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빈지노, 이센스, 버벌진트의 신보를 감상하고 써둔 게 있었는데 오랜만에 힙합엘이에 돌아온 기념으로 올려봅니다. 곧 이름에서 '힙합'도 빠진다고 하니 시기도 맞는 것 같고... ^^;
[빈지노 : 노비츠키] _ 3.5/5
빈지노는 이번 노비츠키 앨범에서 의도적으로 모음 규칙을 무시한 라임을 많이 썼던데 그게 맛있다거나 설득력이 있진 않았고 실패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앨범을 뻔하지 않게 구성하는 감각, 색다른 주제와 가사의 표현 방식(Sanso, Camp), 프로듀서들이 다양했음에도 잘 조율한 유기적인 사운드는 좋았다. 아니, 매우 훌륭했다. 하지만 이걸 하나로 완성해내지 못한 구멍이 랩이었다는 게 아이러니했고 아쉬웠다. 빈지노라서 더.
[24:26]이나 [11:11] 앨범 때처럼 자음과 모음을 자로 잰 듯이 맞춘 정교한 라이밍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발음했을 때 라임 덩어리로 들릴 정도로 마감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것까지 의도되었다고 느껴졌지만 쿨하게 다가오진 않았다. 힙하기 위해 무심한 감성을 곁들였으나 그냥 헐겁고 정성이 덜 들어간 느낌만 나서 딱히 따라부르며 플로윙하기 싫어지는 랩. 그리고 이번에 확실히 느낀 건 이제 멜로디를 랩보다 더 잘 짜는 것 같다.
랩 스핏이 점점 구려지는 것 같아 아쉬웠는데, 원래 발음은 뭉치고 부정확한 느낌이 있었지만 정교한 라이밍이 그걸 커버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걸 신경도 안 쓰는 느낌을 받았다. 모든 건 임성빈의 마음이고 결정이지만 힙합 아티스트로서, 차원이 다른 랩 디자인으로 최고 래퍼의 반열에 올랐던 빈지노가 왜 굳이 랩의 기본적인 방법론을 살짝 빗겨나간 랩을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나마 괜찮았던 건 'Coca Cola Red', '990' 정도. 근데 그것마저도 피처링 아티스트의 랩이 더 좋았다.
[이센스 : 저금통] _ 3.5/5
이센스의 저금통은 과거작들에 비해 더 선명하게 보이고 또 들리는 라이밍을 한 게 반가웠다. 빈지노가 노비츠키에서 한 랩의 방향과는 반대인 것 같아서 재밌었고. 원래 언컷퓨어 때부터 자/모음은 잘 맞췄고 배치도 기본기가 탄탄했지만 일상에서의 말투를 자연스럽게 녹여내려는 과정에서 라이밍 강조에 힘을 빼고 라임에 의한 바운스가 약했던 게 이센스의 랩이었다고 생각했다. 라임 조금 더 듣기에 자연스러운 위치에 배치한 유엠씨(UMC) 같았다고 해야 할까나. 농담이다.
그런데 이번 앨범에서는 웬일인지 최소한 어떻게 라이밍을 하고 있는지 들리고 캐치가 가능하도록 더 선명하게 모음과 자음 조립에 신경을 썼다. 다소 산만했던 플로우도 깔끔하게 마감한 느낌이었고. 훅도 전체적으로 시크하고 캐치해서 좋았다.(No Boss, A Yo, What the hell) 아, 빈지노는 노비츠키에서보다 이센스 앨범에서의 피처링 벌스 랩이 더 좋았다.
한 곡을 구성하는 데 있어 가끔 뻔하고 유치한 걸 할 때가 있고, 힙합의 정통 작법에서의 스펙트럼 확장을 이뤄내진 못했다고 보지만 해당 카테고리 안에서는 가장 장인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힙합의 범위 안에서 어느 정도 예상되는 걸 타이트하고 정교하게 하는 게 이센스라는 열혈힙합래퍼의 매력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이제 그 매력이 조금 줄어든 것 같고 결이 대부분 비슷해서 뻔하고 지루해지기 시작한 것 같다.
힙합 연예인이었던 슈프림팀 시절이 없었던 것처럼 힙합씬의 여러 부분을 건드리고 조롱하는, 나름의 동기가 있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이름 좀 알려보겠다는 다른 래퍼들을 애매하게 언급하는 가사들도 슬슬 동어반복 같고 다소 구차하게 들린다. 다음 앨범에서는 좀 확장된 시도들, 더 생동감 있는 일상적인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다. 어쨌든 이제야 좀 라이밍의 입체감이 드러나도록 스핏을 하고 랩이 더 랩다워져서 반가운 앨범이었다.
[버벌진트 : K-XY : INFP] _ 4/5
1번 트랙 'Food'부터 소위 한국의 힙합 뮤지션으로 묶이는 부류와는 종이 다름을 느꼈다. 앨범들마다 소재 선정과 풀어가는 방식이 늘 참신한데, 2023년의 한국힙합 뮤지션들 중 2001년 모던라임즈의 '사랑해 누나'처럼, 혹은 이번 'Food'처럼 특정 주제에 대해 풀어가고 탁월하게 비유를 할 수 있는 뮤지션이 몇이나 될까? 많이 떠오르진 않는다.
세대 구분을 해야만 똑똑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오래 활동한 뮤지션들에 대해 숨쉬듯이 올드, 퇴물 같은 키워드 운운하지만 개인적으로 국내 음악계의 20년 이상 경력의 싱어송라이터 중 버벌진트처럼 했던 걸 반복하지 않고 창의적으로 음악 구성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라임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하고 플로우를 어떻게 타는지, 얼마나 다양한 장르적 시도를 한 작곡을 했는지 알면 랩이 구려졌다든지 비트는 남한테 받으라는 얘길 할 수가 없을 텐데. 어떻게 발음되는지 고려도 안 하는 트래퍼들의 헐거운 라이밍과 오직 힙합스러운 댐핑과 질감의 비트만 원하는 마니아들에게 이번 한남씹프피는 여자들 감성만 건들기 위해 연애 얘기를 하는, 힙'팝'으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힙합과 관련된 키워드들 사용하지 않고 경험 기반의 연애 관련 스토리텔링으로 채우되, 랩을 하는 방식은 철저히 힙합의 정통 작법에 기준해 치밀하고 치열했다는 점과 과거 작업물들의 '힙합스러운' 소스를 가져와 요소마다 재활용하는 방식이 재밌었다. 일상의 이야기를 기술적으로 정교한 랩 퍼포먼스로 보여주는 게 어떤 면에서는 진짜 힙합스러운 모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아직도 2008년에 허접한 래퍼와 비트 메이커들 때려잡던 사냥꾼 버벌진트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대놓고 투명인간 취급하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참신한 표현, 랩, 멜로디, 다양한 장르의 사운드, 피처링 뮤지션들의 개성을 고려한 사운드와 편곡 등 즐겁게 들었다.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과거작들에 비해 다소 밋밋했던 몇몇 곡들의 훅(자기파괴, Friendzone), 다민이의 매력을 더 보여주지 못한 것 같은 임팩트 없는 가사와 빈약한 플로우, 멍청트랩 스타일과 별개로 너무 헐거운 플로우에 웃음지뢰가 없었던 언에듀케이티드 키드의 가사 정도.
이분 진짜 음잘알 ㅇㅈ
한남 씹프피에 대한 평 진짜 좋네요 ㅋㅋ 잘 읽고 갑니다
노비츠키의 랩에 대한 생각이 존나 비슷해서 재밌었네요
반대로 저금통의 랩은 칭찬했지만 가사가 큰 감흥없다는것도 재밌고ㅋㅋ
ㅇㅈ 노비츠키 이분 생각이 저랑 일치함. 저도 랩이 조금 아쉬웠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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