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소리와 햇살의 쏟아지는 밝은 빛을 맞으며 그는 ‘악몽 같던 꿈’에서 깹니다. ‘섬광’의 연출과 유사하죠. 그러나 ‘섬광’에서와는 다르게 이제 여정은 끝났고 모든 것은 해결되었습니다. 부모와의 두 번째 대화를 통해 부정은 긍정으로 전환됩니다. 학대의 대상이었던 자기 자신이 “자기자신은 사랑 못하지 왜”라는 질문으로 뒤집어지고, ‘너와 날 우리로 가두기 전’의 모습을 하염없이 찾아 헤메지 않고 이제는 직접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폭력성은 든든한 것이 되고, 심지어 ‘붉은 융단’에서 그토록 경멸해 마지 않았던 아버지의 ‘손가락 위 반지’가 “나도 원해 손가락 위 반지를”이라고 외치게 되는 입장의 변화를 보입니다. 가족에 대한 거부에서 필요로 이동하는 모습은 사뭇 감동적입니다. 가족에 대한 격렬한 불만 표시는 거꾸로 그에 대해 채워지지 못한 욕구를 암시하기도 하니까요.
그는 공연에서 이 앨범을 만들며 고통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치유하는 과정이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이 앨범의 가장 중요한 주제의식은 ‘극복을 통한 치유’이며, 그 안에서도 가장 주요한 극복 대상은 ‘내 자신과 가족에 대한 사랑의 결핍’입니다. ‘제자리’에서 부모, 나, 전 여자친구가 등장합니다. 이 주체들은 정상적이고 안정감 있는 가족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입니다. 유년 시절 부모와의 분리경험과 억압, 사랑의 결핍과 대립. 그의 음악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 음악은 돈을 벌고, 그에게 돈과 여자를 안겨주었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의 그는 그것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죠. 결국 그는 자신이 겪는 결핍의 경험이 역설적이게도 남에게서 채워질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남에게 채워달라고 매달리고 투정부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남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그는 다시 집을 떠납니다. 그에게는 이제 결핍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태여 떳떳하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으로 충만한 상태입니다. 부모로부터, 유학생활로부터 도피하고 결핍을 숨기기 위해 선택한 음악이 아닌, 긍정이나 희망 같은 얘기 없이 화만 쏟아낼 뿐인 음악이 아닌,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하는 ‘완전한 음악’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어머니가 해주신 아침밥을 먹는 그의 모습은 그래서 상징적입니다. 이제 음악을 하는 그의 미래에 대해 부모와 자식 사이에 (‘입장’에서 언급했던) 시차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알람은 잘못 맞춰지지 않습니다. 집은 아버지의 고함과 얼음 같은 분위기로 가득찬 곳이 아니라 어머니의 된장국 냄새와 아늑한 목소리가 울리는 따스한 곳입니다.
그를 속박하던 결핍 위에 세워진, 그의 무너진 이념이 다시 세워지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다시 세워지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혹여 그가 또 다시 새로운 이념을 선언하더라도 지금과는 상당히 다를 것이라고 예상해볼 수 있습니다. 선언하고, 선언이 붕괴하고, 다시 선언하고, 또 다시 같은 서사를 반복하더라도, 그 세우고 부수는 반복의 과정 속에서 그는 변화하고 성장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를 단순히 진정한 음악과 상업적 음악의 이분법 위에서 일방적으로 투쟁하는 캐릭터로 읽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제 그의 가치는 어떤 특정 이념에 고정되어 한 입장을 강요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매순간 자기 자신이 마주한 문제를 향해 전력으로 투신하고, 철저히 부서지는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는 추락과 재생의 순환 그 자체를 살아가는 태도를 음악으로 표현하는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가 변화를 다짐했으니 그를 읽는 해석틀도 함께 변화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길었던 [녹색이념] 메인 이야기의 끝입니다. 마지막으로 번외 트랙 ‘암전’의 해석만이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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