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전에 확인해야 할 건 버벌진트가 김태균의 말처럼 막연히 타협과 변절의 길을 겪게 된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일단 그에 대한 답은 [누명]에 있습니다. 필요한 부분만 간단하게 짚고 넘어갑시다. 혁명가로 씬에 등장한 그는 구성원들의 편견과 누명으로 인해 부당한 선고를 받고 추방당합니다. 기나긴 망명 끝에 모든 운명의 짐을 정화하고 ‘사자에서 어린아이’로, 긍정하고 유희하고 창조하는 자로 거듭난 끝에 평온한 정신을 되찾습니다. 이런 서사의 흐름 속에서 버벌진트의 태도 변화에 있어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메시지들은 ‘Ad Hoc’, ‘배후’, ‘Losing My Love’, ‘사자에서 어린아이로’에 거의 다 담겨있습니다.
누명 리뷰 1 :
누명 리뷰 2 :
‘Ad Hoc’의 가사 중 “여자 낚시? 야 난 지금 이 바닥이 구역질 나서 떠날 준비중이야 다신 그런 부탁 따윌랑 하지 마”, “뛰다 지쳐 쓰러지긴 뭘 쓰러지냐 난 단지 병신들 형님 동생 놀이가 재미 없어졌다고”, “중학교 때 애새끼들 놀던 꼴 그대로잖아”에서 그의 염세적인 현실 인식이 드러납니다. 왜 그럴까요? 의문은 ‘배후’로 이어집니다. “내가 찌질한 의도로 만들면 애들은 와 이것이 Real Hip Hop / 또 내가 Real한 의도로 만들면 애들은 우 찌질 Hip Hop”, “가짜가 진짜를 욕해도 눈 감아 준 이 문화의 진짜 적 That’s you 바로 너” 이런 가사들이 총체적으로 시사하는 바는 그가 보기에 이 씬은 음악적 평가가 온전히 작동할 수 없을 정도로 수준이 저열하다는 것입니다. ‘Losing My Love’를 보면 이런 메시지는 더욱 분명해지죠. “내 마음을 담아서 아무리 얘기해봐도 돌아오는 건 메아리 뿐. everywhere i go.” 이 아트폼은 애초에 불구적인 상태였기 때문에 나의 진정성을 누군가가 인정하고 안하고 하는 문제가 성립할 수가 없는 셈입니다. 그래서 그의 결론은 이곳의 규칙에 따라 ‘리얼’을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 즉 ‘이곳을 떠나 그저 내 자신에게 리얼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떠납니다.
그럼 다시 김태균을 통해 질문해봅시다. 혁명은 당신이 일으키지 않았냐고, 나를 혁명에 동참시킨건 당신이니 책임지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누군가의 눈엔, 누군가의 눈엔 / 나 또한 희망이겠지 지금의 문화에 있어”라는 가사를 통해 제멋대로 내면의 세계로 숨어버린 그를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문화적 영향력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무책임한 짓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죠. 켄드릭 라마는 ‘Mortal Man’에서 투팍과 대화를 나누는 상황을 가정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오용하고 남용하는 문제에 대해서 자문하고, 그 해답을 찾아나갑니다. “Made me wanna go back to the city and tell the homies what I learned. The word was respect (내 도시로 다시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내가 무얼 배웠는지 알려주고 싶었어. 내가 배운 단어는 존중이야)”는 그 책임감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죠. 이런 측면으로 본다면 역사의 이름을 빌려 혁명을 외쳤던 자의 결론이 ‘내 자신에게 리얼한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분명히 무책임하고 자기중심적인 것으로 보이죠.
버벌진트는 자신이 혐오했던 ‘형님 동생 놀이’를 방치한 채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곤 ‘자신에게 진정한 음악’의 결과로서 내놓은 것이 아주 우연하게도 ‘Sell-out’이라는 딱지가 붙을만한 음악이었죠. 물론 이 사실관계만으론 그가 타협했다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의 진정성의 기준은 우리가 판단할 수 없는 시야 밖으로 떠났으니까요. 그러나 여전히 조심스럽게 물어볼 수 있는 것은 정말 내 자신에게 리얼한 것으로 충분한 문제였다면, 왜 굳이 자신의 진정성을 알아보지 못했던 리스너들과 플레이어들을 굳이 꼭 욕하고 떠나야 했을까요? “버벌진트가 [누명]에서 보여준 이야기는 핑계일 뿐이고 그저 돈 되는 음악을 하고 싶어 변절한 것이다”라는 식의 비난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혁명가’와 ‘내 자신에게 리얼한 것’이 꼭 모순되지 않는 역할이라고 보기는 힘들죠.
김태균이 보기에 역사는 모두의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이끄는 자는 ‘누군가의 눈’과, ‘더 중요한 무언가’를 끊임없이 의식해야 합니다. 그것의 진정성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더라도 자신에게 ‘떳떳’하면 그걸로 되는 것이죠. 버벌진트와 김태균의 차이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내 자신에게 진정한 음악’을 하더라도 자신의 문화적 영향력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유아적 태도’로 전락하느냐 마느냐 하는 결정적 조건이 됩니다. 버벌진트는 한번도 자신의 실패를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김태균은 자신의 실패를 완전히 인정하고 새롭게 출발할 것을 다짐합니다. 앞으로 그 둘은 앞으로 음악적으로 치열하게 반목할지도 모릅니다(물론 별 상호작용은 없겠지만). 버벌진트는 [Go Hard]의 첫 트랙 'Rewind'에서 인상적인 벌스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Fast Forward'에서는 'Rewind'에서의 그 가사들이 사실 "만들기 얼마나 쉬운지 아무도 모를" 것들이며, 그저 "눈을 감고도 라임들이 기어"나올 뿐이라며 청자들이 자신을 해석하려할 때 사용하려 드는 기준을 흔듭니다. 오히려 전통적인 진정성을 배제해줄 것을 거듭 강조하며 청자를 조롱하는 식이죠. 그러나 김태균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가사를 통해 자신의 진정성을 끊임 없이 증명하려 들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다시 강조하지만 역사와 그에 동반하는 책임감에 대한 두 사람의 인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념적 투사’이던 김태균은 이제 죽어 싸울 수 없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변하기 전 당신의 음악의 영향’이 남아있습니다. ‘제자리’에서 새롭게 완성한 순환적 세계관의 그의 모습을 놓고 읽어보죠. “내가 비록 더 이상 순수를 말할 수 없는 꼴이 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내 실패를 인정한 다음 그 안에서 떳떳하게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일어설 것“이라고 말하는 듯 합니다. 아마 이 목소리는 ‘누군가’를 향한 것이겠죠. 이것이야 말로 역사에게 판단을 맡기는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김태균의 ‘암전’은 과연 ‘시대착오’일까요? 이에 대한 평가는 훗날 그들을 보고 자란 ‘누군가’들의 몫이 될 겁니다. 분명 ‘누군가’ 중 누군가는 그들에게 “여기서 질문”하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 모습을 그저 지켜볼 뿐입니다.
P.S) [녹색이념]의 앨범아트는 자신의 믹스테잎 [TakeOne For The Team]과 버벌진트의 [누명]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P.S 2) “돈 보다 중요한 거 얻는 방법? / 없어보고 나서 따지는게 순서가 맞어 / 그들이 책상에서 관조하며 떠든 삶이란 / 참는 자에게 복이, X발 그거 아니잖아” – E SENS, 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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