

 

우리나라 최초의 록 밴드 애드 훠(Add 4)를 결성 및 앨범 발매를 하였고요 

 

 

1972년 조용필 선생님과 1974년 신중현과 엽전들 멤버가 되시는 이남이 선생님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드럼 솔로로 브러쉬 소리가 나오는 최초의 음반인 

 

 [드럼! 드럼! 드럼! 앰프키타 고고! 고고! 고고! 고고!]를 발매하고

 

김대환과 김트리오 악단 - 꿈을 꾸리(1972) 

 

마치 유목민처럼 자유롭게 여러 음악들을 방랑한후 

 

유년시절부터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하셨고 17살의 나이로 국내 최연소 밴드 마스터가 되셨으며  

 

 

1978년 [드럼! 드럼! 드럼! 앰프키타 고고! 고고! 고고! 고고!]에 세션으로 참여하셨던 

 

재즈 색소포니스트 강태환 선생님과(현재 영국의 Evan Parker 미국의 Ned Rothenberg과 함께 세계 3대 프리 재즈 색소포니스트로 꼽히시기도 하신답니다.) 

 

 

위에서 설명드렸던 최선배 선생님과 함께 재즈 트리오인 강트리오를 결성하여 일본, 독일, 영국 등지에서 활발한 연주활동을 펼치고 이시기를 기점으로 완전히 재즈에 착륙을 하였으며 

 

 

흑우(黑雨)라는 호(號)를 사용하셨던 프리 재즈 뮤지션 故김대환 선생님이셨습니다.(말같지도 않은 드립을 치는게 아니라 故김대환 선생님께서는 장르도 장르이지만 정말 Free하게 활동해오신 재즈 뮤지션이기도 하셨습니다 나중에 故김대환 선생님에 관한 글 한편 게시하도록 하겠습니다.)

 

TIP! 

01. 

 

수록곡 아리랑 

 

↑↑↑ 이 앨범은 신중현 선생님의 첫 앨범인 [히키-申 키타-멜로듸 輕音樂 選曲集]이라는 앨범이고 

재즈를 전면에 내세워 동요와 민요를 연주한 앨범인데요 2년전에 음원이 풀려서 제가 자주 듣는 앨범중 하나입니다

신중현 선생님 이름으로 발매된 앨범중 재즈를 전면에 내세운 유일한 앨범이고 

제가 고등학생때부터 신중현선생님의 빠였고 

The Roots of Korean Jazz라는 주제를 정했을때 가장 먼저 생각났던 앨범이라서 

본문에 꼭 넣으려고 이 앨범에 관한 정보들을 찾는데.. 

"신중현의 첫 녹음앨범으로 미8군에서 함께 일하던 선배들인 더블베이스, 드럼, 색스폰 연주자와 함께 장충동에 있는 최성락의 개인녹음실에서 미군 휴대용 수동 녹음기로 만든 앨범으로 재즈풍으로 편곡된 동요와 한국 민요가 담겨 있다."

 

앨범 인트로덕션 글이 ↑↑↑ 이렇게 적혀있었고 연주는 애드 훠의 연주라고 적혀있던데다가

 


신중현 선생님께서 2006년에 중앙일보에 기고하신 글을 보면 1958년 발매라고 하셨는데 


종합해본 결과 애드 훠는 3인조 '록 밴드'였고 1958년이면 애드 훠 결성 10년 전이라서 너무 의아했고 


The Roots of Korean Jazz와 The Jazz of Passion을 작성하며 

자료 검토 과정에서 크로스 체크를 할때 엇갈리는 자료가 있는것은 익숙헀던터라 


꼭 본문에 넣고싶었던 앨범이였지만 


씁쓸한 마음을 뒤로한 체 그냥 본문에 넣지 않는걸로 결정했는데요 


 

혹시나해서 1편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던 한국 재즈 100년사(박성건 저)를 헤집어 보니 

 


설명드렸던 1962년 김대환 선생님(드럼) 신중현 선생님(일렉 기타) 신지철 선생님(색소폰) 주축으로 두 분의 베이스 주자까지 5인조로 구성된 재즈 밴드 클럽 데이트에 대하여 알게되었고


[히키-申 키타-멜로듸 輕音樂 選曲集]의 인트로덕션 글의 악기 구성과 맞아떨어졌으며 


앨범에 대해 더 알아보니까 이 앨범이 12인치바이닐로 발매되었는데 

12인치 바이닐은 우리나라에서 1961년 이후에 나온 앨범이라서 시기까지 맞아 떨어져서 


이 앨범의 연주가 클럽 데이트의 연주인것을 알수 있었으며 


본문에 밴드 클럽 데이트에 관한 정보와 [히키-申 키타-멜로듸 輕音樂 選曲集]에 관한 정보를 포함시키게 되었습니다. 


02. 

 

수록곡 돌아오라 (Get Back)에서 브러쉬 솔로 부분이 나오는데요

 

[드럼! 드럼! 드럼! 앰프키타 고고! 고고! 고고! 고고!]가 발매될 당시 재즈 밴드외에 드럼에 브러쉬를 사용하는것은(그것도 솔로로) 굉장히 파격적인 연주였습니다 


음악도 재즈로 시작을 하셨고 


기존의 연주 방식 멜로디,코드 진행을 파괴하여 자유롭게 연주하는 프리 재즈의 특징을 생각했을때 


강트리오 이후 프리 재즈 뮤지션의 길을 걸으셨던 김대환 선생님께서 [드럼! 드럼! 드럼! 앰프키타 고고! 고고! 고고! 고고!]를 통해 프리 재즈 뮤지션으로서의 효시를 쏘아 올리신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1년 후 미8군 오디션에 드럼,콘트라베이스,피아노,기타,플룻,클라리넷 2명,바이올린 2명 이렇게 9인조로 구성된 서울 명문 여대 음대생 스윙 재즈 밴드 블루 리본이 오디션에 합격을 합니다

 

5개월간의 연습 끝에 45분 쇼를 구성했다고하는데요 

 

아무리 음대생들이라 하더라도 당시 미8군 오디션을 겨우 5개월간 연습하고 합격을 했다는것은 정말 실력이 뛰어났다고 봐야하고요 

 

1962년부터 1964년까지 활동을 하였고 

 

미8군 쇼 대행업체 중 가장 규모가 컸던 화양 소속이었으며 

 

하얀 원피스에 파란 리본을 맨 의상을 착용한 블루 리본은 인기가 많아서 

 

미군부대가 있는 곳은 다 섭렵하였고 

 

검은 상처의 부루스.JPG


배우 '최은희 선생님'의 영화 검은 상처의 부루스에도 출연을 했다고 합니다 

 

위에있는 블루 리본 단체 사진 맨 왼쪽으로부터 세 번째 여성분이 

 

 

신중현 선생님의 아내분되시는 명정강 선생님이시고 

 

위에 흑백사진은 명정강 선생님께서 보관해오셨던 사진인데 스윙 재즈 밴드 블루 리본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자료라고 합니다. 

 

Le troisieme chapitre : 박성연과 야누스 한국 재즈씬을 지켜온 두 이름  

 

누군가 제게 국내 재즈클럽을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저는 고민 전혀 안하고 

 

이태원 올댓재즈 1976년.JPG

이태원에서 1976년에 오픈하여 현재까지 운영이 되고있는 재즈클럽 올댓재즈와 

 

야누스 1.JPG


2년후 신촌에서 오픈하여 5번이나 클럽을 옮기긴 하였지만 역시 현재까지 운영이 되고있는 재즈클럽 야누스를 추천할겁니다 

 

엘이 회원분들께는 야누스에 대하여 설명을 드리려고하는데요 

 

 

야누스의 사장님이 한국 재즈의 대모라 불리시는 박성연 선생님이 십니다

 

박성연 - Summertime

 

박성연, 임인건 - Estate [20140125 Cafe Hado] 

 

어릴때 미8군 PX에서 일하시던 오빠분이 어느 날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하나 갖다 주셨는데

 

그 라디오로 AKFN을 통해 재즈를 접하셨고 

 

박성연썜 젊은시절.JPG


FB_IMG_1443186393049.jpg

고등학교 졸업하시고 1978년 미8군 오디션에 합격하시면서 재즈 뮤지션으로써의 첫발을 내디디셨고 

 

맥주 홀을 찾아가 공짜로 공연을 해주고도 쫓겨난적도 있으시고 연주를 하는데 왜 계속 연습만 하냐며 항의를 받으실 정도로 

 

재즈를 할 장소도 없고 재즈란 음악이 생소했던 그 시절 

 

야누스 2.JPG


데뷔를 했던 그 해에 야누스를 오픈하신겁니다 

 

먼저 이태원에서 오픈한 올댓재즈와 다른 점은 올댓재즈는 미군들을 타겟으로 오픈한 클럽이었고 

 

야누스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타켓으로 오픈한 클럽이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그 당시는 우리나라 재즈가 음지에서 움직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비즈니스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올댓재즈는 이태원이라는 곳의 특성을 아주 잘 이용한것이고

 

야누스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것인데 계속 고집스럽게 운영을합니다 

 

올댓재즈는 그 시기를 감안한다면 경제적 수익이 굉장히 좋았었는데 

 

박성연 선생님의 고집에 대한 댓가였던것인지 손님보다 연주자가 더 많았었고 

 

직접 정기 공연 하시려고 어떤 때는 전화를 하루에 60통씩 하시기도 하고. 팸플릿 찍고, 우편으로 붙이러다니시고 

 

클럽 신촌 시절 이후에 혜화동을 거쳐 서초동 교대 근처에 자리 잡기까지 모두 다섯 번이나 이사를 하였을정도로 

 

야누스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무너진 담벼락에도 꽃이 피어 나듯이 그 힘든 환경이 공연을 하시던 뮤지션들을 더 똘똘 뭉치게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이게 또 연주와 노래에 묻어나고 

 

이걸 어깨 너머로 본 다음 세대의 뮤지션들에게 영향이 되었고 

 

야누스를 거쳐간 재즈 뮤지션들도 굉장히 많고 

 

오늘 날에 이르러서는 야누스는 한국 재즈씬을 지키는 소나무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박성연 선생님께서 신장병으로 십 수년째 일주일에 3일은 투석을 하셔야 하고 걸으시는것도 힘드시다고 하는데 

 

가족분들의 만류에도 "발성을 터득한 건 채 10년이 안 되었다"고 하시면서 여전히 매일 연습을 하신다고 하던데.. 

 

앞으로도 박성연 선생님의 열정이 건강하게 계속 타오르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나는 재즈를 지키려고 했던 적이 없다. 무슨 특별한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냥 재즈를 사랑하는 거다. 살면서 이것만큼 좋은 게 없었으니까." 

 

(박성연 선생님 2010년 정통 시사 주간지 시사IN 인터뷰 내용中..)

 

La Ventana - 사의 찬미 Feat.박성연

 

5년전에 박성연 선생님께서 하셨던 시사인 인터뷰 내용중에 제가 뭐 음악하는 사람도 아닌데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던 부분입니다. 

 

epilogue 

 

현재까지 들어난 fact만 놓고 이야기를 한다면 단 한 번도 본문에서 설명드린 용산을 지역 기반으로 활동하시던 1세대 재즈 뮤지션분들이 일제강점기말 경성을 지역 기반으로 활동하시던 재즈 뮤지션들처럼 대중음악계의 주류였던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본토에서 재즈 음악이 R&B, 소울, 훵크 음악의 엔진 역할을 하였던것처럼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음지에서 움직이던 재즈 뮤지션들께서 

 

 

70년대 대중음악계를 주름 잡으셨던 소울 음악과 훵크 음악을 기반으로 작곡을 하시고 연주를 하셨던 신중현 선생님과 

 

 

당시 고고장을 주름 잡았고 

 

ㅌㅌㅌ.jpg


영화 '고고 70'의 모티브가 되었던 

 

 

 

 

우리나라 최초의 소울 브라스 밴드 데블스의 움직임의 자양분 역할을 하셨던것은 분명한것으로 보여집니다

 

엘이 회원분들께서 옛날 국내 재즈에 대해 이해를 하시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되었으면해서 시작한 일인데 ㅋㅋ 

 

오히려 제가 옛날 국내 재즈에 대해 오해하고있던것들도 풀리게 되었고 

 

머릿속에 6.25 전쟁 직후부터 80년대까지 흑인음악 뮤지션들의 계보를 정리하게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기에 정말 감사드리며 

 

끝까지 한 없이 부족한 읽어주신점 역시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The Roots of Korean Jazz는 본문으로 마치며 다시 작성중인 쿠바 재즈와 스페인 재즈에 관한 글 The Jazz of Passion은 현재 진행 속도로 보았을때 빠른 시일내로 완성될듯합니다.

  

#1945.08.15 해방 #만요(漫謠) #스윙 재즈 #심성락 #한국 전쟁 #미군부대 #미8군 #은평구 진관외동 175번지 #류복성 #최세진 #이판근 #김대환 #블루 리본 #신촌 #이태원 #야누스 #올 댓 재즈 #박성연 #신중현 #데블스 #블랙넛 개ㅅㄲ


[The Roots of Korean Jazz] - 번외편 - 마지막 퍼즐 : http://hiphople.com/kboard/5768091  (12월 5일 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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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6.29 03:29
    와,,, 긴글감사합니다 재즈에관심이많은데 많이배우고 갑니다!
    앞으로도 재즈관련글 많이 보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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