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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온, 이 세 글자가 한국 힙합에서 지니는 무게를 전부 다 설명하기에는 이 지면의 크기가 이를 허락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들의 길은, 어느 누구보다도 쟁쟁히 빛나는 작품들을 공개했던 예술가의 길이었고, 수업과 콘텐츠, 협업을 통해 꾸준히 후학들을 길러냈던 선각자의 길이었으며, 한국 힙합의 예술성을 재즈합(JAZZHOP)의 실험성, 혹은 메타와 렉스의 지역색으로 증명하려 했던 투사의 길이었다. 이들이 그 무게를 짊어질 수 있을 만큼 걸어온 길은 그 정도로 장구한 것이었다.
이들의 첫 음반인 <Garion>이 발매된지도 20년이 흘렀고, <Garion 2>로부터 헤아려 보아도 13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 사이 한국 힙합은 급변하고 있었다. 쇼미더머니의 조류가 힙합을 양지로 휩쓸리게 했다. 이에 밀물을 타고 온갖 치어들이 몰려왔다. 시간이 가는 것도 모른 채 이들은 잠깐이나마 그 격류를 누렸다. 그리고 이제는 간조가 찾아왔다. 어느 물고기는 마약에 빠져 가라앉고, 또 다른 물고기는 돋보이려고 발광하다 가라앉고, 더러는 죄인의 용수를 쓴 채 길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기어이 물이 빠지자, 그 자리에는 가라앉고, 길을 잃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생선들의 흔적만이 드문드문 보인다. 언뜻 보기에는 황폐해진 것으로 뵈는 이 광경을 보고, 상승과 하강이 거듭되는 시대적 흐름에 몰이해한 이들이 뱉는 '씬이 흔들린다', '한국 힙합이 흔들린다'는 비관론이 더 이상 우스갯소리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시대의 격랑을, 가리온은 꿋꿋이 버텨왔다. 가끔씩 곡도 발매하고, 온갖 공연들을 종횡무진 하면서, 그렇게 오랜 공백을 채워왔다. 과연, 이 거대한 흐름 속을 살아가는 두 현인은,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너무도 오랜만에 음반으로 우리를 찾아온 이들은 무슨 말을 할까. 그 부푼 기대를 안고 재생 단추를 눌러본다.
가리온을 동경하며 홍대에서 신촌, 그 위로 깔린 박자를 딛고 선 여러 선수들이 있었다. 웬만해서는 등을 내주지 아니하던 두 마리 나이 든 준마는 그 선수들 중 오래 꾸준하였고, 또 동시에 가장 언더그라운드 지향적이었던 딥플로우에게 자신의 고삐를 기꺼이 맡겼다. 딥플로우는 두 명마가 마음껏 뛰놀 벌판을 만들고자 힙합 씬 각지에서 기라성 같은 프로듀서들을 불러왔다. 범위로는 메인 스트림의 더 콰이엇과 그레이부터 부산의 언더그라운드 씬의 16 레벨즈(16 LEVELZ)에 이르는, 또 연식으로는 원로 중의 원로인 킵루츠와 마일드 비츠부터 최근 씬에서 각광받는 프레디 카소와 비앙에 이르는 광대한 협업은 가리온의 이름값과 더불어 딥플로우의 수완의 결과물이었던 셈이다.
특히 오래 묵은 프로듀서들의 경우에는 딥플로우가 의도적으로 각 프로듀서의 전성기 시절의 소리를 가져오려 심혈을 기울였다. 예컨대, "III"의 그레이는 "Hot Summer"에서 보여줬던 감각적인 신시사이저 운용과 세련되고 다채로운 편곡을 그의 최전성기에 준하는 수준으로 복각시켰으며, "Post Mortem"에서는 소울 컴퍼니 시절의 더 콰이엇하면 바로 떠오르는 섬세한 재즈 샘플 활용이 그대로 드러난다. <Garion 2>에서 "영순위", "산다는 게" 등 주요 곡을 도맡아 만들었던 킵루츠와의 재지한 호흡도 하이텔 접속 주파수를 제목으로 삼아 이들의 열정 가득했던 옛날을 그려보는 “01410”이 그러하듯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물론 음반 내의 노장들이 과거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고전적 샘플을 적극 이용하여 육중함을 드러내는 것은 마일드 비츠가 빅딜에서 보여준 바 그대로이나, 그 접근법은 90년대 미국 동부의 그것이라기보다도 최근 북미 언더그라운드를 휩쓸었던 그리셀다 풍에 조금 더 가까워졌다. 20년 전의 다운된 톤을 다시금 가져온 MC메타,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단정하고 유려해지는 나찰의 랩이 자유로이 나아가기엔 최적의 환경인 셈이다.
명장들이 자신들의 황금기를 음반에 가져오니 그 사이를 파고드는 후학들의 솜씨와 개성도 자연스레 과거를 향한다. 현재 한국 힙합에서 가장 왕성한 프로듀서인 프레디 카소가 곳곳에 아날로그적이면서도 탁월한 샘플 운용으로 존재감을 각인시키고, 비앙 특유의 디트로이트 적인 베이스 설계, 돈 사인(Don Sign.)의 블루지한 구성, 이안 캐쉬(Ian Ka$h)의 독특한 편곡이 중간중간 튀어나오며 이 음악적 파인 다이닝의 킥 역할을 수행한다. 그 사이에서도 16 레벨스가 동양적인 소리샘들을 끌어모아 <Garion> 시절을 연상시키는 모습을 완벽하게 되살려놓은 것이 청자에게 있어 너무도 반갑게 다가온다. 숙련된 장인인 딥플로우의 진두지휘 하에서, 이리도 다양한 소리들이 엮이면서 90년대 동부 양식의 준마도(駿馬圖)를 한 폭 멋들어지게 그려낸다.
<가리온3>에 그 동안의 가리온의 경력에서 가장 방대한 협연이 담겨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행보에 영감과 영향을 받아 존경과 동경을 품은 이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리온이 마스터플랜을 누비던 시절을 직접 객석에서 경험했고, 지금은 한국 힙합의 허리를 받치는 이들이 된 80년대 초반생 MC들과의 협업이 유독 두드러진다. 이에서 나오는, 어느덧 중년을 맞이한 이들이 주고받는 속 깊은 이야기와 세상살이는 이 음반에서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지점이다. 그간 겪은 곡절이 이래저래 많았던 팔로알토가 “Testify”에서 가리온의 내면의 스트레스와 갈등에 공감하고, 지나간 삶들을 되짚어 성찰했던 “Post Mortem”에 마이노스가 사색적인 절구를 하나둘 추가해내는 모습이 정겹게 다가온다. 한국 힙합에서 이런 일상감 있는 소재하면 빼놓을 수없는 존재이자, 한국 힙합의 또 다른 상징이기도 한 개코가 “Pawn Shop”에서 일상과 고민을 가리온과 공유하는 지점은 이들을 좋아하는 이들이면 특히나 감동에 젖을 부분이기도 하다. 앨범의 두 보컬 게스트 역시 이러한 진솔함을 따라 배치된다. 쿤타의 쓸쓸한 톤이 “노마지도”의 불안감을 대변한다면, 이를 능히 넘어서고자 하는 “Checkmate”의 짙은 의지는 따마의 매끄럽고 벅차오르는 톤에 의해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마지노선이자 최전선”이라는 시사성에 걸맞는 열화같은 부분도 존재한다. “불가침”에서 가리온의 두 MC와 딥플로우, 그리고 스카이민혁까지 한국 힙합에 대한 애정에 있어 어디 가도 처지지 않을 인물들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자신들의 가치를 말하는 대목에서 저절로 혈기가 용솟음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외부의 흐름에 냉소하며 굳이 따라가지 아니하려는 “Kibitz”에서 언제나처럼 관조적으로 유려하게 뱉는 화지의 모습도 강렬하다. “영순위”에서 협업이 아쉽게 불발된 타이거JK가 이번에는 앨범의 대미에서 계속되는 이야기와 무한한 열정을 열변하는 대목에 다다르면 그 상징성 이상의 뜨거운 박동이 앨범을 다 듣고 난 우리의 마음도 한바탕 휩쓸고 간다. 이 솔직함과 진심, 우리가 사랑하였고 언제나 무의식에 배어있던 그 감정은 두 마리의 명마의 발굽과 울음소리에, 두 MC의 열정이 담긴 가사와 랩에 의해 다시금 기지개를 켠다. 이 음반의 수많은 MC들, 재즈말의 디제잉에 의해 인용되고 변주되는 가리온의 곡들과 경구들, 그리고 인터루드에 끌어온 옛 다큐멘터리에 담긴 이들의 젊은 날은 이들이 오랫동안 지켜온 열의에 대한 헌정이요, 그 자체로 이들이 그간 보여온 진심에 대한 증거이다.
그렇다면, 이 음악적 장치들을 통해 가리온이 하고팠던 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가리온3> 내내 반복되는 체스와 관련된 표현은 그 자체로 “옛이야기”의 구절에 대한 자체적인 오마주이며, 또한 두 기사가 행마를 통해 서로의 생각을 주고 받듯이 서로간의 진심과 깨달음을 나눠보자는 상징이기도 하다. “Monochrome”에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 “Chess Knight”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대국은 훈수에 흔들리다(“Kibitz”) 끝내 어느 쪽에서 이유 모를 실수를 범하고 만다(“Blunder”). 대국을 복기(“Post Mortem”) 하다보니 무기력, 지난날을 향한 미망과 추억, 아슬아슬한 하루와 부닥치게 되지만, 체크메이트를 당하더라도 삶은 이어지기에 가리온의 둘은 다시금 초심과 열정을 다져 앞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이 승패를 알 수 없는 승부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아무리 지치고 쇠하더라도 또 다시 전진하여야 하는 이유를 깨닫는다. 밖에서 뭐라 하여도, 시대가 우리를 덮치고 동력이 다 닳기 직전이더라도 우리는 재미와 열정, 혹은 누군가와의 정신적 유대에 이끌려 끝끝내 진심에 도달한다. 고식(古式)을 갖춰 치열하게 전개되는 이 대국의 엔드게임은, 깨지고 지치고 미혹되다가도 기어이 우리가 품은 진심에 한없이 다가가는, 모두가 바라고, 그만큼 고되지만 실로 복된 삶이다. 가리온이 20년이 넘는 행보에서, 또 지천명의 고개를 넘는 중년의 지혜에서 우리에게 건네는 세 번째 이야기는, 그 숱한 격랑과 비관론, 급류를 딛고 오래도록 지켜온 이들의 열정과 진심에 대한 축복어린 아름다움, 그리고 이에 대한 동료와 후배들의 애정어린 헌정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검소하되 누추하지 아니한, 또 동시에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아니한 이들의 진정성은 급변하는 세상 가운데서도 그저 쟁쟁하기만 하다.
Best Track: Chess Knight, 불가침 (Feat. Deepflow, 스카이민혁), Blunder, III (Feat. Tiger JK)
https://drive.google.com/file/d/1LLsns3I6afjkNdyYFCRq9v-E62St9jnU/view
본 리뷰는 HOM#19에서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갳휴
hom에서도 너무 잘읽었습니당👍👍
잘읽었습니다!
01410이 하이텔 주파수였군요ㅋㅋ
진짜 추억속에 묻혀있는 메타포로 가득한 앨범이네요
가리온이 늘상 힙합문화에 대한 주제로 가사를 많이 써왔는데 본인들 얘기를 꺼내는 것도 신선한 포인트입니다
사실 저도 조사하며 알았던.....
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인지라......하이텔....천리안.......뭐 이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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