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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중반의 한국 힙합에서 '랩을 잘한다'의 제일 큰 척도는 라임이었다. 누가 더 정교하고 자연스러운 다음절 라임을 운용하느냐가 큰 화두였고, 대부분의 리스너들의 결론은 이내 버벌진트, 피타입, 그리고 화나로 좁혀지곤 했다. 특히 '국어사전을 다 외우고 다닌다'라는 소문까지 돌던 화나의 라이밍의 밀도는 다른 래퍼들이 엄두조차 못내는 것이었다. 여기에 특유의 기괴한 톤과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비트 선정이 더해지며 화나의 음악은 한국에서 대체하기 힘든, 유일무이한 것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글리 정션'이라는 문화 공간과 '발아'라는 프로젝트를 통하여 후배들을 지원하고, 그 사이에도 'FANACONDA'(2017) 같은 양질의 작업물을 내면서 화나의 명성은 더더욱 높아졌다. 그랬던 그가 데이토나 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하며 소울 컴퍼니 이후 무려 11년 만에 더 콰이엇과 다시 손을 잡았고, 그의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Fanatic'(2009)의 정신적 후속작인 'FANATIIC'을 내놓았다. 그 시절의 향수와 자신의 진심 어린 서사, 그리고 그동안의 커리어가 총집결된, 리스너들을 다시금 광신도로 만들기에 충분한 작품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소울 컴퍼니의 엣 동료들이자, 이 앨범의 사운드를 진두지휘한 더 콰이엇과 프리마 비스타는 '붐뱁'이라는 큰 틀을 짰다. 이 틀 안에서 'FANAtitude'(2013)의 유쾌한 감성, 'FANACONDA'의 진중한 밴드 사운드, 'FANAbyss'(2018)의 음울함을 오가는 형태로 전체적인 프로덕션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분위기를 'FANA Funk'나 '얼룩말'의 브라스, 또 '광흥창에서'와 '요람기', '담배가 모자라', 'VIEW'의 피아노, '2810'의 전자음 같은 재지한 소스가 전체적으로 관통하며 사운드적 유기성을 형성하고, '두 번째 개식', '발아' 같은 트랙의 밴드 사운드, 그리고 '차이'나 'Green Is The New BLACK'을 비롯한 트랙에 가미되는 변주 같은 다양한 편곡 덕에 이 앨범은 화나의 디스코그래피 가운데서도 가장 편안하고 대중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프로덕션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고전적 프로덕션 위에 자부 ('FANA Funk', '두 번째 개식', '차이'), 허무('얼룩말', '담배가 모자라'), 쓸쓸함과 그리움('광흥창에서', '요람기')을 오가는 화나의 가사와 랩은 광기는 이전보다 덜해졌을지언정 예리한 표현과 변태적인 동일 모음 라이밍은 전성기에 준하는 수준의 뛰어남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라이밍과 가사로 인해 간과되기 쉬운, 독특한 톤을 활용한 강약 조절이 본작에서도 유효하게 작동하며 인상적인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기존의 화나의 앨범들과는 달리 이례적으로 꽤 많은 래퍼들이 피처링으로 참여한 것이 흥미롭다. 특히 재미있는 조합이 '녹색'이라는 키워드를 지닌 래퍼들이 한데 모인 단체곡 'Green Is The New BLACK'인데, 스웨이디, 테이크원, 제네더질라, 빌 스택스 같은 개성이 뚜렷한 아티스트들이 프리마 비스타의 탁월한 프로덕션 하에 준수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화나 본인 역시 이들에 밀리지 않는 벌스를 뱉으며 앨범의 하이라이트를 성공적으로 장식하였다. 저스디스도 'FANA Funk'를 통해 화나의 자부에 함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깊이 있는 가사를 실로 오랜만에 보여주었다. 화나와 전성기를 공유하는 베이식의 찰진 훅이 귀를 사로잡는 'BFG'라거나, 화나의 추상적 관점을 씬의 리더 격 존재인 팔로알토와 더 콰이엇이 특유의 안정감으로 구체화하는 'VIEW' 등 이 앨범의 여러 협업들이 앨범의 퀄리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영리하게 활용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Fanatic' 이후 12년의 시간 동안 '쇼미더머니'라는 TV 쇼가 한국 힙합을 장악했고, 음악적 유행도 갈수록 쉽고 가벼운 방향으로 키를 돌려왔다. 그 과정 속에서도 화나는 방송 외의 대안을 제시하며 후배들을 지지했고, 음악적으로는 깊은 작가주의와 묵직한 디테일을 유지해왔다. 물론 고난과 곡절이 없던 것은 아니다. 결국 화나는 온 세상이 힙합으로 물들 '그날'을 포기했다('그날이 오면'(2006)). 공황에 빠지기도 했고, 어글리 정션은 끝끝내 문을 닫았다. 누군가는 그의 이러한 실패를 조소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시종일관 씩씩하다. 'FANA Funk', 'Green Is The New BLACK'을 통해 신세대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세대들에게 '진정성과 디테일을 요구하는' 날 선 비판을 가한다. 실패들의 뒤에도, 화나가 '요람기'에서 내린 결론은 결국 미래와 희망이었다. 그렇기에, 필자는 음악적 고민과 고집으로 똘똘 뭉쳐진 그의 보수적 낙관주의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억지로 시류를 따르는 게 아니라 넘어섰기에, 그 가치가 더더욱 빛나는 앨범이다.
Best Track: GREEN Is The New Black (feat. Sway D, TAKEONE, ZENE THE ZILLA, BILL STAX), 발아, 요람기
화나는 라임도 라임인데 가사와 톤이 사기죠.
저는 가끔 화나형 특유의 구렁이 같은 목소리로 ASMR을 하는 상상을 하곤 한답니다 꺄훗
화나야? 무지성 개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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