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개미로의 퇴화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내가 힙합 음악을 듣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화자가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며, 그의 눈에 비친 세계는 어떻게 보이는지를 느끼는 것이다. 내가 몰랐던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거나 내가 애써 외면했던 감정과 심연을 마주하게 되는 경험은 황홀하다. 예술이란 세상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매개체라고 생각한다.
<개미>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불쾌하다. 터져 나오는 욕, 인간에 대한 불신과 인생에 대한 혐오. 마치 개미를 밟아 죽여도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처럼 <개미> 속 인간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하지만 아무리 인생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더라도 대부분 꾸역꾸역 살아간다. 개인의 삶에 대한 의미를 찾지 못하면서도 개미처럼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부속품으로서 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그 불편한 지점을 풀어내는 방식으로 큐엠이 선택한 방식은 우리가 암묵적으로 함구하고 있던 생각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개미>의 불쾌함은 역설적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경험에서 느끼는 공감에서 비롯된다. 큐엠의 경험은 다분히 개인적이고 극단적이다. 하지만 그 경험의 근간이 되는 사고방식이나 경험에서 큐엠이 느끼는 깨달음은 분명 나도 어디에선가 한 번쯤 해본 생각이다. 예를 들어, 트랙 <개미굴>의 두 번째 벌스에서 큐엠은 폭식증이 걸린 모습을 보여준다. 폭식증의 원인은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마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부정당한 것이다. 큐엠의 앨범을 들어왔다면 큐엠과 그의 가족이 얼마나 가족을 사랑하고 아끼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이 사랑하는 것은 지금의 내가 아니라 이상적인 ‘나’라는 생각에 큐엠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다. 나 역시 가족이 날 사랑하는 것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나에 대한 끝없는 요구에 자기자신을 잃어버리곤 한다. 큐엠의 가사는 ‘가족이 날 사랑하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내 확신에 물음표를 던진다. 그렇다면 <망가진것들>에 나온 사랑이 진정한 사랑으로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개미굴>의 서사 때문에 아름다워 보이는 <망가진것들>은 우리의 불편함을 극대화시킨다.
<개미>에서는 <hannah>에서 큐엠을 지탱했던 가치를 흔들고 부정한다. 그리고 우리가 외면했기에 쉬이 넘어갈 수 있었던 사회의 압박, 잔인한 인간성, 한국인으로서 공유하는 불완전한 사랑과 결핍, 영원할 수 없는 가족을 큐엠은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물론 저런 생각들은 갑자기 불현듯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의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제대로 인식하지 않았을 뿐이다. 나를 인간으로서 지탱하고 있는 모든 것이 허구였다면, 우리랑 개미랑 다른 것이 무얼까. 큐엠은 우리가 자신의 개미굴에 발 디뎠다고 하지만 애초에 우리 모두 커다란 하나의 개미굴 속 각자의 방안에서 눈먼 채 침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큐엠은 <개미>를 통해 예술가의 역할을 다했다. 이제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각자 질문에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나 역시 아직은 괴롭고 불편하다. 그렇게 좋아하는 술자리에서도, 엄마의 생일파티에서도, 직장에서도 <나일론>의 비트와 가사가 머릿속에 재생된다. 이센스의 <비행>에서 말했듯, 이 생각에 시간을 끈 내가 가장 더러운 걸까. 아니면 모두가 얄팍하게 믿는 척하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처절하게 고민하는 것이 맞는 걸까. 큐엠의 답도 궁금하다. 그리고 그 답에 대한 단서는 cd 전용 트랙 <hannah2>에 담겨 있지 않을까. 택배로 올 cd와 머릿속에 <개미>가 그만 재생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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