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1월에 1일에 우리나라 1930~1940년대 스윙 재즈에 민요(民謠)적인 요소를 접목시킨 만요(漫謠)에대한글이랑 1960~70년대 미8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재즈 1세대 뮤지션들에대한 글 두 편을 2월안으로 올리겠다고했었는데 벌써 4월 11일이네요 만요(漫謠)에대한 글을 쓰려고 자료들을 모으다보니 생각 이상으로 자료가 너무 방대하였고
그 모아놓은 자료들을 정리하려는데 크로스 체크하던 도중 자료들중에 사실과 다른 자료들도 상당했고 구전으로만 전해져온 자료들도 조금있었고
또 당시 뮤지션들의 친일 행적에대해 그들이 음악사에 세운 공을 앞에두고 일종의 쉴드를 치려는 뉘앙스를 풍기는 자료들도 조금있어서
커트해야할 부분들은 커트하고 다시 정리하는 과정을 거치고 작성하느라 오래걸리게되었습니다
솔직히 제가 재즈 이론적인 부분에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있는게 아닌데다가
부족한 필력에 너무 거대한 주제를 택한게 아닌가하는 걱정이 컸던게 사실이지만
대신에 철저하게 감상자 입장에서 쓴글이고
글 쓸때 포커스도 디테일적인 부분보다는 전체적인 부분에 맞췄기때문에 글 읽으시는분들 입장에서도 어렵게 느껴지시지는 않을거라고 생각됩니다.
Le premier chapitre : 1920년대 한반도내 jazz의 존재에 대하여
본문은 원래 1930년대에서 1940년대 만요(漫謠)에대한 글을 쓰려고했으나
글을 쓰려고 자료를 모으던 도중 1920년대 활동하던 최초의 재즈밴드 Korean Jazz Band의 존재에 대하여 알게되었고
눈앞에있는 수가 왜 놓여졌는지를 이해하려면 그 전에있는 수를 봐야하는것이 당연한것이기때문에 본문에 1920년대 재즈에 대한 내용을 포함시키게 되었습니다
한반도에 재즈(당시 표현 : 쨔스 혹은 짜스)에 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언제이고
한반도에 재즈가 처음 연주된 시기는 언제일까요?
한국 재즈역사서라고 볼수있는 "한국 재즈 100년사(박성건 저)"에 따르면 한반도에 재즈에 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1926년이라고합니다
다만 여기서 확실하게 아셔야할게 뭐냐면
미국 본토에서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많은 재즈 뮤지션들이 여러 유럽 국가들에서 순회 공연을하며 스윙 재즈의 세계화의 문을 서서히 열고있었고
한반도내에서는 호남의 부호집안 아들로
(조선축구단)
(맨 왼쪽이 백명곤 선생)
조선축구단의 구단주셨던 백명곤선생이 상해 원정경기를 하고 상해에서 재즈 악기들과 재즈 악보들을 가지고 귀국하신후
대한제국 시절 황실 군악대였던 이왕직 양악대 출신에
그럼에도 근대화 시대에 맞게 굉장히 리버럴한 태도를 보이셨고
조선일보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재즈 비평을 기고하기도하셨으며
오늘날에와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대중음악 작곡가 불리는 홍난파 선생과 몇몇분들과 함꼐 의기투합하신후
한반도에 재즈에 대한 기록이 처음 등장했던 같은 해 조선일보에서 후원한 첫 공연을 시작으로
다음해 우리나라 첫 재즈 콘서트도 성황리에 마친 Korean Jazz Band가 방송국의 개국과 유성기(축음기) 보급의 바람을 타고 전국 순회 공연을 하였으며
일본 회사였던 콜럼비아 레코드 경성지사에서 최초의 재즈 수입 음반인 Paul Whiteman의 앨범이 수입되었던 1920년대 후반을 제외해놓고는
(덧붙여 설명드리자면 콜럼비아 레코드 경성지사도 세계적인 스윙 열풍이 불던 1930년대 재즈 밴드를 꾸리게 됩니다.)
한반도에 유입된 모든 서양음악을 재즈라고 불렀던 시기였기때문에 1920년대 초중반에 기록된 재즈는 기록만으로 온전한 재즈라고 볼수 없다는겁니다
간단하게 설명 드리자면 "우리나라 역사상 재즈에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하고 공연이 열린 시기는 1926년이고
스윙 재즈 세계화 시대의 문이 서서히 열리고있던 1920년대 후반을 제외하고
1920년대 초중반은 한반도에 유입된 모든 서양음악을 재즈라고 불렀던 시기였기때문에 기록만으로 온전한 재즈라고 볼수없다"
↑↑↑ 이렇게만 알고계셔도 1920년대 우리나라 재즈에대해서는 반은 알고있는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TIP!
01.자료들에 의하면 백명곤 선생님의 재력은 일제강점기 당시에 스포츠카와 오토바이를 끌고다닐정도로 엄청났던것으로 보이고요 조선축구단에서 하셨던 구단주의 역할을 Korean Jazz Band에서도 했던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02.Korean Jazz Band의 첫 공연 당시 멤버 구성입니다
이인선(Vocal)
백명곤(1st Saxophone)
이철(2nd Saxophone)
홍재유(Banjo,Violin)
홍난파(Piano)
이상준(Drum)
박건원(Slight Trombone)
한욱동(Trumpet)
사진에는 이인선 선생님이 안계신데 자료에의하면 Korean Jazz Band 첫공연부터 함께하셨다고합니다.
Le deuxieme chapitre : 두 얼굴의 도시 경성(京城)
바로 일명 1930~40년대 "조선 쨔스" 만요(漫謠)에 내용으로 들어가려고했으나
60~70년대 국내 음악계에 대하여 논할때 미8군쇼를 빼놓고 논할수없듯
1930~40년대 만요(漫謠)에 대하여 설명할때 한성과 서울 사이의 도시 경성을 얘기하지 않고 설명이 되지않기에 본문에 짧게라도 포함시키는게 맞다고 생각하여 포함시키게 되었습니다
경성(京城), 일제강점기 문화 예술에대하여 논할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도시
길 한복판 선로를 타고 움직이는 전차, 그리고 인력거와 자전거를탄 사람들이 생각나는 도시
창가 구석에서 소설을 쓰는 작가, 술에 취한 연인의 다툼, 친구들과 시를 읊으며 나누는 대화
바에서 독한 위스키를 들이키며 생각에 잠긴 사람
그리고 작은 무대 한 켠에서 연주가 흐르고춤을 추며 서로에게 호감을 발산하는 남녀가 생각나는 도시
실제로도 다섯개의 백화점과 라디오 방송국이있었고
한반도내 5대 레코드사였던
오케 레코드
콜럼비아 레코드
태평 레코드
시애론 레코드
리갈 레코드가있었으며
일제 말기에는 인구 100만에 육박하는 거대도시였습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있는게 당연하듯이 위에서 설명했던 일본인들이 많던 남촌과 조선인들이 많던 북촌을 놓고봤을때 일본의 민족차별은 노골적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경성의 남촌 거리의 휘황찬란한 분위기와 북촌 거리의 비참하고 남루한 분위기는
일제 강점기의 슬픈 역사와 근대화의 새로운 물결이라는 두 얼굴을 보여줌과 동시에
한반도를 침탈한 일본의 찌질하고 유치하고 쪼잔하기 짝이없는 Lil Bitch적 민낯을 보여주고있다고 생각합니다.
Le troisieme chapitre : 조선 jazz 귀재 김해송
Duke Ellington & His Famous Orchestra - It Don't Mean A Thing (If It Ain't Got That Swing) (1932)
Benny Goodman - Sing, Sing, Sing (1935)
Buster Bailey And His Rhythm Busters - Light Up (1938)
Billie Holiday - Swing, Brother Swing (1939)
1920년 미국 본토를 들여다 보면 금주법이 시행되자 반작용으로 불법 술집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하였고
불법 술집들이 손님을 끌기위해 화려한 쇼를 많이들 보여주었습니다
이때 쇼에 올렸던게 재즈 밴드였는데 불법 술집들끼리 경쟁적으로 재즈 밴드의 수를 늘렸고
이러한 현상이 빅밴드 형성에 많은 기여를 하였고
재즈의 즉흥적인 성향에 빅밴드의 다채로운 요소가 더해졌고 이 조화가 스윙 음악의 탄생에 시발점이되었고
거기다가 1장에서 설명해드렸듯이 세계 대공황으로 많은 재즈 뮤지션들의 유럽 순회 공연을 하게되었고 스윙 재즈의 세계화의 문이 서서히 열리고있었습니다
1930년대를 보면 1933년에는 금주법이 해제되었고 그로인해 음지에서 활동하던 재즈 뮤지션들이 양지로 올라오기 시작하였으며
중반에는 침체되있던 경기가 살아나기 시작하며, 눌려있던 용수철이 튀어오르듯 억눌려있던 대중들은 마음을 펴듯 밝고 경쾌한 멜로디의 스윙 재즈를 찾기 시작합니다
한반도내에서는 충남 공주 출신으로 신문 배달등 지금으로 따지면 아르바이트같은 일들을 하시며 색소폰을 배우시고 1장에서 설명해드렸던 Korean Jazz Band에서 제 2 색소폰을 맡고계셨던 이철 선생님께서
같은 시기 일본과 중국을 통해 한반도내에 스윙 재즈가 물밀듯이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무수히 많은 스윙밴드들이 등장하였고 스윙 재즈가 우리 가락인 민요(民謠)와 결합하여 만요(漫謠)를 만들어내었던 당시
우리 음악시장을 장악하고있던 일본 레코드사들에 대항하여 훗날 1930년대 일명 "조선 쨔스"를 이끌게되는 오케 레코드사를 설립하셨습니다(2장에서 설명드렸듯이 당시 오케 레코드,콜럼비아 레코드,태평 레코드,시애론 레코드,리갈 레코드가있었는데 이철 선생님께서 설립하신 오케레코드 제외 모두 일본 회사였습니다.)
당시 한반도내 5대 레코드사간의 경쟁은 굉장히 치열하였는데
이 치열한 경쟁속에서 다른 레코드사와 차별화로 자체적으로 악단 꾸려 녹음을하는 방식을 선택한 오케 레코드사는 태평 레코드사와 1~2위를 다툴 정도로 성공을 하게됩니다(정말 오글거리기는 하지만;; 본문에대한 자료를 모을때 이 부분에대한 자료를 읽으며 오케 레코드사 자체가 우리 음악시장을 장악하고있던 일본 레코드사에 대항하려고 만들어진 회사이고 더군다나 일본이 노골적으로 민족 차별을 하던 당시를 생각하니 오케 레코드사의 쾌거가 괜히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TIP!
본문을 다시 읽어보며 뭔가 찝찝한 느낌이 들길래 모아놓은 자료를 다시 헤집어보니
오케 레코드사에서 먼저 녹음을위한 자체 악단을 꾸리고
이에 자극을 받은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도 똑같이 녹음을 위한 자체 악단을 꾸렸던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 옛 가요에 관심 많으신 분들도 오케 레코드사 자체 악단에 대해
1970년대 지구레코드 LP들을 찾아보면 많이 보이는 이름인 "지구레코드 전속 관현악단"과 같았을것이라고 오해하실수도 있을거같은데
사장이셨던 이철 선생님의 음악적 성향도 그렇고 보시다시피 악기 편성도 당시 스윙 재즈 밴드들에서 보이는 편성이였고
이 얘기가 2년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3 하반기 예술강좌 프로그램 축음기감상석 조선재즈카페 강의에서도 나왔던 부분인데
1930~1940년대는 한반도내에서 나왔던 가요,트롯도 그렇고 미유럽 영화음악도 짙은 스윙 재즈 성향을 보였던 시절이였기때문에
대중음악적 성향이 짙었던 "지구레코드 전속 관현악단"과 스윙 재즈 성향이 짙은 "오케 레코드 자체 악단"을 유사하게 보시면 안됩니다.
2015.04.12 04:50 PM 수정
치열한 경쟁속에 오케 레코드사의 선봉에는 1950년대 후반 아시아에서 최초로 미국에 진출한 걸그룹 김시스터즈의 세분중에 김숙자선생님과 김애자선생님의 부친이시고
목포의 눈물과 다방의 푸른 꿈으로 유명한 이난영선생님의 배우자되시는
(TV조선과 tvN에서 동시 방송된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다큐드라마 '위대한 이야기' - 이난영과 김시스터즈 - 장면中..)
김해송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김해송 선생님은 본명이 김송규(金松奎)로 젊은 시절부터 작곡에 두각을 나타내셨고
"연락선은 떠난다" "잘있거라 단발령" ☜ 두 곡으로 데뷔하신후에는 오케 레코드의 전속 작곡가로 일하셨는데
김해송 - 청춘 계급 (1938)
박단마 - 나는 열일곱살이예요 (1938)
박향림 - 오빠는 풍각쟁이야 (1938)
김해송 선생님께서 다른분들한테 주셨던 곡을 들어보면 민요적 발성이 많이 보이는데
어떤분들은 김해송 선생님이 오케 레코드사에서 지금으로 따지면 연습생들을 가르치셨던걸 근거로 김해송 선생님이 세계화의 흐름에 뒤쳐지지 않으심과 동시에 우리가락을 지키시려고 하신 일이라고도 하는데
물론 일명 "조선 쨔스"를 가장 발전시키고 당시 김해송 선생님을 두고 "쨔스 귀재" 극찬이 이어지던게 사실이긴하나 다른 레코드사에서 나온 녹음물들을 들었을때도 느낄수있는것이기 때문에 냉정히 얘기해서 그건 아닌거같고
비슷한시기 프랑스에서 스윙 재즈에 집시 음악 요소를 결합시킨 Django Reinhardt 음악을 들어보면 알수있듯이 다른 음악을 흡수하려는 성질이 강한 재즈의 특성때문인것같습니다
Django Reinhardt - I Saw Stars (1934)
Django Reinhardt - Clouds (1935)
Django Reinhardt - Viper's Dream (1937)
다만 한반도내에서 녹음된 곡중에 최초로 스캣이 시도된 청춘 계급도 그렇고
1930~40년대 대중음악 곡중에 재즈다 아니다를 논할때 기준이 되는
Improvisation,Swing,Blue Note,Syncopation이 갖춰진것으로 볼때
김해송선생님이 해방이후까지 우리 재즈계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것은 부정할수없는 사실인거같습니다(많이들 "French Jazz"로 불리우는 프랑스 재즈의 틀을 만든 음악을 "Gypsy Jazz"라고 얘기하고 "Gypsy Jazz"의 틀을 만든 사람을 Django Reinhardt라고 얘기하는걸 보면 알수있듯이 말이죠.)
김해송 선생님의 사망에대해서는 납북 제외해놓고는 확실하지가않은데
많이들 해방 이후 미군 위문공연도많이하셨던데다가 아무래도 우익 진영 인물들로 결성된 대중음악협회 초대 회장이셨기도 하셨으니 6.25전쟁때 납북되어 사망하셨다고 추측하고있습니다.
epilogue
제가 고등학생시절부터 나름대로 국내 재즈 역사에대한 자료도 찾아보고해왔었는데 1920년대 한반도내 재즈의 존재에대해서는 본문 작성을 위한 자료를 찾던 도중 처음 알게되었고 그외에 모르던 부분들도 많이 알게되었습니다
이런 표현이 너무 고지식한 표현인지는 잘모르겠으나 저는 현재라는 굳게 잠긴 문을 열수있는 열쇠가 과거이고 그 문을 열고 앞으로 나아가는게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을 읽으시는분들께 소박한 바램이있다면 본문을 읽으시는분들이 머릿속에 국내 힙합이라는 건물을 건설하실때에 본문이 기초공사를하는데있어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하길 바라는 바이며
다음편의 제목은 "1세대 재즈 뮤지션.. 그들의 열정, 의무 , 인생"이고요 되도록 빨리 완성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The Roots of Korean Jazz] - 제 2편 - 1세대 재즈 뮤지션.. 그들의 열정, 의무 , 인생 : http://hiphople.com/kboard/4264814 (6월 26일 게시)
좋은글 잘 읽었어요!
진짜 잘 읽으셨다니 마음이 놓이네요 ㅎㅎ
덧붙여 설명드리자면 자료들을보면 1930~1940년대 카바레나 댄스홀,살롱에서 활동했던 스윙 밴드들은 되게 많았던거같은데
아무래도 속칭 "밤무대 밴드"들이다보니 녹음 자료도 없고 사진이라도 있으면 밴드 편성을보고 확인할수있었을텐데 전부 구전으로 전해져온 자료들이라서 그에대한 내용은 포함시키지 않게되었습니다.
앞으로도 한국의 블루스&재즈에 대한 칼럼을 많이 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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