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하이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일까? 그들은 데뷔 20년을 넘었고 24년에 좋은 믹스테잎을 발매하고 예능에 출연해 웃음을 주는 동시에 유튜브 활동을 하며 성공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이들은 오래, 그리고 크게 성공했을까.
나는 그들의 팬이지만 내가 2000년대생임을 감안한다면 이또한 신기한 일이다. 그들은 2003년에 데뷔했으니까. 그리고 그들의 리더인 타블로는 한국역사에 길이 기억될 부당한 마녀사냥을 전국민적으로 당했다. 아마 그는 공부를 지나치게 잘했다는 이유로 손해본 유일한 인물일 것이다. 여하튼 그들의 커리어는 유달리 다사다난했고 딱히 그들이 잘못하지 않아도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그들은 건재하다. 대중이라는 딱히 정의불가능한 집단부터 평단, 매니아까지 아우르며 지지층을 보유한 몇 안되는 존재고 이 범주를 아티스트- 본인의 행보와 음악을 본인들이 주도하는- 으로 좁힌다면 더더욱 그들의 희귀성은 빛난다.
당연히 그들의 성공을 하나의 요인으로 정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여러 단어들을 고심하다가 나는 두 단어를 먼저 집어들고 싶다.
‘균형감각’과 ‘문학적 품위’
타블로와 투컷이 여러 예능과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그들은 예능에 나왔고 보컬 피처링을 활용한 곡들을 써왔다. 그래서 그들은 종종 ‘장르가 아닌. 그냥 음악’ 이라는 말로 그들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하지만 99 정도를 제외한 그들의 준수한 바이오그래피를 보면 그들은 그 미묘한 균형감각- 힙합스럽지 않은 힙합그룹 혹은 힙합스러운 음악을 하는 밴드- 를 유지해왔다. 이를 잘 보여주는 앨범 중 하나가 타진요라는 사건을 겪고 yg에 들어가고 99를 발매하는 등 여러 일들을 지나고 발매한 신발장이다. 나는 신발장을 내 십대 시절에 들었고 가장 좋아하는- 최고로 여긴다는 뜻이 아니다- 앨범이다. 이 앨범의 특이점은 헤픈 엔딩과 born hater가 같이 있는 앨범이라는 사실이다. 막을 올리며는 샘플링을 기반으로 하는 비트와 랩으로 구성된 ‘힙합’ 트랙이다. 하지만 헤픈 엔딩과 또 싸워 같은 곡들은 소위 말하는 ‘리얼 힙합’이라는 정체가 애매한 장르와 결이 맞지 않는 것이지 않은가. 여기서 그들의 균형감이 빛난다. 그들의 앨범들은 자기복제 혹은 정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조화롭지 못하다던가 중심점 없이 산개한다는 지적과는 거리가 멀다. 정서와 주제, 구성이 다른 곡들을 엮으면서도 산만하지 않게 유지시키는 조형감각이야말로 그들이 해낸 성취의 기반이다. 백야와 우산을 콘서트에서 부를 수 있는 그룹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특기할 이름이 투컷이다. 프로듀서,비트메이커,엔지니어,믹싱담당,예능인,세차원(..) 등을 담당하는 그는 상대적으로 캐치하고 감각적인 멜로디메이커인 타블로의 작곡을 잘 보좌하면서 소위 힙합스러운 단단한 비트를 주조하면서 앨범과 그룹의 균형을 잡는다. 이는 신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막을 내리며에서의 말끔한 샘플링, 듣자마자 이거다! 싶은 born hater의 비트나 rich의 편곡들은 투컷이 가지는 비트 메이커이자 프로듀서로서의 역량을 엿보이게 만든다. 물론 스포일러같은 곡에서 보이는 타블로의 흡인력 있는 멜로디메이킹을 제외할 수는 없다. 우산으로 대표되는 그의 좋은 멜로디감각은 분명 에픽하이의 대중적 성공의 큰 축이다. 하지만 이런 조형감각은 투컷과 타블로의 호흡에서만 기인한 것은 아니다. 에픽하이는 어떤 소재를 다루든, 어떤 음악적소스를 배합한 사운드를 구사하든, 문학적 품위를 잃은 적이 없다. 아니 타블로가 열꽃이나 에픽하이의 앨범들에서 보여준 가사들은 한국힙합이 자랑할 수 있는 리릭시즘의 극치였다. 이는 신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스포일러같은 서정적인 이별곡에서 보이는 묘사력, 또 싸워에서 선보인 놀라운 펀치라인(이해를 두 번 해도 일만 나면 오해)과 문체, 부르즈 할리파와 born hater에서 보인 소위 빡센 랩에 담긴 장르적 쾌감이든, 아님 rich에 함유된 정서이든 타블로는 다채로운 주제에서 기복없이 인상깊은 구절들을 구사하면서 왜 그가 한국대중음악사 최고의 작사가들 중 하나인지 증명한다. 이것은 신발장이 아니 에픽하이가 그들의 커리어 내내 보유한 가장 효과적인 무기이다.
물론 완벽한 앨범은 아니다. 몇몇 피쳐링진들과의 호흡이 완벽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윤하와 태양은 본인들의 기량을 입증했고 born haterd의 참여진들은 누구나 탐낼 비트 위에서 최소한의 제 몫을 해낸다. 하지만 개코의 랩은 붕 떠있는 듯하며 김종완의 목소리 역시 나에게는 진부한 선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동안 타블로의 보좌진 혹은 사이드킥의 위치 정도에 한정된 듯한 미쓰라진의 위치와 기량 역시 이 앨범의 아쉬움이다. 무엇보다 결국 창의성과 혁신성 항목에서 높은 점수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라디오 친화적인 트랙들과 힙합장르의 문법에 충실한 곡들을 한 앨범에 이렇게 응집성있게 연결시키는 프로덕션은 누군가 쉽게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다시금 강조하지만 이 프로덕션 위에서 타블로는 여전히 뛰어난 가사들을 올리고 있다.
신발장이 역사적으로나 미학적인 가치로나 그들의 최고작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국사상 최악의 병신들과 언론,대중들이 초래한 미증유의 고통을 딛고 일어난 앨범이라는 점에서 하이스쿨에게 각별한 앨범이다. 무엇보다 여전히 25년까지 살아있는 그들의 감각을 확인할 수 있다는 면에서 기억될 앨범이다. 혹자는 에펙하이의 음악들이 어느 순간 제자리걸음한다고 주장한다. 일리 있는 말이지만 에픽하이의 위치에 오른 팀이 또다른 갱신을 하기란 쉽지 않다. 무엇보다 그들의 팬으로서 그들이 최소한의 기품을 지켜왔다는 사실은 보증할 수 있다. 그들 사이에 실망스럽고 아쉬운 성과들은 있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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